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불교의 미래와 계율정신의 회복
한국 불교의 미래와 계율정신의 회복
  • 박병기/한국교원대 교수
  • 승인 2018.08.14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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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제3회 정평불교포럼 발표4/박병기 직선제 대중공사 재가위원장

한국 불교의 미래와 계율정신의 회복

박병기(직선제 대중공사 재가위원장)

Ⅰ. 머리말

미래는 현재와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차별화되는 연속성과 차별성을 지닌다.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찰나의 순간만을 감각적 느낌을 위한 만들어진 개념으로 인지하는 불교의 시간관은 우선 과거와 현재, 미래 사이의 뗄 수 없는 관련성을 강조한다. 오늘은 어제의 산물이고, 내일은 오늘의 산물이라는 관점이다. 그 안에서 고정된 정체성을 지니지 못하는 우리 존재자들은 업(業)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그 흐름에 몸과 마음을 내맡기는 ‘가상적’ 행위 주체들일 뿐인지 모른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 인간들은 그 흐름을 볼 수 있는 깨달음의 역량을 갖추고 있는 존재자들이기도 하다. 그 흐름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는 어리석음을 직시함으로써 우리는 그 질긴 업장을 소멸시키고 이전과는 질적으로 차별화되는 삶을 이끌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깨달음의 길이고, 그 과정이 수행의 길이다.

‘21세기 초반 한국불교가 위기에 처해있다.’는 명제는 당연히 비판적 검토의 대상이다. 우선 ‘21세기 초반 한국불교’라는 개념 정의부터 따져볼 수 있다. 이 개념은 시간적 한계와 공간적 한계를 전제로 해서만 성립될 수 있고 나아가 그 현재성에 주목하는 개념이지만, ‘한국불교’라는 개념의 내포와 외연은 모두 시비의 대상일 수 있다. 그것이 과연 구체적인 한국불교계, 즉 대한불교조계종으로 상징되는 현재 우리의 불교계를 지칭하는 개념인지, 아니면 ‘종교로서의 불교’라는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는 어떤 현상을 지칭하는 개념인지를 물을 수 있다.

후자는 주로 종교학자들과 종교사회학자 등의 관심사 속에서 등장하고, 그렇게 등장하는 한국불교는 한국인들의 정신적·물질적 삶의 영역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고 또 미칠 수 있는지를 탐색하는 기초 개념으로 활용될 수 있다. 이러한 논의의 흐름과는 일정하게 차별화되면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한국불교는 조계종단으로 상징되는 구체적인 불교공동체를 전제로 한다. 대승불교의 전통 위에 서 있는 이 불교는 승가공동체와 재가공동체의 사부대중을 주인공으로 삼아 현재에 이르고 있는 문화전통이자, 가톨릭, 개신교와 함께 현재 한국인들의 종교생활을 지배하는 대표적인 제도종교이다.

이런 의미의 한국불교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진단에 대해서는 누구라도 수긍할 수밖에 없는 많은 증거들이 제시되어 있다. 본래적 의미의 종교를 생각하면 차마 떠올릴 수조차 없는 비리와 추문들이 널리 알려져 있고, 저들이 왜 존재하고 있을까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위태로우면서도 애처로운 초상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한국 불교의 미래를 말할 수 있을까? 그 미래가 과거 및 현재와의 연계성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불교의 관점을 전제로 한다면,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해서 그 안에서 작동하는 업(業)의 흐름을 직시함으로써 미래를 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미래에 희망을 담을 수도 있다고 답변할 수 있다.

Ⅱ. 20세기 한국불교의 굴곡과 극복 과제: 왜색불교와 계율정신의 실종

우리 한국인에게 20세기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굴욕과 저항으로 다가왔다. 을사늑약과 의병운동, 강제합방과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등으로 이어진 20세기 초반부는 양반 지배층의 도덕성과 정치적 역량에 기대 보다 많은 사람을 위하는 위민(爲民)이라는 조선의 이상이 지니는 시대적 한계와 도전 속에서 맞은 것이기도 했다.

