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쪽 겨드랑이에서 맑은 바람이 솔솔”
“양쪽 겨드랑이에서 맑은 바람이 솔솔”
  • 한유미/한국차심평원장
  • 승인 2018.01.05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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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선생 한유미의 차와 놀자] (15)칠완다가 등에 업고 신선이 되련다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 다수는 엿가락처럼 몸이 늘어지는 한 여름에 차를 잘 마시지 않는다. 한가하다 못해 적막감마저 감도는 땡볕 내리쬐는 여름날 차 놀이에 심취하는 필자와 대조적이다. 찻주전자(다관)를 쓰다듬고 찻잔을 조몰락거리기엔 눈 내리는 겨울도 풍치가 있고 따사로운 바람 선선한 봄·가을에야 말할 것도 없지만, 차에 근거한 선도(仙道: 신선이 되는 조건 혹은 방법)를 즐기기엔 여름만한 계절이 없어 신선의 계절이라 부른다.

차에서 말하는 선도(신선도)는 포박자의 저자이며 신선술의 대가인 갈홍이 증명하려 했던 고대 중국의 보편 신앙적인 진리로의 신선의 도(또 중국불교 선사상을 연상하여 감각적 도락을 인식적 진리로 착각하는 것 역시 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찌는 여름날 차는 도락을 경험케 한다

그 찌는 여름날, 차는 세상에 더 이상 비할 것 없는 도락(道樂: 극대화된 쾌락)을 경험케 해준다. 돈으로 살 수 없는 마음의 사치를 한껏 누리게 했던 지난여름 마셨던 몇 잔 차를 이 겨울에 그리워하고, 그 지대한 차의 덕(德)에 다가올 여름을 생각하면 흡족한 마음에 벌써 설렌다. 풍류라는 것이 미학이라는 것이 낭만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지 달리 뭐 있겠는가.

선도를 즐기는 장소는 빌딩 속의 사무실이다. 아무런 꾸밈이 없는 밋밋한 공간으로 차의 도락에 빠져들 만한 곳이 아니다. 사람들의 말로는 사무실이나 사람이나 무미건조하여 함께 정담을 나룰 만한 용도가 아니라고들 하는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를 즐기는 나름대로의 규칙, 즉 신성한 의례가 있다. 에어컨 바람으로 실내온도 27.5℃를 유지하는데 세심한 주의와 정성을 기울이는 일이다.

차는 일상화된 세계적인 음료이지만 어떤 가치를 만들어내는가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에어컨이 제구실을 하는 것 같지 않은 이 온도가 신선이 되는 온도가 아닐까 하여 신선의 음료이자 명약인 차만큼 중요시 한다. 만약 과거역사의 차귀신 선배들이 살아있다면 신선이 되는 조건 두 가지로 ‘온도와 차’라고 설파했을 것이다. 신선의 온도 예찬에 대해서는 터무니없다 핀잔을 받겠지만 말이다.

독자들도 한번 실행해보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혹시 그 신선의 온도에 의심이 있다면 사우나 이후의 상쾌함을 쉽게 연상해보면, 사람에 따라 온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허무맹랑한 기만, 상상으로 얻는 거짓 즐거움이 아님을 알 것이다.

차의 도락은 같은 차의 영역이지만 자연과학이 바탕이 되고 사회적 의미를 띠는 심평선(審評禪)과는 결이 다른 감흥이 있다. 차의 심평(관능검사)에서 신비를 품은 차란 보여주는 아름다움의 세계에 마음을 뺏긴다고 한다면, 신선의 도 영역에서 신비를 품은 차라는 이미지 출처는 노옥천(盧玉川: 795~824)의 칠완다가에 대표적으로 표상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노동은 중국 당나라 시인으로 호는 옥천자(玉川子)이다. 박식하고 학문을 좋아하고 시를 잘 지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산에 은거하였다. 성품이 차를 좋아하여 《칠완다가(七碗茶歌)》를 지었다. 칠완다가는 맹간의(孟諫議)가 월단차(둥근 편차) 300편을 노동에게 보내준 것에 대한 감사의 글 중의 일부분으로, 칠완다가의 본래 제목은 《맹간의가 햇차를 보내준데 대한 감사의 노래》이다.

다음은 전체 시 중에서 ‘칠완다가’로 알려진 부분만을 해석하였다.

