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의지 더욱 굳건히 한 옥중 수행도량
독립의지 더욱 굳건히 한 옥중 수행도량
  • 한국불교선리연구원
  • 승인 2019.08.09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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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스님과 서대문형무소 ②
▲ 서대문형무소 수감 당시 만해 스님 수형자 기록표.

서대문형무소는 한국인에 대한 ‘엄벌주의(嚴罰主義)’적 행형을 집행하는 최일선으로서 수감자에게 일말의 온정도 허용하지 않았다. 입고, 먹고, 자는 문제 자체가 목숨을 위협하는 열악한 감옥의 처우와 환경은 수감자 스스로 그 환경에 지쳐 신념을 포기하도록 하였다. 삶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의(衣), 식(食), 주(住)가 수감자에게는 일본제국주의의 탄압보다도 견디기 힘든 더 큰 적이었던 것이다. 일제 식민 당국은 이 감옥의 일상마저도 식민지 ‘민(民)’에 대한 통제와 감시의 ‘훌륭한’ 수단으로 활용하였던 것이다.

또한 일제는 감옥 안에서도 그들에 따르는 자와 따르지 않는 자에 대한 엄격한 분리정책을 시행하여 전자에게 일정한 ‘혜택’을 부여하는 형태의 누진처우제(累進處遇制)를 1937년 11월에 도입하였다. 일제는 이 회유책을 제시하며 ‘사상범’에 대한 지속적인 교화(敎化)작업을 통해 전향(轉向)을 유도하였다. 감옥에 수감된 독립 운동가의 사상적 기운을 꺾고 그들을 일제 식민지 운영의 협력자로 전환시킴으로써 1930~40년대 전시체제에서 식민지 운영의 원활함을 감옥 운영에서도 찾고자 한 것이다.

결국 서대문형무소로 대표되는 일제 강점기 감옥은 강력한 일상의 통제를 통해 일제의 식민지 경영에 걸림돌이 되었던 저항세력, 반대세력, 불복종 세력, 반사회적 인물을 사회로부터 완전 격리시켜 한국인이 선동되지 않도록, 사상적 전파가 되지 않도록, 인적 연결고리가 이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두는 역할을 ‘잘’ 수행하였다.

서대문형무소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만해 스님은 독립운동가로서의 길을 한시도 저버리지 않았다. 물론 만해 스님에게도 일제에 의해 감옥에 구금된 것은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많은 육체적 고통과 말 못할 정신적인 쓰라림이 있었을 것이다. 더욱 이 옥중에 수감되면서 3·1운동에 대해 취조, 회유, 협박 등을 받으면서 재판을 받은 것과 일제의 구형에 따른 옥중 생활은 견디기 어려운 삶의 어두운 단면이었다. 이에 관련하여 스님은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벌써 십년이로구만, 우리들 삼십삼인이 긔미년 사건으로 서대문감옥에 갓치어 잇든 것이, 나는 그 때 수년 옥중생활을 하는 사이에 情緖的으로 衝動을 밧어 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엇다. 그러나 모든 것이 맘대로 못되는 生活임으로 말하자면 이 情緖조차 쪼각쪼각 바서 버리는 때가 엇더케 만엇는지 모른다. - 한용운, <月明夜에 一首詩> 중에서

일제의 온갖 고문과 악형, 그리고 일체의 난방시설 없이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서 웅크리고 앉아 한 겨울을 지내야했고, 한여름에는 환기가 잘 되지 않아서 옥사 내부가 초열지옥(焦熱地獄)과 같았던 감옥생활은 민족대표들에게 여러 가지 병마를 불러왔다. 박준승은 고문으로 옥사하고 양한묵은 옥고로 숨졌다. 손병희는 옥중에서 병에 걸려 출감한 뒤 생을 마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대표들은 종교 지도자이기 때문에 신앙이 큰 힘이 되어 고통을 견디며 독서와 명상에 열중하였다.

만해 스님 또한 이런 역경을 이겨내면서 감옥을 수행도량으로 삼으며 자신의 독립정신을 과감하게 펼쳐보였다. 스님은 옥중에 들어오기 전, 민족대표와 함께 피체될 경우를 대비하여 사전에 정한 옥중투쟁 3대 원칙을 고집스럽게 지켰다. 그것은 1. 변호사를 대지 말 것, 2. 사식(私食)을 취하지 말 것, 3. 보석(保釋)을 요구하지 말 것 등의 세 가지였다.

