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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중 성지 세상에서 가장 상서로운 곳"
[경전과 함께한 인도성지순례] (8)보드가야 대탑에서 마음이 충만했다
2018년 09월 28일 (금) 09:36:07 이병욱/정의평화불교연대 사무총장 mytrea70@gmail.com

북방 불교는 음력으로 12월 초파일을 부처님이 정각을 이룬 날, 즉 성도절(成道節)로 기념합니다. 그러나 남방 테라와다 불교는 탄생, 성도, 열반을 음력 4월 만월일(15일) 같은 날에 기념합니다. 순례자들은 1월 2일 저녁에 부처님의 정각지 보드가야대탑에 들어갔습니다.

   
▲ 저녁에 보는 보드가야 대탑.

원래 일정은 1월 2일 아침 일찍 바라나시를 출발해 점심 식사 이후에 보드가야 대탑을 순례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 부처님 성도 7주와 관련된 7군데 선정터를 순례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델리에서 바라나시 행 비행기가 안개로 인해 5시간 이상 늦게 출발하면서 연쇄반응을 일으켜 1월 2일 저녁 6시 무렵 어둠이 내릴 때 대탑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대탑에 들어가니

보드가야 대탑에 들어가려면 검색대를 통과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스마트폰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다만 디지털 카메라는 사용료를 지불하면 들어 갈 수 있습니다. 마침 순례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디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소지 할 수 있었습니다.

대탑에서는 신발을 신을 수 없습니다. 입구에서 신발을 맡기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양말은 허용됩니다. 어느 나라든지 성지에서는 대부분 신발을 벗어야 합니다. 그래서일까 “이곳은 성스러운 곳 신발을 벗어라!”라는 말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법당에 들어 갈 때 신발을 벗습니다. 보드가야 대탑에 입장할 때 신발을 벗고 합장 자세로 들어갔습니다.

검색대를 통과하여 대탑 영역에 들어가니 완전히 다른 세계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천상이나 극락이 이곳이 아닐까 생각들 정도입니다. 그것은 화려하게 장엄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신심으로 가득 찬 ‘분위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끊임없이 주문을 외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누구나 들을 수 있게 마이크에서는 티베트 음조의 반복적인 단순하고 짤막한 만트라가 흘러나옵니다. 여기에 새소리도 들려옵니다.

대탑으로 가까이 갈수록 새소리는 점차 커집니다. 새소리는 매우 경쾌하고 청량한 느낌입니다. 마치 여울물이 소리를 내서 흐르는 것처럼 끊임없이 재잘 되는 새소리가 염불소리와 함께 분위기를 한껏 고양시키는 것 같습니다. 대체 이 새소리는 어디서 나는 것일까?

금강좌에 가사공양을 하고

마하보디 대탑에서 목적지는 대탑 안에 있는 불상입니다. 금강좌에 앉아 있는 불상은 사진으로 많이 보았습니다. 우리나라 불상과도 다른 모습이지만 사진으로 많이 보아 왔기 때문에 익숙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니 경외심이 일어납니다. 더구나 불상에 참배하기 위하여 긴 줄이 형성되어 있고 대부분 지극한 신심으로 불상을 바라보고 있어서 이곳이 가장 성스런 장소임을 실감케 합니다.

   
▲ 대탑 안에 있는 금강좌불상.

진주선원 순례자들은 비좁은 공간에서, 그것도 사람들로 가득 찬 공간에서 잠깐 참배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가사를 공양했습니다. 준비된 황금색 가사를 부처님에게 보시하는 행사입니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물건을 불상관리자에게 건네주어 불상에 터치하여 되돌려 받기도 했습니다.