우리 불교는 그 상황 속에서 이중적인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하나는 일제 식민지주의자들의 억압과 지배라는 일반적인 도전이고, 다른 하나는 천민으로 전락했던 승려 신분의 회복과 물질적 기반 구축 기회라는 특수한 도전이었다. 이러한 상반된 도전 속에서 당시 승려들은 대체로 후자의 흐름에 동참함으로써 상당한 지위와 권력, 자본까지 획득하는 길을 걷는다. 이른바 친일불교가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도전 속에서 전자에 주목하면서 나라의 독립과 불교의 종교성을 회복하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이루어내고자 하는 귀한 시도들이 있었다. 3.1운동 민족지도자로 참여한 만해와 용성이 그 시도들을 상징한다. 이 두 사람은 각각 종단의 중심과 주변에서 다른 방식으로 저항하면서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지켜내고자 노력했고, 일정한 성공과 좌절을 동시에 맛보아야 했다.

성공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3.1운동과 독립 운동 자체이고, 좌절로는 급속한 왜색불교화와 계율의 쇠퇴를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성공과 좌절은 광복 이후 우리 불교의 상황에 그대로 영향을 미치는 업으로 작동했고, 그에 따른 보(報)는 21세기 초반인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왜색불교는 대처승단의 주도권 확보와 노골적인 친일로 이어졌고, 광복 이후의 상황 속에서는 대통령 유시에 기반한 타율적인 ‘정화’의 굴곡으로 이어졌다. 1962년 출범한 대한불교조계종은 외형적으로 왜색불교의 잔재인 대처승단을 비판하면서 ‘청정 비구, 비구니 승단’이자 ‘우바새, 우바이’가 주요 구성원으로 참여하는 사부대중공동체의 지향을 내세웠지만, 승단의 핵심 기반인 계율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함으로써 지속적인 위기 상황을 노정시켜야만 했다.

조계종단 핵심 지도층의 은처자 의혹은 그 중에서도 기본적인 오계(五戒) 중 하나인 불사음계(不邪淫戒)를 위반하는 것이어서 종단 자체의 존립 기반을 스스로 허물어뜨리는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고, 불행히도 이 충격이 누적되면서 승단 구성원들 사이에서는 큰 문제가 아니라는 무감각과 면역 현상마저 만연해 있다. 최근의 총무원장 스님들이 거의 모두 이런 은처자 의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런 현상을 상징하는 사건들이다.

우리에게 20세기 초반 식민지 경험은 전통 신분제 사회의 자율적인 극복의 과정 상실과 힘 있는 자에게 적극적으로 빌붙음으로써 생존은 물론 상당한 정도의 지위와 권력까지 보장받을 수 있다는 식민지 마름의 현실인식을 사회정의로 포장하게 만드는, 소피스트적 파국의 결과를 낳았다. 다시 말해서 지주에게 붙어 소작인을 착취하는데 앞장섬으로써 자신의 생존 기반과 알량한 권력을 보장받고자 했던 부정적인 의미의 마름의식이 전 국민에게 확산되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이 마름의식은 미 군정기를 거치면서 숭배의 대상을 미국으로 바꾸는 친미적 성향의 고착화로 이어졌고, 현재까지도 특히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이른바 ‘기지촌 지식인’의 이중적 삶을 일상화하게 하는 불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현상은 불교계 안에서도 당연히 재생되고 있다. 재가보살과 출가보살 모두의 깨달음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처한 상황에 따른 차별화 가능성 또한 수용하는 대승불교의 정신은 현재 조계종 종헌에도 명료하게 제시되어 있다

