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처학교] 5강 한국 참여불교의 교리와 실천
[눈부처학교] 5강 한국 참여불교의 교리와 실천
  • 운판(雲版)
  • 승인 2019.08.10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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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남 참여불교 재가연대 공동대표
불교개혁행동, 정의평화불교연대
2019년 8월 9일

 

 

“참여불교란 불교가 세상에서 구현되는 모습......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자들이 세간에서 어떻게 알고 어떻게 살아야하는 지에 대한 답을 구해가는 과정”이라고 김형남 참여불교 재가연대 공동대표는 말한다.

미래의 부처는 공동체로 온다는 틱낫한 스님의 말씀에 깊이 공감하며, “지금은 무엇보다 네트워크를 만들고 주변인을 주체로 만듦으로써 자기 주도적 불교와 참여불교가 동시에 가능하도록 하는 일을 중심에 두어야 할” 시기라고 재가활동을 하는 현장 실천가의 고민에서 우러난 대답을 준비했다.

50페이지에 이르는 강의 자료를 인쇄하다가 강의에 늦은 지나친 준비성을 외면할 수 없어서 양이 많지만 강의록을 전재한다. 강의자는 성의를 봐서라도 꼭 다 읽어주기를 부탁했다.

*본 강의의 영상제작은 혜원 박경숙님이 도움을 주셨습니다.

 

한국 참여불교의 교리와 실천

1. 들어가는 말

가. 강의를 맡으면서

처음 주제를 받아봤을 때 막막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이름이 참여불교재가연대의 공동대표로써 이름값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강의를 맡았고, 한국의 불교운동의 역사를 정리해서 알려드리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했으나, 강의 제목에 교리가 들어가 있는 것을 보고 눈앞이 깜깜해졌습니다,

그만큼 참여불교란 무엇이고, 불교가 교리적으로 참여불교를 지향해야 하는 지에 대해 정리된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단지 내 종교가 불교고, 불교가 사회적으로 유용해야한다는 생각에 관성적으로 참여불교를 받아들였을 뿐이었습니다.

최소한 구업을 짓지는 말아야지 하는 생각에 많은 논문을 찾아보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방황을 했습니다만, 결론은 참여불교란 불교가 세상에서 구현되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자들이 세간에서 어떻게 알고 어떻게 살아야하는 지에 대한 답을 구해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내가 무아를 받아들이고 있으나, 몸을 버릴 것도 없고 몸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인식과 실천의 과정에 있는 참여불교에 대해 “한국사회의 참여불교란” 이라고 명확하게 정의내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나. 참여불교 탐구의 나침판

(1) 부처님의 삶

이러한 인식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가장 유용한 나침판으로 사용되었던 것은 역시 부처님의 삶입니다.

부처님의 전도의 과정을 살펴보며 무아가 인드라망 네트워크를 통해 빛을 발하는 모습을 경험했습니다. 왜 부처님이 부처인지 알게 된 것에 대해 정평불에 감사드립니다. 이해를 통해 얻은 믿음의 소중함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2) 자신의 삶과 교단의 변화를 위한 노력의 의미

또다른 나침판은 불교와 제 삶의 관계입니다.

불교 교단을 바꾸려고 노력했던 것은 챰여불교의 관점에서도 역시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불교를 바꾸어 사회를 바꾸겠다는 이상은 부처님의 제자인 이상 당연히 갖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폭력과 분노가 없었다고 볼 수 없고, 집착 역시 생겼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교단을 위한 충언에 반응하지 않고, 교단이 세속의 가치관에 물들어 불자들을 부끄럽게 하고 있다는 것은 형태만 다른 폭력입니다, 고립된 깨달음이나 기복신앙으로 신자들을 물들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이나 불교에 내재되어 있지 아니한 것을 불교로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래동안 이러한 점을 지적해 왔으나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교단이 바뀌지 않았다고 한들, 내가 바뀌었거나 올바른 불교 모습에 대한 목마름이 늘어난 이상, 내가 교단에 대한 폭력적인 생각을 하거나 분노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단을 좌지 우지 하는 일부 출가자들의 폭력을 내려놓게 할 효과적인 방법을 차자 강구하면 될 일이고, 이 역시 집착으로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또 한 번 정평불의 이러한 강의 시도는 교단에 대한 몇차례의 자정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던 직후에 너무나 적절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감사드립니다.

사회적 고통과 불교 교단이 처한 고통이 결코 다른 것이 아님을 인식시키고, 이것을 바로 보고 같이 해결할 방안을 찾게 해주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불교교단의 고통은 대다수의 소외에서 비롯됩니다. 불교를 처음 접하는 분들도, 불교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한발짝의 실천을 하려는 분들도, 불교를 전문적으로 공부하려는 분들도, 불교 교단에서 헌신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분들도, 불교에 대한 공부를 통해 배움과 사회적 실천을 일치시키려는 활동을 계획하는 분들도 모두 소외되어 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한 스님들 중에는 올바로 공부하고 배움과 실천을 일치시키려고 매진하려는 분들과 불교를 직업적으로 받아들이고 공부를 포기하고 신도들에게 맹목적인 불교를 강요하며 제도를 통해 집단적 생존방식의 이익을 누리려는 분들의 비율은 3:7정도 일 것입니다. 여기서 집단이란 공동체의 개념이 전혀 아님은 유의하셨으면 합니다.

출가제도가 있기 때문에 3이라는 비율이 가능할 것이고 이는 다른 종교에 비추어 결코 낮은 비율은 아닐 것입니다.

올바른 종교지도자라면 그 3의 비율에 속한 성직자를 수면위로 띄우고, 7의 비율이 사욕을 자제하고 이를 따르게 하려고 시도할 것입니다. 그것이 종교 전체의 공동선에 부합합니다.

2009년경은 선거나 각종 제도로 7을 능수능란에게 이용할 수 있는 불교지도자들에 의해 불교적 고통이 심화될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때 조계종단은 가장 세속적인 통치방법을 익히고 있고 7의 표피적 이해관계에 능통한 분을 지도자로 선출하였고, 이로부터 공동선의 개념은 완전히 무너지기 시작하여 현재는 거의 자생적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3이 급속하게 소외되는 것에 반작용으로 그 비율은 10년 새에 2정도로 떨어졌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불교를 스님들에 의해 간접경험하는 비중이 높은 재가불자들의 경우는 2:8 아니 1:9의 비율로 비중이 더 작을 것입니다. 조계종단의 제도는 한마디로 소외를 낳는 도구이고, 2의 성직자나 1~2의 재가불자가 점점 더 주변부로 밀려나게 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고통을 바로본다면 이렇듯 주변부로 밀려난 주변인을 불교적 주체로 세우 것이 인식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일 것입니다.

그 주체는 새로운 네트워크로 세워 질 것입니다. 틱낙한 스님이 미래의 부처는 공동체로 온다는 것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흔히 이제는 재가불교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이는 출가자보다 깨어있다는 의미로 사용되어서는 안됩니다. 출가제도 바깥에 있는 재가자가 좀더 현실을 객관적으로 직시할 수 있고, 현재의 제도에서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재가자들만의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합니다. 물론 재가자들이 시작하고 제도에서 자유롭고 정신적으로 해방되어 있는 재가자들을 우선 결집해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으나, 재가자들만의 네트워크를 고집하는 것은 또다른 차별을 낳은 것이고, 인식과 실천에 대한 또다른 폭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의 교단에 대한 분노는 전혀 갖을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파사현정”의 구호는 언제나 옳고, 대승불교와 참여불교의 근본 동인이나, 경계를 이탈하여 교단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는 것은 불교의 비폭력 정신에 반합니다.

현실의 교단의 문제를 지적함으로써 반면교사로 활용하고, 지금은 기대하기 힘들겠지만, 만일 현실이 교단이 우리가 만드는 네트워크를 경쟁상대로 생각하고 정신적 중심을 세우려는 움직임이 생긴다면 참여불교의 입장에서 그것보다 바람직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은 무엇보다 네트워크를 만들고 주변인을 주체로 만듦으로써 자기 주도적 불교와 참여불교가 동시에 가능하도록 하는 일을 중심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네트워크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네트워크가 어떻게 움직여야 할 것인가의 단초를 제공하는 것이 정평불이 만든 이 시간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참여불교가 만드는 네트워크에 대해 한마디만 더 보태자면, 이는 사회의 구멍난 네트워크를 메꾸는 구실 역시 하여야 합니다.

진영논리와 흑백논리로 쫘악 갈라진 이 사회의 네트워크는 점 점 구멍이 심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모순은 불교에도 바로 투영이 됩니다.

역시 소외되고 주변부로 밀려나거나 경계선에서 서있을 곳을 못찾고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사회의 사람들 역시 이 사회의 주체로 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 네트워크의 가장 중요한 역할입니다.

여기서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이 3가지 있습니다.

가장 의미있는 일이나, 가장 빛나는 일을 찾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교조주의에 빠지고, 주도하는 몇사람이 없어지면 네트워크도 사라집니다. 현재 주변에 바로 보이는 일을 해결해야 합니다.

대안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겠다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중도나 방편을 잘못이해하는 분들 중에 이러한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한가지만 있을 수 없습니다. 뒤에서 설명하듯이 동사섭이나 동체대비의 인식하에 자기 일로 여기고 뛰어드는 과정 자체가 참여불교의 모습입니다. 뛰어들어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해결방안을 찾아야 합니다. 내가 시작하는 모든 일이 처음 있는 일이고, 내가 내는 해결방안이 최초의 해결방안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네트워크의 중심이 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자랑을 하는 이상 깨달음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중심이 되고자 하는 이상 참여불교가 아닙니다. 항상 자기 아닌 다른 주변인들을 주체로 만들어야 한다는 인식으로 움직여야 자기주도적 참여불교가 가능합니다.

(3) 그리스도교인들의 불교를 바라보는 시각

한국의 참여불교의 이론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에서 많은 영감을 얻고 불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원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일원론적 불교적 세계관에 대한 탐구정신은 불자들에 못지 아니함을 감히 말씀드릴 수 있고, 이는 불교적 교리가 탁월하므로 다른 종교의 시선과 논리를 의식할 필요없다는 맹목적 신념을 갖고 있는 저를 부끄럽게 하였습니다.

다. 참여불교 탐구에서 찾아낸 인식론과 실천론

많은 글들을 섭렵하면서 제가 참여불교의 인식론과 실천론으로 받아들인 것을 정리해서 말씀드리자면,

과연 부처님이 이 시대에서 내가 접한 것을 보신다면 과연 내가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실까?

단순한 제도와 순진한 사람들이 존재하였던 시대에 설파하신 부처님의 말씀을 복잡한 제도와 영리해진 사람들로 가득한 현시대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가 참여불교의 인식론이라면,

그 실천론은 “선공후사”입니다.

2. 참여불교의 정의와 지향점

가. "모든 불교는 참여불교다"

“참여불교라는 말을 사용하는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불교 자체가 사회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로카미트라 법사)

로카미트라 법사는 “참여불교라는 것은 부처님 당시부터 실행 되었던 것”이라며 “부처님이 보살로 계실 때 다른 중생을 돕는 삶을 사신 것이나, 깨달으신 후에도 45년간 고통받는 중생들을 위한 삶을 사신 것을 보면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참여불교의 어원에는 이를 넘는 사회에 대한 개입이 녹아있다고 하면서, 불교가 종교인 이상 사회적 관계를 갖고 있지 않을 수 없고, 현실의 사회에 대한 개입에 대하여 사회적 유용성에 따른 보편적 사회적 가치 실현으로 보고 불교 교리와는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학자도 있다(한국불교 괜찮은가, 조성택 교수).

또한 불교적 수행과 참여불교의 개념을 분리하면서 수행불교에 치중할 것이 아니라 공동선의 관점에서 참여불교를 고민하여야 할 때라고 주장하는 이론도 역시 비슷한 논지일 것으로 본다. 이는 막스 베버적 관점 즉 불교를 반사회적 신비주의 종교로 분류하고, 산티데바가 모든 세상을 가죽으로 덮는 것보다 각자 가죽 신발을 신는 것이 더 쉬운 해법이라고 가르쳤다는 점, 그리고 많은 불자들이 세상 속에서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서라도 개인의 내적 변화가 우선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는 불교에 대한 잘못된 시각에서 벗어나 불교가 좀더 구체적인 사회적 역할을 해야한다는 주장의 논거로 사용된다. 구체적인 방향에 대해 본 저자의 논지와 차이는 없으나 수행과 사회적 실천을 분리시켜 바라볼 이유는 없다고 본다.

또한 일원론적 세계관을 강조하고 선악 이원론으로 매도당하는 것을 피하려다 보니, 정치적 참여에 소극적인 면이 있었고, 사회적 의제를 불교적 포장으로 바꾸어 불교를 홍보하려다 보니 엉성한 사회적 참여(4대강 화쟁, 민주노총위원장 조계사 피신 등)가 일어난 것에 대한 답답함도 작용했으리라 본다. 사회적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바라봄으로써 고통의 근원을 해결하려는 불교의 입장에서 시선의 의식이나 포장은 필요없다.

나. 명상은 불교가 아니다.