금강좌 부처님을 참배하고 난 다음 순례자들은 대탑을 세 번 돌았습니다. 대탑 주변에는 순례자들로 가득합니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서 밤이 되었지만 대탑 주변은 환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밤에 보는 대탑은 해가 있을 때 보는 대탑과는 또 다른 신비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부처님은 이곳 보드가야 보리수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런 깨달음에 대하여 ‘무상정등각’이라 합니다.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이라는 뜻입니다. 빠알리 어로는 ‘아눗따라삼마삼보디(anuttara sammāsambodhi)’라 합니다.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바른 깨달음입니다.

누구나 깨닫습니다. 심지어 교회 다니는 사람도 대화중에 깨달았다고 합니다. 몰랐던 것을 아는 것도 깨달음이고 삶의 지혜도 일종의 깨달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깨달음 중의 깨달음이 있습니다. 위없는 깨달음입니다. 위가 없다는 것은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최상의 깨달음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열 가지 별칭 중의 하나가 아눗따라(anuttara: 無上士)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최상의 진리는 무엇일까? 초기경전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율장대품에서는 순서대로 체계적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이 그날 밤 깨달은 것은 다름 아닌 ‘연기법’이었습니다.

그날 밤에

율장대품을 보면 상가의 형성과정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상가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선행 되어야 할 것이 부처님의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율장대품 첫 페이지는 부처님의 깨달음 이야기부터 시작됩니다. 첫 번째 송출품은 ‘보리수이야기(bodhikathā)’입니다. 율장대품에서는 그날 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때 세존께서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얻은 후에, 우루벨라 지역의 네란자라 강가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보리수 아래서 칠일 동안 홀로 가부좌를 하고 해탈의 지복을 누리며 앉아 있었다. 그리고 세존께서는 밤의 초야에 연기법의 순관과 역관에 대하여 정신활동을 기울였다.”(Vin.I.1)

   
▲ 밤에 보는 보드가야 대탑

율장대품 1장 1절에 있는 내용입니다.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은 것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연기법입니다. 이는 “세존께서는 밤의 초야에 연기법의 순관과 역관에 대하여 정신활동을 기울였다.”(Vin.I.1)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십이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

율장대품 보리수이야기에 따르면 부처님은 그날 밤 초야, 중야, 후야 세 번의 기간 동안 깨달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공통적으로 십이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이 소개 되어 있습니다.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연기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며,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며,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생겨난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고,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면 여섯 감역이 소멸하고, 여섯 감역이 소멸하면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소멸하면 느낌이 소멸하고, 느낌이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면 집착이 소멸하고, 집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소멸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해서 소멸한다.”(Vin.I.1)

이와 같은 십이연기 정형문은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성제 역시 생멸이라는 연기적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즉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된다(imasmiṃ sati idaṃ hoti)’라 하여 조건발생하고, 또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진다(Imasmiṃ asati idaṃ na hoti)’라 하여 조건소멸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Imassuppādā idaṃ uppajjati)’라 하여 상호의존적 발생하고,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Imassa nirodhā idaṃ nirujjhati)’라 하여 상호의존적 소멸합니다. 이와 같은 연기적 구조는 모든 경우에 다 적용됩니다. 마치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하였듯이, 부처님은 연기법을 발견하여 부처가 된 것입니다.

삼명(三明)으로

동아시아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이 ‘새벽별’을 보고 깨달았다고 합니다. 새벽별 이야기가 어느 경전에 근거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초기경전에는 새벽별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율장대품을 비롯하여 ‘니까야’에서는 초야, 중야, 후야에 연기법을 깨달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두려움과 공포에 대한 경(M4)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자신의 전생을 아는 지혜인 숙명통이 생겨났는데, 이에 대하여 “바라문이여, 이것이 내가 밤의 초야에 도달한 첫 번째 앎입니다.”(M4)라 했습니다. 중야에는 뭇 삶들이 업에 따라 태어나고 죽는 것을 앎에 대한 지혜가 생겨났는데 이에 대하여 “바라문이여, 이것이 내가 밤의 중야에 도달한 두 번째 앎입니다.”(M4)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부처님은 후야에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방법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알아 번뇌의 소멸에 대한 지혜가 생겨났습니다. 이와 같은 누진통의 지혜가 일어났을 때 “태어남은 부수어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알게 되었는데, 이에 대하여 “바라문이여, 이것이 내가 밤의 후야에 도달한 세 번째 앎입니다.”(M4)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그날 밤 세 번에 걸쳐서 깨달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모두 공통적으로 연기법에 대한 것입니다. 또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것입니다. 또 사성제의 깨달음에 대한 것입니다. 이렇게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의 지혜를 삼명(三明)이라 하는데, 후야에 사성제의 진리를 깨달았을 때 더 이상 윤회하지 않을 것을 알게 됩니다.

