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은 허구”를 강조하는 ‘육조단경’
“깨달음은 허구”를 강조하는 ‘육조단경’
  • 김광수/정의평화불교연대 공동대표, 한양여대 교수
  • 승인 2017.12.10 01:40
  • 댓글 8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광수] 다시 ‘깨달음’ (13)
▲ 김광수 정평불 공동대표

《육조단경》을 보면, 육조스님의 법문은 <정(定)과 혜(慧)가 다르지 않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옳은 말이다. 이는 《육조단경》 사상의 핵심이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이것이 오늘 논의의 주제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定)이라면 어떤 정인가? 정에는 종류도 많고 방법도 많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정이란 수행의 과정과 정도에 따라서 천차만별이라는 점이다. 3년전 수행했을 때와 지금,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수행하느냐에 따라서 그 정도는 천차만별이다. 교리 상으로 보더라도 초선정이 다르고 2선정 3선정이 다르다. 위빠사나와 삼마타가 다름은 물론이다. 참선수행을 일년 한 사람 30년 한 사람, 3아승지겁을 한 사람의 수준은 각각 다르다. 대승 6바라밀에서는 념(念), 즉 사띠(sati)라는 개념을 없애버리고 그것을 정이라는 개념으로 통일했다. 그래도 역시 지(止)와 관(觀)은 다르다. 정(定)이라면 어떤 정인가. 그리고 수행의 경지는 어떠한가. 그런데도 6조스님은 이런 내용이 전혀 없이 그냥 정과 혜가 다르지 않다고 말하신다.

“정에서 혜가 나온다고 말하지 말라. 정(定) 그 자체가 혜이다“(《육조단경》 연구, 얌폴스키, p182)

《육조단경》의 이 말은 그 자체가 혁명적이고 파격적이라고 하는 학자나 선사들도 있고, “그거 뭐 당연한 거 아닌가” 하고 하는 학자나 선사들도 있다. 하여간 《육조단경》은 선종의 바이블이니까 절대적으로 인정하자. 그리고 실제로 나는 이 내용을 믿는다.


한편, 혜(慧)는 무엇인가? 불교에서는 그것을 흔히는 반야지혜라고 한다. 일반인들의 지혜와는 다르다. 그러니 “불교가 주장하는 불교 독특한 교리, 진리”를 확연히 모두 이해해야 비로소 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교리의 진수는 무엇인가? 역시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이다. 이것을 통찰하고, 확연히 깨달아야만 혜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무상정등정각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연기법이라고 할 수도 있고, 용수, 나가르쥬나가 말하는 공(空)도리를 깨달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정도 되어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걸 알면 아라한이 되는데, 그걸 얻기 까지는 삼 아승지겁이 걸린다고 한다. 그만큼 얻기 어렵다는 것이다.

세속적으로 말하더라도, 이른바 깨달았다고 하는 스님은 그링 많지 않다. 거의 없다. 내가 알기로는 근래 백년 동안에 이른바 깨달았다고 하는 스님은 경허나 만공, 만해 정도이다. 그분들의 깨달음도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도 많이 있다. 자 그렇다면 과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는 것이 이승에서 가능한 것인가.


선사들은 말한다. 깨닫지 못한 자가 법문을 하고, 중생들을 이끄는 것은 흡사 눈 어두운 자가 대중을 이끌고 가는 것과 같아서, 모두를 구덩이에 빠트린다고. 그리고, 대중교화나 사회참여는 스스로 먼저 깨달은 연후에 해야지, 눈먼 사람이 무슨 대중을 교화하고, 사회에 참여하느냐고. 그러니 우선 자기 수행이 먼저라고 한다.

그런데 깨닫는 것이 그토록 어렵다면 중생교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회참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 사회는 악의 구렁텅이로 빠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마라(魔羅)는 인간을 타락시키기 위해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그러니 깨달은 연후에 사회구제를 해야 한다는 것이 말은 그럴듯해도, 그 깨달음이란 것이 이토록 비현실적인 바에야 그 주장 조차도 공허해 질 수 밖에 없다. 그러면 불교는, 불자들은 이 사회 발전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그저 밥버러지들인가. 불자들은, 스님들은 자기 수행에만 힘쓰는 이기적인 인간들인가. 그들이 언제 깨달아서 그 결과를 사회에 회향해 줄 수 있는가. 그러니까, 문제는 깨달음이 우리에게는 너무도 멀리 있다는 데 있고, 동시에 선사들은 그 깨달음 이전의 모든 생각과과 활동을 의미 없다고 치부해 버리는 데에 있다. 그것이 성철스님으로 대표되는 한국 선종의 “깨달음 지상주의”의 폐해이다.


