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명의 거룩한 임이 생겨났다"
"여섯 명의 거룩한 임이 생겨났다"
  • 이병욱/정의평화불교연대 사무총장
  • 승인 2018.08.22 10:38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전과 함께한 인도성지순례] (6)사르나트 초전(初轉) 여섯 아라한의 의미는

녹야원이라 불리우는 사르나트는 광활합니다. 마치 폐허와 같은 바라나시의 처참한 삶의 모습만 보다가 푸른 초원의 유적지에 들어서니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 간 듯 합니다. 목적지는 다메크 스투파입니다.

▲ 사르나트 다메크스투파

다메크 스투파 앞 잔디밭에

1월 2일 이른 아침임에도 사르나트에는 각국에서 온 순례자들이 이곳저곳에 보입니다. 생긴 모습만큼이나 입는 옷도 다릅니다. 테라와다 불교권 국가에서 온 불자들은 대게 흰색 계통의 옷이고, 한국에서 온 불자들은 자유로운 복장입니다. 진주선원불자들은 모두 흰색가사를 수하고 다메크스투파 앞 잔디밭에 자리 잡았습니다.

어쩌면 이 자리가 오비구에게 처음 설법하던 장소일지 모릅니다. 동방의 순례자들은 가장 먼저 빠알리 예경을 했습니다. 인도성지에서는 빠알리어로 예경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빠알리어는 부처님 당시 민중어입니다. 부처님은 빠알리어로 설법했습니다. 빠알리어가 마가다어와는 약간 다르긴 하지만 그때 당시 민중들이 사용하는 언어이었습니다.

예경문은 진주선원에서 만든 ‘날마다 하는 기도문’에 실려 있습니다. 가장 먼저 “나모 땃사 바가와토 아라하토 삼마삼붓다싸” 예경문을 세 번 독송합니다. 이어서 “붓당 사라낭 갓차미”로 시작되는 띠사라나(三歸依)를 세 번 합니다. 다음으로 “빠나띠빠따 웨라마니”로 시작되는 빠알리 오계 빤짜실라를 독송합니다. 계속해서 “이띠삐소 바가와 아라항 삼마 삼붓도”로 시작되는 붓다완다(佛隨念), “스왁카또 바가와또담모”로 시작되는 담마완나(法隨念), “수빠띠빤노 바가와또 사와까상고”로 시작되는 상가완나(僧隨念)을 독송합니다. 이러한 독송은 성지에 갈 때 마다 계속 되었습니다.

▲ 다메크 스투파 앞의 진주선원 불자들

빠알리 예경 후에는 초전지 사르나트에 적합한 빠알리경을 독송합니다. 초전지 사르나트에서는 ‘가르침의 바퀴를 굴림에 대한 경(初轉法輪經, S56.11)’ 만한 경이 없을 것입니다. 준비된 프린트물에 쓰여 있는 대로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는 바라나시 시의 이씨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에 계셨다.” (S56.11)로 시작되는 경을 독송했습니다.

인도성지순례는 본래 룸비니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짧은 일정에서 거리 문제로 인하여 반드시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사대성지라면 탄생지 룸비니, 정각지 보드가야, 초전지 사르나트, 열반지 쿠시나라인데, 이번 순례에서는 초전지, 정각지, 열반지, 탄생지로 되어 있어서 순서가 맞지 않습니다. 거리와 시간의 문제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보입니다.

“누가 이 가르침을 신속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초전지 사르나트에서 부처님은 다섯 명의 수행자에게 처음으로 자신이 깨달은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이에 대한 가장 자세한 이야기는 율장대품에 실려 있습니다. 니까야에는 부분적으로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어서 전체를 보기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과 초전과 관련해서는 율장대품을 참고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전재성 님 역의 율장대품에서 초전과 관련하여 ‘가르침의 바퀴를 굴림에 대한 이야기’가 17페이지에 걸쳐 소개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이 사함빠띠 브라흐마의 청원으로 가르침을 설하기로 결정하고 길을 떠나는 장면 이후에 대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고민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기 어려운 심오한 진리를 이해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에게 가장 먼저 가르침을 설할까? 누가 이 가르침을 신속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Vin,I.7)라며 고민했습니다.