삼전 십이행상(tiparivaṭṭaṃ dvādasākāraṃ)

부처님의 깨달음은 <초전법륜경>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에 따르면 사성제를 세 번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로 점검했습니다. 이를 ‘삼전 십이행상’(tiparivaṭṭaṃ dvādasākāraṃ)이라 하는데 사성제에 대하여 각각 세 번씩 굴린 형태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고성제에 대해서는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Idaṃ dukkhaṃ ariyasaccanti)’, ‘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는 상세히 알려져야 한다. (dukkhaṃ ariyasaccaṃ pariññeyyanti)’, ‘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가 상세히 알려졌다. (dukkhaṃ ariyasaccaṃ pariññātanti)’라고 세 번 굴린 것입니다. 이는 철저하게 점검하고 검증한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사성제에 대하여 세 번씩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로 완전하게 알게 되었을 때 마침내 깨달음을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초전법륜경>에서는 “이와 같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나의 앎과 봄이 세 번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로 있는 그대로 청정해졌기 때문에, 수행승들이여,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히 깨달았다고 선언했다.”(S56.11)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하여 의심합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미완성이고 불완전한 것이라고 반신반의합니다. 그래서일까 <초전법륜경>을 보면 사성제를 세 번 굴린 것으로 철저하게 깨달았음을 설명하는 듯합니다. 더구나 하늘의 신들이나 악마들에게 까지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가장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이라고 자신 있게 선언한 것입니다.

깨달음을 반신반의하는 자들은

부처님의 깨달음은 깨달음을 이룬 그날 밤에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세월이 지난 다음 깨달음이 추가된 것이 아닙니다. 이는 <쿳다까니까야>의 ‘이띠붓다까(여시어경)’에서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밤부터, 잔여 없는 열반의 세계로 완전한 열반에 든 밤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대화하고 말하고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It.122)라고 하신 것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반신반의하는 자들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불완전한 것, 미완성인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일까 후대 부처님의 깨달음 보다 더 높은 깨달음이 있다고 합니다. 대표적으로 “옛 부처님 나기 전에 의젓한 동그라미(古佛未生前 凝然一相圓) 석가도 모르는데 가섭이 어찌 전하랴(釋迦猶未會 迦葉豈能傳)”(직지심경 134)라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깨달음은 그 깨달음 자체로 완전한 것이고 완성된 것입니다. 그런 가르침은 초기경전으로 전승되어 왔습니다.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것을 말로서 남겼습니다. 이를 ‘구분교(九分敎, 구부경)’라 하는데 경, 응송, 수기, 게송, 감흥어, 여시어, 전생담, 미증유법, 교리문답 이렇게 아홉 가지 형식으로 남겼습니다. 이와 같은 구분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니라 달 그 자체를 뜻합니다. 일체지자인 부처님만이 구분교의 형식으로 팔만사천법문을 설했습니다. 그래서 깨달은 밤부터 열반에 든 밤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라고 했는데, 이는 ‘티끌만큼도 잘못도 없이, 설해진 목적과 완전히 일치하고, 그것과 일치하기 때문에 다른 것이 아니다.’(ItA.II.190)라 한 것입니다.

