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 일깨운 '신과 함께' 염라의 한숨 섞인 대사
관객 일깨운 '신과 함께' 염라의 한숨 섞인 대사
  • 오마이뉴스 김규종
  • 승인 2018.02.02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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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함께 - 죄와 벌'이 1400만 영화 된 까닭

영화를 보면서 지난날을 돌이키는 수가 있다. <1987>을 보면서 87년 6월의 덥고 습한 여름과 자욱한 최루탄 연기, 지랄탄의 습격과 연발탄의 굉음을 떠올렸다. 장삼자락에서 유인물을 꺼내 나눠주던 개운사의 승려들, 두려운 얼굴로 시위대를 바라보는 행인들, 방독마스크를 쓴 채 학생들을 추적하던 사복들, 경적 울리는 택시와 버스기사들.

30년 전 6월 10일, 18일, 26일 뜨거웠던 사흘이 <1987>로 되살아났다. 그것은 기억의 지층(地層)에 켜켜이 쌓여있던 아슴푸레한 사건과 관계를 동반한다. 눈물겹도록 아프고, 등줄기 서늘할 만큼 두렵고, 가슴 터지도록 뭉클한 시위대의 장렬한 투쟁현장이 눈앞에 삼삼하다. 망각의 늪에 퇴적암처럼 깔려있던 기억을 되살려내는 시공간 <1987>.
 

 신과 함께- 죄와 벌

신과 함께- 죄와 벌ⓒ 롯데 엔터테인먼트

140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신과 함께 – 죄와 벌>(이하 <신과 함께>)은 <1987>과 다른 각도에서 지난날을 반추하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짧은 기간에 한정된 그 사흘의 기억이 아니라, 살아온 모든 날들과 관계와 사건을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 내가 몇몇 장면에서 적잖게 불편하고 괴로웠던 데는 이유가 있는 게다. 

<불설수생경 (佛說壽生經)>에 이르기를, 사후 49일 동안 인간은 7개 지옥을 지나가야 한다. 살인지옥, 나태지옥, 거짓지옥, 불의지옥, 배신지옥, 폭력지옥, 천륜지옥이다. 저승의 권력자 염라대왕이 살아생전 망자가 행한 살인과 나태, 거짓과 불의, 배신과 폭력, 그리고 천륜의 죄를 낱낱이 확인하고 단죄(斷罪)한다. 곳곳에서 확인하는 나의 죄!

정의로운 망자 자홍

<신과 함께>는 주호민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다. 그러하되 원작을 그대로 모사하지 않고 나름대로 손질하여 영화의 고유한 맛이 나도록 가꾼다. 살신성인의 자세로 불길 속에서 사람을 구해내는 소방대원 자홍의 형상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자신의 목숨이 아니라, 일면식(一面識)도 없는 인간을 살리려는 거룩한 자홍.

저승차사 해원맥과 덕춘이는 자홍을 저승입구인 초군문으로 안내한다. 죽은 자홍은 어리둥절하지만 덕춘이는 만면에 웃음을 띤다. 그도 그럴 것이 자홍은 19년 만에 나타난 귀인이기 때문이다. 덕춘의 말에 따르면 "자홍은 1593년 죽은 논개 이후 423년 만에 저승의 일곱 재판을 무사히 통과할 확률이 가장 높은 정의로운 망자"다.

초군문에서 그들 3인을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차사 강림. 강림은 저승차사이자 동시에 변호사로 자홍의 무죄를 입증할 임무가 있다. 원작의 진기한 변호사 몫을 강림이 도맡는 형국이다. 삼차사가 자홍을 맹렬하게 변호하는 것은 그들의 이해관계와 관련돼있다. 천년 동안 49명을 환생시키면 그들도 인간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관객은 자홍과 차사들과 함께 지옥을 지나면서 살아온 날을 돌이키게 된다. 그런데 원작의 회사원 자홍을 소방대원으로 만든 감독의 혜안이 놀랍다. 불행한 일이지만 작년 12월 21일 제천에서, 지난 1월 26일 밀양에서 화재가 발생해 수십 명의 고귀한 인명이 희생됐기 때문이다. 영화 첫머리 대규모 화재장면의 데자뷔가 새삼스럽다.

공간이동, 이승과 저승    
      
<신과 함께>의 부제(副題)는 '죄와 벌'이다. 나폴레옹 같은 초인을 꿈꾸며 완전범죄를 실행하려는 라스콜리니코프를 그려낸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과는 결이 다르다. 인간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하는 죄의식의 극복여부를 가늠하려는 영혼의 소유자가 겪는 스릴러 <죄와 벌>과 달리 <신과 함께>는 간명하게 이승의 죄와 저승의 벌을 다룬다.

영화가 만화보다 재미있는 것은 컴퓨터 그래픽을 통한 자유로운 공간이동과 평면의 입체화 덕이다. 웹툰의 공간 제약에서 벗어나 대형화면과 음향이 보족하는 공간은 객석의 상상력과 결합하여 오락의 요소를 강화한다. 이런 점에서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강림의 공간이동은 <신과 함께>의 오락성과 더불어 '헬조선'의 면모를 극화한다.

자홍의 동생이자 말년병장 수홍이 관심사병 동연과 악연을 맺는 장면은 21세기에도 지속되는 군대문제를 극대화한다. 김광석의 <이등병의 노래>를 가사만 바꿔 부르는 두 사람. 불의의 총기사고를 당하는 수홍과 그것을 신속하게 수습하려는 박 중위. 승진과 가족생계가 달린 가장의 필연적인 선택으로 사건과 관계가 뒤얽힌다.

