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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의 공양은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
[경전과 함께한 인도성지순례] (11) 꾸시나가르 열반당 앞에서
2018년 11월 21일 (수) 11:21:01 이병욱/정의평화불교연대 사무총장 mytrea70@gmail.com
   
▲ 열반상 앞에서 경전을 독송하고 명상하는 불자들.

인도성지순례 팀은 꾸시나가르로 향했습니다. 2018년 1월 4일 오전 일찍 바이샬리에서 대림정사 순례를 마친 원담 스님과 함께 하는 진주선원 순례 팀의 다음 여정은 꾸시나가르 열반지입니다. 바이샬리에서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꾸시나가르는 230㎞ 거리로 자동차로 4시간가량 걸립니다.

케사리아(Kesaria) 스투파

꾸시나가르로 이동 중에 케사리아(Kesaria) 스투파가 차창 밖으로 보였습니다. 부처님이 출가할 때 삭발처라고도 합니다. 부처님이 열반지로 가는 여정에서 릿차비 족들과 작별한 곳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부처님이 베살리(바이샬리)를 떠나 열반지로 향할 때 릿차비 족들은 부처님의 마지막 여정임을 알았습니다. 릿차비 족들은 마지막 길을 아쉬워하며 계속 따라 갔습니다. 부처님은 이별을 아쉬워하며 떠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하여 신통력으로 큰 강을 만들고 발우를 전해 주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릿차비 족 사람들은 발우를 봉헌한 스투파를 건립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전체둘레가 427미터이고 높이가 46미터 되는 거대한 스투파입니다.

돌아오지 않는 강, 간다크 강(Gandak River)

부처님은 이별을 아쉬워하는 릿차비 사람들에게 더 이상 따라 오지 못하도록 신통으로 강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일까 케사리아 스투파에서 남서쪽으로 4~5㎞ 떨어진 곳에 강이 있습니다. 위성지도로 확인해 보니 ‘간다크 강(Gandak River)’입니다.

간다크 강을 경계로 오른쪽은 릿차비 인들이 사는 곳이고, 강 건너편은 열반지로 가는 길입니다. 릿차비 인들은 저 강을 건너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일까 산치대탑의 부조를 보면 릿차비 인들이 강을 건너가는 부처님을 향해 두 손을 눈에 대고 우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강은 이별의 상징입니다.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가 있습니다. 강을 건너는 것을 죽음으로 본 것입니다. 초기경전에서도 보시하며 베풀고 산 사람에 대하여 “지옥의 베따라니 강을 뛰어넘어, 죽을 때 하늘나라로 간다네.”(S1.33)라 하여 강을 건너는 것을 죽음으로 묘사했습니다. 기독교 찬송가에도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요단강은 죽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간다크 강을 건넜습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강을 건넌 것입니다. 그런데 간다크 강은 무척 큰 강입니다. 강폭도 넓고 수량도 풍부하여 바다같이 넓습니다. 건기임에도 강물이 많은 것은 아마 발원지가 히말라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강 한 편에서 화장하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차창 밖에서 화장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장작더미에 불이 붙어서 연기가 새까맣게 하늘로 치솟습니다. 별도의 화장시설이 있어서 화장 하는 것이 아니라 강변이 화장터로 사용되는 듯합니다. 강에서 화장하는 것은 인도의 전통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강 저 건너편으로 보내는 듯합니다.

   
▲ 꾸시나가르 열반당.

왜 꾸시나가르에서 열반에 들었을까?

꾸시나가르는 불교 사대성지 중의 하나입니다. 탄생지 룸비니, 정각지 보드가야, 초전지 사르나트와 더불어 꾸시나가르는 열반지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꾸시나가르에서 열반에 들었을까?

꾸시나가르는 초기경전에서는 꾸시나라(kusināra, 이하 꾸시나가르)라 합니다. 부처님 당시 꾸시나가르는 변방이었습니다. 이는 <디가니까야> ‘마하쑤닷싸나의 경’에서 아난다가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이 작은 도시, 불모의 도시, 변방의 도시에서 완전한 열반에 들지 마십시오.”(D17)라고 불만을 표출한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 아난다여, 작은 도시, 불모의 도시, 변방의 도시라고 말하지 말라.”라 하시면서 전생에 보살로 살았을 때 이곳 꾸시나가르와 인연이 있었음을 설명해 줍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십니다.

