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운동과 삼각산
삼일운동과 삼각산
  • 김규순
  • 승인 2018.03.02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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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김규순의 풍수이야기 125.
▲ 삼일독립선언서 _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은 이미 경술국치일인 1910년 8월29일에 망했다. 그로부터 8년 6개월여의 세월동안 지구상에서 사라진 조선의 혼이 떨쳐 일어난 것이 기미독립만세운동이다. 무엇이 조선의 민중들이 맨손으로 저항할 힘을 주었는가?

삼각산.

삼일독립만세운동이 분출한 에너지는 삼각산 정기였다. 우이동 삼각산 기슭에 자리잡은 ‘봉황각’이 3・1운동의 발원지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민족의 상징적인 산으로 민족의 영산 백두산, 단군이 점지했던 태백산이 있지만, 삼각산은 이 땅에서 살아온 우리의 민중의 가슴속에 맺힌 산이다.

고려 말 이곡은 ‘삼각산 봉우리가 훤히 보이는듯’이라고 노래했고, 정유길은 ‘삼각산푸른빛에 창 앞에 보이는데’라고 했으며, 김상헌은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라고 읊었고, 장유(張維)는 ‘둘러친 내와 언덕 삼각산에 연해있고’, 윤선도는 ‘삼각산에 먹구름이 날고 더욱 걸리는데’, 김창협은 ‘삼각산 봉우리만 아스라이 날 보내네’, 정약용은 ‘치솟은 삼각산이 철견과도 같았다네’라고 노래했듯이 우리의 가슴속에 삼각산은 일심동체였다. 삼각산은 비바람이 오나 눈보라가 치나 천둥번개가 울리고 가뭄이 들어도 애환을 같이 해온 피붙이 같은 산이었다.

▲ 삼각산의 정기를 머금은 봉황각

삼일독립선언서에 적힌 33인을 조선대표가 아닌 민족대표라고 한다. 전세계에 널리 퍼져있는 한민족의 대표였다. 그 민족대표 33인의 이름 중에 맨 처음에 손병희 선생이 적혀있다. 처음에 적혔다는 것은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손병희 선생이 ‘봉황각’을 1912년 건립하였다. 건립의 취지는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독립운동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전진기지였다.

경술국치(1910년)를 당하자 “앞으로 국권회복은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될 터이니 내 반드시 10년 안에 이것을 이루어 놓으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1912년에 심산유곡인 우이동에 봉황각을 짓고 독립운동을 위해 7회에 걸쳐 483명을 수련시켰으며,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5명이 봉황각에서 정신무장을 하였다.

‘봉황각’은 삼각산이 보이는 언덕에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호로 우뚝 서 있다. 삼각산의 정기가 머무는 길지에 봉황각을 세워 민족의 정기를 일깨웠던 요람이었다. 손병희 선생이 일신의 영화를 멀리하고 오직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여 새 시대 새 희망의 씨를 뿌린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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