다시 육조스님 말씀으로 되돌아가서, “정에서 혜가 나온다고 말하지 말라. 정(定) 그 자체가 혜이다“라고 했는데, 정(定)이 무슨 정인지도 모르고, 정에도 수행의 단계에 따라서 수십 수백가지 정도가 있는데, 그렇다면 혜(慧)도 그 정(定)의 수준에 따라서 수십 수백가지의 지헤가 있다는 말인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도 정도가 있는가? 무상정등정각에도 수준이 있고 단계가 있는가?

우리는 여기서 무상정등정각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잘 따져 보아야 한다. 과연 그런 것이 있는가? 그것을 성취한 것은 석가모니부처님 한분 뿐 아닌가? 한 분이 아니라 여러분이 있다고 해도 그 분들은 이름 없이 왔다가신 분들 아닌가? 그리고 그것이 드러나지 않고, 객관적으로 노출되지 않는다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그러므로 적어도 그것은 있다고 해도 상징적으로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무상정등정각이 실체적으로 있다면 “정과 혜가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정(定) 그자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뜻이 아닌가? 그런데, 정에는 다양한 수준과 차별이 있으니, 어떤 정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가? 가장 높은 정만이 무상정등정각인가? 그리고 육조스님은 그런 의미로 정을 말씀하셨을까? 나는 그건 아니라고 본다.


그게 아니라면 무엇인가? 6조스님의 뜻은 “우리가 정(定)을 할 때에 그 순간순간마다 우리는 그 자체가 혜(慧)인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대의에도 맞는다. 즉, 우리는 그 자체로서 법신불이고 화신불이고(《육조단경》연구, p.192-194) 우리는 그 자체로서 부처이고, 부처가 될 씨앗이고 불성을 가진 고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윗책 p.191). 그러기에 그런 표현이 나올 수 있다. 우리가 부처이기 때문에 정(定)을 할 때마다, 즉 부처라는 램프에 불이 켜질 때마다 광명이라는 지혜가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혜는 우리 내부에 이미 미리 장치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육조단경》의 큰 뜻이 그런 것이라고 본다. 그러니까, 그것이 바로 又日新(날마다 새롭다)이고, 사념청정(捨念淸淨)이다. 그것이 日日是好日(매일매일이 좋은날)이고, 平常心是道(평상심이 도이다)이며, “시시각각 깨어있으라”는 뜻이다. 승조 스님의 유명한 글에도 “손길 닿는 것 마다 참 아닌 것이 없다(觸事而眞)”고 했다. 좋은 말씀이다.


그런데 그렇게 본다면, 요즘 선종에서 말하는 등용문(登龍門)과 같은 “그런 깨달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이란, <합격하면 모든 것이 저절로 다 갖추어지고, 떨어지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극히 희소한 사람만이 될 수 있는 사법고시>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순간순간이 깨달음이고, 정(定)을 할 때마다 깨달음이다. 깨달음 이전과 이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흔히 “우리는 이미 깨달았다” “이미 부처이다”라는 말도 한다. 깨달음 지상주의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화두선에서 화두를 타파한다든지, 확철대오한다든지 그런 것들은 대부분 허구일 수 있다. 그래서 《육조단경》의 이 부분은 확철대오나 화두타파를 인정할 수 없는 근거가 된다. 선종의 바이블인 《육조단경》에서부터 바로 그런 허구는 타파되는 것이다. 어찌보면 그이후의 선종은 “깨달음이라는 허구”를 가지고 《육조단경》의 대의를 크게 벗어났다고도 할 수 있다. 이렇게 선종의 바이블인 《육조단경》 자체가 돈오견성이라든지, 확철대오를 근본부터 부정하고 있다는 것은 내게는 큰 발견이었다.


그렇다면 “순간순간 깨어있는 상태가 곧 바로 부처의 상태다.” 이 사상은 어떤 사상인가? 그게 바로 화엄경으로 말하자면 여래(如來)성기(性起) 사상이다. “그대 자체가 깨달은 존재이고, 일거수일투족이 그 자체로서 부처의 움직임”이라는 사상, 이것은 조주(趙州)나, 도오겐(道元)의 글에서도 보이는데, 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는 “일념즉시 무량겁”이고, “초발심시 변정각”과도 같은 사상이다. 사실 이는 그리 낯설지 않은 사상이다. 내가 강조하는 것은, 《육조단경》의 이 사상은 깨달음이라는 무척 높은 경지를 따로 세워 놓고, 돈오돈수니 뭐니 해 가면서 확철대오를 따로 세우는 한국 선종의 “깨달음 지상주의”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는 기실 깨닫기 전에는 아무 의미도 없고, 깨달은 자 이외에는 모두 눈먼 자이고, 오로지 수행의 목표가 확철대오라고 주장하는 한국 선종의 주장이 《육조단경》의 내용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즉, 그분들이 (성철스님으로 대표되는 그분들이) 말하는 깨달음이란 것은, “그런 깨달음”은 그분들이 숭상하는 《육조단경》의 내용으로 보더라도 허구(虛構)라는 것을 뜻한다.

