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보이차는 안녕하십니까
당신의 보이차는 안녕하십니까
  • 한유미/한국차심평원장
  • 승인 2018.02.06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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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선생 한유미의 차와 놀자] (17) 묵은 보이차

우리가 애지중지하는 ‘오래된 보이차(묵은 보이차)’는 반세기 전만 해도 중국에서는 골칫거리 재고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 재고품이 오늘날 해를 묵힐수록 가치 있는 차로 등극하였다. 그 때문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품질에 상관없이 보이차는 무조건 오래 보관만 해두면 저절로 맛있는 차가 된다고 생각한다(자연 산화발효인 보이차 청병에 해당).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역설적이게도 ‘오래 묵혀두면 저절로 좋아 진다’가 만사형통이 될 때 도리어 우리의 눈과 혀가 어두워진다.

중국수교 이전에는 주로 대만을 통해 소량으로 퍼지던 보이차가 중국수교 이후 1990년대 초부터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는 희소성과 정보 부족 등으로, 구정물이라고 할 만한 찻물인지, 마실만한 찻물인지, 판단하는 사람도 없었고 판단을 해야 하는 물건이라는 것조차도 알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어떤 생소한 문화와 제품을 처음 받아들일 때, 시행착오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 하나의 과정이어서 부끄러울 이유는 없다. 그러나 잘못된 습관이나 개념이, 전통이나 관례 또는 처음이 맹목적 교리가 되어버린 고집(합리성이나 목표가 없이 근거 없는 일방적 집착)으로, 시간이 지나도 개선되지 않을 때 사회의 불치병이 되고 만다. 그래서 첫 단추를 잘 꿰지 않으면 바로잡기 어렵다는 말이 교훈이 되곤 한다.

보이차에 접근하는 방식은 처음과 지난 세월만큼 얼마나 달라졌을까.

‘오직 차를 오래 마셨다는 권리(연륜)’만이 전부인 ‘이상한 전문가’들은, 보이차를 무조건 저장해두면 더 좋아지지 나빠질 리가 없다고 한다. 아마 햇차의 자극이 부드러워지는 발효, 순화 자체를 품질로 오해해서일 것이다. 보관상 문제가 없이 순하게 발효가 잘 되어도 맛이 없는 경우가 많지만 사람들은 아직 잘 모른다.

우연히 경험한 아래의 에피소드는, 오래된 보이차의 범주에 속하는 ‘차의 가치’를 무엇에 두어야 할지 생각할 기회로 삼고자 한다.

차를 애호하는 스님들이 참 많다. 접대 음료로 사용하는 일이 많아서일 것이다. 필자가 어느 스님의 사무실에 막 들어섰을 때 방문객들이 마무리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분들이 나가고 스님의 안내에 따라 소파에 앉았다. 탁자 위에는 접대했던 보이차가 가득 든 투명한 티포트(차 우리는 플라스틱 용기)가 놓여있었다.

스님은 그 티포트에 뜨거운 물을 부어 넉넉한 잔에 가득 따라주었다. 찻잔을 코언저리에 갖다 대자 강력한 곰팡이 냄새가 콧속으로 훅 빨려들었다. 우려내던 차였음에도 곰팡이의 존재감은 확실했다. 처음에 양을 듬뿍 넣어서 그런지 곰팡이만 무시하면 농도도 좋고 달짝지근하여 한 잔을 가뿐히 비웠다. 보이차의 단맛이 간혹 다른 치명적인 단점을 덮는 구실이 될 때가 있다.

1990년대 생산된 청병이라고 했다. 스님이 부지런히 찻잔을 채워주는 대로 마셨다. 이른 더위가 유난했던 지난해 6월,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가는 ‘차 마시기 딱 좋은 시간(차를 맛보는 신체 민감도는 오전 11시 30분쯤이 가장 좋음)’이었다. 외형이 수수한 만큼 입담도 소탈한 스님은 차 심평 대회 참여(주최 측의 참여인원이었던 듯) 했던 얘기며 그 외 차에 대한 자신의 다양한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어찌나 재미가 있던지 홀린 듯 빠져들 정도였다.

그러나 뱃속 건강에 대한 찜찜한 불안감은 대화의 유쾌함과 다른 문제다. 세상에 태어나 곰팡이 찻물(곰팡이 맛)로 배를 채우기는 처음이었다. 족히 십여 잔을 마셨지만 마시는 잔마다 곰팡이냄새는 가실 기미가 없이 위세가 당당하였다. 그런 차가 너무 뜻밖이어서 일까. 어느 순간 잠깐은, 비현실적으로 찻자리가 느껴져 신기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차에 대한 그 스님의 거침없는 자신감이 대범함으로 보여서 그랬는지, 아무튼 일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차를 ‘제대로 맛보여 준다’는 말이 동기가 되어 방문했는데, ‘그런 차뿐’이었는지 ‘그것이 최대의 호의’였는지 ‘굳이 기대를 시킬 만한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인사말에 지나지 않았을 빈말이었는데 눈치 없이 곧이곧대로 들은 것이 아닌가’ 하는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날아다닌 건 곰팡이 보이차로 배를 채우고 나서였다.