박 중위를 엄단하려는 강림이 저승의 규칙을 파기한다. "차사는 이승의 일에 개입할 수 없다!" 영화는 저승차사 강림의 내면세계를 스치듯 보여줌으로써 객석의 호기심을 자아낸다. 어째서 차사들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할까. 저승에서도 이승의 일을 기억하는 자홍을 부러워하는 덕춘. 해원맥과 강림의 과거도 우리는 아는 바 없다.

넘치는 눈물, 숨죽인 웃음
 

 영화 <신과 함께>의 한 장면. 저승 세계를 구현한 컴퓨터 그래픽은 이 영화의 백미다.

영화 <신과 함께>의 한 장면. 저승 세계를 구현한 컴퓨터 그래픽은 이 영화의 백미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지옥의 재판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판관들의 어처구니없음으로 객석에 간간이 웃음이 흐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관객은 이내 숙연해지거나 눈물을 훌쩍거린다. 영화는 곳곳에 눈물과 한숨과 안타까움을 매설해두고 있다. 웃음은 양념으로 기능한다. <신과 함께>는 사필귀정과 인과응보의 업보에 따른 저승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신곡>에서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연옥을 보여주고, 지옥을 거쳐 마지막에 베아트리체와 함께 천국에 이른다. 하지만 <신과 함께>는 단도직입적으로 지옥행을 택한다. 연옥은 배제돼 있으며, 천국은 인간세상의 환생쯤으로 그려진다. 따라서 웃음이 스러지고 눈물과 한탄이 여기저기서 관객을 기다리고 있음은 자명한 이치다.

감독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에게 친숙한 신파(新派)의 요소를 도입한다. 1912년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신파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이후 신파는 가정비극에 근거한 멜로물을 지칭했다. 오자키 고요의 <금색야차>를 번안한 조중환의 <장한몽>과 이해조의 <백일홍>이 대표작이다. 신파는 지금도 살아있거니와 막강한 위력마저 발휘한다.

말 못하는 농아엄마와 큰아들 자홍, 작은아들 수홍 일가가 겪어야했던 지독한 가난과 출구 없음이 단적인 예다. 의식을 잃은 엄마와 영양실조에 걸린 동생을 망연자실 보고만 있어야 했던 자홍의 극단적인 선택과 사건진행은 전형적인 가정비극이자 신파다. 이런 장면이 객석의 흐느낌으로, 매표구의 장사진(長蛇陣)으로 연결된 것은 아닐까.

잠과 죽음 그리고 꿈

"죽는 것은 잠자는 것, 오직 그뿐. 만일 잠자는 것으로 육체가 상속받은 마음의 고통과 육체의 피치 못할 괴로움을 끝낼 수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심으로 바라는 바 극치로다. 죽음은 잠드는 것. 잠들면 꿈을 꾸겠지." (<햄릿>, 3막 1장)

부왕의 복수를 차일피일 미루는 햄릿이 삶과 죽음 사이에서 방황하다 내뱉는 독백이다. 우리는 죽음을 영면(永眠)이라 말한다. 문자 그대로 영원히 잠자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잠과 죽음은 동전의 앞뒤처럼,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돼있다. 잠을 자면 꿈을 꾸게 된다. 꿈에서 우리는 의식 아래 은닉된 자아의 여러 내면과 본질과 마주친다.

<신과 함께>에서 우리는 수홍이 어머니의 꿈에 나타나는 장면을 본다. 최종관문에 이르러 패소가 확실한 자홍을 위해, 아들의 무고(無故)를 주장하려 고행의 길로 나선 어머니를 설득하러 현몽(現夢)하는 것이다. 깊은 잠에 빠진 어머니의 꿈에 대법관 법복을 입고 등장하는 수홍. 그가 어머니를 위로하면서 눈물로 작별인사를 드린다. 

객석의 눈물과 콧물이 봇물처럼 터져 나온다. 죽음처럼 깊은 잠 꿈속에서 그토록 보고 싶은 아들을 만나는 어머니 눈에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벙어리인 그녀가 비로소 말문을 연다. 가족의 모든 불행의 원죄가 자신에게 있음을 말하는 흰머리의 어머니. 천륜지옥 염라대왕 앞에서 어머니와 동생의 눈물겨운 해후에 눈물로 동참하는 자홍.

꿈과 영화 그리고 결론
 

 영화 <신과 함께>의 한 장면. 자홍의 동생 수홍 역을 연기한 김동욱은 진정성 있는 연기로 감동을 준다.

영화 <신과 함께>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현대의 영화관객은 이미지로 세상을 보고 판단한다. 이미지는 실물의 그림자거나 감각의 허상에 불과하다. 플라톤에 따르면, 진실은 가시적인 세계 저 너머 어딘가에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찾아야 한다. 투사된 이미지가 아니라, 영원한 이데아를 응시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신과 함께> 하는 관객은 차고 넘치는 이미지로 결박당한 상태다.

이때 관객을 일깨우는 염라의 한숨 섞인 대사가 튀어나온다.

"왜 사람들은 살아서 하지 못한 일을 죽어서 하려고 할까?!"

감독이 영화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본질적인 문제제기가 아닐까, 이것은. 인간 모두가 살아생전에 진실하고 선량하며 자애롭고 평화로이 살면 그만인 것을?! <신과 함께>는 대단히 윤리적이며 교훈적인 바른생활 영화다. 그럼에도 이토록 많은 관객이 몰린다는 것은 한국사회의 도덕적 순결도가 아직은 살아 있다는 반증 아닐까, 희망한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와의 제휴에 의해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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