“조계종단은 조선시대 500년의 불교 탄압에도 꺾이지 않고 실낱같이 불조의 혜명을 이어오면서 정혜쌍수(定慧雙修)와 이사무애(理事無礙)를 드높이며, 대승불교의 부처를 이루고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행을 실천하여 온 것이다.”(조계종 종헌 전문 중에서,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편, 『계율과 불교윤리』, 조계종출판사, 2011, 250쪽)

“이와 같이 보살이 배워야 할 세 가지 계장에 대해 부지런히 닦아 배우려 하는 이는, 재가자이거나 출가자이거나 간에 먼저 위없이 바르고 평등한 보리의 큰 서원을 세운 뒤에 법을 같이 하는 보살로서, 이미 큰 서원을 세워 지혜도 있고 힘도 있고 말로 표현하는 뜻도 있어 깨칠 수 있는 이를 찾아 구해야 한다.”(『유가론』 「보살지」 중에서, 여기서는 원영 편저, 『대승계의 세계』, 조계종출판사, 2012, 291쪽에서 재인용)

보살계의 기반은 출가보살과 재가보살의 공존과 자율성이다. 다만 수행의 과정에서 처할 수 있는 상황의 차이를 인정하고 있을 뿐이다.

“보살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재가보살이요 둘째는 출가보살이다. 재가자에게는 여섯 가지 무거운 법이 있고 출가자에게는 여덟 가지 무거운 법이 있다. 이 법들 가운데 보살이 어느 하나 또는 모두를 범하면, 현재에 한량없는 무상보리를 장엄할 수 없고 마음을 고요하게 할 수 없다. 이는 이름만 보살이지 진정한 보살이 아니다. 당연히 사문이라 부를 수 없고 바라문도 아니어서 최상의 지혜에 바르게 나아갈 수 없다.”(『보살선계경』 「우바라문보살수계법」 중에서, 원영 편저, 위의 책, 370쪽에서 재인용)

두 보살 사이의 차이는 계율의 양적인 차이이지 질적인 차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색불교의 그림자는 그러한 양적인 차이를 질적인 차이로 상정하게 하여 승가에 대한 재가의 수직적인 복종과 타율성을 고착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 스님, 우리 스님!’이라고 부르면서, 그 어떤 추문에도 흔들리지 않는 재가보살의 굴종적인 신앙이 그 어두운 그림자의 일단이다. 『유가론』에서 말하는 ‘큰 서원을 세워 지혜도 있고 힘도 있고 말로 표현하는 뜻도 있어 깨칠 수 있는 이’는 당연히 출가보살로 한정되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인정하고 또 존중해야 하는 것은 더 많은 수의 중계(重戒)를 기꺼이 수지하면서 수행과 깨달음의 과정에서 수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출가보살과 승가공동체일 뿐이다. 20세기 초반 한국불교에 정착한 왜색불교의 짙은 그림자는 바로 그 계율정신의 마비와 왜곡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것은 곧 한국불교 자체의 왜곡이자 타락이며 소멸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Ⅲ. 계율정신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그렇다면 한국불교의 미래는 현재의 계율정신 실종 현상을 직시하면서 회복 방안을 적극적으로 마련함으로써만 희망적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결코 쉽지 않은 과제다. 재가보살과 출가보살 모두에게 계율은 곧 일상의 삶이자 몸의 움직임을 이끄는 준거이기 때문에 계율정신의 회복은 자신의 일상과 몸의 변화와 회복을 수반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작은 습관을 바꾸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돌아보면 계율정신의 회복은 쉽게 설정하기 어려운 지난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로 그런 어려움의 현실화가 현재와 같은 타락과 그 타락에 대한 변명과 무감각의 일상화임을 생각해보면, 이 길 외에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도 부정할 길 없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출가보살만의 범계를 문제 삼지 않아야 한다는 당연한 전제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수행에 전념하고자 출가를 감행한 출가보살들이 그 수행에 더 적합한 환경을 지니고 있다는 석가모니 붓다의 전제는 시대상황의 변화에 따라 상당한 정도의 변화와 마주하고 있다. 우선 세속과의 연결망이 인터넷에 의해 혁명적으로 확충되었고, 다양한 방식으로 돈을 직접 만질 수 있게 된 우리의 출가보살들은 그 돈으로 어떤 일도 할 수 있는 ‘자유의 과잉’으로 내몰리고 있다. 도박과 성매매, 이른바 명품의 일상적인 소비 등이 그런 과잉에 노출된 결과물들이다.