초야의 게송

원담 스님과 진주선원 순례자들은 마하보디 대탑 한편에 자리 잡았습니다. 단순히 한번 둘러보고 가는 것이 아닌 구도여행 개념이기 때문에 여법하게 보냈습니다. 먼저 ‘예경문’ 등 빠알리 챈팅을 했습니다. 다음으로 정각지에서 독송하기에 가장 적합한 <초전번륜경>(S56.11)을 함께 독송했습니다. 마하보디대탑을 마주보고 보리수가 있는 그곳에서 율장대품 1장 1절에 있는 보리수이야기를 독송했습니다.

율장대품에 따르면 부처님은 초야, 중야, 후야에 걸쳐서 세 번 깨달았습니다. 가장 마지막으로 깨달은 것이 사성제입니다. 초야에는 숙명통, 중야에는 천안통, 후야에는 누진통의 지혜가 생겨나서 깨달은 것입니다. 율장대품에서는 초야, 중야, 후야의 깨달음에 대한 게송이 있습니다. 먼저 초야의 게송입니다.

“참으로 열심히 노력을 기울여
선정을 닦는 임에게 진리가 나타나면,
사실들이 원인을 갖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므로
그 거룩한 임에게 모든 의혹은 사라진다.”(Vin.I.2, Ud.1)

   
▲ 보드가야 대탑에서 경전독송하는 진주선원불자들

이 게송은 <우다나> ‘깨달음의 경’과도 병행합니다. 율장대품에서는 연기의 순관과 역관을 한 다음 게송을 읊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우다나>에서는 연기의 순관 후에 게송이 나와 있는 것이 다릅니다. 핵심은 ‘사실들이 원인을 갖는다(Yato pajānti sahetudhamma)’라는 말입니다.

부처님은 초야에 “사실들이 원인을 갖는다는 것을 분명히 앎(Yato pajānti sahetudhamma)”이 있었고, 중야에는 “조건 지어진 것들은 소멸하고야 만다는 사실을 인식함(Yato khayaṃ paccayānaṃ avedī)”이 있었고, 후야에는 “태양이 어두운 허공을 비추듯(Suriyo'va obhāsayamantalikkha” 번뇌를 소멸하여 진리를 꿰뚫어 악마의 군대를 쳐부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초야, 중야, 후야 세 번에 걸쳐서 십이연기의 순관과 역관에 정신활동을 기울임으로써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것입니다. 이는 앗사지 존자가 사리뿟따 존자에게 “사실들은 원인으로 생겨나며 그 원인을 여래는 설합니다. (Ye dhammā hetuppabhavā, tesaṃ hetuṃ tathāgato āha)”(Vin.I.40)라고 말한 연기법송과 일치합니다.

중야의 게송

부처님은 중야에서 천안통의 지혜가 열렸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것입니다. 자신의 지은 행위로 인하여 세세생생 윤회하는 삶의 모습을 천안으로 본 것입니다. 중야의 게송은 다음과 같습니다.

“참으로 열심히 노력을 기울여
선정을 닦는 임에게 진리가 나타나면,
조건 지어진 것들은 소멸하고야 만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
그 거룩한 임에게 모든 의혹은 사라진다.” (Vin.I.2, Ud.2)

율장대품에서는 십이연기의 순관과 역관에 정신활동을 기울이고 난 다음 이 게송을 읊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다나>에서는 연기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로 시작되는 연기의 환멸문만 소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게송을 보면 핵심구절은 ‘조건 지어진 것들은 소멸하고야 만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앗사지 존자가 말한 “그것들이 소멸하는 것 또한 위대한 수행자께서 그대로 설합니다. (Tesañca yo nirodho, evaṃvādī mahāsamaṇo)”(Vin.I.40)라고 말한 연기법송과 일치합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출가하기 전에 앗사지 존자의 경행을 보고 경외심을 느껴 물어 보았습니다. 앗사지 존자가 짤막하게 답송한 것은 부처님이 초야와 중야에 하신 말씀입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이 짤막한 연기법송을 듣고 그 자리에서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 (yaṃ kiñci samudayadhammaṃ, sabbaṃ taṃ nirodhadhamma)”라고 알아들어 ‘진리의 눈(Dhammacakkhu)’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후야의 게송

마지막으로 부처님은 후야에서 누진통의 지혜가 열렸습니다. 보리수아래에서 초야, 중야를 보내고 마지막으로 후야에 이런 게송을 남겼습니다.