부처님은 한때 스승이었던 알랄라 깔라마와 웃따까 라마뿟따를 떠 올려 보았지만 하늘사람으로부터 이미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붙잡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붙잡고 이야기 해 보았자 그들을 귀찮게 할 뿐이고, 또한 이해 못하는 자들에게 설명해 보았자 피곤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이전에 자신과 함께 수행 했던 다섯 명의 수행자들입니다. 그들이라면 진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 사르나트 유적지

부처님은 길을 떠났습니다. 보드가야에서 바라나시까지 240여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입니다. 걸어서 2주가량 걸리는 거리라 합니다. 길을 가는 도중에 외도 우빠까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인연 없는 중생 우빠까는 “그럴지도 모르지요”라며 고개를 위아래 끄덕거리며 샛길로 사라졌습니다.

부처님은 마침내 바라나시 사르나트에서 고행하고 있는 다섯 명의 수행자와 만났습니다. 다섯 명의 수행자들은 처음에는 환대하지 않았습니다. 고행을 포기하고 떠난 자에 대하여 타락한 수행자로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점차 가까이 올수록 태도는 변했습니다. 저절로 허리가 굽혀지고 발 씻을 준비해 오기에 이르렀습니다.

부처님은 다섯 수행자에게 “수행승들이여, 출가자는 두 가지 극단을 섬기지 않는다.”라며 처음으로 설법하기 시작 했습니다. 이는 극단적인 쾌락추구와 극단적 고행에 대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이와 같은 양극단을 처음 언급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율장대품에서는 부처님과 다섯 수행자 사이에 고행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무려 세 페이지에 걸쳐서 언급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이 고행을 포기하고 떠난 것에 대한 다섯 비구의 이의 제기에 대한 부처님의 긴 설명이 그것입니다.

부처님은 결코 고행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이 포기한 것은 극단적인 고행입니다. 극단적 고행에 대한 이야기는 <맛지마니까야> ‘사자후에 대한 큰 경(M12)’에 상세하게 실려 있습니다. 극단적 고행에 대한 회고의 경이라 볼 수 있습니다. 고행이 없이는 진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감관을 수호 하는 것, 두타행을 하는 것, 정진하는 것 등은 극단적 고행이 아니라 일반적 고행입니다. 이런 고행은 진리를 성취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입니다. 다섯 수행자가 이의를 제기 했을 때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나는 윤택하게 살지 않으며 정진을 포기하지도 않았고 사치에 빠지지도 않았다.”(Vin.I.9)라고 말씀 했습니다.

부처님은 고행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정진 했던 것입니다. 정진도 일종의 고행이라 볼 수 있습니다. 외도들이나 하는 극단적 고행을 포기하고 정진했을 때 마침내 ‘위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anuttaraṃ sammāsambodhiṃ: 無上正等正覺)’을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초전(初轉)은 우주적 빅뉴스

부처님이 무상정등각을 설명해 주는 과정은 <초전법륜경>에 상세히 실려 있습니다. 다섯 명중에 가장 먼저 꼰당냐가 이해했습니다. 이 장면에 대하여 “그 가르침을 설할 때에 존자 꼰당냐에게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S56.11)라고 되어 있습니다. 꼰당냐에게 법안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가장 먼저 안 것은 초전지의 땅의 신입니다.

땅의 신은 “세존께서 바라나시 시의 이씨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에서 어떠한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하느님이나 세상의 어떤 사람도 멈출 수 없는, 위없는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리셨다.”라고 소리쳤습니다.

