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을 쌓고 지킨 승군의 흔적을 더듬다
산성을 쌓고 지킨 승군의 흔적을 더듬다
  • 이창윤 기자
  • 승인 2019.08.09 11:4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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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따라 떠나는 사찰순례 4 - 북한산성계곡길
▲ 봉성암 전 성능 대사 부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8호.

북한산은 서울의 진산입니다. 최고봉인 백운대의 높이가 836m 남짓한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바위로 이루어져 산세가 웅장하고 계곡 또한 깊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북한산은 예로부터 백두산, 지리산, 금강산, 묘향산과 함께 우리나라 오악(五嶽) 중 한 곳으로 꼽혔습니다.

북한산은 봉우리가 험준하고 가파른 탓에 삼국시대 이래 천혜의 요새로 주목받았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번갈아가며 이곳을 점령했고, 고려는 거란이 침입하자 태조의 유해를 모신 재궁(梓宮)을 이곳으로 옮기고 산성을 축조했습니다. 조선 또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 번의 큰 전란을 겪은 뒤 도성을 지키고 임금이 피난할 곳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에 북한산성을 쌓았습니다. 북한산성을 쌓는 일에는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등 삼군문의 군사와 한양 주민이 동원되었지만, 전국에서 뽑혀 올라온 승군의 역할이 컸습니다.

북한산성 입구에서 중흥사에 이르는 북한산성계곡길은 북한산성을 쌓고 지킨 승군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는 곳입니다.

북한산성계곡길은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에서 출발합니다. 순례를 시작하자마자 길은 두 갈래로 나뉩니다. 하나는 대서문을 거치는 포장도로이고, 다른 하나는 수문 터와 서암사 터를 거쳐 계곡을 따라 오르는 탐방로입니다.

태풍과 함께 장마가 물러간 뒤 찾아온 무더위로 절절 끓고 있는 도심과 달리 계곡물 흐르는 소리와 매미 울음이 가득한 북한산성계곡길은 초입부터 청량합니다.

▲ 북한산성 승영사찰 중 하나였던 서암사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폐사됐다. 복원 불사가 진행 중이다.

성안의 물을 흘려보내던 수문 터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제법 너른 터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북한산성을 쌓은 뒤 성을 지키던 승군이 머물던 승영(僧營) 사찰 중 한 곳이었던 서암사(西庵寺)의 옛 터입니다. 광헌(廣軒) 스님이 창건한 서암사는 한때 133칸이나 되는 큰 규모였지만,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매몰돼 폐사되었다 합니다. 서암사는 지금 복원을 위한 모연이 한창입니다. 축대 위에 허름한 가건물과 천막으로 지은 대웅전이 예스러운 단청을 두른 여법한 법당으로 바뀔 날이 곧 오겠지요?

바위를 휘감아 돌며 떨어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계곡을 오르다보면 이내 북한동역사관 앞에 다다릅니다. 이곳에서 대서문을 거친 길을 다시 만납니다.

북한산성 안에는 한때 태고사 아래까지 100여 가구 이상의 주민이 살았다 합니다. 광복 이후 마을 주민의 궁핍한 생활을 본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상가를 허가한 뒤 북한산성은 유원지로 바뀝니다. 이곳이 다시 옛 모습을 되찾은 것은 국립공원관리공단이 2001년 마을 주민 55가구와 상점을 산 아래로 옮기는 이주사업을 시행한 이후 입니다. 북한동역사관은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이었던 북한동 마을의 자취와 이주사업 과정을 희미하게나마 더듬어 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북한동역사관 앞을 지난 북한산계곡길은 중성문과 산영루 앞에서 잠시 가파른 기운을 내보일 뿐 내내 완만하게 이어집니다. 길이 완만한 것은 산성을 지키는 입장에서 보면 취약점입니다. 이것을 보완하기 위해 노적봉과 증취봉 사이 협곡에 중성을 쌓고 성문을 설치했는데, 그것이 중성문입니다. 중성문 옆에는 시신을 내보내던 작은 암문인 시구문(屍軀門)이 있습니다. 북한산성에 설치한 수문 2곳 중 한 곳도 중성문 옆에 있었지만 현재는 흔적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중성문을 지나 용학사 앞에 이르면 비석 수십 기와 누각이 오가는 이를 맞이합니다. ‘북한산성 선정비군’과 산영루입니다.