또한 불교를 명상과 거의 동일시 하면서, 자기 존재의 본질을 똑바로 꿰뚫어 보는 내적인 자각을 강조하고 있으나 인간관계의 대립이나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를 소홀히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내면의 성찰만을 강조하고 인간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감정을 억압하게 된다면 현실생활은 결코 원만하게 할 수 없다는 문제가 따른다. 불교가 현실생활의 부딪침에 발현되지 않는다면 이는 명상을 행하는 자이지 불자라고 표현하기 어렵다.

인간에 의한 인간이 고통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인간으로서의 접근성이 떨어짐에도, 자기 수행을 자랑하는 자를 본다. 이는 진정한 수행을 했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사회고를 해결하기 위하여 관계를 살피고 제도와 법을 살펴야 한다. 이는 출가수행자들에 겪는 불교적 고통도 마찬가지이다. 관계를 이해하고 잘못된 제도를 고치지 않으면 결코 해결할 수가 없다. 부처님이 설하신 많은 말씀 중에 출가자 사이에 관계를 설파하시고, 스승에게 지켜야할 5가지 의무나 재가자에 불이익한 행위를 금지시키는 등 출가자가 삼가야할 8가지 특징 등은 모두 관계 속에서 실현해야 할 의무이고, 재가자에 대한 법시 역시 재가자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지 아니한다면 가능한 것이 아니다.

현재 대부분의 선수행자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만 해결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을 갖었던 부파불교시대의 비구나 비구니들로 인해 당시의 불교는 소승으로 폄훼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상좌불교는 대승불교의 선 수쟁자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사회참여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다. 참여불교는 불교의 실천론이다

붓다는 초기경전의 여러 곳에서 모든 사람들이 개인적으로는 ‘사무량심(四無量心’을 닦고, 사회적으로는 ‘사섭법(四攝法)’을 적극 실천하기를 권했다. 붓다는 이 두 가지를 통해 불교의 이상사회를 앞당길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무량심이란 자(慈) 비(悲) 희(喜) 사(捨)를 말하고, 사섭법은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를 말한다. 전자의 ‘사무량심’은 자신의 거룩한 마음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자리행(自利行)이나 결국 사회적 고의 해결에 나선 보살의 모습으로 투영되고, 후자의 사섭법은 원만한 사회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이타행(利他行)이다.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루어야만 이상사회를 앞당길 수 있다.

결국 수행이 곧 생활이고, 생활이 곧 수행이 되어야 한다. 세상에서 접하는 모든 것이 수행이라는 것이 참여불교의 결론이 될 수 밖에 없다(이상 마성스님의 수행불교에서 참여불교로를 저자와 상의하여 개념을 약간 수정함).

라. 참여불교이론의 탄생과 발전

참여불교의 기원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갈린다. 일부 학자들은 근대 이후 서양문화를 접하게 된 불자들이 인권, 평등, 정의와 같은 서구적 가치의 자극을 받아 참여불교를 형성했다고 본다. 실제로 참여불교 사상가들 상당수가 서양에서 공부하거나 생활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태국의 술락 시바락사는 영국에서 사회학을 공부했고, 인도 달리트 불교의 지도자인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는 미국 콜럼비아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실용주의 철학자 존 듀이의 영향을 받았다. 틱낫한도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비교종교학을 공부했다. 따라서 그들이 서양사상의 직간접적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반면 참여불교를 생겨나게 한 가장 중요한 동인을 불교의 전통적 가르침을 사회적으로 재해석하고 적용하는 노력에서 찾는 입장도 있다. 두 관점 모두 일리가 있다. 또한 두 관점 중 어느 하나를 배타적으로 선택할 필요도 없다. 불교는 언제나 ‘관계적’으로 존재해 왔다. 참여불교도 밖으로부터의 영향과 안으로부터의 각성이 관계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생겨난 운동이다.

박경준 교수는 『참여불교의 이론적 기초인 혁신과 신전통주의에 관하여 로버트 N.벨라는 '근대 아시아의 발달과 종교'에서 "혁신주의는 사회의 혁신과 국가의 부흥을 주장하며 초기의 스승(敎祖)과 가르침에로의 회귀를 주장하며 전통을 희석시키는 것을 거부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근본 가르침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전통에 대한 강도높은 자기 비판이 따른다"고 한다. 반면 신전통주의는 "최소한의 변혁을 통하여 가능한 한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이념이며 다른 어떤 전통보다도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자신들의 전통과 문화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근대적 사상과 방법론을 이용한다"고 하였다.

불교의 사회적 행동주의자들은 전통주의적이거나 신전통주의적인 특성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으나 모두가 혁신주의자라고 킹 교수는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근본적인 관심사는 사회변혁이라고 말하고 있다.』라고 함으로써 역시 같은 견해를 취하고 있다.

참여불교는 외적 세계를 태우는 불에 주목하여 출발하였다고 한다. 《법화경(法華經)》의 “온 세계가 불난 집(三界火宅)”이라는 이야기는 오늘의 전쟁과 폭력의 시대에는 영적 비유가 아니라 사실적 표현처럼 들린다. 베트남 전쟁의 참화 속에서 ‘참여불교’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하며 고통의 현실에 뛰어들었던 틱낫한은 베트남을 “불의 바다 속의 연꽃”으로 표현했다. 이때의 불은 단지 마음을 태우는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만이 아니라 실제로 생명을 파괴하는 폭력도 의미한다. 서양세계가 베트남 전쟁을 보는 시각을 결정적으로 바꾼 틱쾅둑의 소신공양도 온 세상이 불에 타고 있음을 깨닫게 하려는 자기희생적 보살의 행위였다.

참여불교가 고통과 악을 예방하는 ‘경제적 정의’에는 적극적일 수 밖에 없음에 참교불교 주창자들 사이에 이견은 없다. 이로써 개인의 내적 변화와 사회의 외적 변화를 동시에 추구한다(정경일 참여불교와 해방신학의 대화 시도).

크리스토퍼 퀸 · 샐리 킹 편저 《아시아의 참여불교》이다. 여기에는 인도의 암베드카르, 태국의 붓다다사, 술락 시바락사, 티베트의 달라이라마, 베트남 출신 틱낫한 등의 사상이 소개되어 있다. 또한 이 책에서는 참여불교를 불교해방운동과 관련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 불교해방운동은 구체적인 경제문제 · 사회문제 · 정치문제 · 환경문제를 극복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제시하는 이론이 불교적 이념과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따라서 참여불교는 불교적 이념과 전통에 근거해서 구체적인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불교계의 활동이라 정의할 수 있다.

마. 참여불교와 불교의 접합에 대한 이견

그러나 사회문제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가르는 방식의 사회적 개입은 곤란하다는 입장에서 출발하여 사회문제 해결은 결국 사회적 유용성의 문제이므로 이것이 종교가 사회에서 존립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는 지에 대해 의문을 제시하는 견해도 있다(위 조성택 교수 논문).

국가가 개입해야할 문제를 대신하거나 종교적 신념을 사회운동화하는 것은 기독교적 생존전략이거나 위험스런 일이라 한다.

사회적 실천의 근거로서 종교적 가치의 실현을 들기에는 그 관계가 자명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사회의 가치와 종교적 가치가 결합되기 보다는 별개로 존립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라고 판단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불교에 있어서는 일원론 적 세계관에 따라 개인과 사회의 문제를 이분할 수 없는 것이라 보고 바로 여기에 불교의 사회참여를 얘기할 수 있는 단초가 있다고 보나, 사회에 독특한 방식으로 일정한 사회적 가치관에 개입하는 것의 여부를 놓고 “불교의 사회적 참여, 잘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한국불교의 사회참여에 대한 강박증이라고 한다.

저자는 사회개입의 방식은 후차의 문제라고 본다. 사회적 고통을 바로본다는 것에서 실천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정립될 것이고, 불교적 세계관에서 불교의 사회개입의 정도와 방법이 역시 자연스럽게 도출된다고 본다. 저자는 참여불교의 정체성 논쟁은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이미 부처님 말씀 안에 모든 것이 있다.

바. 참여불교는 새로운 이론이 아니다

저자는 물론 신이 존재나 맹목적 믿음을 강요받지 않는 일원론적 세계관의 매력 때문에 불교를 택하게 되었으나, 또한 불교의 과학적·합리적 요소 그리고 전통 문화와 정서가 우리 민족의 현재와 결합할 수 있다고 보았고, 불교와 결합한 민족주의는 맹목적 민족주의가 아닌 점차 세계주의로 발전하는 과정의 민족주의라 판단하였습니다.

대승불교는 또한 개인의 깨달음을 넘어 중생구제나 정토실현의 방향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선불교는 과거에의 집착을 단번에 불사르는 혁명성을 갖고 있습니다.

근본불교정신과 초기 교단, 대승불교운동의 비판정신과 보살사상, 초기 선불교의 혁명성 등 이미 불교안에 그리고 내안에 사회적 실천의 모든 계기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내면을 돌아봄으로써 생긴 에너지가 사회의 불을 끌 수 있다는 성불과 정토건설이 둘이 아니라는 상구보리 하화중생, 자리이타 선농일치의 정신은 이미 우리에게 들어와 있습니다.

이미 우리가 택한 길인, 부처님이 어떻게 생활하고 무엇을 가르쳤는지, 그 삶과 법을 중시하고 여기에 기초하여 앎과 삶을 찾고, 불교의 사회적 행동을 찾는 것이 참여불교인 것입니다.

3. 참여불교의 교리적 기초

이하에서는 되도록 이면 윤문을 하지 아니하고 인용문은 그대로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가. 부처님의 생애

이러한 운동들은 근대라고 하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발생한 새로운 것들을 반영하며 불교인들은 그들의 사회적 행위를 정당화시키고자 노력하는 데 대개의 경우 그 정당화는 언제나 불교적이다. 그것은 불교의 사회적 행동주의자들이 대부분 자신의 뿌리를 붓다에게서 찾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불교의 사회적 행동주의-박경준 교수).

이렇듯 참여불교의 핵심은 부처님의 일생, 삶에 있다. 부처님이 어떻게 자라고 무슨 고민을 했는지, 그리고 걸식하며 검소하게 살아가신 발자취를 되짚어 보는 ‘부처님 일생’과 중도ㆍ사성제ㆍ8정도·연기법ㆍ삼법인 등 ‘부처님 근본가르침’이 바탕이된다.

붓다는 사회적 약자에게 자비로웠지만 직접적 정치개입으로 사회적 강자들과 충돌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비교적 단순했고 순진했으나 가르침이 절실했던 그 시기 인도가 아니라 붓다가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났다면 예수처럼 십자가에 처형당해 죽었을 것이라고 한다(틱낙한).

붓다 자신이 ‘최초의 참여불자’였다. 붓다는 극심한 차별과 폭력의 시대에 평등한 수행 공동체를 만들고 평화를 위해 애썼다. 예를 들면 브라흐민 출신 제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불가촉천민인 수니타를 공동체에 받아들였고, 비록 세 번 거절하긴 했지만 결국 양모인 왕비 마하파자파티 고타미가 이끈 오백 명 여성들의 출가를 허용했다. 그리고 전쟁을 막기 위한 노력도 했다. 그의 두 혈족인 사키야족과 콜리야족이 로히니 강물의 사용을 놓고 전쟁을 벌이려고 할 때, 붓다는 전장으로 직접 가서 두 부족에게 물었다. “물이 중요한가, 생명이 중요한가?” 그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물음에 깨우친 두 부족은 전쟁을 포기하고 함께 사는 길을 택했다. 또한 붓다의 가르침에는 가난과 폭력의 연관성을 드러내는 일종의 ‘사회분석’도 있다.

가난한 이에게 소유를 주지 않음으로 인해 가난이 퍼졌고, 가난이 퍼지면서 도둑질이 늘어났고, 도둑질이 늘어나면서 무기를 사용하는 일이 많아졌고, 무기를 사용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일도 많아졌다.

현대적 개념으로 풀어보면, 붓다는 폭력의 원인이 경제적 불평등임을 분석함으로써 분배정의를 해법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현실 정치와 지혜롭게 관계 맺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붓다가 사회와 정치의 원리와 작동방식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의 참여불교 운동은 상좌부불교 전통의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활발하다. 그 이유는 상좌부불교가 붓다 당시에 제정된 수행 공동체의 규칙과 생활방식을 원형 그대로 지켜온 것과 관련이 있다. 상좌부불교의 출가자들은 붓다 당시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형태의 경제행위에도 종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전적으로 재가자 공동체에 의존해야만 한다. 그 결과 재가자들은 출가자들을 물질적으로 지원하고 출가자들은 재가자들을 영적으로 지원하는 호혜적 관계가 만들어졌다. 그런 호혜적 관계의 구체적 형태가 탁발(托鉢) 전통이다. 출가자들은 2500여 년 동안 매일 마을에 가서 탁발을 해왔다. 자연히 마을 사람들과 일상적으로 접촉하게 되면서 그들의 상담자, 교육자, 치유자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참여불교 형성의 한 토양이 된 것이다.

