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릉 양식의 기원
조선 왕릉 양식의 기원
  • 김규순
  • 승인 2017.11.24 13: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재] 김규순의 풍수이야기 120.
▲ 공민왕릉 전경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 왕릉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현재 18개 지역에 40기의 릉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조선 왕릉의 구조나 형식을 보면 공민왕의 왕릉형식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 왕릉이나 강화도에 있는 고려 왕릉에서는 볼 수 없는 양식들이 나타나며, 그런 구조와 양식들이 조선 왕릉에서 계승되고 있다.

개성부근에 있는 공민왕릉을 보면, 무덤 둘레에 호석이 둘러싸고 있고, 혼유석과 장명등이 놓여 있으며 좌우에 문인석과 무인석 그리고 석마가 있다. 조선 왕릉에서 이런 구조와 양식을 그대로 발견할 수 있다.

▲ 공민왕릉의 호석

공민왕릉은 왕릉의 구조와 양식을 어디에서 가져왔을까?

세밀히 살펴보면 사찰의 구조에서 모방한 것을 알 수 있다. 대웅전이 무덤이고 석등이 장명등이 되고, 쌍탑이 망주석이 되며 사천왕상이 문인석・무인석이 되는 것이다. 대웅전을 지키는 용 대신에 석양과 석호를 왕릉 주위에 둘렀다. 사상적 배경으로는 왕즉불(王卽佛)사상이다. 왕이 곧 부처라는 의미이다. 요즘말로 두사부일체이다. 왕즉불사상은 신라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왔다. 신라시대에는 왕과 왕비의 이름, 그리고 자식들의 이름까지 붓다의 가족이름으로 지었다. 고려시대에는 지방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전국에 사찰을 지었다. 도선국사의 비보사찰이나 호국사찰이라는 명분하에 많은 사찰을 지었고 지방 직접 통치의 한 축으로 삼았다. 조선시대에도 원찰이라는 이름으로 사찰들이 지어졌거나 왕실의 안녕을 위해 소임을 다하였다.

▲ 태조이성계의 신덕왕후 초장지에 있었던 정릉의 호석. 태종 이방원이 정릉을 이장시키고 광통교 축대로 사용했다. 공민왕릉의 호석과 동일한 무늬양식이며 금강저도 거의 동일하다.
▲ 남원실상사의 대웅전과 석등 그리고 쌍탑의 구조

죽음의 세계는 유교보다 불교가 더 심오하다. 사후세계에 대한 의식과 사자를 위로하는 방법론도 불교가 더 디테일하다. 그 디테일에 민중은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 왕실도 그것을 피해가지는 못한 모양이다. 사람의 생각과 문화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조선이 건국되었어도 고려의 불교적 신앙을 사람들의 뇌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천년고찰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도 그런 연유일 것이다.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 근거와 모체가 있기 마련이다.

 

   
 

저널리스트 김규순은 계명대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했다. 성균관대 유학대학원 석사학위 취득. 강원대학교대학원에서 지리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준기 선생 외 여러 스승으로부터 풍수술법을 배웠다. 강원대 출강.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연구위원. 월간 <사람과산>과 <불교닷컴>에 '김규순의 풍수이야기'를 연재하고 있다.

[불교중심 불교닷컴, 기사제보 cetana@gmail.com]

"이 기사를 응원합니다." 불교닷컴 자발적 유료화 신청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11길 16 대형빌딩 4층
  • 대표전화 : (02) 734-7336
  • 팩스 : (02) 6280-255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만
  • 대표 : 이석만
  • 사업자번호 : 101-11-47022
  • 법인명 : 불교닷컴
  • 제호 : 불교닷컴
  • 등록번호 : 서울, 아05082
  • 등록일 : 2007-09-17
  • 발행일 : 2006-01-21
  • 발행인 : 이석만
  • 편집인 : 이석만
  • 불교닷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불교닷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san2580@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