‘북한산성 선정비군’은 19세기 북한산성을 관리한 총윤청(摠戎廳)과 무위소(武衛所)의 제조(提調), 경리사(經理使)가 선정을 펼친 것을 기린 비석으로 30여 기가 남아있습니다.

▲ 승병 지휘자인 총섭(摠攝)을 임명할 때 지켜야 할 규칙 3가지를 새긴 ‘북한산승도절목(北漢山僧徒節目)’.

선정비군 사이 암벽에는 철종 6년(1855)에 새긴 ‘북한산승도절목(北漢山僧徒節目)’이라는 명문이 있습니다. 총 325자의 이 명문은 승병 지휘자인 총섭(摠攝)을 임명할 때 지켜야 할 규칙 3가지를 새긴 것입니다.

명문에 따르면 당시 북한산성 내 승영은 조직이 크게 무너진 듯합니다. 산성 밖 외부 승려를 총섭에 임명한 것이 원인인데, 이 때문에 승군은 흩어지고 각 승영사찰은 피폐해졌다고 합니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임금의 교지를 받아 정한 3개의 규칙, 즉 절목(節目, 법률이나 규정 등의 조나 항목)을 바위에 새겨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을 당부한 것이 ‘북한산승도절목’입니다. 첫 번째 절목은 다수결에 따라 선정된 이가 총섭에 임명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두 번째 절목은 성 밖 승려를 임명되도록 도모하는 자는 영문(營門)에 소송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절목은 총섭이 사찰의 폐단을 바로잡고 국가에 극진히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북한산승도절목’은 조선 후기 승군의 운영 상황을 엿볼 수 있는 명문입니다.

‘북한산승도절목’ 앞에는 산영루(山映樓)라는 누각이 서 있습니다. ‘아름다운 북한산의 모습이 물가에 비친다’는 뜻의 이름처럼 산영루와 주변 풍경은 북한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 한 곳으로 꼽힙니다. 《성호사설》을 지은 조선의 실학자 성호 이익은 삼각산 8경 중 하나로 ‘산영루에 뜬 달’을 꼽았습니다. 산영루는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 수많은 시인묵객이 찾는 명소였습니다. 현재 산영루는 을축년 대홍수 때 유실된 것을 2014년 복원한 것입니다.

산영루를 지나면 바로 중흥사가 순례객을 맞습니다. 중흥사는 승군 총지휘자인 도총섭(都摠攝)이 머물던 북한산성 승영의 수사찰(首寺刹)이었습니다.

▲ 중흥사. 북한산성을 수비하던 승군의 총지휘자인 도총섭이 주석하던 사찰이다. 1915년 홍수로 폐사됐다가 2012년부터 복원불사가 진행 중이다.

북한산성 내 대부분의 승영사찰과는 달리 중흥사는 북한산성을 쌓기 전부터 있던 사찰입니다. 언제 창건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려 숙종 9년(1103)에 조성된 ‘건통 3년 증흥사명 금고’와 충혜왕 5년(1344) 조성된 ‘봉은사 청동 은입사 향완’에 ‘삼각산 중흥사’란 명문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늦어도 12세기 초에는 절이 경영되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중흥사가 역사의 전면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중국 임제종의 적손 석옥 청공(石屋 淸珙) 스님의 법을 이은 태고 보우(太古 普愚, 1301~1382) 스님이 이곳에 주석하며 절을 중창한 뒤입니다.

보우 스님은 중흥사 동남쪽 기슭에 직접 지은 산내 암자 태고암(태고사)에 머물며 선풍을 진작했습니다. 보우 스님이 태고암에서 지은 <태고암가>는 스님의 깨달은 경지를 엿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충목왕 2년(1346) 원나라에 건너간 보우 스님은 호주 천호암에서 청공 스님에게 <태고암가>를 내보이고 발문과 함께 가사를 받습니다. 임제종의 법맥을 이은 것이지요. 당시 청공 스님은 “그가 공부를 하여 본 곳이 투탈(透脫)하고 사유(思惟)에 벗어나서, 그 글이 공겁(空劫) 이전의 소식을 얻었다. 이 암자가 있고 세계가 있었으며, 세계가 무너지더라도 이 암자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암자 가운데 주인은 있지 않은 곳이 없도다.”라고 감탄했다 합니다.

