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불교의 전설, 조불련의 중흥조"
"북한불교의 전설, 조불련의 중흥조"
  • 이지범/고려대장경연구소장
  • 승인 2018.01.05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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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땅과 스님들' ⑨ 박태화 위원장과 북한불교의 재건

2000년대부터 북한을 자주 왕래했던 분들조차도 아직, 또 우리들이 곧잘 하는 말들 속에서 “진짜, 북한 스님들이 있어요.”, “우리처럼 수행하고 있나요”라고 한다.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에 대해 자기식대로 해석하거나 아니면 관성화된 생각으로 이해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북한에서도 정초나 특별할 경우에 종교에 관한 행위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를 단순히 생각만 해도 이런 입장이 달라질 수 있다. 종교는 인간의 문제를 넘어 근원적인 측면을 다루고 있기에 북녘 하늘밑에서도 신앙화된 측면들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세기동안 제한된 형태로 북한사회에서 종교를 이끌고 있는 수행승과 불자 그리고 그 분들과의 인연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지범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
 

▲ 조선불교도연맹중앙위원회 위원장 박태화 대선사.(2005년 6월 촬영사진: 평화통일불교협회 회보 <하나로> 2005년 12월호 표지)

다시 재건된 북한불교

고구려 소수림왕 2년(AD 372년)에 전래된 불교는 오늘날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다. 남한과 달리 조선불교도연맹 중앙위원회라는 단일교단으로 형성된 북한불교는 김세률 초대위원장과 김숭격 위원장 그리고 제2대 안숙용 위원장을 이어서 제3대 박태호(朴泰浩) 위원장 때에 이르러 재건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침체되었던 북한의 불교는 1972년 9월 3일을 기해 공식 활동을 재개했지만, 국내외적인 위상의 복원과 불교적인 사업들은 1980년대 초반부터 본격화되었다.

북한불교의 재건은 1982년에 김일성 주석의 70회 생일을 기념하기 위한 각종 건설사업 정책에 맞물려 있기도 하지만 북한을 왕래하는 외국 바이어(Buyer)들과 관광객들에게 전통과 문화, 역사를 소개할 수 있는 국책적인 홍보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된 측면이 더 크게 작용되었다. 이런 점들에서 볼 때 오늘날 북한불교의 교단적인 정체성은 “고구려식 불교로부터 이어진 전통과 문화에 기반한 정통성에 바탕을 두고 ‘주체사상’에 입각한 북한식 사회주의국가에 의한 정책적인 불교를 지향하고 운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 조불련은 1980년 9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와 그해 11월 제7기 제3차 전원회의를 개최하고, “전체 불교도들은 고려민주주의련방공화국을 창립할 데 대한 새로운 통일강령의 실현을 위하여 한 사람같이 떨쳐나서자”는 성명 발표에 이은 강령 개정과 조직 실천사업 등의 공식 문건을 채택하였다. 특히, 1983년 4월 평양시 모란봉구역 용화사에서 제8차 조불련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열려 박태호 제3대 조불련 위원장의 선출 등 내부정비와 더불어 1954년도에 제정한 강령과 규약을 현실 발전의 요구에 맞게 개정하여 발표되었다. 새로 개정한 조불련의 강령과 규약에는 불교의 현대화를 통한 도제양성과 포교 및 역경의 3대 사업, 사회주의 제도의 옹호고수와 발전, 사회주의 경제건설 참여,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과 존엄 고수,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 실현, 침략과 전쟁책동 반대, 평화수호, 각국 불교도들의 친선 협조관계 발전 등을 담았다. 이로써 제도적인 정비와 함께 조직적인 사업의 추진으로부터 재건되었다.

▲ 조불련 박태호 위원장 미국LA 방문.(남북‧해외동포 불교도 조국통일기원 합동법회: 1991년 10월 30일 미국LA관음사 - 좌로부터 박태호 대선사, 송월주 조계종총무원장, 시자스님, 홍보월 재일본조선불교도협회장 대리, 서태식 조불협 사무국장)