그런 차를 마시고 접대용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내심 놀랍기는 했다. 그럼에도 함께 마셨고 스님에 대한 유감이 없어, 방문객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편이 나은 것 같아 차를 거절하지 않고 마셨다.

‘그 스님의 보이차’는 누군가가 특별히 거절을 하지 않는다면, 그 스님의 주변인과 방문객이 마셔서 소비될 것은 자명해 보인다. 그 스님의 사무실을 나와 10여 분이 채 지나지 않아 뱃속이 서서히 보글거렸다. 약한 불에서 500원짜리 동전만한 거품이 끓어오른 듯 보글거려 소파에 의지했다. 보글거림이 시작된 지 5분이 지나지 않아 뱃속이 따끔거렸다. 강도는 약했지만 아주 예리한 따끔함이 산발적으로 뱃속을 찔렀다. 병이 흔적을 남기는 것처럼 곰팡이의 반란은 증상을 안겼다. 그 스님의 뱃속은 안녕하신가‥…. 10여 분이 지나 괜찮아졌다.

▲ 여러 가지 보이차. 기사 내용과 직접 관련 없음. (사진=네이버 이미지 갈무리)

차를 구입을 할 때, 이미 그 지경이 된 차를 저렴해서 구입했는지, 알면서도 곰팡이를 발효의 개념으로 생각하여 구입했는지, 멋모르고 샀다가 세월이 흘러 알고 보니 어쩔 수 없어서 억지로라도 마시면서 없애는 중인지, 구입할 때는 멀쩡했는데 어쩌다 관리를 잘못하여 그리 되었는지, 심층적으로 궁금했지만 입을 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스님의 선택에 대한 권한도 없지만, 무엇보다 그런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그 스님의 인상이 자연스럽고 강해서였다.

누구라도 많은 돈을 투자하여 재어둔 보이차를 문제가 있다고 해서 쉽게 물리지는 못할 것이다. 비싼 차(오래된 비싼 차들은 극소수에 한정)가 아니더라도 물량의 규모에 따라 액수가 불어나는 것이 보이차시장이다. 여러 차 중에서 보이차는 특히 차의 가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돈에 봉사하는 차(돈의 향기에 지배되는 돈차)’로 전락하여 사람의 가치가 훼손될 염려가 늘 존재한다.

만약 그 스님과 똑같은 차를 다른 누군가가 갖고 있지 말라는 법 없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활용할까. 뱃속 체력만 괜찮다면 마셔 없앨까? 팔아치울까? 눈 딱 감고 버릴까? 아는 사람들에게 선물로 인심이나 쓸까. 차계는 이런 일들로 애환이 끊이지 않는다.

불과 십 수 년 전만 하더라도, 보이차의 저장성(미래가치)을 보증하는 근거가 되는 인자들에 대한 학문적 자산과 경험이 부족했었다. 그래서 보이차는 무조건 ‘세월이 약’이라는 바람직하지 않은 논리가 더 깊게 확산되었다. 지금은 가공이나 저장환경에 따른 품질과의 관계에 대해 부족하지 않을 만큼 경험지식이 축적되어 구입에 도움이 되고 있다.

그 스님의 특별한 보이차 맛을 궁금해 한 사람들이 있다. ‘메주에 핀 곰팡이 살살 긁어모아 뜨뜻한 물에 휘휘저어, 동동 뜬 곰팡이 물 한잔을 쭉 들이키면 기분이 어떨까.’ 우리는 충분히 나이가 들어서 함께 마시지 않아도 맛을 공유하는 법, 이럴 때 염화미소로 화답할 줄 안다.

그 스님의 보이차가 떠오를 때마다, 뱃속은 곰팡이 호수가 되어 일렁인다. 

차의 생명은 수분, 수분과의 사투다.
 

차선생 한유미(韓有美)는

중국 항주다엽연구소(杭州茶葉硏究所) 심배화 선생에게 차심평(Tea Tasting)을 배웠다. 2003년부터 심평과 가공, 차 고전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주해서 《육우다경》과 《동다송·다신전》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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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는 숭늉이 최고 2018-02-15 20:22:37
세상에서 제일 좋은 차는 숭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숭늉을 먹을 수 없는 전기밥솥 때문에 숭늉을 못 먹지만
생각만 해도 입에 군침이 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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