공민왕과 우왕 두 임금이 국사로 극진히 모셨던 스님은 정치와 불교 혁신을 주장했습니다. 도읍을 한양으로 옮겨 민심을 다스릴 것을 주청했고, 5교9산을 통합해 불교를 개혁하고자 했지만 권력의 실세였던 신돈과의 갈등으로 속리산에 금고되기도 했습니다.

스님이 우왕 8년(1382) 입적하자 임금이 원증(圓證)이라는 시호와 보월승공(寶⽉昇空)이라는 탑호를 내렸습니다. 태고사 경내에는 스님의 사리탑인 원증국사탑(보월승공탑)과 탑비가 남아있습니다. 스님의 사리탑은 태고사 외에도 양산사와 사나사, 청송사에도 세워졌습니다.

▲ 태고 보우 스님의 사리탑. 태고사 경내에 있다.

북한산성을 쌓을 당시 30여 칸에 불과했던 중흥사는 축성 이후 승영 수사찰이 되면서 136칸에 이르는 대찰로 바뀝니다.

중흥사는 북한산성 내 용암사, 보국사, 보광사, 부왕사, 원각사, 국녕사, 상운사, 서암사, 태고사, 진국사 등 11개 사찰을 관장했습니다. 각 사찰마다 수승(首僧)과 승장(僧將)을 1명씩 두었는데, 승병은 8도 사찰에서 1년에 6차례 번갈아 뽑아 올렸습니다. 승군은 북한산성을 쌓는 일에 동원되었을 뿐만 아니라 완공 이후에는 삼군문과 함께 성문과 수문, 장대, 창고 등을 지켰습니다.

중흥사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만세루와 나한전, 산신당 등의 전각이 있었는데, 고종 31년(1894) 화재로 피해를 입은 뒤 1915년 홍수로 폐허로 변했습니다. 다행히 2012년부터 중창불사가 진행돼 서서히 옛 모습을 되찾고 있습니다.

중흥사와 태고사 사이 등산로를 따라 북한산 대피소 방향으로 가다보면 오른쪽 갈래길을 따라 봉성암에 다다릅니다.

봉성암은 북한산성을 쌓을 때 도총섭이었던 계파 성능(桂坡 性能, ?~?) 스님이 창건한 사찰입니다. 성능 스님이 북한산성을 쌓은 경위와 시설물 등을 기록한 《북한지》에 따르면 창건 당시 봉성암은 25칸 규모였다 합니다.

이 암자에는 성능 스님의 것으로 전하는 사리탑이 있습니다. 성능 스님은 중흥사에서 30여 년간 주석하면서 승군을 통솔했지만, 생애는 자세히 전하지 않습니다. 벽암 각성(碧岩 覺性) 스님 문하에서 3년 동안 수행하고, 화엄사 각황전 화주승으로 숙종의 지원을 받아 불사를 마무리했습니다. 스님이 도총섭으로 북한산성을 쌓는 일에 참여한 것은 이런 숙종과의 인연 때문인 듯합니다. 스님의 사리탑은 옥개석 일부가 파괴되었을 뿐 상륜부까지 온전하게 남아있습니다.

성능 스님의 부도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북한산성과 승영사찰을 묵묵히 지켜보았을 터입니다. 느리지만 하나둘 제 모습을 찾아가는 북한산성과 사찰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며, 북한산 내의 문화유산을 잘 보존하고 복원하는 것이 성능 스님과 승군이 흘린 피와 땀에 보답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 이 기사는 제휴매체인 <불교저널>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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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불교 2019-08-11 05:58:06
비단 북한산성만이냐 남한산성 부산금정산성 충주산성 해안가 방비 수군 육군 다리놓고 병자돌보고 전쟁터와 험한 일에 목숨바친 불교다 한국불교를 지켜온 것은 승려들의 수없이 많이 흘린 피의 댓가다 천년사찰이 그냥 국가가 공짜로 준게 아니다 현재의 배부른 불교승려들이 반성해라 아직도 일반승려들은 매월 보시금 제로다 이런단체는 한국에 없다 빈부차이가 극과 극이다 불교시민단체들도 반성해라 옛날 승군같은 이름없는 승려들을 지원하고 보시해라 그들이 진정한 한국불교의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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