이처럼 역사 속의 불교 전통들은 사회적 고통에 응답하며 참여하는 자비의 길을 걸어 왔다. 그것은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이루고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 바라나시로 걸어가 지혜와 자비의 수행공동체를 만든 스승 붓다의 길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틱낫한은 분명하게 말한다. “모든 불교는 참여불교이다.”(이상 참여불교와 해방신학의 대화시도-정경일)

재가불교운동이 성공하려면 목표의식이 분명해야 한다. 출가든 재가든 종단중흥이나 조직의 성장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불교의 목표와 모든 활동은 불법을 널리 펴는 전법(傳法)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전법은 곧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실천으로 귀결된다. 부처님은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세상을 불쌍히 여겨 길을 떠나라.”고 하셨다. 그것이 불교가 존재하는 이유이고, 출가든 재가든 그것을 위해 활동해야 한다. 이런 목표를 분명히 하지 않는다면 재가라고 해서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인적 구성보다 무엇을 위해 활동할 것이냐는 정견과 목표의식을 명확히 하는 것이 우선이다(불교평론-서재영박사).

전법과 재가불교운동을 일치해서 보는 이러한 시각도 결국은 부처님의 삶에서 사회적 실천의 기초를 찾기 때문이다. 좀더 깨달음과 사회참여의 일치화를 부처님의 전도과정에서 찾은 전문적인 논문을 참조하기로 한다(이하 김재성 박사의 초기불교의 깨달음과 사회참여라는 논문을 부분 발췌하였고 저자의 해설은 따옴표로 넣었다).

붓다는 전문적인 수행승 집단인 출가승단을 만들었으며, 승단의 구성원들이 출가의 목적인 궁극의 경지 아라한과에 이르도록 이끌었다. 그리고 일반 사회인들을 지속적으로 교화해나가면서 사회 참여의 모습을 보였다.

붓다는 일반 재가자들에게 그들이 실천할 수 있는 만큼의 가르침을 제시하였다. 세속에서의 행복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정당한 방법으로 그러한 행복을 추구할 것을 제시하였다. 국왕은 국왕으로서 법에 의한 통치를 해야 한다고 역설하였고, 일반 재가자들은 열심히 노력해서 재산을 모으고, 그 재산은 자신과 남들과 함께 공유하면서 현세의 행복한 삶을 살라고 제안하였다.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상호 의무를 제시하면서 구성원간의 존중과 상호 돌봄의 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보시와 도덕적인 생활로서의 지계(持戒)를 강조하고, 자비희사(慈悲喜捨) 등의 명상을 통해 천상에 이르는 수행법도 강조하였다. 궁극적으로는 재가자들도 무상(無常)을 이해하는 지혜를 갖추어 예류과 이상의 성인의 깨달음에 이르게 하였다. 오욕락이 있는 재가자도 출세간법을 증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음을 알고 지도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붓다는 세간에 살아가는 재가자들이 각자가 누릴 수 있는 현세의 행복과 내세의 행복 그리고 궁극의 행복을 제

시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사회 참여를 하였다.

“저자 주-김재성 박사는 부처님의 전도선언에 이러한 부처님의 정신이 녹아있다고 보았다.”

붓다가 깨달은 후, 녹야원에서 처음 법을 설한「 초전법륜경」을 통해서 수타원이 되었고,「 무아상경(無我相經)」을 통해 5비구는 아라한이 되었고, 같은 장소에서 야사와 그 친구 55명이 아라한이 된 후에, 붓다는 많은 사람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세상에 대한 연민으로, 신과 인간의 유익함과 안녕과 행복을 위해서 처음도 중간도 끝도 좋은 법을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하였다. 이른바 열반에 이르는 길을 세상에 전하라는 전도선언이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 신과 인간의 유익함과 안녕과 행복을 위해 붓다와 그 제자들은 사회참여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도의 선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나는 인간계와 천상계의 모든 결박에서 해방 되었다. 그대들도 역시 인간계와 천상계의 모든 결박으로부터 해방 되었다. 비구들이여! 이제 나아가 많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이 세상에 대한 자비심에서, 신들과 인간들의 이익과 유익과 행복을 위해 편력하라. 두 사람이 한 방향으로 같이 가지 말라. 그래서 시작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이 법을, 의미와 표현을 구족한 가르침을 설하라. 청정한 삶, 완전하고 순결한 이 성스런 삶(梵行)을 드러내라.

세상에는 더러움에 의해 눈이 그다지 때 묻지 않은 사람도 있는데, 법을 듣지 못하면 [바른 길을 벗어나] 타락하고 말 것이다. [법을 들으면] 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법을 설하기 위하여 우루벨라의 세나 마을로 갈 것이다.‘

붓다는 재가자에게는 재가자로서 이 삶에서 행복하고, 다음 생에서도 행복하기 위한 가르침을 다양하게 제시하고 있다 붓다는 출가제자들과 함께 사회와 더불어 살아가면서 당시의 사회 구성원의 안녕과 행복과 유익을 위해, 35세 깨달음을 이룬 후, 80세에 완전한 열반에 들 때까지 45년을 보냈다.

직접적으로 현실사회의 문제를 개혁하려고 세속의 정치를 하지않았더라도, 붓다는 전쟁, 경제, 바람직한 정치체제, 다양한 인간관계의 윤리 등의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 다양한 가르침을 제공하고 있다.

붓다는 정치가로서가 아니라 영적인 스승으로서 궁극의 자유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붓다와 출가 제자들은 당시 사회의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 사회인으로 올바르게 살아가는 방식과 궁극적으로는 자신들이 직접 경험한 깨달음-열반의 행복을 전함으로써 사회참여를 하였다.

비구 보디(2005)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 붓다의 출현 배경으로 초기 경전인 니까야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 속에서 붓다의 임무가 우주적 영역에 가까운 것임을 보게 될 것이다. 인지할 수 없는 시간의 우주적인 배경을 뒤로 하고, 인간들은 무지의 어둠에 둘러싸여 늙음과 병과 죽음의 괴로움에 속박되어 헤매고 있는 세상에, 붓다는 인간들을 위해 빛을 가져다준 사람(ukkdhro manussnam. Sn 335게)으로 등장했다.

이렇게 붓다는 보통 인간과 달랐고,아라한이 된 제자들과도 누진자로서 그리고 일부 능력(육신통)과 사무애해(四無碍解) 등과 같은 점을 제외하고 달랐다.“

붓다는 신(神)도 아니며 신의 예언자나 화신(化身)도 아니다. 오히려 그 분은 자기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궁극적인 자유[解脫]와 완전한 지혜를 얻어서 천신(天神)과 인간들 가운데에서 견줄 이 없는 스승[無上師]이 된 최상의 인간이다. 그 분이 걸었고 보여준 그 길을,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실제로 따라감으로써 인간들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구원해내는 방법을 보여주었다는 의미에서만 그 분은 ‘구원자’이다. 붓다가 얻은 지혜와 자비의 완전한 조화를 통해서, 그 분은 보편적이면서 영원한 완성된 인간의 이상을 구현하셨다

붓다는 사람들이 세속적인 삶의 차원에서 행복, 평화 그리고 안전을 얻기 위해 선(善)의 뿌리를 심을 수 있는 세속적인 길과 사람들을 열반으로 인도하는 초세간적인 길을 함께 선포하였다. 이처럼 붓다의 역할은 그가 가르친 초세간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는 것보다 더 넓다. 『앙굿따라 니까야』에서 볼 수 있듯이 붓다는 “많은 사람들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서, 세상에 대한 연민 때문에, 천신과 인간의 유익함과 안락과 행복을 위해서” 세상에 출현하신 분으로, 붓다의 이타적인 차원을 폭넓게 보여주고 있다.

불전에 제시된 행복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다. 첫 째, 현재의 삶에서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유익함과 행복(dihadhamma-hitasukha)인데, 이것은 자신의 도덕적인 의무와 사회적 책임을 실현할 때 얻어진다. 둘 째, 다음 생으로 연결되는 유익함과 행복(samparyika-hitasukha)은 10가지 유익한 행위[十善業]나 보시 등의 공덕이 되는 행위, 자비희사의 사무량심을 실천할 때 얻어진다. 세 째, 궁극적인 선 혹은 최고의 목적(paramattha)인 열반, 태어남의 순환(윤회)으로 부터의 궁극적인 해탈은 팔정도를 수행할 때 얻어진다.

“저자 주-사무량심에 대하여는 별도로 설명한다”

앞의 두 행복은 깨달음이라는 지고(至高)의 행복에 이르는 과정이지만 무시되지 않았다. 재가자들에게는 마음의 번뇌를 덜어놓는 방법으로 보시, 지계, 천상의 점차적인 가르침(anupubbikatha: 次第說)을 처음으로 제시했고, 믿음을 일으키고 이해능력이 있는 재가자에게는 사성제를 가르쳐 성인이 되게 하였다.

보리수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직 후 7주 동안 붓다는 해탈의 행복(vimuttisukha)을 맛보며 지냈다. 붓다는 중생들의 근기가 자신이 깨달은 법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설법을 주저하였지만, 법을 들으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중생들도 있다는 범천 사함파티의 권청으로 설법을 결심하였다. “내가 깨달은 이 법(法, Dhamma)은 심오하여 알아차리기도 이해하기도 힘들며, 평화롭고 숭고하며, 단순한 사유의 영역을 넘어서 있고 미묘하여 오로지 현자만이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을 좋아하여 그 즐거움에만 탐닉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열반을 이해하기는 어려우리라.” 천의 설법 권청을 듣고 나서 세계를 둘러보니, 사람들 가운데에는 선량한 자질을 가진 사람, 나쁜 자질을 가진 사람, 가르치기 쉬운 사람, 어려운 사람, 현재의 그릇된 행동 때문에 위험에 당면하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두루 섞여 있는 것이 있는 그대로 보였다. 이 가운데 법을 펴서 제도할 사람들이 있음을 보고 설법을 결심하였다.

붓다의 깨달음은 설법의 형태로 사회 참여로 이어졌다. 만나는 대중들이 누구이건 그 대상에게 가장 적합한 가르침으로 각자의 능력에 맞는 실천의 방법을 제시하고 각자 유익함과 행복을 경험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저자 주-김재성 박사는 부처님이 초기설법의 고민에서 부처님의 사회참여의 본질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부처님은 깨달음의 희열에 만족하거나 머물지 않으셨다. 당시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설법함으로써 질시와 미움의 대상이 되거나 희화화될 것도 각오해야하는 시점이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사람들을 두루 살피시고 그 각각의 자질과 관계성을 파악한 연유에 설법을 결심하셨다. 논문 전체를 살펴볼 때 이것이 부처님이 아라한에 머물지 아니한 이유이기도 하고 차별되는 점이기도 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본고에서는 재가 대중을 향한 가르침을 중심으로 초기불교의 사회 참여 모습을 정리하고자 한다.

붓다는 사람들이 가난에 빠져있고 배고픔과 빈곤에 의해 핍박당할 때, 그들이 도덕적으로 산다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통찰하였다. 따라서 적절한 일자리와 일에 합당한 보수가 주어진다면 나쁜 행동을 피할 수 있다고 보았다. 붓다는 경제적 정의의 실현은 사회적 조화와 정치적 안정성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꾸따단따경」에서 제사를 통해서 자신의 재산과 영토를 지켜 이 세상에서의 행복을 도모하려고 하는 마하위지따 왕에게 궁중제관은 다른 방법을 제안한다. 즉 도둑들에 의해 국가가 어지럽고 파괴되었고 시골은 약탈자들이 만연한데, 이런 지역에 과세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한다. 또는 그런 도적을 사형이나 감금으로 추방할 수 없으므로 농사와 목축에 적합한 이들에게 곡식의 씨앗과 사료를 제공하고, 상업에 적합한 자들에게는 돈을 주며. 사무에적합한 자들에게는 적당한 월급을 제공하여 그들이 일에 몰두하여 안정된 생계를 유지하게 되면 왕국도 안정되고 세금도 많아지며 평화와 안정이 찾아 올 것이라고 제안한다. 이상적인 정치가로서 국민들이 경제적인 안정을 얻게 하는 것이 정치의 기본이라는 점을 강조한 이 경전이 불교가 위정자들에게 전하는 정치적 메시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붓다는 또한 일반 사회인들이 현재의 삶에서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행복과 관련되는 법을 가르쳤다. 이러한 가르침에서 가장 종합적인 초기경전은「교계싱갈라 경」이다(DN 31경). 재가자들의 실천법이라고도 불리는 이 경의 핵심내용은 “여섯 방향에 대한 예배”이다. 붓다는 고대 인도의 종교의식을 새롭게 해석하여 윤리적 의미를 불어 넣었다. 붓다에 의해서 설명된 “여섯 방향에 대한 예배”의 수행은 사회의 구성원들이 자애, 연민, 선의의 마음으로 서로 간의 의무와 책임을 실현할 때, 사회적 질서의 정합성을 가져오며, 서로 연결된 관계망에 의해 사회가 유지된다는 것을 전제한다.

세상에서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 사이에 상호 돌봄의 정신은 사회를 결속시키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만드는데 필수적인 지침이라고할 수 있다.

붓다께서는 현세와 내세 양자의 유익함을 얻는 공통의 근거를 공덕을 짓는 일(puññakiriya)에 방일하지 않음이라고 하였다.