조불련의 중흥조

해방정국에서 활동하다가 1950년대 말에 숙청된 김세률 초대위원장이 조불련의 창립자(NewFounder) 내지 개산조(開山祖)라면, 박태화 제3대 조불련 위원장은 북한불교의 중흥조(中興祖, Instaurator)이다. 중시조와 같이 침체했던 북한불교의 종문을 다시 일으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박태화 위원장이 활동한 시기는 1980년대 초부터 ‘통치하는 입헌군주제’를 지향했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시대와 그 궤를 같이한다. 그것은 핵실험과 선군정치 등 사회주의 강성대국의 꿈과 함께 2000년 6‧15와 2007년 10‧4 남북공동선언 등 남북관계 개선에 디딤돌을 놓기도 한 김정일 위원장의 정치적 유산으로부터 점철된 불교의 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태화 위원장 시기의 조불련은 북한불교의 오래된 미래이기도 하다. 그것은 오늘날 북한불교의 승려 70% 이상은 학림당 박태화 대선사의 제자들이기 때문이다. 즉, 박 위원장은 사자상승의 불교전법에 따라 북한 불교계에서 상좌와 손상좌를 가장 많이 둔 분이다.

1919년 10월 15일 함경북도 길주군에서 출생한 박태화(朴泰華) 위원장은 1999년 9월을 기해 박태호 위원장에서 그 이름을 개명하였다. 박 위원장은 선대로부터 불문에 귀의한 집안의 영향으로 1934년에 자신의 고향인 함북 길주군 보현사로 동진출가하여 1936년에 묘향산 보현사 불교학원(佛學院)을 졸업하였다. 1945년 말까지 보현사에서 수행한 박 위원장이 <미주현대불교(1990년 2월호)>에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그 당시에는 나무도 하고 밭농사도 지으면서 살았다”고 회고하였다. 속세 30이 되던 해인 1946년에 함경북도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어 정계에 입문하게 되어 1986년 11월에 최고인민회의 제8기 대의원(국회의원)으로 처음 선출되었다. 1990년 4월에는 최고인민회의 제9기 대의원으로 다시 선출되었으며, 그해 5월부터는 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위원회 위원을 맡아 활동하였다.

20대 중반, 묘향산 보현사에서 법천스님을 은사로 학림(鶴林)이란 법명을 수지하였다. 보현사 불학원을 졸업한 박 위원장은 그 후 평양의 인민경제대학에 수학하여 1958년에 졸업하고 조불련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79년 9월에는 조불련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특히 1983년 4월 제8차 조불련 전원회의에서는 제3대 조불련 중앙위원회 위원장에 박태호 대선사가 선출되고 부위원장으로 법등 홍화두 스님도 같이 선출되었다. 1984년 8월 평양 용화사에 열린 ‘확대전원회의’에서는 불교교류와 종교․문화재관리 활동을 위해 박태호 위원장에 대한 재추대를 결의하고 시‧도 지부를 결성하는 등 국내외적인 조직적인 역량과 사업보고를 가졌다.

이 시기에 조불련은 박태화 위원장을 중심으로 중앙위원회의 조직을 개편하고 각 시·도위원회를 새롭게 조직하는 등 종교조직체로서의 위상을 구축하였다. 전국적으로는 사찰 등 불교유적과 문화재의 보수와 관리에 실질적인 국가 행정업무가 시행 준용되었다. 또한 “불교교리가 주체사상에 부합되는 것”이라는 내용의 호소문을 박 위원장 명의로 남조선과 해외불교도에게 보내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1985년 12월 평양 용화사에서 ‘조선불교도련맹 중앙위원회 창립 40돌 기념 중앙보고대회’를 개최하여 천도교와 기독교, 유교 등과 함께 북한사회에서 종교단체로서나 사회단체로서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조불련은 1986년에 북한 종교단체로서는 처음으로 외국 종교단체를 평양으로 초청하게 된다. 그해 8월 소련 불교대표단을, 9월에는 중국 불교대표단을 국내로 초청을 하였으며, 12월에는 네팔 카트만두에서 열린 세계불교도우의회(WFB) 제15차 네팔총회에 참가하여 소련과 중국불교계의 지원으로 조불련이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하게 되는 등 국제적인 위상까지 제고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조불련은 1987년 7월 3일 묘향산 보현사에서 ‘국제불교도 평화행진’ 개막행사를 개최하는 등 폭넓은 국제종교교류 활동을 가졌다. 또한 1988년 1월 묘향산 보현사에서 ‘조국통일기원법회’를 처음으로 개최하였으며, 1988년 5월 5일 묘향산 보현사에서 분단 이후 최초로 ‘석가탄신일 기념법회’를 봉행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그해 5월 6일 《평양방송》을 통해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박 위원장은 1988년 9월 일본의 조충련 기관홍보지인 <조선화보>에 북한 종교인으로 처음 인터뷰하여 그해 11월호에 사진과 함께 인터뷰 내용이 개재되었다. 그리고 1989년 6월에는 조불련 대표단의 단장으로서 소련(현재의 러시아)을 처음 방문하였으며 1990년 3월에 스리랑카, 그해 9월에 몽골을 처음 방문하여 각국 종교계와 국제교류를 가졌다.