재가보살의 경우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을 불교도, 또는 재가보살이라고 스스로 칭할 수 있으려면 당연히 보살계를 받아서 지키고자 노력해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 재가보살 중에서 이러한 최소한의 계율정신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어느 정도일지에 대해서는 낙관적인 답을 주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번 위기를 계기로 우리의 계율을 다시 보면서 그 정신의 회복을 꾀하고자 하는 노력이 재가와 출가 모두에게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 출발점도 재가보살이 먼저 나서서 마련함으로써 출가보살에게 모범을 보이고 또 변화를 촉구할 수 있는 기반을 닦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런 전제 속에서 계율정신의 회복을 위해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과제 중 몇 가지를 제시함으로써 발제자로서의 역할을 대신해 보고자 한다.

가. 초기계율과 보살계 전통의 통합과 재구성이 필요하다.

현재 우리 불교는 초기계율에 속하는 <사분율>과 보살계를 모두 받아들여 수지하는 계율 전통을 지니고 있다. 그러다보니 출가보살이 너무 많은 계율에 노출되는 결과가 나타나고 있고, 자신이 수지하겠다고 받아들인 계율이 무엇인지 조차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과 직면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 승가공동체의 적극적인 인식과 대응이 필요하다. 사분율의 비구계와 비구니계는 당연히 승가공동체 구성원들의 몫이다. 스스로 나서서 현 시대상황과의 부합성이나 미래지향성 등을 감안하여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지를 고려하고 실천하는 몫도 당연히 출가보살들의 몫이다. 한국불교계에서 율사들의 목소리가 더 커져야 하지만, 그 크기가 단순한 계율의 강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해석과 재구성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 바탕 위에서 보살계 전통을 재해석하고, 꼭 지킬 수 있고 지켜야 하는 것만을 중심으로 계율의 항목을 최소화하면서 적극적으로 지켜가는 방향으로의 재구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나. 금지의 도덕과 권유의 윤리를 구분해야 한다.

계율을 포함한 모든 도덕규범에는 해서는 안 되는 금지의 도덕과 더 나은 목표를 위한 마음가짐과 실천을 권유하는 권유의 윤리가 함께 포함되어 있다. 불교계율에서 금지의 도덕에 속하는 대표적인 것은 당연히 오계(五戒)이다. ‘살인하지 말라’거나 ‘거짓말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음행을 하지 말라’, ‘술을 마시지 말라’ 등의 다섯 가지 계율은 출가와 재가를 통틀어 모두 지켜야 하는 금지의 도덕이다. 그것은 다시 법적인 처벌을 감수해야 하는 법적 차원의 금지와 도덕적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도덕적 차원의 금지로 나뉜다. 거짓말과 술, 음행에 관련된 계율이 주로 후자에 속하고, 살인과 도둑질에 해당하는 계율이 전자에 속한다.

이러한 금지의 도덕과 함께 보살계에는 권유의 윤리에 속하는 계율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특히 대승계의 체계적인 완성으로 평가받기도 하는 삼취정계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시민이면서 동시에 사부대중공동체의 구성원인 출가보살과 재가보살이 시민윤리와 수행공동체의 계율을 조화시키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차원의 율의계(律儀戒)와, 몸과 입, 뜻으로 지어가는 모든 악업을 경계하면서 선함을 쌓아가는 섭선법계(攝善法戒), 모든 존재의 평화와 행복을 바라는 자리이타행을 지향하는 요익중생계(饒益衆生戒)가 그 셋이다.