첫 잔은, 목과 입을 적시고
둘째 잔은, 고민을 없애고
셋째 잔은, 마른 창자 적시니 생각나는 문자 오천 권이네
넷째 잔은, 가벼운 땀 솟아 평생 편찮은 일 털구멍으로 사라지고
다섯째 잔은, 살과 뼈가 상쾌해지고
여섯째 잔은, 신선과 통하네
일곱째 잔은, 마시지도 않았건만 오직 양쪽 겨드랑이에서 맑은 바람이 솔솔 부는 것 같구나

봉래산이 어디냐? 옥천자는 이 맑은 바람타고 돌아가련다.
 

*봉래산(蓬萊山)은 신선이 산다는 전설의 산으로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과 더불어 고대 중국의 동해안에 있다고 믿었던 삼신산(三神山) 중의 하나다. 《漢書》 〈郊祀志〉.

“양쪽 겨드랑이에서 맑은 바람이 솔솔”

일곱 째 잔의 일부분 ‘오직 양쪽 겨드랑이에서 맑은 바람이 솔솔 부는 것 같구나’는 초의의 다시 《동다송》에도 인용된 구절이다.

차의 도락 일명 신선이 되는 놀이는(이하 신선놀이라 하겠다) 기본적으로 정서적 안정이 바탕이 되어야 제대로 즐기는 쾌락이지만 사람에 따라 환경에 개인차가 있다. 차가 미치는 영향의 정도와 좋아하는 정도 등 갖가지 개별적인 변수가 많지만, 즐거움에 대한 극단적 쾌락의 열망이 신선을 동경하게 한다. 신앙으로서의 신선에 대한 열망은 죽는 것이 죽기보다 더 싫어서 신선에 대한 환상을 키웠다.

차는 사람을 구별하지 않는다. 좋아하는 누구에게나 신선의 감흥을 준다. 노동과 소동파는 문인이라 글로 표현했을 뿐이지 그들이 특별하거나 없는 감흥을 일부러 지어낸 게 아니다. 예술가들이 유독 차를 사랑한 데는 감정의 재료로 흥을 돋우어 영감을 주어서이다. 그들이 화가였다면 그림으로 설명했을 것이고 음악인이라면 연주나 곡으로 드러냈을 것이다. 누구든 자신의 방식대로 즐거워하면 된다.

▲ 《칠완다가(七碗茶歌)》를 지은 당나라 시인 노동. 호는 옥천자이다.

아래 <일곱 잔의 신선차>는 일반대중 누구라도 즐길 수 있는 고상한 놀이문화의 예문으로 바꾸어 보았다. 칠완다시(일곱 잔 차의 노래)를 활용하여 부담 없이 시작해 볼 수 있도록. 주로 여성들의 문화인 행다(차 예절) 이외에 별 것이 없는 빈곤한 차 문화에 하나의 소스(source)가 되기를 목적하였다. 삼행시나 오행시 또는 노래가사를 개사한 정도의 수준이므로 감정을 표현하는데 어려움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일곱 잔의 신선차

첫 잔은, 목과 혀를 축이니 봄바람 같은 미소 절로 번지고
둘째 잔은, 울분을 씻어 내리고
셋째 잔은, 마른 배를 적시니 그제야 조용한 눈물 한줌 덜어놓았네
넷째 잔은, 송글송글 코에 맺힌 땀 마음의 짐 씻겨나가고
다섯째 잔은, 깃털 같은 몸이 되고
여섯째 잔은, 나도 몰래 콧노래 흥에 겨워라
일곱째 잔은, 경액(瓊液)인지 이슬인지 마시지도 않았건만 겨드랑이 날개 돋아 맑 은 바람 솔솔

봉래산이 그 어디냐 껍질 벗은 이 자리 옥천자 일곱째 잔마저 비우리

녹차를 마실 때나 편한 차 모임에서 삼완 시(삼완 찻자리), 오완 시(오완 찻자리), 칠완 시(칠완 찻자리)를 주제로 찻자리를 꾸며보거나 청담을 나누기엔 칠완다가를 활용하는 것 이상 없다고 생각되었다.