불교는 붓다의 깨달음에서 비롯되었다. 붓다는 번뇌가 모두 사라진 체험을 통해 아라한이 되면서 붓다가 되었다.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 불사(不死)를 성취한 것이다. 붓다는 이 깨달음을 아직 때가 덜 묻은 동시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전했다. 45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출가와 재가의 제자가 되었다. 붓다는 국가적인 간섭을 받지 않으며, 자유롭게 깨달음을 추구할 수 있는 출가승단을 만들었으며, 승단의 구성원들인 비구, 비구니, 사미, 사미니들에게 출가의 목적인 궁극의 경지 아라한과에 이르도록 지도했다. 그리고 승단의 청정을 유지해 가면서 일반 사회인들을 지속적으로 교화해나가면서 사회참여의 모습을 보였다.

세상에 사는 일반 재가자들에게는 세속에서의 행복의 추구도 강조했다. 국왕은 국왕으로서 법에 의한 통치를 해야 한다고 역설하였고, 열심히 노력해서 재산을 모으고, 그 재산은 자신과 남들과 함께 공유하면서 현세의 삶의 행복을 유지하라고 제안하였다.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상호 의무를 제시하면서 구성원간의 존중과 상호 돌봄의 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보시와 도덕적인 생활을 강조하고, 자비희사(慈悲喜捨) 등의 명상을 통해 천상에 이르는 수행법을 지도하셨다. 그리고 재가자라 하더라도 지혜를 갖추어 예류과, 일래과, 불환과의 깨달음에 이르게 하였다. 오욕락이 있는 재가자(sabhda)도 출세간법을 증득할 수 있는 기회(oksdhigama)를 얻을 수 있음을 알고 지도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붓다는 세간에 살아가는 재가자들이 현세의 행복과 내세의 행복 그리고 궁극의 행복에 이르는 길로 인도함으로써 사회 참여를 하였다

나. 대승불교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은 모든 불교의 근본 이상이다. 깨달은 자는 반드시 중생을 교화하고 구원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의 ‘상’과 ‘하’를 시간적 선후관계로 보기도 하지만, 지혜의 추구와 자비의 실천 모두 중요하다는 것이 더 본래적인 뜻이다. 그래서 한국의 참여불자들은 좌구보리 우화중생(左求菩提 右化衆生)이라는 표현으로 지혜와 자비의 병진을 강조하기도 한다.

대승불교의 보살 이상도 불교의 사회참여 사상과 실천의 중요한 한 전거로 이해할 수 있다. 개인적 해탈을 강조하는 상좌부(上座部, Theravda)불교의 아라한 이상과 달리 대승불교의 보살 이상은 고통받는 모든 존재의 구원과 해탈을 추구한다. 큰mah 수레yna를 뜻하는 ‘대승(大乘)’이라는 표현 자체에 이미 보살의 사회적 의미가 담겨 있다. 대승의 보살은 모든 존재가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까지 열반에 드는 것을 스스로 유예한다. 뿐만 아니라 지장보살의 이상에서 보듯이, 고통 받는 중생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보살은 지옥으로까지 뛰어든다(정경일-참여불교와 해방신학의 대화시도).

대승불교에서 참여불교의 조직형태와 운동방식이 생겨납니다. 왜냐하면, 승가와 재가를 구분하지 않고, 남을 돕는 것이 자기구원이라는 점에서 수행과 일을 구분하지 않고, 나아가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불교와 비불교도 구분하지 않는, 차별 없는 포용력이 대승불교 운동이기 때문입니다. 근본불교는 불교가 없는 데서 처음으로 나온 것이라면, 대승불교는 불교가 있는 데서 그 잘못을 비판하면서 나왔기 때문에 운동적 성향을 내포하고 있습니다(불교평론-서재영 박사).

재가는 승가를 외호하고 수행환경을 제공하는 복전(福田)의 역할에 머물러 왔다. 재가자의 위상과 역할에 반전을 일으킨 것은 대승불교이다. 불탑 주변의 불지(佛地)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법사들이 대승불교의 흥기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자연히 대승경전에는 재가자가 종교적 권위를 가진 주체로 부상한다. 일례로 유마 거사는 부처님의 10대 제자로 대표되는 출가자들을 호통치며 대승의 정신을 설파하고, 승만 부인은 원대한 보살의 서원을 일으킨다.

대승불교는 특히 사무량심을 강조하고 있다. 사무량심이란 모든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고 괴로움과 미혹을 없애주는 자(慈)·비(悲)·희(喜)·사(捨)의 네 가지 무량심을 의미한다.

자무량심(慈無量心)은 모든 중생에게 행복하길 바라며 즐거움을 베풀어 주는 마음가짐이며, 비무량심(悲無量心)은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고통의 세계로부터 구해내어 깨달음의 해탈락(解脫樂)을 주려는 마음가짐이다. 사무량·사등심·사범주·사범당이라고도 한다.

희무량심(喜無量心)은 남이 즐거우면 함께 기뻐하려는 것으로 중생으로 하여금 고통을 버리고 낙을 얻어 희열하게 하려는 마음가짐이며, 사무량심(捨無量心)은 탐욕이 없음을 근본으로 하여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보고 미움과 가까움에 대한 구별을 두지 않는 마음가짐이다.

처음에는 친한 사람에 대하여 이 마음을 일으키고 점차로 반경을 넓혀서 미운 사람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평등하게 이 마음을 일으키도록 되어 있다.

그때 세존께서 사위성에서 걸식하여 식사를 하고 나서 기원정사에서 산책하다가 나운(羅雲, 라훌라)에게 가서 말씀하셨다.

“나운아,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慈心)을 닦으라. 그것을 닦으면 성냄이 다 소멸될 것이다.

나운아, 모든 존재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悲心)을 닦으라, 그것을 닦으면 남을 해치려는 마음이 다 소멸될 것이다.

나운아, 남이 즐거우면 함께 기뻐하려는 마음(喜心)을 닦으라. 그것을 닦으면 질투(미워)하는 마음이 다 소멸될 것이다.

나운아, 남을 평등하게 대하려는 마음(護心, 捨心)을 닦으라. 그것을 닦으면 교만한 마음(마음의 흔들림)이 다 소멸될 것이다.

나운아, 부정에 대해 명상하라. 이것으로 탐욕이 사라진다.

나운야, 무상에 대해 명상하라. 이것으로 아만(我慢)이 사라진다.”

<增一阿含經 제7권, 安般品> <맛지마 니카야 62, 敎誡羅羅大經>

“선남자야, 보살의 4무량심은 진실한 사유이다. 선남자야, 어찌하여 진실한 사유라고 하는가? 모든 번뇌를 끊어버리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닦으면 탐욕이 끊어지고, 모든 존재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닦으면 성냄이 끊어지고, 남이 즐거울 때 함께 기뻐하려는 마음을 닦으면 즐겁지 않음이 끊어지고, 남을 평등하게 대하려는 마음을 닦으면 탐욕과 성냄과 중생이라는 생각이 끊어진다. 그래서 진실한 사유라고 한다.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의 4무량심은 모든 선근의 근본이다.”

<36권본 大般涅槃經 제14권, 梵行品>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내가 이전에 너에게 4무량을 설했다. 비구는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4방 · 사유 · 상 · 하에 가득 채운다. 그 마음과 함께하면 번뇌도 없고, 원한도 없고, 성냄도 없고, 다툼도 없나니, 지극히 광대하고 한량없이 잘 닦아 모든 세간을 가득 채우고 지낸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과 남이 즐거우면 함께 기뻐하려는 마음과 남을 평등하게 대하려는 마음도 그러하여, 번뇌도 없고, 원한도 없고, 성냄도 없고, 다툼도 없나니, 지극히 광대하고 한량없이 잘 닦아 모든 세간을 가득 채우고 지낸다.

아난아, 너는 젊은 비구들에게 이 4무량을 설하여 그들을 가르쳐야 한다. 만약 젊은 비구들에게 이 4무량을 설하여 가르치면, 그들은 평온을 얻고 힘을 얻고 즐거움을 얻어, 번뇌의 열기로 뜨거워지지 않고 일생 동안 청정한 행을 닦을 것이다.”

<中阿含經 제21권, 長壽王品 說處經>

탐욕이나 분노를 일으키고, 남을 해치거나 미워한 결과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 돌아와 마음의 상처로 남는다. 따라서 남을 소중히 여기는게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일이고,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게 남을 소중히 여기는 일이다. 이 일은 자신과 남을 질책하지 않고 너그럽게 보살피는 데서 시작한다.

누구나 결함이나 허물이 있기 마련인데 그것을 그냥 받아들여 용해 시키지 않고 싸우기를 계속하면, 자신은 긴장 속에서 분열되고, 남에게는 저항하게 된다. 이 저항이 분노이고 증오이다. 따라서 자신에 대한 배려가 곧 남에 대한 배려이고, 남을 배려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도 배려하지 못하는 법이다.

4무량심은 대승불교권에 속하는 우리나라에서 매우 중요하게 강조되었던 교설로서, 고승들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자비를 상징하는 십일면관음의 조상(彫像)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보살도를 행할 때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마음가짐으로 자비심을 보다 구체적으로 확대시킨 것이다. 로카미트라 법사는 또 “모든 종파는 ‘자비희사’의 극대화가 공통점이라 할 수있겠는데 지혜가 첫 번째”라며 “하지만 지혜와 자비는 둘이 아니며 자비없이는 지혜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불교 수행을 한다면 자비와 지혜를 떼어 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로카미트라 법사는 “(수행의)경지가 높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보다 적극적이되고, 너그러워지며, 자비심이 생긱고 며칠간이라도 화를 덜내야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되지만 어떤 종교단체들은 성직자들이 주변 사람들보다 의식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며 “불교야 말로 근본적으로 사회에 참여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사무량심 실천을 통해 공심을 갖고 있는 수행자가 주변을 변화시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불교에서 수행의 경지를 바라보는 관점은 오직 하나다. 수행을 통해 바뀌었는가, 수행을 통해 공심이 가득차게 되었는가이다.

마가스님이 대승불교의 교리로 강조하고 있는 사섭법은 사섭사·사사섭법·사섭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섭(攝)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하면 모든 중생들이 다 한마음 한뜻으로 화합할 수 있다는 말이다.

보살이 중생을 섭수교화하여 불도에 들게 하는 보시섭·애어섭·이행섭·동사섭의 4가지 행위를 말하는데 다음과 같다.

① 보시섭:진리를 가르쳐주고 재물을 기꺼이 베풀어주어 중생으로 하여금 친애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일, 보시는 걸림없는 무주상(無住相)으로 해야 한다

② 애어섭:사람들에게 불교의 진리 속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하여 항상 따뜻한 얼굴로 부드럽게 말을 하는 일, 열 가지 악한 일 가운데 입으로 짓게 되는 네 가지를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이간질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악한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언제나 선한 말, 착한 말을 하여 상대를 기쁘게 하는 것이다. 또 비단결같이 입술에 발린 말로써 남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네 가지 추악한 말을 떠나 진실되고 사랑스런 말을 사용해야만 애어의 섭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③ 이행섭:몸으로 하는 행위, 말로 하는 행위, 마음으로 하는 행위, 즉 신(身)·구(口)·의(意) 3업으로 선행을 하여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고 도에 들어가게 하는 일,

우리는 사회생활에 있어서 언제나 남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 남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돼야 할 것이다. 언제나 남들이 만나 보고 싶어하고 또 남들이 그 사람을 그리워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물질적인 도움이나 별다른 이익을 주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을 만나면 즐거워지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사람은 비록 물질적으로는 가난하더라도 마음만은 언제나 거부장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마음은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세상을 보다 달관해야 할 것이고 많은 수행을 쌓아야만 얻어지는 훌륭한 마음가짐 일 것이다.

④ 동사섭:나와 남을 구별하지 아니하는 보살의 동체대비심에 근거를 둔 것으로 중생들에게 접근하여 일심동체가 되어 함께 일하고 생활함으로써 고락을 함께 하고 화복을 같이하면서 그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일이다.

이 동사섭은 보살의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에 근거를 둔 것으로, 함께 일하고 함께 생활하는 가운데 그들을 자연스럽게 교화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동사섭은 사섭법 가운데 가장 지고한 행이다. 보시·애어·이행은 처해진 환경에 따라서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는 것이지만 동사섭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동사섭을 행한 대표적인 고승으로는 혜숙(惠宿)·혜공(惠空)·대안(大安)·원효(元曉)·언기(彦機) 등을 꼽을 수 있다. 혜숙은 국선(國仙) 구참공(瞿公)의 그릇된 사냥을 막기 위하여 다리의 살을 베기도 하였고, 여자의 침상에서 누워 자기도 하였다. 혜공은 천진공(天眞空)의 병을 고치는 한편, 언제나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며 변방의 사람들에게 불교를 전파하였으며, 대안은 거리를 다니면서 모든 사람에게 크게 편안하라고 축원하였으므로 ‘대안’이라는 별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들 세 고승의 다음 시대에 활약하였던 신라의 원효는 거지·땅꾼 등의 소외받는 계층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을 교화함은 물론, 무애가(無歌)를 부르고 무애무(無舞)를 추면서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참된 가르침을 심어주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조선 중기의 고승 언기는 오도(悟道)한 뒤 양치기를 하면서 동물들과 하나가 되는 수행을 닦았고, 대동강 가에서 거지와 고아들을 모아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을 교화하여 당시 평양에는 거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이밖에 많은 고승들이 사섭법에 입각하고 중생들에게 불교를 심어주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사섭법은 사무량심과 함께 대승불교 보살도의 대표적인 수행덕목이다.