“아난다여, 나는 여섯 번이나 이 지역에서 몸을 버렸다. 그리고 나는 일곱 번째로 전륜왕, 정의로운 법왕, 사방을 정복한 자, 일곱 가지 보물을 지닌 자로서 몸을 버렸다. 그러나 아난다여, 나는 신들의 세계, 악마들의 세계, 하느님들의 세계,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몸을 버릴 곳을 찾지 못한다.”(D17)

부처님은 마가다나 꼬살라의 수도에서 열반에 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부처님의 탄생지나, 정각지, 초전지에서 열반에 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변방에서 열반에 든 것은 전생에 보살로 살았을 때 일곱 번이나 이곳 꾸시나가르에서 몸을 버렸기 때문이라 합니다. 여덟 번째인 현생에서도 이곳 꾸시나가르에서 몸을 버릴 것이라 했습니다.

꾸시나가르에서 몸을 버린 세 가지 이유

부처님이 꾸시나가르를 열반지로 선택한 것은 전생의 인연도 작용했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이유가 더 있습니다. 빠알리 사전에 따르면 우다나 주석을 인용하여 부처님이 꾸시나가르에서 몸을 버리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 Because it was the proper venue for the preaching of the Mahā-Sudassana Sutta; (2) because Subhadda would visit him there and, after listening to his sermon, would develop meditation and become an arahant while the Buddha was still alive; and (3) because the brahman Dona would be there, after the Buddha’s death, to solve the problem of the distribution of his relics (UdA.402f; DA.ii.573f6).

부처님이 꾸시나가르에서 몸을 버린 것은 첫 번째는 ‘마하쑤닷싸나의 경’에 실려 있는 대로이고, 두 번째는 부처님의 마지막 제자 수밧다를 그곳에서 교화하기 위한 것이고, 세 번째는 부처님 사후에 사리분배를 책임질 바라문 도나 존자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라 합니다.

열반당을 향하여

꾸시나가르는 부처님에 의하여 열반지로 선택되었습니다. 오늘날 꾸시나가르는 탄생지 룸비니, 정각지 보드가야, 초전지 사르나트와 함께 열반지로서 전세계 불교인들이 찾는 사대성지중의 하나입니다. 진주선원 순례자들은 미리 준비해온 황금빛깔의 가사를 이운하여 열반당으로 향했습니다.

둥그런 돔 모양의 열반당을 향하는 순례자들은 분위기가 무거웠습니다. 탄생지, 정각지, 초전지와 달리 열반지로 향하는 불자들 얼굴은 숙연합니다. 이날 꾸시나가르의 날씨는 매우 맑았습니다. 늘 안개 낀 듯 뿌연 하늘만 바라 보다 푸른 하늘에 햇살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일까 공원처럼 잘 가꾸어진 유적지 공원에는 청춘남녀들이 잔디밭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있고 가족단위로 놀러 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 꾸리사가르 열반당 내부 열반상 일부.

거룩하고 평안한 모습

순례자들은 둥그런 돔 모양의 열반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들어가자마자 오른쪽으로 누워 있는 열반상을 보았습니다. 사진에서 보던 그대로입니다. 사진은 현지에서 본 것과 다릅니다. 현지에서는 시각을 포함하여 오감으로 접하고 분위기로 보기 때문입니다.

눈을 감고 있는 부처님의 모습은 거룩하고 평안해 보였습니다. 수많은 와불상을 보았지만 이곳 쿠시나가르 열반상만 못합니다. 2013년 중국 돈황에서 거대한 열반상을 보았지만 역시 이곳만 못합니다. 마치 불상 중에는 보드가야 대탑 안에 있는 금강좌불이 최고이듯이, 이 세상에서 꾸시나가르 와불상만한 것이 없습니다.

   
▲ 꾸리사가르 열반당 내부 열반상 일부.

눈물을 흘리기도

순례자들은 열반상을 세 번 돌았습니다. 그리고 준비한 황금빛의 가사를 공양했습니다. 가사를 공양하고 열반상 앞에 앉아 예경했습니다. 빠알리 예경문과 관련된 경을 독송했습니다. 예경은 오래 이어졌습니다. 정과 성을 다하는 예경에 어느 불자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예경이 끝난 후에 십분 가량 입정했습니다.