그런데 오랜 옥고생활을 견디지 못한 일부 민족대표가 일제의 회유에 넘어갔고, 일부는 극형에 처한다는 소문을 듣고 대성통곡하는 등 굳건했던 신념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본 스님은 그들을 향해 똥통을 집어던지며, “비겁한 인간들아, 울기는 왜 우느냐! 나라 잃고 죽는 것이 무엇이 슬프냐! 이것이 소위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는 민족대표의 모습이냐! 그 따위 추태를 부리려거든 당장에 취소해 버려라!”고 호통을 치니, 삽시간에 조용해졌다고 한다. 이러한 행동에 대하여 민족대표로서 함께 수감된 이종일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통곡하는 자 머리에 인분을 쏟아 부었던 사실은 너무나 유명한 일이다.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통쾌무비한 일이다. 우리 민족대표가 공포에 떨거나 비열한 행동을 자행한다면 그를 따르는 우리의 민중은 장차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내가 그 같은 어리석은 자의 행동을 목격했다 해도 인분 세례를 퍼붓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다. 역시 한용운은 과격하고 선사다운 풍모가 나타나는 젊은이다. - 이종일의 <묵암비망록> 중에서

한편, 당시 서대문감옥에서는 ‘통방’이라는 것이 유행하였다. 격리된 수인이 창살 밖으로 서로 대화하거나 방마다 있는 변기통을 비우러 나가면서 딴 방 수인과 슬쩍 연락하는 것이 이른바 ‘통방’이다. 스님은 옆방의 최린과 ‘통방’을 하다가 들켜 호된 벌을 받았다. 그 때 스님은 즉흥시 한 편을 읊었다.

하루는 이웃방과 더불어 통화할 새 一日與隣房通話
간수에게 몰래 들킨지라 爲看守聽
손으로 두들겨 맞으니 雙手被輕
잠시 동안 입을 벌릴 수 없더라. 二分間卽

서대문형무소는 독립항쟁의 성지가 되었다. 잡혀온 시민·학생이 간수의 고문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감방 안에서 큰소리로 독립운동의 연설을 하거나 만세를 부르면, 여기저기서 박수로 공명하곤 하였다. 만해 스님도 몇 차례 옥중 연설을 하다가 곤욕을 치렀다.

만해 스님은 이렇게 혹독한 옥중생활에 있었으면서도 재판정에서는 자신의 독립의지를 적극적으로 피력하였다. 1919년 3월 11일, 앞으로도 조선의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이냐는 질문에 “그렇다. 계속하여 어디까지든지 할 것이다. 반드시 독립은 성취될 것이며, 일본에는 중에 월조가 있고, 조선에는 중에 한용운이 있을 것이다.”라고 독립에 대한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1919년 5월 8일 경성지방법원의 예심에서도 향후 독립운동에 대하여 “몸이 없어지면 정신만이라도 영세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다.”라고 대답하며 독립정신을 영원히 가지고 있을 것을 뚜렷하게 선언하였다. 1920년 9월 25일의 고등법원 공판에서도 스님은 같은 의지를 지속하였다.

금번의 독립운동이 총독정치의 압박으로 생긴 줄 알지 말라. 자존심이 있는 민족은 남의 압박만 받지 아니 하고자 할 뿐 아니라 행복의 증진도 받지 않고자 하느니 이는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라, 사천년이나 장구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 언제까지든지 남의 노예가 될 것은 아니다. 그 말을 다하자면 심히 장황하므로 이곳에서 다 말할 수 없으니 그것을 자세히 알려면 내가 지방법원 검사정의 부탁으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이라는 것을 감옥에서 지은 것이 있으니 그것을 갖다가 보면 다 알 듯하오. - 동아일보 1920. 9. 25 <독립은 민족의 자존심> 중에서

사천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조선민족의 독립은 자존심 있는 민족에게 당연한 일인 것이지 일제의 총독정치의 탄압 때문에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스님에게 독립운동은 절대 다른 민족의 노예가 될 수 없다는 민족적 자존심을 되찾기 위한 적극적 행동인 것이다.

만해 스님은 일제로부터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지만, 스님은 차디찬 옥중에서 항일투쟁을 지속하여 전개하였다. 그러나 스님에게 3년에 걸친 수감생활은 육체적 고통은 물론 정서적으로도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함께 했던 동지 하나둘 변절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죽고 싶을 만큼 견디기 힘든 고문을 받으면서 흔들리는 자신과의 싸움으로 번민과 회한이 반복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그럴수록 자신을 채찍질하며 일관된 신념을 한시로 표현하는 등 독립에 대한 의지를 더욱 굳건히 하였고, 누구보다 투철한 독립정신을 지키면서 감옥에서 <조선독립이유서>를 집필하여 독립운동의 의지를 밝혔다. 이러한 항일투쟁은 민족대표로서의 자존심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항일운동이었다.

[참고 자료]
한용운, 《한용운 전집》6, 서울: 불교문화연구원, 2006.
박경목, 《기록으로 보는 일제 강점기 서대문형무소 일상》, 대전: 안전행정부 국가기록원, 2014.
양성숙, 《일제하 서대문형무소 연구: 의병투쟁과 105인사건을 중심으로》, 성신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6.
김상웅, 《만해 한용운 평전》, 서울:시대의 창, 2006.
김광식, 《만해 한용운 평전: 첫키스로 만해를 만난다》. 서울:참글세상, 2009.
김광식, <한용운의 항일투쟁과 서대문형무소>, 《3·1민족대표와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역 사관 개관 7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도시 관리공단, 2005.

※ 이 기사는 제휴매체인 <불교저널>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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