꼰당냐에게 생멸의 지혜가 생겨났습니다. 그렇다고 꼰당냐가 ‘내가 알았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법안이 열린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땅의 신은 우주적 사건이 일어 났음을 큰 소리 쳤습니다. 이런 빅뉴스는 곧바로 사대왕천에 전달되었고, 사대왕천은 삼십삼천에게, 마침내 하느님(Brahma; 梵天)의 귀에 까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인 무상정등각을 최초로 안자는 사함빠띠 브라흐마입니다. 그런데 가르침을 듣고 최초로 이해한 자는 꼰당냐입니다. 법의 바퀴가 굴러 가는 역사적인, 아니 우주적인 순간입니다. 그것은 드디어 죽음으로부터 탈출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태어나지 않게 되어 윤회에서도 벗어 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천상에 사는 신들은 복과 수명이 다하면 어떤 비참한 존재로 태어날지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불사의 진리의 수레바퀴가 구르기 시작했다는 것은 자신들도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음을 말합니다. 그래서일까 하느님의 귀에 까지 들어가게 되었을 때 경에서는 “일만 세계가 움직이더니 흔들리고 크게 진동했다. 무량하고 광대한 빛이 신들과 신들의 위력을 뛰어넘어 세상에 나타났다.”(S56.11)라고 묘사 되어 있습니다.

▲ 붉은 벽돌만 남은 사르나트 유적지

<초전법륜경>을 빠알리어로 모두 외운바 있습니다. 한 달 보름가량 걸렸습니다. 다 외웠을 때 마치 커다란 깨달음을 이룬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초전법륜경>을 독송할 때 기쁨과 환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을 제대로 알고 독송하면 환희심이 일어난다고 하는데, <초전법륜경>도 마찬가지라 봅니다. 그렇다면 <초전법륜경>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초전법륜경>은 부처님이 최초로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린 것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리즈로 엮어져 있는 율장대품을 보면 초전륜이 단지 ‘가르침의 바퀴를 처음 굴리셨다.’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꼰당냐가 처음 가르침을 이해했을 때 부처님은 “꼰당냐는 궁극적인 앎을 얻었다. 꼰당냐는 궁극적인 앎을 얻었다. (aññāsi vata bho koṇḍañño, aññāsi vata bho koṇḍaññoti)”(전재성 님 역) 또는 “참으로 꼰단냐는 완전하게 알았구나, 참으로 꼰단냐는 완전하게 알았구나”(각묵스님 역)라 했습니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말씀에 어떤 이는 ‘인가’라 합니다. 그러나 더 정확한 의미는 ‘확인’이라 봅니다. 깨달은 것을 최초로 말 했을 때 알아들었음을 확인 한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말을 했을 때 이해한다면 전달이 잘 된 것입니다. 더구나 탐욕으로 물든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위없는 진리를 설명했을 때 이를 알아들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기쁘기 그지없을 것입니다. 부처님도 그랬을 것이라 봅니다. 그래서 ‘꼰당냐가 내가 성취한 진리를 이해했구나’라는 취지로 말한 것이라 봅니다.

▲ 다메크 스투파를 돌고 있는 순례자들

아라한이 되는 가르침

꼰당냐에게 생멸의 지혜가 생겨난 것은 견도(見道)의 단계에 불과한 것입니다. 진리의 맛을 본 것입니다. 그러나 남아 있는 번뇌가 있습니다. 탐욕, 성냄 등 남아 있는 번뇌를 소멸하려면 최장 일곱 생을 더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준비된 수행자라면 현생에서도 가능할 것입니다. 부처님이 찾아간 오비구도 그랬습니다.

다섯 명의 수행자들은 부처님의 설명을 듣고 모두 법의 눈이 열렸습니다. 깨달음이 증명된 순간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제대로 찾아 간 것이라 봅니다. 외도나 일반 사람들이라면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 수행력이 뒷받침 된 근기 있는 수행자들이었기 때문에 ‘진리의 눈(Dhamma cakkhu: 法眼)’이 생겨난 것입니다.