사섭법과 사무량심을 실천하고 있는 불자들은 서로간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로카미트라 법사는 또 “수행하는 사람이면 승속의 구분없이 ‘승가’라 할 수 있다”며 “삼보에 귀의하는 진지한 불자는 이상적인 차원과 실제적인 차원을 모두 생각하고 정신적인 동료의식을 가져야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이병욱 박사는 대승불교의 대표적 경전이라 할 수 있는 승만경과 법화경 그리고 원효대상의 법화총요에서 대승불교의 참여불교정신을 설명하고 있다(이하 이병욱 박사의 사회적 약자를 위한 참여불교의 길)

1) 《승만경》의 10가지 큰 서원: 자비

《승만경》에서 승만 부인은 10가지 큰 서원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① 계율을 범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것, ② 교만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것, ③ 화내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것, ④ 질투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것, ⑤ 아끼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것, ⑥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중생을 성숙시키는 데 재물을 사용하겠다는 것, ⑦ 애착함이 없는 마음, 번뇌에 물들지 않은 마음 등으로 중생을 포섭하겠다는 것, ⑧ 괴롭고 고통스러운 중생 등을 보면 편안하게 하고 도리[義]로 이롭게 하겠다는 것, ⑨ 잘못된 계율을 따르거나 계율을 범한 사람을 보면, 포섭할 사람은 포섭하고 굴복시킬 사람은 굴복시키겠다는 것, ⑩ 정법(正法)을 포섭해서 사라지지 않게 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①~⑤는 개인적 수행에 관한 내용이고, ⑥~⑩이 사회적 의미를 지니고 있어, 참여불교와 관련을 맺어볼 수 있다. 이상의 10가지 큰 서원 가운데, ⑥~⑧의 내용을 더 자세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⑥ 세존이시여! 나는 오늘부터 보리에 이르기까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재물을 받아서 모으지 않고, 받은 모든 재물을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중생을 성숙시키기 위해서 사용하겠습니다.

⑦ 세존이시여! 나는 오늘부터 보리에 이르기까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섭법(四攝法)을 행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모든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애착함이 없는 마음과 번뇌에 물들지 않는 마음[不愛染心], 만족함이 없는 마음[無厭足心], 걸림이 없는 마음[無心]으로 중생을 포섭하고 받아들이겠습니다.

⑧ 세존이시여! 나는 오늘부터 보리에 이르기까지 만약 고독한 중생, 갇혀 있는 중생[幽繫], 질병에 걸린 중생, 여러 가지 재앙과 고난에 빠진 중생, 괴롭고 고통스러운 중생을 본다면 끝내 잠깐이라도 그냥 두지 않고 반드시 편안하게 하고 도리[義]로 이롭게 하여 여러 가지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한 뒤에 떠나겠습니다.

⑥은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중생, 곧 사회적 약자를 성숙시키는 데 재물을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⑦은 사회적 약자를 포함하는 중생을 위해서 애착함이 없는 마음과 번뇌에 물들지 않는 마음 등으로 사회적 약자를 포함하는 중생을 포섭하겠다는 것이다. ⑧에서 말하는 여러 가지 재앙과 고난에 빠진 중생, 괴롭고 고통스러운 중생 등은 사회적 약자를 의미하는 것이고, 이 사회적 약자를 정신적인 차원과 물질적인 차원에서 돕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승만경》에서 말하는 10가지 큰 서원 가운데 ⑥, ⑦, ⑧ 등에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참여불교의 자비 이념이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한다.

2) 《법화경》의 자비 · 평등 · 방편

앞에서 《승만경》에서 제시하는 자비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법화경》에서는 자비에 대해 다른 관점에서 더 자세히 논하고 있다. 그것은 《법화경》 〈법사품〉의 《법화경》을 설법하는 자세에 대해 설명하는 대목에서 잘 나타난다. 〈법사품〉에서 제시하는 《법화경》을 설법하는 자세는 자비심을 갖고, 인욕하는 마음을 내고, 모든 존재가 공(空)하다고 보며,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참여불교에 적용하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려는 마음, 곧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고, 그리고 자비의 활동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더라도 인욕의 마음을 내고, 이러한 활동은 공의 지혜에 기초하고, 나아가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이 《법화경》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참여불교의 이념 가운데 하나이다. 이 내용에 대해 《법화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약왕아! 선남자 · 선여인이 여래가 열반에 들어가신 후, 사부대중을 위해서 이 《법화경》을 말한다면, 이 사람은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이 선남자 · 선여인은 여래의 방에 들어가고, 여래의 옷을 입으며, 여래의 자리에 앉아서 사부대중을 위해서 이 《법화경》을 말한다. 여기서 ‘여래의 방’이라고 한 것은 모든 중생에 대해 큰 자비의 마음을 갖는 것을 의미하고, ‘여래의 옷’이라고 한 것은 부드럽게 인욕하는 마음을 말하며, ‘여래의 자리’라고 한 것은 모든 존재가 공(空)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경지에 머문 다음에 게으름이 없는 마음으로 모든 보살과 사부대중을 위해서 이 《법화경》을 말해야 한다.

이러한 〈법사품〉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법화경》의 〈상불경보살품〉에 나오는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이다. 상불경보살은 만나는 모든 사람을 다 공경하는데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다 부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상불경보살은 여러 사람에게 핍박을 받지만, 이러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모든 중생을 공경한다. 이처럼 모든 중생에 대해 공경하는 사람이 《법화경》에서 말하는 이상적 인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내용은 중생의 평등을 주장하는 것이고, 그러하기 때문에 상불경보살은 중생을 공경한다는 것이므로, 이것을 참여불교의 관점에서 해석하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존중으로 이어진다. 이 또한 《법화경》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참여불교의 이념이다.

그리고 《법화경》의 〈비유품〉에서는 방편의 필요성을 비유로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불타고 있는 집에서 어린아이들이 놀이에 빠져서 위험한 줄 모르고 있으므로 아버지가 이 어린아이들을 구해내기 위해 방편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방편은 원래 불교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데 필요한 것이지만, 이 방편이 참여불교 이념의 하나가 될 수 있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존중한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사회적 약자의 눈높이와 처지에 맞추어서 보호해줄 필요가 있다. 내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사회적 약자가 실제로 보호받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를 인격체로서 존중하면서도 실질적으로 보호하려는 방편의 정신이 더욱 요구되는 것이다. 이것도 《법화경》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참여불교의 이념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승만경》에서도 자비를 말하고 있지만, 《법화경》의 자비는 다른 각도에서 접근한 것이다. 그것은 자비에다 인욕, 공, 정진을 추가한 것이고, 이것을 참여불교에 적용하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자비만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고, 인욕, 공의 지혜,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세(정진)가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3) 원효의 《법화종요》의 평등과 수행(방편)

원효는 《법화종요》에서 《법화경》의 평등은 수용하였지만, 방편은 자신의 관점으로 해석한다. 그것은 방편의 여러 가지 실천이 부처가 되는 길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참여불교에 적용하면, 사회적 약자를 위해 그들의 눈높이와 처지에 맞추어 다양한 활동을 하는 것이 불교의 수행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는 것이 사회적 약자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러한 활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부처가 되는 수행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참여불교의 수행론을 제시한 것이다.

원효는 《법화종요》에서 일승의 인(因)으로서 두 가지를 제시한다. 그것은 성인(性因)과 작인(作因)이다. 우선, 성인(性因)은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는 점에 근거한 것이다.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두 부처가 될 수 있고, 이러한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성인(性因), 곧 자기의 성품에 본래부터 간직하고 있던 원인이라고 한 것이다. 또한 성인(性因)은 어느 한 중생이라도 가볍게 대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평등에 기초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나아가 인간존중 사고방식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 다음, 작인(作因)은 어떤 수행을 하든지 궁극에는 부처가 된다는 점에 근거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여러 가지의 수행이 차별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승의 관점에서 보면 그러한 여러 수행이 모두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에 대한 《법화종요》의 인용문을 살펴보자.

작인(作因)은 성인이나 범부든지, 내도(內道, 불교 안에 속하는 가르침)나 외도(外道, 불교 이외의 가르침)든지, 도분(道分, 출세간적인 것으로 도를 닦는 데 속함)이나 복분(福分, 세간적인 것으로 복을 짓는 데 속함)이든지 간에 모든 선근은 다 같이 수행자를 무상보리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예컨대 《법화경》에서 말하기를 “어떤 경우에는 예배하고, 어떤 경우에는 단지 합장하고, 나아가서는 한 손만 들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조금 머리를 숙이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산란한 마음을 가지고 나무아미타불을 한 번만 외치기라도 한다면, 모두 이미 불도를 이루었다” 등등이라고 말한다. ……불법의 오승(五乘)의 모든 선(善)과 외도의 여러 가지 선(善)은 다 일승이니, 그 이유는 다 불성에 의지해서 다른 체(體)가 없기 때문이다.

원효는 방편의 정신을 한 단계 더 끌어올려 다양한 방편의 내용이 모두 부처가 되는 길이라고 한다. 이것을 참여불교의 관점에서 해석하면, 사회적 약자를 위해 봉사하는 다양한 형태의 활동이 모두 부처가 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다. 선불교의 혁명성

대승불교의 대중성 확보는 나중에 세속화ㆍ신격화 함으로써, 근본불교가 법집화(法執化)한 것보다 더 모순적이고 비불교적으로 변한다.

부처님을 신격화하여 부처라는 이름의 또 다른 ‘신’을 탄생시킨 것은 근본불교의 연기법, 무아(공) 정신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전지전능한 신은 사상적으로 무아이자 일원론인 불교일 수가 없습니다.

비불교화된 대승불교의 문제를 근본불교 정신으로 회귀시킨 것이 초기 선불교이다.

선의 급진적 자유로움은 공(空), 다르마, 붓다와 같은 불교의 최고 상징에도 절대성을 부여하지 않는데서 드러난다. 임제 선사는 사자후를 토한다. “붓다를 만나면 붓다를 죽여라!”

부처님 역시 자신의 설한 법을 뗏목에 비유하며 사용과 버림에 미련을 두시 말 것을 말씀함으로 선불교 탄생의 기초를 제공하셨다.

4. 실천적 기초-무아와 공

다른 종교는 인간을 영혼을 지닌 존재로 보지만 불교는 무아적 존재로 본다. 이 세계와 우주의 존재를 그리스도교는 신에 의한 무로부터의 창조ex nihilo로 설명하고 불교는 연기(緣起)에 의한 생성과 변화로 설명한다. 그리스도교는 타력적 구원을 믿는 반면 불자들은 자력적 해탈을 추구한다.

불교는 2,600년 전 본성과 신성을 부정하는 종교로서 나타났다. 무아설을 주장함으로써 본성론적 사고방식을 부정하였고 기성 사유 방식과 종교적 권위주의를 부정하면서 신성을 부정하였다. 이후 다른 양상도 역사적으로 나타났지만 불교는 신에 귀의하는 종교가 아닌 자력 종교로 출발하였으며, 중심에 대한 신앙과 복종의 종교라기보다는 자신과 세계의 존재 형태에 대해 의문하고 기존의 사유방식에 도전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가다듬어 갔다.

철학화한 무아와 공에서 실천력이 나오기는 어렵다. 체험적으로 알아야 하는데, 무아·공을 철학적으로 해석하고 접하고 있다. 심지어 사상으로서 ‘무아’가 ‘거짓 나’를 버리고 ‘참나’를 찾자는 식으로 곡해되면서 결국 유아적 입장이 된다. 그러므로 ‘무아’를 말하고 있지만 무아가 아니다. 체험할 수 있는 무아, 공, 견성이라야 실천력이 나올 수 있다.

거기에 ‘고(苦)’나 ‘놀람’의 뿌리가 없음을 아는 것이 무아이고 공이다. 즉 있는 그대로 살펴보면 사물의 본질이 드러나고, 거기에는 고라고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괴로움은 사라지고 얽매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된다.

‘공’을 논하기 보다는 자기의 문제의 뿌리를 찾아보고 결국 뿌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해결방안을 선택하는 것이 실천을 잉태하는 불교적 사유이다.

고(苦)라고 한 것이 환영에서 생긴 일이므로 그 근본 뿌리가 없는 것, 이것이 공(空)이다.

부처님은 고통스러운 삶에서 고통의 실체가 없음을 체험적으로 깨닫도록 말씀하시며 깨달음의 자세가 되어 있는 자에게 사성제를 설하셨다. 그것이 무아사상이고 공이다.

