잊혀진 정화·창종 주역 원허 스님 재조명
잊혀진 정화·창종 주역 원허 스님 재조명
  • 이창윤 기자
  • 승인 2019.08.22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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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순 연구원 구술·매체·종회자료 등 검토 삶·업적 평가
‘선문화연구’ 26집 술고, “문도 미형성…후속 연구 필요”
▲ 1953년 1월 15일 부산 선암사 동안거 해제 기념 사진. 가운데 줄 왼쪽 두 번째가 원허 스님이다.

동산, 금오, 효봉, 청담 스님 등과 함께 정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현 조계종 출범에 크게 기여했으면서도 지금껏 재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은 원허 효선(圓虛 曉璇, 1889~1966) 스님의 생애를 조명한 논문이 발표됐다.

최동순 동국대 불교학술원 연구원이 한국불교선리연구원(원장 법진)이 발행하는 《선문화연구》 제26집에 발표한 <원허의 금강산 활동과 대한불교조계종 출범 기여>가 화제의 논문.

최 연구원은 이 논문에서 《불교시보》, 《금강산》, 《불교》 등 잡지와 제자인 최준섭, 인환 스님의 구술, 정화 관련 종회 자료와 언론보도 등을 토대로 원허 스님의 삶과 업적을 재조명했다.

최 연구원은 스님의 행적을 크게 금강산을 중심으로 한 사찰 경영·포교 활동과 불교정화에 참여해 조계종 출범에 기여한 활동 두 가지로 구분해 고찰했다.

▲ 《선문화연구》 제26집.

1909년 금강산 표훈사에서 관허 천일(貫虛 天日) 스님을 스승으로 출가한 원허 스님은 1910년 일제 강점기로부터 해방 공간에 이르기까지 금강산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원허 스님은 표훈사와 말사 주지 소임을 맡아 사찰을 경영하며 잡지 발행, 금강산불교회 구성, 포교서적 보급, 불교학 연구 지원, 수좌 양성에 힘썼다.

특히 원허 스님은 선실을 개당·운영하는 등 마하연선원을 중심으로 수좌들을 외호했는데, 이 때 동산, 효봉 스님 등과 맺은 인연은 불교정화와 조계종 출범으로 이어졌다.

원허 스님은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1월 월남해 향곡 혜림(香谷 蕙林, 1912~1978) 스님의 도움으로 구미 도리사에 주석했다. 향곡 스님은 금강산 마하연에서 원허 스님과 인연을 맺은 운봉 성수(雲峰 性粹, 1889~1949) 스님의 제자다. 스님은 그해 5월 다시 해인사로 주석처를 옮겼는데, 당시 해인사 조실인 효봉 스님 또한 금강산에서 원허 스님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한국전쟁 중 범어사 청풍당 선원과 선암사 소림선원 등에서 주석하던 스님은 비구승들의 수도도량을 확보하는 문제로 1953년 봄 서울 안국동 선학원으로 주석처를 옮겼다.

비구승들은 1952년 종회에서 비구 수도도량으로 사찰 18개소를 배분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각 본산 주지들의 비협조로 무산됐다. 비구승들은 1953년 태고사에서 열린 주지회의에도 참석해 재차 수도도량 분배를 요구했지만 쫓겨나는 수모를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1953년 가을 200여 명의 수좌가 ‘제1차 승려대회’를 열어 불교정화를 논의했을 때, 서울·경기지역의 청담 스님, 충청지역의 금오 스님, 전라지역의 효봉 스님, 경상지역의 동산 스님과 함께 스님은 강원도 지역 정화 책임자로 선임됐다.

스님은 그해 11월 양양 낙산사 주지로 부임해 이승만 대통령의 도움으로 도량을 정화하고, 뒤이어 1954년과 1955년 평창 월정사, 속초 신흥사, 고성 건봉사 정화도 이끌어 냈다.

스님은 1954년 임시종회와 1962년 개원한 통합종단 중앙종회에 참여하며 불교정화에 조계종 출범에 크게 기여했다.

1954년 9월 28일과 29일 이틀간 선학원에서 열린 ‘제2차 전국 비구승대회’에서 스님은 종회의원으로 추대돼, 경산 스님과 함께 상벌위원이 됐다.

원허 스님은 1960년 낙산사에서 서울 적조사로 주석처를 옮겼는데,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로 대처승에게 사찰에 뺏길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실제로 합천 해인사의 경우 폭력배를 동원해 급습한 대처승이 비구승을 몰아냈고, 다른 많은 사찰도 비슷한 양상에 처해 있었다. 비구측은 효봉 스님을 위원장으로 하는 비상대책위를 구성해 대응했는데, 원허 스님은 금오, 청담, 경산 스님 등과 함께 위원으로 참여해 종단 수호에 나섰다.

스님은 박정희 정권의 압력으로 1961년 1월 출범한 불교재건위원회에 청담, 경산, 추담, 행원 스님과 함께 비구측 5인 대표로 참여했다. 1962년 4월 11일 통합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이 출범한 이후에도 그해 8월과 12월에 열린 중앙종회에 참석해 주요 안건에 대해 발언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원허 스님은 1966년 연말 입적했다. 당시 조계종 총무원은 스님의 정화운동 참여와 종회 활동 공적을 기려 장례를 총무원장으로 치렀다.

이처럼 불교계 정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조계종 출범에 기여한 현대불교사의 중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원허 스님이 지금껏 조명 받지 못한 원인으로 최 연구원은 스님의 활동 거점이 금강산이었다는 점을 들었다. 분단으로 남한과 표훈사가 단절되면서 활동 기반을 잃었고, 문도를 형성하지 않아 생애와 업적이 조명될 기회를 잃었다는 것이다.

최 연구원은 “원허 스님은 소탈한 성격에 비록 회상의 문도를 형성하지 못했으나 표훈사 활동을 중심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며, “격변기였던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대한불교조계종의 태동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했던 만큼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한편, 《선문화연구》 제26집에는 이밖에 △만해의 독립운동과 선학원 - 재산 환수 승소 판결문을 중심으로(법진·한국불교선리연구원) △한용운의 독립운동과 자유·평등사상의 역사적 맥락(김성연·동국대) △혜암 성관(慧菴 性觀)의 간화선에 대한 고찰(오용석·원광대) △《홍명집(弘明集)》과 《광홍명집(廣弘明集)》에 보이는 불식육계 논쟁(한수진·동국대/신성현·동국대) △원측의 진제(眞諦) 《구식장(九識章)》과 구식설(九識說) 인식의 특징(장규언·서울불교대학원대학) △분황 원효(芬皇 元曉)와 경허 성우(鏡虛 惺牛)의 구도 정신(고영섭·동국대) △《천태소지관(天台小止觀)》의 방편행과 MBSR 치유기제의 상통성 고찰(차차석·동방문화대학원대학) △열반 체험의 해석학적-현상학적 연구(윤동현·동국대학교) △고성 옥천사 명부전 불상과 조각승 경옥(최선일·문화재청/조태건·불교문화재연구소) 등 모두 10편의 논문이 수록됐다.

※ 이 기사는 제휴매체인 <불교저널>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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