특히 조불련의 위상이 드높아진 계기는 1989년 7월 1일~8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평‧축)’ 때이다. 이 축전에는 세계청년불교도 대표 1명, 조선청년불교도 대표 2명을 직접 파견하고 각국의 청년학생, 종교인들과의 친선활동을 가졌다. 또한 이 기간에 각국에서 참가한 청년학생 불교도들을 위한 환영의식을 평양 용화사에서 불교 단독행사로 개최하는 등 국제교류의 폭을 넓혔다. 그리고 평축 환영만찬장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인 여원구 여사의 소개로 미주불교인들과 그 당시 방북했던 남측 법타스님과도 같이 교류하게 되었다.

▲ 조불련 박태호 위원장 베이징 방문(남북불교지도자회담: 1995년 5월 24일 중국북경 랜드마크호텔 - 좌로부터 설송스님, 법타스님, 시현스님, 유성철 상무위원, 박태호 대선사, 심상련 서기장)

북한불교의 전설이 되다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를 비롯하여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조선불교도연맹 중앙위원회가 《조선중앙통신》에 낸 공동 명의의 부고에는 “2005년 11월 11일 낮 12시 86세를 일기로 박태화 조불련 중앙위원회 위원장이 타계했다”고 밝혔다.

이 보도기사는 해방과 분단 이후, 북한불교계에 처음으로 있은 북한당국의 공식 발표 내용이다. 또한 전문을 통해 남측 조계종 등 불교계에 박 위원장의 부고를 전한 것은 처음 있었던 일이다. 이런 사실들만 보더라도 고(故) 박태화 위원장은 북한불교의 전설이다.

그 전설의 탄생은 1989년부터 시작되어 1991년에 개화되었다. 1987년 묘향산 보현사 만세루 복원에서 이어진 전국 주요사찰의 복구와 수리는 물론, 1989년 5월 30일 조선가톨릭협회가 결성되고 이어 그해 9월에 출범한 조선종교인협의회(KCR 위원장 장재철)의 부위원장과 1991년 초에 결성된 북·일 우호친선협회의 부회장을 맡게 되었다. 특히 학림당 박태화 대선사는 분단이후 처음으로 1991년 10월 29일~11월 4일까지 미국 LA 관음사에서 개최된 ‘남북해외동포 조국통일기원 합동법회’에 참가하여 북한불교와 그의 이름을 국제적으로 알리게 되었다.

이때의 불교도 합동법회는 그의 용기와 결단이 수반된 업적이다. 그로부터 박 위원장은 1993년 범민련 북측본부의 부의장을 맡으면서, 1994년 6월 1일 일본 동경을 처음으로 방문하여 재일본조선불교도협회(서태식 회장) 등과 회의와 교류를 증진하였다. 다시 남북대화와 교류의 물꼬는 1995년 5월 24일 중국 북경을 직접 방문하면서 열리고 진행되었다. 1991년 10월과 1995년 5월에 가진 남북불교회의는 8.15해방과 분단 이후, 불교교류의 고전으로 자리하게 된다. 이 두 차례의 교류는 첫째, 새로이 출범한 양측의 불교도가 불교만의 공통적인 내용을 재확인하고 합동법회라는 형식을 공유하게 되었다는 점과 둘째, 향후 교류를 전제로 하는 대표자회의를 가짐으로서 실질적인 교류테이블을 만들었다는 데 그 의의와 패턴(Pattern)을 유지하게 되었다. 양측 대표자간의 회동은 양측에 대해 상호 인정하는 교류 파트너십을 구축함으로서 향후, 전통적인 교단구성과 불교통합을 위한 첫 출발인 동시에 교류협력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그 전례로 남아 있다.

1997년부터 매년 부처님오신날 봉축 남북공동발원문 채택과 동시발표 등을 추진하고 인도적인 교류와 협력을 강화해온 박 위원장은 1998년도에 북한이 자랑하는 ‘조국통일상’을 수상하게 되고 북한 당국으로부터는 그해 생일상을 받았다. 남북정상회담에 이은 2001년 금강산에서 열린 6.15민족대회에서는 박 위원장이 개막 연설을 맡았고, 2002년 8.15민족대축전 행사를 위해 서울을 방문한 박 위원장은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스님과 호흡을 맞춰가며 일련의 남북불교 교류를 주도하였다. 그러한 계기는 2003년 3.1절 민족행사로 나타났다. 박 위원장은 참가하지 못했으나 황병대 부위원장을 단장으로 차금철, 리영호 책임부원 등 북측대표단이 서울을 방문하여 강남 봉은사에서 남북합동법회를 개최하는 등 교류가 더욱 확대되었다.