차가 좋아 날밤 새우며 죽자고 마시는 것도 좋고, 반가운 벗이 좋아 그저 허허 찻잔 돌리기 또한 정신건강에 좋지만, 예절 찻자리에 거리를 둔 남성들과 일반 소비자를 염두에 둔 차 문화의 소소한 활력, ‘차 한 잔의 시인화’ 또는 ‘차 한 잔의 철학화’ 또는 ‘차 한 잔의 신선화’에 대한 아이디어로 적용해 보았다. 다양한 눈요깃거리(외형적)의 차 문화에서 차와 인간의 정화적 경험을 목적으로 삼았다.

“마음 비춰 도락의 허영 끼 부려봐도 좋다”

꼭 차꾼이 아니더라도 차에 자신의 마음을 비추어 도락의 허영 끼를 부려보면 어떨까. 취미에 지나지 않은 도락의 관조가 때로는 묵직한 삶의 관조로 이행되어(예를 들어, 차의 소중함이 소중함에 대한 소중함을 사색하는 것 같은) 더할 수 없는 내면의 보석을 발견하기라도 한다면 그보다 값진 겉치레가 또 있겠는가.

재미삼은 일이지만 내용은 가감 없이 실제 그대로의 마음을 옮겨놓았다. 다만 둘째 잔은, 차의 품질 만족(품질 떨어져 맛없는 차는 한 잔도 넘기기 어려움)과 번뇌의 종류와 강도에 따라 개인차가 있을 수 있으나(해묵은 인간의 번뇌라는 것이 차 몇 잔에 쉽게 씻어지지 않을 경우), 일단 둘째 잔의 고비와 셋째 잔의 표현, 즉 개성의 차이를 어느 정도 고려한다면 이후의 잔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차의 영향에 따른 보편적 기분을 보증해준다고 장담할 수 있다.

따라서 옥천자의 차의 노래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일곱 잔의 신선차>와 <칠완다가>의 도락 역시 한번을 우려 마시나 백번을 우려 마셔도 감정이 동일하다. 또 중국의 교연스님이나 소동파나 황정견(소동파의 제자. 문집 《황산곡집》에, ‘차를 마실 때 혼자 마시는 것이 최고이고, 두 사람이 마시는 것은 풍취가 있고, 세 사람이 마시면 맛이 좋고, 6~7이면 나눠마신다’고 한 이 부분도 동다송에 인용)이나, 한국의 다산 정약용이나 추사 김정희나, 일본의 센리큐나 차를 애호하는 누구를 막론하고, 차에 심취한 감성 풍부하고 민감한 사람들의 정취를 노동이 대표했다 뿐이지 도락의 감정은 마찬가지다. 노동이 차의 속성을 있는 그대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차의 세계에서 칠완다가의 ‘위대함’은 과거의 차인들과 현재·미래의 차인들 모두를 대변하여 통하게 한 업적일 것이다. 차의 가치를 검증한 위상의 상징으로 말이다. 만약 개인의 상상적인 문학에 치우친 글이었다면 공허할 뿐만 아니라, 천 년을 뛰어넘은 지금 우리의 마음과 동시적이지 않아 관심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결코 문학으로 미화된 거품, 멋의 기교와 같은 허영이 아니다.

옥천자는 찻물을 경액(신비한 약물)으로 목을 적신다고 했다. 어느 누군가는 차를 억지로 마시는 것이 참으로 괴로워 수액(水厄: 물로 인해 생긴 재앙, 즉 물고문)이라고도 했다. 경액과 수액은 사람들의 기호를 극명하게 나타낸 차의 양면성이다. 음료든 약물이든 차의 도락은, 결코 만만치 않은 인생의 어느 한 자락에서, 잠시 쉬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취미에서 활력을 얻고 위로 받는 사람들의 적잖은 살림살이다.

신선도(神仙道)에 이르는데 정말 일곱 잔의 차가 필요할까. 칠완다가에서 여섯 째 잔 이후는 무의미했다. 어떤 사람은 두 잔에도 석 잔에도 또는 최소 열 잔이 되어야 기분이 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자신만의 신선의 도에 이르는 방법을 새해맞이 기분전환으로 궁구해 보는 것도 좋겠다.

차를 신선의 경지(즐거움을 즐기는 마음의 기술)로 터득한 진정한 도락의 장인(匠人) 옥천자를 ‘신선장인’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차선생 한유미(韓有美)

중국 항주다엽연구소(杭州茶葉硏究所) 심배화 선생에게 차심평(Tea Tasting)을 배웠다. 2003년부터 심평과 가공, 차 고전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주해서 《육우다경》과 《동다송·다신전》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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