금지의 도덕에 속하는 계율을 어긴 경우에는 엄격하고 엄정한 처벌이 따라야 한다. 출가보살에게는 승단추방과 같은 조치를 즉각적으로 취해야 하고, 재가보살에게도 재가공동체로부터의 소외와 추방이라는 처벌이 가해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 불교계에서는 이러한 처벌 자체가 유명무실해짐으로써, 금지의 도덕에 속하는 계율을 어기고서도 상응하는 처벌은커녕 양심의 가책조자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듯한 모습이 자주 노출되고 있다. 하루 빨리 극복해야 하는 부정적인 계율문화이고, 그런 점에서 최근에 재가공동체 중 하나인 정의평화불교연대 구성원들 사이에서 공식적인 모임에서는 불음주계를 철저히 준수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진 일은 주목받을 만한 현상이다.

다. 재구성된 계율을 기반으로 시민사회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현재 우리 불교공동체의 구성원 모두는 한국 시민사회의 구성원이자 대한민국 국민이다. 시민사회 안에서 종교 또는 종교공동체의 위상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단 하나의 해답은 있을 수 없고 또 있어서도 안 된다. 각각의 시민사회가 시대상황에 따라 다르게 규정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조차 지속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늘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확실한 사실은 이제 더 이상 특정 종교공동체가 국가나 시민사회로부터 고립된 것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불교계는 그동안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국가의 법에 호소하거나 종교의 자율성을 번갈아 내세우는, 일관성 없는 모습으로 많은 비난을 받아왔다.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와 그 자유를 적극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제도종교의 상대적인 자율성은 당연히 요구할 수 있고 또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 그 자유와 자율은 당연히 시민사회가 제도종교에 기대하는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것을 전제로 성립될 수 있을 뿐이다.

시민사회는 제도종교에 자신의 구성원인 시민들의 정신적 안정과 삶의 의미 물음에 대한 적극적인 해답 제시, 시민공동체 자체의 정신적 지향에 대한 적극적인 실천 등을 기대한다. 그런 기대에 최소한으로 부응하기 위해서는 제도종교가 당연히 도덕성과 청정성의 기반 위에 서 있어야만 하고, 더 적극적인 영역에서는 사회의 구조적인 부정의에 저항하면서 각 종교의 지향에 부응하는 사회정의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 현대사 속에서 특히 가톨릭의 경우 일정 시기 동안 이러한 적극적인 역할을 해냄으로써 현재까지도 상대적으로 높은 신뢰를 받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그런 적극적인 목소리와 실천은 자신의 종교내의 종교적 청정성과 도덕적 정당성 기반이 확보되어 있을 때라야 비로소 시민사회 속으로의 확산이 가능해진다. 최근 언론매체에 지속적으로 노출되고 있는 개신교와 가톨릭, 불교계 모두의 추악한 모습들은 그런 청정성과 정당성이 종교계 내부에 확보되어 있는지에 대한 광범위한 의구심을 불러내기에 충분하고도 넘친다. 특히 조계종단으로 상징되는 불교계의 경우는 한국 가톨릭과 함께 비교적 단일한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음으로 인해서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비리와 그 은폐에 취약할 수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에 대한 대응은 당연히 종교계 구성원 개인을 문제 삼는 개인윤리에서 벗어나 사회윤리의 차원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도덕과 종교는 당연히 다르다. 그런 점에서 종교의 계율과 시민사회의 도덕은 일정한 차별성을 지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견해일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의 금지의 도덕 차원에서는 그 차별성이 오히려 종교계율의 더 엄격한 적용과 처벌로 구체화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 불교계에서는 이러한 최소의 금지도덕에 대한 의식마저 희미해져가고 있다. 계율의 적극적인 해석과 재구성을 전제로 이 지점의 문제점을 적극적으로 부각시켜 극복해가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시민사회와의 바람직한 관계설정도 가능해질 수 있고 또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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