의로움과 더불어 찾아오는“외적 · 내적으로 폭력적인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의로움을 요구하는 사회적 고통을 내려놓게 하는 지혜를 통해 폭력적이지 않은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이것이 불교수행이다. 불교는 외적 · 내적 폭력의 그침, 알아차림, 깨어 있음, 잊지 않음, 내려놓음, 받아들임 같은 수행을 통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이는, 모든 형태의 집착으로부터의 자유이다. 불교적 자유의 철저성은 ‘절대적 비-절대주의’로 나타난다. 불자들은 불교의 가르침도 절대화하지 않는다. 붓다도 자신의 가르침을 뗏목에 비유했다. 강을 건너면 뗏목을 버리고 길을 가야 하듯, 자신의 가르침도 해탈에 이르는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선가에서는 그것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표현한다. 중요한 것은 달을 보는 것이지 손가락을 보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선의 급진적 자유로움은 공(空), 다르마, 붓다와 같은 불교의 최고 상징에도 절대성을 부여하지 않는데서 드러난다. 임제 선사는 사자후를 토한다. “붓다를 만나면 붓다를 죽여라!”

그것이 신앙이든 이념이든 역사적인 것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절대화는 지속적 좌절을 초래한다. 모든 역사적 이념과 체제는 강을 건너기 위한 뗏목과 같다. 뗏목에 집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동남아시아의 참여불교 주창자들은 붓다가 제창한 이래 줄곧 강조되어온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을 실천적 이론으로 끌어내었다. 연민과 상호의존성, 무아가 바로 그것이다.

5. 연기와 네트워크-연기의 관계론

술락은 무아(無我)란 나와 남의 비착취로 나타나야 하며 이러한 원리를 통해서 사회적 가르침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틱낙한 역시 연민과 자비를 강조하는데 특히 타인을 위한 행동의 바탕으로서 나와 남의 불이성(不二性)을 강조한다. 따라서 자비와 연민과 무아는 우리의 모든 사회 행동주의자들의 사실상의 기본적인 동기로서 반복하여 등장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시아 불교 행동주의자들이, 그 활동의 기반을 경전의 근거(주로 붓다의 교설)에서 뿐만 아니라 실천과 경험에서도 찾으려 했음을 알게 된다. 경전적인 근거와 철학적 원리는 불교의 사회적 행동주의를 불교적으로 정당화시키는 이론적 근거를 제시할 수 있고 또 실제로도 그렇지만, 사회적 행동주의의 실질적 동기는 자비와 연민, 무아라는 말로 반복되어 설명되는 경향이 있다.이러한 경험적 조건들은, 그들이 모두 강조하듯이 불교적 실천과 함께 길러져야한다(박경준 교수 위 논문).

가장 보편적 인간경험인 고통은 오늘날 전 지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전 지구적 고통은 전 지구적 구원을 필요로 한다.

불교사상의 핵심은 모든 존재가 연결되어 있다는 상호의존적 연기의 진리이다. 나가르주나(龍樹)는 그 진리를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가르침으로 풀어 설명한다. 이런 연기의 관계론에 따르면 독립적이고 고립적인 ‘나’는 존재할 수 없다. ‘나’라고 하는 것은 본디 비어 있고, 오직 ‘나 아닌 것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나’로 존재할 수 있다. 이런 나와 나 아닌 것의 불이(不二)에 대한 지혜는 고통받는 모든 존재에 대한 자비를 샘솟게 한다. 모든 존재가 연결되어 있으니 남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이다. 그래서 비말라키르티(維摩詰)는 “중생이 아프므로 나도 아프다”고 말한다. 불교의 이런 연기적 관계론은 불자들이 아니어도 동의할 수 있다. 마틴 루터 킹도 그 진리를 선포했다. “모든 생명은 상호 연관되어 있다. 한 운명으로 묶여 있는 우리는 상호성의 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모든’ 존재가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의 지혜는 ‘고통을 받는 이들’과의 연관성만이 아니라 ‘고통을 주는 이들’과의 연관성도 인정하게 한다. 즉 나는 피해자만이 아니라 가해자와도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불교적 연기의 지혜에서 비롯하는 자비는 정치적으로 무차별적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참여불자들은 정치적 대립의 상황에서 어느 한 쪽을 편들지 않는다. 만약 편을 들어야만 한다면 ‘모두’를 편든다. 틱낫한의 〈나의 진정한 이름들로 나를 불러다오〉라는 시는 이런 무차별의 지혜와 자비를 아름답게, 그리고 아프게 표현한다.

나는 작은 난민선에서

해적에게 강간당한 후 바다에 몸을 던져 죽은

열두 살 소녀

나는 아직 볼 줄도 사랑할 줄도 모르는 가슴의

그 해적.

1980년대, 폴 니터는 암살부대의 폭력을 막기 위해 엘살바도르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출국을 앞두고 한 불교 명상수련회에 참석한 그는 버니 글래스먼 선사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하고 지혜를 구한다. 그 때 선사가 말한다. “당신이 그 암살부대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만 그들을 막을 수 있습니다.”

정의를 위해 싸우다가 그만 자기의(自己義, self-righteousness)에 빠지기도 한다. 또한 ‘악’에 분노하다 ‘악인’을 증오하기도 한다. 그들은 마음 안팎에서 타오르는 폭력의 불길 때문에 고통을 겪기도 한다. 그럴 때 불교의 불이적 지혜와 자비는 저항을 정화하고 사랑을 확장해 줄 수 있다. 악인과 내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악인에게 저항하면서도 악인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될 것이다(정경일 박사 위 논문).

상호의존성이라는 불교적 원리는 아마도 사회 행동주의자들이 자신의 관점을이해하고 표현하며 정당화사키는 데 이용하는 가장 강력한 이념 수단이라고 할수 있다 붓다다사와 틱낙한은 살아있는 존재는 세계를 공유하며 그런 이유로 각자의 행위는 다른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상호의존성의 원리를 적용한다(박경준 교수 위 논문).

이하는 조은수 교수의 이 시대 불교운동을 위한 창조적 상상력이라는 논문을 거의 원문 그대로 옮긴다. 연기법과 상호의존성을 이해시키고 불교적 인식과 실천론을 자연스럽게 도출하고 있다.

광명운대의 이미지는 법성계에서 나오는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 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 이라는 구절과도 상통한다. 개체와 전체 간의 상즉상입을 말한다. 봉건 시대에는 이것이 봉건적으로도 해석될 수도 있었겠지만 현대에 와서 이것만큼 현재 사회를 잘 설명해주는 것도 없다.

서로가 서로를 비추고 또 서로에게 비추면서 끝없이 이어져 나가는 네트워크, 이러한 네트워크는 세상의 서로 얽히고 얽힌 존재의 네트워크를 보여준다.

이러한 네트워크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중심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각각이 모두 각 각의 중심이다. 각각이 독특한 개체이며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한번 빛이 지나가서 투과하는 순간 서로는 서로 속에 투영된다

대중 또는 공중 속에서 우리는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하다. 따로 또 같이 살면서 다양한 삶의 방식을 취하고 각각은 각각의 중심이 된다. 이러한 대중들의 삶의 방식, 현대의 반중심주의적 사고방식을 이해하는데 불교는 뛰어난 모델을 제공한다

공공의 담론의 정치학은 협상과 조정의 과정을 통해 성립하기 보다는 개개인의 사적인 공간 속에서 은밀하게 이루어 진 개인의 의견의 형태로 집합적 공공의 의지로 표출되어 대중적 의견으로서 수렴된다

실리콘 밸리의 그 사람들은 사무실에서 같이 책상 놓고 머리를 맞대고 일하기보다는 자신이 스스로 짠 일정에 따라 자신만의 공간 속에서 자신이 스스로 설정해 놓은 과제와 목표를 놓고 씨름을 한다. 그러나 그들의 작업과 아이디어는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고 각자의 작업은 헤쳐 모여의 과정을 통해 결국 전체에 유용하게 쓰인다. 이것을 어떤 이들은 collective intelligence라는 개념을 써서 표현하기도 한다. 이러한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집단적인 삶의 방식은 불교의 승가공동체에서도 이미 발견되는 바이다.

중생이 아프기 때문에 나도 아프다는 유마거사의 동체대비는 잘 아는 이야기이다. 문수 사리가 유마힐에게 문병 와서 "이 병은 어떤 원인 때문에 생겼습니까. 얼마나 오래 되었고 언제 낫겠습니까" 라고 했을 때, 유마힐이 "저의 병의 원인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면 보살의 병은 대비에서 생긴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라고 한 바로 그 대비이다. 중생 모두에 대한 사랑이다. 불교의 윤리학은 이러한 관계의 존재양식을 이해함으로써 가능하다. 연기(緣起)가 우리의 존재론이라면 동체대비(同體大悲)가 우리의 윤리이다. 동체대비는 나와 남이 한 몸임을 말한다. 연기를 깨달은 자 만이 동체대비를 느낄 수 있다. 네트워크 속에서 많은 정보를 얻은 자라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수 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알아야 남의 아픔을 공유하고 그와 한 몸으로 느낄 수 있다. "광명운대"를 안다면 "공양시방무량불법승"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연기를 통해 한 몸이기 때문에 남의 아픔을 느낄 수 있다. 참여와 운동의 상상력도 여기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다른 존재, 다른 생명을 가진 존재들과 자신을 동일시 할 수 있는 능력, 다

른 존재의 처지가 되어 그들의 느낌을 공유할 수 있는 정서적인 능력을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동체대비는 공과 가상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철저한 자각에서 온다. 유마거사는 자신의 병이 어리석음과 애착으로부터 생겼다고 했다. 자신의 어리석음과 애착이 또한 모든 중생의 어리석음이요 애착이다. 중생의 어리석음이 유마의 어리석음의 원인이고 유마의 어리석음은 중생의 어리석음의 원인이다. 떼어낼 수 없음을 자각했기 때문에 한 몸이다. 그런데 중생의 어리석음과 유마의 어리석음, 그리고 이 애착은 하나의 환화 조작이다. 현실은 조작된 환상의 세계이다. 나의 몸과 마음이 환화 조작임을 깨닫고 중생의 몸과 마음이 또한 환화 조작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럼 그 환화와 같은 세계에 사는 중생은 어떤 세계관과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 삶과 죽음에 대한 불교적 시각과 해법을 유마힐과 문수사리간의 다음 대화에서 엿볼 수 있다. 유마힐은 환상과 조작의 세계 안에서 삶과 죽음, 그리고 이 세계에 대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할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문수사리: 보살은 병이 난 보살을 어떻게 위문해야 합니까.

유마힐: 몸은 항상 변하는 것 무상(無常)이라고 말하지만 몸을 싫어하고 버려야 한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몸에 고통이 있다고는 말하지만 열반을 좋아한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몸에 자성이 없다고 [무아(無我)]는 말하지만 중생을 가르쳐서 이끌어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몸이 공적하다고는 말하지만 마침내 허무하게 사라진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옛날에 지은 죄를 참회해야 한다고는 하지만, 과거에 집착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병을 통해 남의 병을 가엾게 여깁니다. 오랜 세월 동안 겪은 고통을 비추어, 모든 중생의 행복을 생각합니다. 복을 닦던 것을 기억해서 깨끗한 삶을 생각합니다. 걱정과 근심을 하지 않고 항상 정진하며, 좋은 의사가 되어 중생의 병을 치료해야 합니다. 보살은 마땅히 이렇게 보살의 병을 위문하여 보살을 즐겁게 해 줍니다."(유마경 오윤희 번역)

즉 환화로서의 세계, 공으로서의 세계를 말하지만 이 세계를 버리지는 않는다. 몸의 병 아픈 것을 위로하지만 몸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삶을 개발하고 다른 사람의 인생을 돌보고 배려하지만 그렇다고 삶이 무상함을 망각하고 삶에 연연하거나 끄달리지는 않는다. 현재와 미래의 삶이 보다 낫기를 추구하지만 그렇다고 미래를 소유하려 하거나 결과를 정복하려 않는다. 자신의 명예를 존중하지만 일단 지나간 자신의 과거에 대해 연연하지 않는다.

6. 수행-내적 성찰과 사회적 실천의 일치

영적 수행을 통해 내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먼저인가, 아니면 사회적 실천을 통해 사회구조를 변화시키기는 것이 먼저인가라는 질문에 불교에서는 “걷고 머무르고 앉고 눕고 말하고 침묵하고 가만히 있는 모든 것이 선”이라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수행법을 가르친다. 여기서는 명상이 세상 밖으로 도피하는 게 아니라 ‘이 세계가 곧 수행의 장소’가 된다.

불교의 수행법은 다양하지만 근원에서는 하나로 통한다. ‘마음챙김’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마음챙김은 몸, 생각, 느낌,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챙겨 알아차리며 하는 모든 것이 명상이요 수행이다. 선가에서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을 모두 선(禪)이라고 하는 것도 그런 뜻이다. 이런 불교적 마음챙김의 영성으로 보면 관상과 활동, 명상과 행동은 둘이 아니다. 또한 마음챙김 수행은 세계긍정적, 세계변혁적 영성을 가능하게 한다. 마음챙겨 하는 모든 것이 수행이기에 수행을 위해 세계를 떠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수행을 위해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마하 고사난다는 말한다. “불자들은 사원을 떠나 인간 경험의 사원, 고통 가득한 세계의 사원으로 들어갈 용기를 가져야만 한다.” 세계가 곧 수행과 구원의 장소이다.