마음이 있어야 세상도

사람들은 부처님의 죽음을 슬퍼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열반’입니다. 그것도 빠리닙바나(Parinibbāna)라 하여 ‘반열반(般涅槃)’ 또는 ‘잔여가 없는 완전한 열반’이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궁극적 목적은 열반입니다. 모든 강물은 바다로 향하듯이, 모든 가르침은 열반으로 향합니다. 그런 열반에 대하여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 (nibbānaṃ paramaṃ sukhaṃ)”(Dhp 204)라 하여 열반이야말로 궁극적 행복이라 했습니다.

열반은 말로서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반은 있어도 열반에 들어간 자는 없다고 합니다. 누군가 ‘내가 열반을 체험했다’라는 말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열반을 체험한 자가 아닙니다. 지각과 느낌이 소멸된 상태에서 열반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있어야 세상이 있습니다. 마음이 없으면 세상도 없습니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세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음이 있어야 지각하고 느낄 수 있는데 마음의 대상이 없어서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 세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숫따니빠따>에서 학인 아지따는 부처님에게 “명색은 어떠한 경우에 소멸합니까?”라며 물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의식이 없어짐으로써, 그 때에 그것이 소멸합니다. (Viññāṇassa nirodhena etthetaṃ uparujjhati)”(Stn.1037)라고 답했습니다.

의식(viññāṇa), 즉 마음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으면 정신-물질(nāma-rūpa: 名色)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번뇌가 다한 성자는 재생의 원인이 되는 행위를 하지 않기 때문에 임종 순간에 재생연결식이 일어나지 않아 새로운 태어남이 없습니다.

   
▲ 열반상 일부 부조. 부처님의 열반을 슬퍼하는 아난.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가는 가르침

부처님은 정각을 이룬 후 45년 동안 설법했습니다. 그러나 정각을 이룬 다음에 진리를 설하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진리에 대하여 욕망의 세계에 사는 자들이 조건 발생적 법칙인 연기를 보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역류도(逆流道)입니다.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가르침입니다. 욕계에서 모두 욕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욕망을 내려놓아라’합니다. 이런 가르침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도리, 즉 모든 형성의 멈춤, 모든 집착의 버림, 갈애의 부숨, 사라짐, 소멸, 열반도 보기 어렵다. 내가 이 진리를 가르쳐서 다른 사람들이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피곤이 되고 나에게 곤경이 될 것이다.”(Vin.I.5)라 했습니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자 악마 빠삐만이 나타났습니다. 악마 빠삐만은 “올바로 잘 가신 임께서는 지금 완전한 열반에 드십시오. 세존이시여, 바로 지금 완전한 열반에 드실 시간이 되었습니다.”(D16)라며 재촉하듯이 말했습니다. 악마의 권유대로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면 불교는 없었을 것입니다.

열반당 앞 쌀라(Sāla) 나무

부처님의 열반지 꾸시나가르에는 쌀라(Sāla)나무가 있습니다. 열반당을 들어가는 입구에 커다란 쌀라 나무 두 구루가 있습니다. 쌀라 나무는 부처님이 완전한 열반에 들 때 의지하던 나무입니다. 이는 부처님이 “아난다여, 그대는 나를 위해 쌀라 쌍수 사이에 머리를 북쪽으로 한 침상을 만들어라. 아난다여, 나는 피곤하니 누워야겠다.”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열반당 앞에 있는 두 구루의 쌀라 나무가 그때 당시 것은 아닐 것입니다. 후대에 이곳이 부처님의 열반지라 하여 심어 놓은 것이라 보여 집니다. 그런 쌀라 나뭇잎은 어떻게 생겼을까? 잎사귀가 넓은 활엽수입니다.

최상의 공양이란 무엇인가?

부처님이 열반하실 때 초기경전에 따르면 두 구루의 쌀라 나무에서는 때 아닌 꽃이 만개 했습니다. 꽃들은 부처님을 공양하기 위해 부처님 몸에 떨어졌습니다. 천상에서는 만다라바 꽃들이 공중에서 흩날렸습니다. 천상의 음악소리도 울려 퍼졌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아난다를 불러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했습니다.