“참으로 열심히 노력을 기울여
선정을 닦는 임에게 진리가 나타나면,
태양이 어두운 허공을 비추듯,
그 거룩한 임은 악마의 군대를 부숴버린다.” (Vin.I.2, Ud.2)

율장대품이나 <우다나>에서나 공통적으로 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이 소개 되어 있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우다나>에서는 “이처럼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남으로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라는 연기송이 앞에 있습니다.

게송에서 핵심구절은 “태양이 어두운 허공을 비추듯(Suriyo'va obhāsayamantalikkha)”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태양이 떠올라 자신의 빛으로 어둠을 몰아내듯, 번뇌를 부순 거룩한 임은 길을 통해서 진리를 꿰뚫어 악마의 군대를 쳐부순다.’라는 뜻입니다. 조건발생하는 연기의 유전문과 조건소멸하는 연기의 환멸문에 정신활동을 기울여 번뇌를 소멸한 것을 뜻합니다. <맛지마니까야> ‘두려움과 공포에 대한 경(M4)’에서는 사성제를 있는 그대로 알아 누진통의 지혜가 열린 것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 흰색 가운을 입은 진주선원 불자들.

깨달음의 완성은 아라한송으로

초기경전에 따르면 깨달았을 때 공통적으로 외치는 게송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후야에서 사성제를 깨달았을 때 “태어남은 부수어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M4)라고 분명히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를 깨달음의 게송이라 볼 수 있는 ‘아라한송’이라고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라 실천하면 누구나 아라한이 될 수 있습니다. 부처님도 아라한입니다. 아라한이 되면 부처님의 깨달음의 경지가 되어 동급이 됩니다. 그래서일까 율장대품에서는 오비구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해탈했을 때 “이로써 세상에 여섯 명의 거룩한 임이 생겨났다.”(Vin.I.14)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특수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보편적인 것임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았습니다. 만일 홀로 깨달은 것에 만족하여 열반했다면 가르침은 이 세상에 전달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처님 혼자만 열반에 들어갔을 것이고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것은 누군가는 알 수 있다고 여겨 가르침을 펼치셨습니다. 그 결과 가르침의 바퀴는 끊임없이 굴러가서 오늘날 보드가야 대탑에 수많은 사람들이 순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아라한이 됨으로써 완성됩니다. 누가 깨달음을 인가해 주지도 않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았을 때 스스로 윤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알았듯이, 제자들도 번뇌가 다하여 해탈 되었을 때 윤회하지 않을 것이라 스스로 알게 됩니다. 깨달음은 “태어남은 부수어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M4)라는 스스로의 선언으로 완성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보드가야 대탑의 보름달

보드가야 대탑에 보름달이 밝았습니다. 마치 그날 밤 부처님이 깨달았던 것처럼 어두운 하늘에 둥근 달이 휘영청 떠 있습니다. 날짜를 따져 보니 1월 2일 밤은 음력으로 11월 16일 되는 날이었습니다.

   
▲ 보드가야 대탑에 뜬 보름달.