부처님은 다섯 수행자에게 “수행승이어, 오라! 가르침은 잘 설해졌으니, 그대는 괴로움의 종식을 위해서 청정한 삶을 살아라!”(Vin.I.12)라며 구족계를 주었습니다. 다섯 수행자는 비구가 되었습니다. 불교역사상 최초로 승가가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다음 단계는 오비구를 아라한으로 만드는 단계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단계적으로 성취됩니다. 법안이 생겨서 견도 단계가 되면 이제 본격적으로 수행해야 합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결박의 경(A10.13)’에서 “수행승들이여,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과 다섯 가지 높은 단계의 결박이 있다.”(A10.13)라 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견도의 단계는 수다원이고, 오하분결에서 탐욕과 성냄이 옅어진 단계는 사다함이고, 오하분결이 모두 풀린 상태가 아나함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라한의 단계는 오상분결이라는 미세한 번뇌가 모두 풀린 상태를 말합니다.

율장대품에 따르면 부처님은 오비구에게 무아의 가르침을 설합니다. 이를 <상윳따니까야>에서는 ‘다섯 명의 경(22.59, 無我相經)’이라 하여 별도의 경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율장대품에서는 쭉 이어져 있습니다.

부처님은 진리의 눈이 생겨난 오비구에게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내가 아니다. 만약 이 물질이 나라면 이 물질에 병이 들 수 없고…”로 시작되는 무아의 가르침을 설했습니다. 색, 수, 상, 행, 식으로 이루어진 오온은 조건에 따라 생겨나고 조건에 따라 사라지는 것으로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오온에 대하여 싫어하여 떠나면 사라지고, 사라지면 해탈한다고 했습니다. 마침내 부처님이 그랬던 것처럼 “그가 해탈할 때 ‘해탈되었다.’는 궁극의 앎이 생겨나서,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은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Vin.I.14)라고 가르쳤습니다.

여섯 아라한의 의미는?

부처님이 오비구에게 최초로 설한 것에 대하여 ‘가르침의 바퀴를 굴렸다’라 합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가르침을 이해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좋은 생각이 일어나서 이를 테스트 했는데, 다른 사람도 똑 같은 결과를 내었다면 보편적인 것이 됩니다.

부처님이 고행을 버리고 보리수 아래에서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지극히 평등하고 원만한 깨달음을 얻었을 때 자신 혼자만 알고 있었습니다. 이를 누군가에게 실험해야 했습니다. 마침 생각난 것이 준비된 수행자들이었던 꼰당냐 등 오비구입니다.

오비구들은 마침내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아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행했을 때 부처님이 증득했던 것과 똑 같은 결과를 내었습니다. 마치 의사가 임상시험을 했을 때, 이를 다른 의사들도 똑같이 시행해서 똑 같은 결과를 낸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오비구에게 무아의 가르침을 설했을 때 역시 자신의 경험했던 것과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된 것을 알았습니다. 이에 율장대품 ‘가르침의 바퀴를 굴림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게 대미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세존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다섯 명의 수행승들은 세존의 말씀에 환희하여 기뻐했다. 그리고 이러한 설법이 행해지는 동안에 다섯 명의 수행승들의 마음은 집착 없이 번뇌에서 해탈했다. 이로써 세상에 여섯 명의 거룩한 임이 생겨났다.”(Vin.I.14)

부처님은 사성제를 설할 때 꼰당냐에게서 법의 눈이 생겨난 것을 보고 자신이 깨달은 진리가 틀림없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다섯 비구에게 오온에 대한 무아의 가르침을 설했을 때 오비구가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은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알아 아라한 선언을 했을 때 자신과 똑 같은 경지가 되었음을 확인했습니다. 바로 그 말이 “이로써 세상에 여섯 명의 거룩한 임이 생겨났다. (Tena kho pana samayena cha loke arahanto honti)”라는 말입니다.

부처님도 아라한입니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게 된 사실을 알게 된 오비구 역시 아라한입니다. 굳이 차별을 두자면 부처님은 ‘대아라한’이라 할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모두 아라한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요? 부처님이 처음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렸을 때 타인들도 그대로 깨닫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불완전한 것이라거나 미완성이 아니라 누구나 가르침을 실천하면 보편적인 깨달음이라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 다메크 수투파를 돌고 있는 진주선원불자들

다메크수투파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자리는 부처님이 오비구에게 설법했던 자리일 수 있습니다. 또한 수많은 순례자들이 머물던 자리일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이천오백여년 전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아니 우주적 장소에 앉아 있습니다.

