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1일은 불교닷컴과 불교포커스가 조계종단으로부터 출입금지를 당한지 800일째 되는 날입니다. 21세기 한국사회에 ‘취재, 출입, 광고, 접촉, 접속 금지’를 실행하는 무도한 종교집단이 있었음을 두고두고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것이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장자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임을 더욱 부끄러워 해야 합니다. 더욱이 법원이 취재방해를 하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순간에도 여전히 취재를 막는 언론탄압이 자행되고 있음은 꼭 기억하여야 합니다.
혜능스님은 『육조단경』<참회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참(懺)이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침이다. 전에 지은 악업인 어리석고 교만하고 허황하고 시기 질투한 죄를 다 뉘우쳐 다시는 더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회(悔)란 다음에 오기 쉬운 허물을 조심하여 그 죄를 미리 깨닫고 아주 끊어 다시는 짓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언론탄압을 자행하는 자들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치지 않으려는 것이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바른 말에 재갈을 물리고 싶어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참(懺)’을 행하지 않습니다. 취재를 금지함은 다음에 오기 쉬운 허물을 조심하지 않으려는 것이니 당연히 ‘회(悔)’가 없습니다. 즉, 지금 조계종단은 ‘참회’가 실종된, 수행의 기본이 결여된 집단입니다. 수행이 사라지고 참회가 실종된 자리에는 오로지 권승들의 정치와 과도한 탐욕만 넘실댑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이익집단일 뿐 더 이상 종교집단일 수 없습니다.
혜능스님은 ‘참회’를 ‘뉘우치고 다짐하는 일’ 이라고 풀이했습니다. 참회하는 주체의 ‘자각과 실천’이 핵심입니다. 저 높은 깨달음을 향한 정진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언론은 ‘지금 여기’를 증언하고 기록하는 목소리입니다. 진정으로 깨달음을 추구한다면 소중히 여기고 감사해야할 동반자이지 불편하게 여기고 미워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을 탄압하는 비민주적이고 야만적인 종교권력의 폭력을 용인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백장스님이 청규를 제정함으로서 선종사찰의 생활문화가 정립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주지가 해야 하는 행향(行香)이라는 일이 있습니다. 아침과 저녁 두 번 향을 태우며 창고와 동사, 산문, 욕실, 승당 등을 둘러보는 일입니다. 행향에 대해서 굉장히 복잡한 설명을 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건물 상태를 살피고 잘못된 것은 없는지 불씨가 남아있지는 않은지 살피는 뜻이 크다고 보여집니다. 바로 불조심이지요. 최고 책임자가 늘 조심하고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나무로 지어진 절집안의 건물들이 오랜 시간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불자들도 법당에서 나올 때 마지막으로 나오는 사람이 반드시 촛불을 끕니다. 불씨를 남겨두지 않음으로써 화재를 방지하며 함께 화재로부터 절을 지켰습니다.
조심하고 조심해도 잘못하는 일은 생깁니다. 중요한 것은, 잘못했을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점입니다. 조심하는 자세, 삼가는 마음이 일상화되고 습관이 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것이 모여 절집안만의 아름다운 풍습으로 전해지게 되는 것이지요.
선가에 전해지는 보배로운 말씀을 담은 <선림보훈>에서도 말씀하지요.
“작은 것이 쌓여 큰 것이 되니 은미한 것은 현저한 것의 싹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사람은 시초부터 조심하고 성인은 조심하는 마음을 간직한다. 졸졸 흐르는 물을 막지 않으면 끝내 논밭이 바다로 변하고, 작은 불꽃을 끄지 않으면 마침내 큰 들판을 태워버린다. 물줄기와 큰 불이 커져 재앙이 되고 나면 어찌해보고 싶어도 실로 어쩔 수 없다.
옛사람도 "작은 일을 조심하지 않으면 끝내는 큰 덕에 누를 끼친다"라고 하였는데 이런 뜻으로 한 말씀이다.“
물줄기와 큰 불이 커져 재앙이 될 때까지 지켜만 보아야 하겠습니까? 한국불교의 주인임을 자각하는 이들이라면 더 이상 언론탄압이 계속되는 것을 방관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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