“그러나 아난다여, 이러한 것으로 여래가 존경 받고 존중 받고 경배 받고 예경 받고 숭배 받는 것이 아니다. 아난다여, 수행자나 수행녀나 남녀 재가신자가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고 올바로 실천하고, 원리에 따라 행한다면, 그것이 최상의 공양으로 여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경배하고 예경하고 숭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그대들은 ‘우리는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고, 올바로 실천하고, 원리에 따라 행하리라.’라고 배워야 한다.”(D16)

부처님은 ‘최상의 공양(paramā pūjā)’에 대하여 설했습니다. 최상의 공양이란 다름 아닌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금강경>에도 재보시보다 법보시가 훨씬 더 수승하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에게 공양한다고 하여 부처님 앞에 꽃, 향, 초 등 물질적인 것만 공양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공양도 해야 함을 말합니다.

진정한 공양은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양을 여읜 공양(nirāmisapūjā)이 나의 가르침을 유지할 수 있게 한다.”(Smv.579)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윤회의 원인이 되는 물질적 정신적 자양분을 여의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고 실천하여 부처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여 괴로움과 윤회를 끝내는 것이 최상의 공양임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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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시간 : 2018-11-21 11:21:01]  
[최종수정시간 : 2018-11-21 11:29:57]  

   
기사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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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도전법 잘해야 스님이고 불자 2018-11-30 15:32:13

    진짜스님이고 불자님이면 부처님처럼 보살님처럼 전도전법 중생구제나 잘하시요
    대한민국 무종교인 증가 종교인수 역전 대한민국 무종교인들 종교 호감도 불교 천주교 선호 개신교 목사 호감도 최저 꼴찌 그리고 일년에 몇번 절에 가는 불교 불자들 종교 없다고 말한다고 하더라 무종교인 증가 이유같다 통계가 정확성이 없다 신뢰도가 떨어진다 여론 조사도 조작하는 대한민국 종교인수 조작도 할수 있다 호감도 꼴찌 종교만 증가한다 믿을수 없는 종교인 통계다 인터넷 다음 구글 네이버 검색창에서 종교 개판이다 검색해 필독하고 정신차려라신고 | 삭제

    • 전도전법 중생구제 잘해야 스님 2018-11-30 15:30:53

      진짜스님이고 불자님이면 부처님처럼 보살님처럼 전도전법 중생구제나 잘하시요
      대한민국 무종교인 증가 종교인수 역전 대한민국 무종교인들 종교 호감도 불교 천주교 선호 개신교 목사 호감도 최저 꼴찌 그리고 일년에 몇번 절에 가는 불교 불자들 종교 없다고 말한다고 하더라 무종교인 증가 이유같다 통계가 정확성이 없다 신뢰도가 떨어진다 여론 조사도 조작하는 대한민국 종교인수 조작도 할수 있다 호감도 꼴찌 종교만 증가한다 믿을수 없는 종교인 통계다 인터넷 다음 구글 네이버 검색창에서 종교 개판이다 검색해 필독하고 정신차려라신고 | 삭제

      • 불교개혁잘한다 희망이다 2018-11-30 15:06:35

        진짜스님이고 불자님이면 부처님처럼 보살님처럼 전도전법 중생구제나 잘하시요
        대한민국 무종교인 증가 종교인수 역전 대한민국 무종교인들 종교 호감도 불교 천주교 선호 개신교 목사 호감도 최저 꼴찌 그리고 일년에 몇번 절에 가는 불교 불자들 종교 없다고 말한다고 하더라 무종교인 증가 이유같다 통계가 정확성이 없다 신뢰도가 떨어진다 여론 조사도 조작하는 대한민국 종교인수 조작도 할수 있다 호감도 꼴찌 종교만 증가한다 믿을수 없는 종교인 통계다 인터넷 다음 구글 네이버 검색창에서 종교 개판이다 검색해 필독하고 정신차려라신고 | 삭제

        • 나그네 2018-11-28 10:58:01

          윗글에서 처럼,

          붓다의 가르침은,
          오직 중생의 궤도에서 벗어나,
          완전한 해탈처인 Nirvana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써,
          궁극의 해탈이 성립된다.

          헌데,
          지금 수행법에는,
          붓다께서 실행하던 Nirvana에 들 수있는 수행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시시비비로 일관하며,
          결과없는 결과만 마냥 기다릴뿐,

          역류도逆流道 라는 대목을
          깊이 고민해보는 계기가 되기를. .신고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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