공간은 그대로입니다. 시간은 흘러 사람은 가고 없습니다. 해가 이천육백여 번 바뀌는 동안에 수많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동방의 순례자들이 이곳을 잊지 않고 찾았습니다. 빠알리 챈팅을 하고 <초전법륜경>을 함께 읽었습니다. 분위기가 좋습니다. 시간은 다르지만 공간을 함께 해서일 것입니다. 그날의 기분을 당일 날 페이스북에 이렇게 올려놓았습니다.

“경전 속에서만 보던 곳에 와 있습니다.
정말 오랫동안 꿈꾸던 곳입니다.
율장 대품에서처럼 정말
이곳이 바로 그곳이란 말인가.
준비해간 흰 가사를 걸쳤습니다.
편단우견이라 하여 빅쿠처럼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었습니다.

흰옷은 재가불자의 상징입니다.
이른 아침 사르나트에는
세계 각국 불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경건한 자세로 탑돌이 합니다.
어떤 이들은 큰소리로 예경합니다.
다메크 탑 앞에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흰 가사를 입은 자들이 예경했습니다.
부처님이 오비구에게 설법했던
‘초전법륜경’을 함께 독송했습니다.

잠시 입정에 들어갔습니다.
귀에는 새소리가 크게 들립니다.
오비구에게 설법했을 때도
새소리가 유별났을 겁니다.
땅바닥에 손바닥을 대었습니다.
부처님이 설법했던 그 땅입니다.
땅의 감촉을 느껴봅니다.
이곳은 부처님의 숨결이 있는 것입니다.”

상쾌한 공기를 흠뻑 마셨다

8박9일의 짧은 순례기간은 늘 시간에 쫓기는 일정이 되었습니다. 초전지 사르나트에서 주어진 시간은 불과 한 시간여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빠알리 챈팅과 <초전법륜경> 독송과 10분간 입정, 그리고 등현 스님의 법문으로 채워졌습니다. 등현 스님은 사르나트 근처 ‘한국 절’에 머무는 스님으로서 원담 스님이 진주선원 불자들과 함께 왔다는 연락을 받고 나와 주셨습니다.

등현 스님은 <초전법륜경>에서 양극단에 대한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기에 다음 행선지 보드가야로 가려면 6시간 동안 차를 타야 해서 여행자 사장은 안절부절 못한 것 같았습니다.

사르나트를 다 보지 못했습니다. 보아야 할 것이 많음에도 눈으로 보는 것으로 그쳤습니다. 제대로 보려면, 제대로 느끼려면 며칠 또는 몇 달 머물면서 보는 것이 이상적일 것입니다. 비록 짧은 순간이지만 충분히 본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현지에서 지(地), 수(水), 화(火), 풍(風)으로 느꼈다면 과거와 현재가 관통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무엇이든지 처음 경험은 오래 갑니다. 처음 경험했던 것은 오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매우 짧게 사르나트에 남아 있었지만 상쾌한 공기를 흠뻑 마셨습니다. 그리고 촉촉한 땅바닥을 느꼈습니다. 챈팅하면서, 독송하면서, 명상하면서 모든 것을 다 느꼈습니다.

[이 기사에 대한 반론 및 기사제보 mytrea70@gmail.com]

"이 기사를 응원합니다." 불교닷컴 자발적 유료화 신청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반야검 2018-08-22 15:39:49
거룩한 '님'이겠지요.
님과 임은 문법상 분명히 구분하고 있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11길 16 대형빌딩 4층
  • 대표전화 : (02) 734-7336
  • 팩스 : (02) 6280-255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만
  • 대표 : 이석만
  • 사업자번호 : 101-11-47022
  • 법인명 : 불교닷컴
  • 제호 : 불교닷컴
  • 등록번호 : 서울, 아05082
  • 등록일 : 2007-09-17
  • 발행일 : 2006-01-21
  • 발행인 : 이석만
  • 편집인 : 이석만
  • 불교닷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불교닷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san2580@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