이와 같은 불교의 마음챙김 수행법을 불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도 배우고 실천할 수 있을까? 휴고 에노미야-라쌀 신부가 처음 선을 배우게 되었을 때 야마다 코운(山田耕雲) 선사에게 물었다. “저는 그리스도인인데 선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선사가 별 이상한 질문을 다 듣는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신부님은 몸을 가지고 있지 않나요?” 불자든 그리스도인이든 상관없이, 몸만 있으면 선 수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불

나가르주나의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다”는 말처럼, 상호연기(相互緣起) 이론에서 나온 “나와 무관한 존재는 없다”는 관계론적 세계관도 불교에서 배울 점이다. “중생이 아프므로 나도 아프다”는 생각을 실천에 적용하면 이 세상 누구의 고통도 나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자비롭게 참여하지 않는다면 내 존재를 거부하는 셈이 된다.

사회적 고통에 대한 ‘연대’는 그리스도교 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불교의 ‘무조건적이고 무차별적인 자비’의 가르침은 다른 종교에서 찾아볼 수 없다.

베르니에 그라스만이 “네가 억압자와 하나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억압자에게 맞설 수 있다”고 한 말처럼, 불교는 어느 한 쪽의 편을 일방적으로 들지 않는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자신과 일치시키는 데서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는다. 이는 정의를 위해 악과 맞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당장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도전이다(이상 정경일 박사 위 논문).

7. 참여불교운동의 방향

실천하는 목표가 분명한 운동을 해야 한다. 그간의 교단 자정운동의 과정에 대한 반성은 교단 지도자들을 욕하기 앞서 변화를 이루지 못한 근본 원인에 대한 반성을 해야 한다.

앞서 수행과 운동은 따로 이뤄질수 없는 것이라 했다.

수행에서 사회변화에 이르기까지 운동의 의미가 자연스럽게 개인의 변화와 사회의 변화로 이끌어져 가야 한다.

올바른 불교를 종교로 갖고자 하는 사람들이 소외되는 현상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은 실체를 고정시켜 바꿀 수 없다는 유아(有我)적 사고이다. 무아사상의 핵심은 인연법에 의해 형성된 것은 인연법에 의해 소멸시키면 사라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현재의 한계는 좌절이 아니라 부처님이 살아가신 모습대로 살아왔나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어떤 운동을 하든지 우리가 물러서지 않아야 할 원칙이 있다.

불교는 철저한 비폭력 평화주의이다. 정의를 위한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다 가난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등의 어떤 형태와 목적의 폭력도 정당화하지 않는다. 그래서 틱낫한은 “모든 폭력은 불의”라고 말한다. 불교적 평화주의의 철저성은 외적 폭력만이 아니라 내적 폭력을 거부하는 데서 나타난다. 1990년대 후반,〈국제평화회의〉 종교지도자들이 멕시코 치아파스 지역을 방문했다. 거기서 멕시코 정부의 억압과 폭력을 목격하고 분노한 종교지도자들은 정부를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자 했다. 이때 불교 측 참가자 하나가 조용히 손을 들고 말했다. “우리 불자들은 아무도 비난하지 않습니다.” 니터는 불교의 그런 비폭력 정신과 태도가 가장 진지하고 영감 넘치는 종교간 대화를 갖게 했다고 회고한다. 불자들은 평정 속에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로워져라!”를 실천하여야 한다.

이러한 비폭력의 목적은 자신만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폭력을 멈추는 것이다.《법구경》은 가르친다.

모든 존재가 폭력에 떤다.

모든 존재가 죽음을 두려워한다.

남을 네 자신처럼 여기면서,

남을 죽이지도 남이 죽이게 하지도 말라.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남을 죽이지 말라”는 개인윤리적 행동과 “남이 죽이게 하지 말라”는 사회윤리적 행동이 함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가 얘기하는 지계의 정신이다

로카미트라 법사는 “근본불교 수행에서는 계정혜 삼학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계율은 일반적으로 무엇을 하지말라는 부정적의미로 파악한다”며 “하지만 이는 무엇을 하지말라가 아니라 무엇을 하라는 적극적이고 긍적적인 의미로 파악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로카미트라 법사는 “불살생을 예로들면 살생을 하지 말라는 의미라기 보다는 모든 중생에게 자비심을 베풀어라는 의미로 파악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로카미트라 법사는 “참여불교의 기본정신이 바로 이러한 원리에 있다”고 말했다.

로카미트라 법사는 “불법(佛法)은 어떠한 이유에서도 폭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사용할 순 없다”고 말했다.

재가불교운동은 스스로 종교적 권위를 확립해야 한다. 《법화경》에 보면 선남자 선여인을 향해 “여래의 방에 들어가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 법을 설하라.”고 한다. 여래의 방, 여래의 옷, 여래의 자리는 종교적 권위를 상징한다. 그러나 이는 교단적 권위, 전통적 권위를 쟁취하여 기득권을 누리라는 가르침이 아니다. “여래의 방이란 모든 중생에게 대한 자비스러운 마음이요, 여래의 옷이란 부드럽고 화평하고 욕됨을 참는 마음이며, 여래의 자리란 모든 존재의 공(空)함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생에 대한 자비심에서 종교적 권위가 나온다. 욕됨을 참는 것에서 여래의 기품이 나오며, 존재의 공성을 보는 안목과 실천에서 여래의 덕성이 확립된다. 재가불교가 성공하려면 이와 같은 자세와 태도가 필요하다. 종교적 내용과 권위를 확보하지 못한 종교운동은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실천적 모범을 보여야 한다. 부처님은 전도선언에서 “처음도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법, 조리와 표현이 잘 갖추어진 법을 설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말에 조리가 있고 논리정연한 웅변만으로 종교운동이 성공할 수 없다. 이성과 논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스스로 종교적 실천성을 담보하는 것이다. 재가불교가 대안이 되려면 승가에 대한 비난자가 아니라, 삶과 종교적 실천에서 모범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부처님께서 전법을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원만하고 완전하며 청정한 행동을 보이라.”고 당부한 것도 이 때문이다(이상 불교평론 서재영 박사).

8. 참여불교운동의 조직

불교의 근본 교단의 모습은 무아와 무소유 등에 핵심이 있었고, ‘상가’는 대중의 귀의처이기 때문에 출가정신에 부합한 사람만이 구성원이 될 수 있다. 재가자가 중심에 되어 과연 ‘상가’를 만들 수 있을 까?

우리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을 한다. 붙들어 줄 출가자도 없고 소속감있는 교단도 없는 상황에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간다는 것은 함께 하기 힘드니까 모두를 외면하고 혼자 가라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과 불교의 주체임을 인지하고 당당하게 불교를 만들어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다른 이들에 대한 외면은 또 하나의 집착일 뿐이다.

“종교와 종교제도(교회와 사찰)도 일종의 지배구조이다. 종교의 테두리에서 구성원들을 지배하며 동시에 사회의 지배세력과 연대하여 지배질서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제도종교는 역사적으로 국가권력의 파트너 역할을 수행해 왔으며, 지금도 그런 관계 속에서 국가권력으로부터 ‘종교적(영적) 영역의 제도적 지배권’을 할당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참여불교는 심신의 수행, 전법 그리고 환경이나 평화·인권·여성과 같은 사회적 문제의 해결을 과제로 부여받고 있고, 이와 더불어 교단단개혁을 중대한 자기과제로 설정하지 않을 수 없다. 즉 “ 교단이 건강하지 않은 상태에서 거창한 사회정의와 사회개혁을 외치는 것은 일종의 넌센스”라고 보는 것이다.

'참여불교'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를 혁신시키는 데 관심이 있었다. 그중에는 자신들의 존재 이유와 스스로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임무를 사회변혁에 도움이 되는 새로운 불교를 만드는데 두었다. 그 한 예로 붓다다사를 들 수 있다. 그는 철학적으로는 사회와 불교를 분리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우선적으로 불교를 혁신시킨 다음에 그 불교를 바탕으로 사회혁신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한국의 참여불교운동 역사와 고민에서도 그대로 배어 있다.

달라이 라마는 각각의 종교와 비종교를 떠나 기본적으로 존재하는 심성(을 ‘모든 인간의 기본적인 심성(영성)’이라고 하고, 이를 ‘사랑과 연민, 용서, 이해, 친절’ 같은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만일 교단이 이러한 심정을 가르티고 확산시미는 것을 방기하고 있을 때 어떻게 해야할까?

이영철 소장의 과거 종교 NGO의 역할에 관하여“① 종교적 심성(영성의 계발)에서 출발하여(개인), ② 자신이 속한 종교공동체가 본래의 건강한 모습을 회복하도록 노력하는 것을 토대로(교단), ③ 사회적 공동선을 실현하는 일에 동참하는 가운데(사회), ④ ‘사회적 공동선의 실현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역할이고, 불교 NGO는 위와 같은 역할을 ‘불교적’으로 실천하는 조직체라고 정의내린 바 있다.

참여불교운동’의 차원에서 이와 같은 일상 생활세계의 변화를 위한 목적의식적인 노력과 구체적인 프로그램에 관하여 ‘참여불교’의 제창자이기도 한 틱낫한 스님이 제시한 ‘참여불교 생활수행 12개 지침’을 보급하는 캠페인이 있다.

이 지침의 주요 내용은 ① 불교사상을 포함하여 어떠한 교리·이론·사상을 숭배하거나 집착하지 말며,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 말 것, ② 현재의 지식이 변치 않을 절대적 진리라고 생각하지 말며, 다른 사람의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관점에 집착하지 않는 방법을 배우고 수행할 것, ③ 고통에 눈감지 말고 자신과 다른 이들이 공통의 현실을 자각하게 할 것, ④ 간소하게 살며 시간과 에너지, 물질을 필요한 사람과 나눌 것, ⑤ 분노와 증오를 갖지 말며, 분노와 증오의 본성을 보고 이해하기 위해 호흡에 집중할 것, ⑥ 산란함이나 주변 환경에 정신을 뺏기지 말며, 당신 안에 기쁨과 평화, 이해의 씨앗을 뿌릴 것, ⑦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표현을 하지 말며, 갈등을 완전히 해소하여 화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개인의 이익을 위해 진실하지 않은 말을 하지 말 것, ⑧ 정확하지 않은 소식을 퍼뜨리거나 확신이 서지 않은 것을 비판하거나 비난하지 말 것, ⑨ 불교단체를 정당으로 변화시키지 말며, 억압과 불의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취해야 하며, 파벌적 갈등에 끼어들지 말고, 상황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할 것, ⑩ 인간과 자연에 해로움을 주는 직업을 갖지 말며, 다른 사람들이 살아갈 여건을 빼앗는 회사에 투자하지 말 것, ⑪ 다른 이의 재산을 존중하지만, 그들이 이간과 다른 종류의 고통을 통해 이익을 얻게 하지 말 것, ⑫ 몸을 도구로 보지 말고, 진리를 깨닫기 위해 생명유지에 필요한 에너지를 유지하며,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에 대한 책임감을 가질 것 등이다.

틱낙한은 종교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항상 잊지 아니하고 있다.

서재영박사는 조직적 기반을 확립해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있고, 여기서의 조직적 기반이 새로운 교단을 뜻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승가는 조직체로 작동하므로 때에 따라 고승이 부재해도 공동체와 대중의 힘으로 유지 전승된다. 하지만 재가는 개인의 원력과 리더십에 토대를 두고 있다. 따라서 선지식이 활동할 때는 큰 성과를 내기도 하지만 당사자가 작고하면 급격히 쇠락하거나 단절되는 양상을 되풀이해왔다. 틱낫한 스님은 “미래의 부처님은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모습으로 오신다.”고 했다. 개인을 통해 붓다와 같은 리더십을 기대하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특정 지도자의 리더십과 역량에 기댈 것이 아니라 공동체와 대중의 힘을 결집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청년조직을 기반으로 하는 정토회나 일본의 SGI가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 특히 재가자 이케다 다이사쿠가 이끄는 SGI의 성장과 활동의 근저에는 조직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9. 파격과 연대

정토회에 대하여 우리는 호감을 갖고 있으면서도 정토회는 마치 정해진 일에 골몰하고 있기 때문에 접근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다.

불교활동가인 노귀남씨는 "정토회는 일과 수행에 몰두하므로 세속적인 ‘친목’이 있기 어렵고, 또 일을 연대할 때는 실용주의로 하니까, 인사치레로 가지 않는다"는 분위기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정토회 활동의 연대는 일과의 관계에서 종교나 정파를 떠나서 매우 유연한 것이 현실이다. 같은 곳을 목표로 두고 있다면 정토회와의 연대에 대해 고민해볼 일이다.

10. 한국의 침여불교운동

한국의 참여불교 운동은 정치적 정의 실현에 적극적이다. 그것은 한국 사회가 경험해 온 일제강점, 분단, 독재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한용운, 백용성이 참여한 1919년 3·1 운동, 1970년대, 80년대의 ‘민중불교’ 운동, 그리고 90년대 이후 지금까지의 다양한 참여불교 운동은 민주주의와 통일이라는 정치적 정의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

20세기 초반, 이능화가 비불교권 종교들에 대한 이론 연구에 매진할 때 만해와 용성, 권상로, 박한영 등은 포교와 교육, 제도개혁과 사원유지 등을 골자로 하는 “조선불교유신론”을 펼친 바 있다. 원불교의 개조인 박중빈의 “조선불교혁신론” 역시 못지 않게 눈여겨 보아야 한다. 이러한 개혁은 여전히 긴요하기 때문이다.