2000년대 초기부터 금강산 신계사와 개성 영통사 복원사업이 남북공동사업으로 발전하면서 추진되었으며, 박 위원장은 2004년 4월 22일에 발생한 평안북도 용천역 열차 폭발사고에 대한 인도적 지원과 협력에 대한 감사의 서신 등을 전하고 2003년 8.15공동행사에서의 경축사 발표 등 북한지역 내의 종교와 활동에 대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박태화 위원장은 2005년 6월에 분단 이후 한국불교계의 최고 수장으로서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한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스님과의 회동과 6.15남북공동선언 5주년 기념행사를 가지는 등 종무활동을 가졌으나 그해 6월말부터 병환으로 말미암아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요양을 하게 되었다. 더욱이 그해 9월 11일 총무원장 법장스님의 갑작스러운 입적으로 인해 조전까지 보내기도 했던 박태화 대선사도 그해 11월 11일을 기해 입적함으로서 남북한의 불교계는 한꺼번에 최고 수장을 잃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박 위원장의 유해는 항일투쟁, 사회주의 건설, 통일사업 등 여러 부문에 걸쳐 희생하거나 위훈을 세운 공로자들의 유해를 안치한 묘역으로 1986년에 조성된 평양의 형제산구역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독실한 불교도인 부인과의 슬하에는 두 명의 자녀를 두었다. 장남은 국가작품심의위원회 책임심의위원과 차남은 인민미술가로 활동하였다.

▲ 박태화 조불련 위원장과 법장 조계종총무원장 회동(2005년 6.16민족공동행사: 2005년 6월 14일 평양 조불련 중앙청사)

다시 통일의 역사로

북녘의 불교는 박태화 위원장의 시대로부터 재건되었다. 각종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종파, 불교와 사찰현황 그리고 불교의식이 현재 북한의 전역에서 행해지고 있음을 알렸다. 그는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인간의 행복과 국가의 발전, 세계평화의 건설에 있다”는 점을 화두처럼 여기고 86년의 수행생활을 마쳤다. 그는 북한에서 종교의 유용성이 실현될 수 있도록 현장의 정치력을 발휘하였고 수행자로서의 인화력과 실천성을 몸소 보여준 북한불교의 위대한 거인이었다. 온화한 얼굴에 머금은 환한 미소는 그의 전매특허이고 어느 날 맞잡았던 그의 손은 굳은살이 박혀있는 투박한 노동자의 손이었다.

이탈리아의 역사철학자인 크로체(B. Croce)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라는 명제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현재의 관점에서 쓰린 현재적 역사를 본 것이나 영국의 철학자 콜링우드(R.G. Collingwood)가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가 된다.”고 자신이 속한 시대의 사상, 경험이 크게 작용한다는 의미에서 볼 때 분단 이후 조불련의 사상적인 기반을 만들고 그대로를 살다간 박태화 위원장의 삶과 생애는 북한불교의 과거와 현재 사이를 잇는 끊임없는 대화이자 통로였다.

고구려와 고려의 불교역사를 잇고 있는 북한의 불교가 올해에 먼저, 고려건국 1100년을 경축하고 다가오는 2019년의 3·1운동 100년을 앞둔 시점에서 하나의 사변을 이룰 역사인식과 교류의 시그널(Signal)이 필요하다. 그 전례로 지난 2003년 3.1절 민족공동행사가 박 위원장의 손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바로잡고 인지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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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 2018-01-07 12:53:35
중들 중생들한테 욕 좀안해서면 한다, 중생들보다 못한 중들이 너무많다, 큰절안하다고 욕하고 지가 무슨 큰 벼슬한냥 중생보다 못한것들

자세히 보니 2018-01-07 07:44:47
맨처음 사진은 뉴욕 원각사입니다.la 관음사가 아니고. 대가사 수하신 분은 법안스님입니다.닷컴 기자들 수준이 짐작이 가네요.닷컴아 문닫아라.

SINABRO 2018-01-06 11:45:52
맨위 사진 대가사 걸친 스님은 열반하신 뉴욕 원각사 조실 오법안 스님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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