보디가야는 잠들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낮에도 인파로 가득하고 밤에도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검붉은 가사를 입은 티베트 승려들이 가장 많이 보입니다. 그들의 신심은 정말 알아 줄만 합니다. 깔판 위에서 전체투지를 하는 스님, 한편에서 경을 읽는 스님, 또 한편에서는 명상하는 스님 등 갖가지 모습으로 대탑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마하보디 대탑은 거대한 소용돌이 같습니다. 대탑을 중심으로 하여 소용돌이치듯이 두 겹, 세 겹, 여러 겹으로 감싸고 있습니다. 틈만 있는 곳이면 여지없이 자리를 잡고 경을 독송하는가 하면 명상을 하고 전체투지를 합니다. 더구나 밤을 세는 것 같습니다. 일인용 간이 텐트가 마치 캠핑장에 온 것처럼 이곳저곳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보드가야는 최대불교 성지입니다. 불교성지중의 성지가 보드가야입니다. 부처님의 탄생보다도, 부처님의 초전보다도, 부처님의 열반보다도 더 가치 있게 쳐 주는 곳이 정각지 보드가야인 듯합니다. 그래서일까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피부색도 다르고 옷차림도 다른 수많은 종족들은 오직 한마음 입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예경입니다. 이슬람에서는 일생에 한번 메카를 순례해야 한다고 하는데, 불교인이라면 부처님의 탄생지, 정각지, 초전지, 열반지 이렇게 네 곳은 순례해야 합니다. 이는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D16)’에서도 부처님이 언급하신 사항입니다. 부처님이 그날 밤 깨달았던 것처럼, 보드가야에 보름달이 휘영청 떴습니다.

보드가야 대탑에서 마음이 충만했다

불교의 사대성지, 팔대성지 중에서도 가장 수승한 곳이 정각지 보드가야입니다. 보드가야 대탑에 있으면 상서로운 기운을 느낍니다. 순례자들이 한마음으로 기도하고 수행하는 도량에 있으면 앉아 있는 것 자체로도 충만합니다. 이에 대한 느낌을 그때 당시에 이렇게 적어 보았습니다.

“새소리가 들려옵니다.
수십 아니 수 백 마리가 지저귀는 것 같습니다.
여울물이 요란하게 흐르는 것처럼,
쉼 없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대탑에 가까이 갈수록
상쾌한 재잘거림은 더 커져 갑니다.
마하보디 대탑 앞에 섰습니다.
상서로움이 느껴집니다.
이 상서로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마도 분위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탑 안에 금강좌가 있습니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신 곳입니다.
불교가 시작된 곳입니다.
불교가 태어난 곳입니다.
해는 저물었습니다.
밤하늘에 대탑이 빛납니다.
저쪽 하늘에는 보름달이 떴습니다.
여기저기 경문 외는 소리가 들립니다.
어떤 승려는 명상에 잠겨 있습니다.
티베트 승려는 온몸을 던져 전체투지(全體投地)합니다.
대탑에는 경문을 독송하고, 전체투지하고
명상하는 자들의 기운으로 가득합니다.
여기에 신비한 새들의 지저귐이 상쾌하게 해 줍니다.
마하보디대탑은 이 세상에서 가장 상서로운 곳입니다.”

   
▲ 보드가야 대탑 야경

보드가야 마하보디대탑에서 마음이 충만했습니다. 휘영청 보름달이 뜬 밤 마하보디대탑은 어둠속에서 황금빛으로 빛났습니다. 탑 안에는 금강좌가 있습니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신 바로 그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 금강좌 부처님이 모셔져 있습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불상이 있습니다. 스리랑카에 가면 스리랑카 불상, 중국에 가면 중국불상, 일본에 가면 일본불상이 있습니다. 각 민족마다 각 전통에 맞는 불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하보디 대탑 안에 있는 금강좌불상만 못한 것 같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았던 바로 그 자리에 모셔진 불상을 중심으로 신심 깊은 불자들과 구도의 열정을 가진 수행자들의 구도의 열기로 가득합니다. 보다가야는 성지중의 성지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상서로운 곳입니다. 보드가야 대탑에서 마음이 충만했습니다.

   
▲ 보드가야 대탑앞에서 기념촬영하는 원담스님과 진주선원 불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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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시간 : 2018-09-28 09:36:07]  
[최종수정시간 : 2018-09-28 09:4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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