김광수/정의평화불교연대 공동대표, 한양여대 교수

[불교중심 불교닷컴. 이 기사에 대한 반론 및 기사제보 mytrea70@gmail.com]

"이 기사를 응원합니다." 불교닷컴 자발적 유료화 신청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89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간낭비 2018-02-02 02:35:08
김교수는 문자놀음 그만하라 그런 말은 토론 세미나 논문으로 밝히고 조계종깡패중들이나
비판하든지 욕하든지 한가한 소릴말고

에구 2018-01-04 03:11:46
육조스님의 정과 혜를 말하는 것은 깨달은 뒤에 정과 혜를 이야기 합니다
깨달은 뒤에 중생을 교화 하라는 말은 가르치는 분이 바로 알아야 바른 길을 제시 할수가 있기 때문 입니다
깨닫는다는 말은 비현실적인 말이 아니며 수행하여 체득 하지 못하면 알수가 없습니다
본인의 수행이 열리면 깨달은 분들을 볼수 잇는 안목이 생기게 됩니다
정평불 공동대표 한양여대 교수라는 분의 수준이 이 모양입니까
일념즉시 무량겁이니 초발심시 변정각도 어느 순간 해석이 틀려집니다
허구가 아니며 자신의 무능을 탓하세요
작은 머리만 써시는 분이 무엇을 알겠습니까

에구 2018-01-04 03:03:20
육조스님의 말씀 하시는 정과 혜는 정과 혜가 하나라는 의미 입니다
수행 과정과 정도에 따라서 천차만별이 아니며 육조스님의 정과 혜는 개달은 뒤의 정과

항마저에/지옥9층불도모자랄것 2017-12-29 14:23:00
바른법깨달음과다른/엉뚱한곳에서/의심/이뭐꼬/화두잡고서해결한다하니 동문서답형깨달음만활개치는말법세상

화두는실체인연/매듭고리를/푸는게NO

자기를인연/매듭에는/천지인등/일체만들어진연관고리로
일어난(행한)/일체의인연과의매듭고리를풀어야YES

PS-범잡을려면범과직접해결/화두랑은전혀NO-해당사항無가짜허상을잡고내가본불세계행NO/일생거짓으로/전매특허인양수억의/수천년세월동안사부대중과불교를 유린한죄크다

PS-바른법은/자신을만들어낸/실체의 모든이매듭을 대상으로하여/실체의 고리를하나씩풀어야만그기에서깨달음有
<매듭고리-적어도한가락매듭이라도풀어야될것>

그래서/가는길(도)가 달라요 2017-12-29 13:36:19
부처님 바른법으로는 인과연법 =원인과/결과 매듭행 법이라하며
이것을 이매듭을 의;문/의심으로/풀고해결?이뭐꼬로/참선화두삼아 해결?
<천부당만부당>

부처님과/법을 /중상모략 불법을 훼손하는자이며/망령된법(말법행의 원인과결과 인연법)
~~
부처님은 이러한 비정상적인 부처님법 가르침과는 전혀다른
모든 부처님의 공통법과는 완전 틀린 말법이라 직접 말씀하시었고

그래서 님/들과는 전혀 다른 길로나아가는 다른 도 다른 부처세계로 나아가는법으로 하늘과땅 아니아에다른 천지분간도못하는그법이랑완전다른지옥갈/악마경계만드는행이며 말법행이라분명히말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11길 16 대형빌딩 4층
  • 대표전화 : (02) 734-7336
  • 팩스 : (02) 6280-255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만
  • 대표 : 이석만
  • 사업자번호 : 101-11-47022
  • 법인명 : 불교닷컴
  • 제호 : 불교닷컴
  • 등록번호 : 서울, 아05082
  • 등록일 : 2007-09-17
  • 발행일 : 2006-01-21
  • 발행인 : 이석만
  • 편집인 : 이석만
  • 불교닷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불교닷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san2580@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