이후 참여불교의 맥이 끊어지다가, 대불련 회장이었던 최연 회장이 주도한 1976년 송광사에서 개최된 여름 수련회인 ‘화랑대회’에서는 ‘민중불교 실천을 위한 전진대회’라는 슬로건으로 그때까지 꾸준히 언급되었던 민중불교를 공식적인 논제로 삼았다. 그때 발표된 여러 논문 중 전재성의 〈민중불교론〉은 이후 좀 더 가다듬어져 1977년 10월 《월간 대화》에 실렸고 현대적 참여불교의 최초의 이론서가 되었다.

문화총림 여래사는 1981년 초 최연과 황희을, 송미기, 장범중 등 대불련 출신 졸업생들이 모여 불교문화사업을 하며 수익도 도모하고자 모인 단체로, 민중불교를 표방하는 기관지 《청년 여래》를 발간하면서 민중불교 이론을 정립하는 과정을 거쳤다.

고 여익구씨등이 조직에 참여한 대불련 지도법사단은 잘 알려진 것처럼 곧바로 1981년 7월 11일~16일 중앙승가대에서 승가 사상 최초로 경제나 사회사상 등 사회과학 분야도 함께 토론한 ‘전국청년승가육화대회’를 개최하도록 이끌었다.

그리고 1982년 6월에는 동국대, 중앙승가대, 해인사, 통도사, 범어사, 운문사, 봉녕사 등 전국 강원에서 500명이 참여한 ‘전국학인승가연맹’을 발족하는 등 청년 승가조직을 활성화시키는 동력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 12월 ‘사원화 사건’이 벌어졌다. 법우 스님은 문화총림 여래사 팀의 조력을 받으며 묘각사에서 청계천과 동대문 일대 봉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여래사 야학을 운영했다. 그리고 대불련 지부나 지회들이 서울, 전주, 부산, 인천, 청주 등지에서 운영하고 있거나 준비하고 있는 야학들을 연합해 ‘불교야학연합회’를 결성하려다가 벌어진 사건이 ‘사원화 사건’이다. 이후 전국적인 검거 선풍이 야학들은 물론 문화총림 여래사와 법련사에서 이전한 칠보사 사원화팀 그리고 관련된 대불련 지회 등으로 번져나갔다. 결국 150여 명이 검거돼 조사받은 끝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법우 스님 3년, 최연 2년, 서울대생 신상진은 1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1983년 7월 17일 범어사에서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나라’는 주제로 중앙승가대와 동국대 석림회, 전국 강원과 선방 스님들, 대불련, 대한불교청년회 1,700여 명이 모여 출 · 재가 연합조직인 ‘청년불교도연합회(청불련)’를 출범시켰다. 그날 배포된 《청년불교도백서》는 그때까지 불교계 분규의 실상을 다루고 그에 관한 개선방안을 엮은 것으로 불교사회연구소에서 수개월의 작업을 거쳐 발간한 것이었다. 따라서 출 · 재가의 결속, 불교혁신, 민족불교 구현, 불국정토 건설을 표방하며 교단개혁을 외쳤지만, 대회의 어떤 자료에도 민중불교라는 단어는 넣지 않았다. 불교의 자주화를 우선 과제로 생각한 출 · 재가 연합조직이라는 점을 배려한 것이었다.

신흥사 살인사건 이후 9월 5일 조계사에서 열린 전국승려대회를 통해 비상종단을 출범시켰다. 기획위원장으로 여익구가 참여한 비상종단은 1984년 7월, 당시로는 파격적일 만큼 혁신적인 제도개혁안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것이 참여불교운동의 역사로 이어지지는 아니하였다.

1985년 5월 4일 ‘민중불교운동연합(민불련)’도 반독재 민주화를 기치로 창립되었다. 창립대회에서 경찰의 방해로 작지 않은 피해도 있었지만, 고문으로 경우 · 월운 스님과 용태영, 지도위원에 고은, 김지하, 황석영, 장기표와 성열 · 지선 스님 등을 모시고 의장에 여익구, 부의장에 진관 스님과 김래동, 집행위원장에 서동석, 기획위원장에 현기 스님 등으로 초대 임원진을 구성했다. 마침내 불교계 최초의 재야 대중운동단체이자 청불련의 뒤를 잇는 출 · 재가 연합조직이 탄생한 것이다. 말하자면 그때까지의 대불련 인맥을 비롯한 출가와 재가의 방계조직과 재야운동권의 불교 신자들까지 총망라한 본격적인 민중불교 실현을 위한 조직체였다.

민불련은 창립하자마자 재야민주세력의 결집체인 민통련에 가입해 사회민주화운동에 적극 나섰고, 기관지 《민중법당》을 발행해 광주학살의 진상, 10 · 27법난의 실상, 안기부의 고문 실태 등을 알렸다. 그리고 불교전통의 현대적 재해석도 시도했다. 일례로 1985년 8월 31일 화계사에서 선망부모를 천도하는 불교의 우란분절이자 민중들이 농사일을 하루 쉬던 전통명절인 백중을 ‘생명해방 대축제’로 개최하려다가 공안당국의 제지로 불발되기도 했다. 그밖에도 1985년 구로공단의 대우어패럴 파업을 계기로 촉발된 ‘구로동맹파업’에 대한 지원 활동과 농성, 1986년 초 민통련을 중심으로 전개된 개헌투쟁에 이르기까지 각종 집회 · 시위 · 농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1986년 5월 9일에는 민불련뿐만 아니라 지선, 청화, 진관, 명진, 성문 등 152명의 스님이 조계사에서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여 민주적 개헌을 주장했다. 그리고 6월 5일에는 218명의 스님이 ‘불교정토구현전국승가회(정토승가회)’를 창립했다.

이와 같은 운동을 주도하였던 여익구 불교의 사회사상은,

‘삶’의 현장에서 역사나 사회의 구조를 도외시하고 인간이나 사회를 말한다면 그것은 추상과 관념이 되어 구체적인 현실을 도피하게 된다. 그런 ‘종교’는 생동하는 종교가 아니라 이미 죽은 종교다. 존재의 본질을 정견(正見)한 데서 출발한 불타의 가르침은 오늘날 이데올로기화된 모든 개념, 이상, 주의들을 좀 더 근원적인 입장에서 비판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따라서 불교는 ‘근본주의(Radicalism)’이다. 아니 주의(主義)라는 말 자체까지도 하나의 절대개념으로 보아 그것을 초월한다.

이것은 일찍이 만해가 ‘마르크스주의가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한다면 마르크스주의도 종교’라고 설파한 것만큼이나 깊은 종교적 통찰력을 내비친 것으로, 불교의 반야공관을 사회운동의 논리로 풀이한 것이라 하겠다(이상 이영근, 여익구, 정토사회를 꿈꾼 민중불교운동의 대부).

그리고 1980년 중반 이후 민중불교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해인사 승려대회’라고 할 수 있는데, 1986년 9월 7일에 해인사에서 2천여 명의 승려가 모여서 ‘불교의 자주화’와 ‘사회의 민주화’를 주장한 대회였다.

1987년의 대통령 선거 후에는 민중불교를 추진하는 단체에도 변화가 생겼다. 대승불교승가회, 불교사회교육원, 불교사회연구소가 새롭게 등장한 것이다. ‘대승불교승가회’에서는 ‘민족불교’를 주장하였는데, 이는 산중불교와 민중불교를 통합하는 것이다. ‘불교사회교육원’에서는 불교를 사회과학적인 안목으로 해석하고 불교운동가를 양성할 것을 목표로 하였다. ‘불교사회연구소’는 불교사회교육원의 자매단체로서 노동, 인권, 통일 등의 문제를 불교의 관점에서 연구하는 단체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 더욱 진전된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도법(道法)의 선우도량 등과 법륜(法輪)의 정토회라고 할 수 있다.

우선 도법은 승가개혁운동 결사체인 선우도량을 결성하고 이 단체를 통해서 조계종의 분위기를 바꾸려고 노력하였다. 도법은 1998년 이후 실상사를 중심으로 해서 여러 대안운동을 일으켰다. 여기에는 귀농전문학교, 작은학교, 인드라망생명공동체 등이 포함된다. ‘귀농전문학교’는 1999년 3월 실상사가 소유한 농지 3만 평을 공동체의 토지로 기증해서 세워진 것이다. ‘작은학교’는 다양한 체험과 살아 있는 교육을 추구하는 대안학교이다. 그리고 ‘인드라망생명공동체’는 1999년 9월에 설립된 불교 대안운동 단체이다.

법륜의 정토회는 불교환경교육원, 제이티에스(JTS), ‘좋은벗들’과 같은 사회참여기구를 움직이는 모집단이면서 공동체이다. 정토회에서는 일과 수행의 통일, 대중 주체의 공동체 실현, 무보수 자원활동 등을 추구하고 있다. 정토회는 순수 종교 공동체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불교환경교육원’은 국내 최고의 환경 전문교육기관으로 인정받고 있고, ‘제이티에스’는 1991년에 설립된 국제 민간구호단체인데, 북한 구호활동도 하고 있다. 그리고 ‘좋은벗들’은 평화운동을 하기 위해 설립된 단체이다(이상 이병욱 위 논문).

1999년 현재 참여불교재가연대의 전신인 불교바로세우기 재가연대가 설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재가연대의 설립목적은 정관 제2조가 규정하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수행과 회향의 삶을 지향하는 참사람 공동체'로서 청정교단의 성취와 민족통일, 인권, 정의, 복지가 실현된는 정토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규정하여, 수행과 회향의 삶이 실천화된 공동체를 수립하여 청정교단과 정토사회를 건설하고자한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는 불자인 내가 변해, 너를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키겠다는 것으로 참여불교의 정신이 녹아 있다..

청정승가를 위한 대중결사가 2009년부터 2014년까지 존재하였다가 사라졌으나, 종단적으로 큰 파급력을 갖지 못하였다.

승가단체로써 제도개선과 승풍진작을 위한 대안제시를 위한 활동을 중심에 놓고 활동하였으나, 종단내에 그 활동의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는 못하였다.

비젼의 공유가 철저하지 못하였고, 구성원들 사이의 밀집도가 1990년대에 탄생하였던 개혁운동 단체들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떨어졌고, 그러한 정도의 활동이 영향을 미칠 수 없을 정도로 종단의 상황은 점차 악화되었던 것이다.

열악한 수좌들의 승려복지문제로 결합하기 시작하였던 선원수좌회 소속 스님들은 2013. 현 총무원장의 재선문제로 결합하여 일부 스님들이 조계사 농성을 이끌어내었으나, 주지의 영향력과 재정적 기반의 문제 등으로 현재는 적극적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강원의 스님들을 중심으로 한 푸른 승가회는 몇 번의 산고를 거치면서 현재 20여명의 스님들이 소속되어 있으나,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지는 못하다.

2000년 경부터 재가운동단체로서의 기능을 거의 참여불교재가연대가 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유야 어떻든 참여불교재가연대는 사부대중공동체 실현을 위한 연대체의 기능을 수행하는데 실패하면서, 그 기능의 약화와 재가운동 전반의 지형을 약화시켰다.

이후 불교시민사회네트워크가 탄생하였으나, 제도권에 편입된 활동에 치중하면서 그 불교시민사회운동으로서의 중립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고, 그 영향력도 약화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후 개혁운동을 지향하는 단체로써 전문가 그룹을 중심으로 한 정의평화불교연대가 탄생하였고 현재의 강의에 이르고 있다.

2015년 송담스님의 탈종을 계기로 바른불교재가모임이 바른불교를 지향하는 수행결사체로써 활동을 개시하였고, 그 조직을 정비하고 있다.

11. 결론

조은수 교수님의 논문으로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현대 사회의 네트워크 적 속성에 비추어 연기를 재조명해 보아야 한다. 연기와 네트워크의 입장에서 동체대비의 자비 정신은 그 윤리적 당위가 된다. 연기는 현대의 문화 현상을 설명해 낼 수 있는 좋은 툴이 될 뿐 아니라 미래의 실천적 모델을 추출해 낼 수 있는 유용한 세계관도 제공한다. 불교의 연기적 사고방식은 세계와 타자를 대상으로서 이해하고 지배하려던 서구의 이원론적 사고방식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연기의 세계관에서 평화와 공생의 윤리가 나올 수 있다. 그런데 나를 둘러싼 다른 생명 개체들과 환경에 대해 자비를 실천하는 동체대비의 세계관은 평화롭고 행복한 마음, 즉 안심(安心)을 실천하는 자들에게서만 나올 수 있다.

이 점에서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평화가 유기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이념을 불교가 제공할 수 있다.

어찌 보면 한국 불교는 1,600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불교적 상상력을 잘 구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한국의 불교는 선, 화엄, 정토를 다가지고 있으므로 풍부한 정신적 자원과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불교 연구는 내부의 언어를 사용하고 그 생각의 틀로써 불교를 해석하는, 즉 불교로써 불교를 이해하는 하나의 순환적체계 속에 갇혀있다. 하지만 자기 순환적인 해석에만 머물러 있기에는 불교의 보편적 이념의 가치가 이 현대 사회에 지니는 포텐셜이 너무 크다. 불교의 오래된 지혜를 다시 살리는 상상의 나래가 더욱 더 펼쳐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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