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관 내려놓고, 객관적 입맛으로 느껴야 한다”
“주관 내려놓고, 객관적 입맛으로 느껴야 한다”
  • 한유미/한국차심평원장
  • 승인 2017.10.23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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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선생 한유미의 차와 놀자] (11)국민녹차-오설록 세작(5)

모든 사람의 생각과 형편이 같을 수가 없고, 같아질 때까지 기다리는 일도 불가능하다. 자신의 밥은 자신이 지어야하고, 땀을 흘린 만큼 거두어들이는 것이 차농사, 차공부가 주는 교훈이었다. 대기업(차에 관한 부분만 해당)이라고 해서 늘 돈이 있었던 것이 아닐 것이고, 늘 이익이 있었던 것도 아닐 것이고, 기계와 기술에 투자를 하지 않고 저절로 되었겠는가. 투자를 하는데 하기 싫은 일이 없었겠는가. 편히 살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은 같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대기업(돈)을 좋아하거나 커넥션이 있어 이 글을 쓴다고 오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돈은 좋아하지만 불로소득을 꿈꿔본 적 없고, 땀 값 이외의 돈을 넘본 적이 없다. 대충 7~8년 전쯤에 필자의 전문성을 확인하고 싶어, 오설록 연구소에서 초대한 적이 있었다. 민간인은 처음이라고 했다. 증제차 공정이 보고 싶어 초대에 응했는데 보지 못했다. 덖음차 가공공정은 보여주었다. 대접이 융숭하고 친절했으나 그 이후 다시 연결된 일이 없다. 차는 형편이 되는대로 구입해 마시다가 말다가 했다.

썰렁한 복도에 남겨졌던 차, 우리 좋은 차도 나눠야

언젠가 어느 대학원에 강의하러 갔더니 강의실 복도에 오설록 차가 마련되어 있었다. 협찬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등급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밤에 강의가 있어 제대로 살펴볼 시간을 갖지 못했다. 수업 전 대기 중에 잠깐 맛을 보았는데 학생들은 아무도 그 차를 찾지 않아 아까웠다. 하필 그날 수업에 대학원생들은 일본 녹차를 많이도 사왔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복도에 썰렁하게 남겨진 차 생각이 났었다. 일본차도 좋지만 우리의 좋은 차도 함께 나누고 싶었다. 대기업 소기업 가리지 않고 있는 사실 그대로 알리고 싶었다. 빈약한 우리 차계에 숨통이라도 터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도 개인 생산자들이 눈에 밟혀 남몰래 아쉬워하며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한 개인과 그 개인의 직업이 분리되는 삶이 있고, 한 개인의 삶이 그 직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이 있다. 필자가 하는 일들은, 불행하게도 삶과 직업이 둘로 나뉘지 않는다. 차 가공과 품질을 가르치는 선생을 하면서 개인의 이익과 공익적이라고 생각되는 이익이 충돌할 때 항상 개인의 이익을 포기해버렸다. 덕분에 가난의 도(道)를 아직 이어가고 있다.

자초한 가난으로 누가 시켜서 누굴 위해서는 아니지만, 어쨌든 불행까지 팔면서 구차하게 거듭 신경을 쓰는 이유는, 이 글이 어떤 후원을 받아 쓴 것이 아닐까라는 오해와 억측을 우려해서다. 5회에 걸친 두서없는 글을 성의껏 읽어준 독자와 정보가 필요한 소비자에게, 혹시라도 불신을 조장하여 찬물을 끼얹는 사람들이 있을까 경계하지 않을 수 없어 내내 마음이 쓰였다.

대기업에도 좋은차 있지만, 경쟁력 없음 사라질 것

대기업의 차가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면 차계 자체도 홍보효과의 덕을 본다. 차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다. 대기업의 차를 일부러 알리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좋은 차가 대기업의 차였던 것이다. 차의 좋고 나쁨은 기업의 규모에 결코 있지 않음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개인 다원은 검증하는 과정이 복잡하고 여러 가지 불편이 있으나, 기회가 닿는 대로 조건에 부합하는 녹차가 있다면 제2, 제3의 국민녹차를 알리려고 한다. 오설록 세작도 경쟁력이 없거나 경쟁이 되는 녹차에 밀린다면 우리의 관심에서 사라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국민녹차의 가치는 싫증나지 않음에 있다. 싫증나지 않음의 출발은 ‘신선함’이다. 덖음차의 특징인 감칠맛도 신선함이 바탕이 되어야 찬사를 받는다. 보이차도 원래는 끓여마시던 차였지만, 신선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우려마시는 차’로 거듭났다. 그렇듯 신선함은 우리의 삶, 몸과 정신의 뿌리가 되어 날마다 새로운 날을 이끌어간다.

차 훈련 도구로 심평만한 게 없다

심평(관능검사)이라는 방법을 거치지 않고 가공(품질)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쉽지가 않다. 심평에 충실하다보면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무아(無我)의 세계로 자연스럽게 진입할 기회가 많다. 무아라는 말을 종교적·철학적으로 거창하게 생각하지만 그리 겁먹을 용어가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일의 심취나 몰입의 정도에 따라 누구라도 무아의 경지는 체험되곤 한다. 자기집착을 버려야 삶에 도움이 될 때, 그 집착을 내 마음대로 버리느냐 못 버리느냐, 즉 마음의 관리(평정심)를 위한 훈련이 필요한데, 차의 세계에서는 훈련의 도구로 심평만한 것이 없다.

선(禪)에서 졸음 방지에 차(茶)가 도움이 되어, 선승들이 애호한 차를 선과 동일하게 대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차의 정신화, 다선일미의 단초가 되었을 것), 심평의 몰입강도와 그 이후의 변화는, 차가 선에 도움이 되는 단순한 정도를 훌쩍 넘어선다. 마시고 제대로 즐기는 것도 심평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차도 쓸모 있는 도구가 되지 않는다.

기술이 극대화되면 예술로 승화되는 것처럼, 심평능력이 자유로우면 인간을 포함한 세상에 대한 새로운 통찰이 생긴다. 심평이 심평선(審評禪: 심평을 넘어서 차를 즐기는 자유, 즉 차심평을 기반으로 삶의 질적 인식의 변화를 유도하는 확장의 가능성)이 될 수 있는 이유다.

자신 주관 내려놓아야 심평의 길 열려

심평선에 이르면 심평(茶)은 놀이(장난감)가 된다. 유희라고 다 같은 유희가 아니다. 심평은 자신이라는 주관을 내려놓지 않고는 습득의 길이 열리지 않는다. 자신을 버린다 함은 몸의 기계화(객관적 입맛의 형성과정)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말한다. 자연스런 학습의 과정이다. 그러면 자신은 영 잊고 마는가. 주체가 없다면 무엇으로 사는가.

심평 훈련으로 몸이 완전히 만들어지면(끝없는 훈련으로 차의 향과 맛이 사회적 입맛으로 체계화 되는 것) 새로운 자신이 재탄생된다. 오늘 본 산이 어제 본 산이 아니듯, 심평 이전의 자신이 아닌 새로운 자신, ‘거듭난 자신’의 재발견이다. 차를 감상하는 경지를 넘어 차를 매개로 세상을 감상하는 여유를 갖고자 한다. 그런 세상에서의 기술적 평가는 ‘그저’ 평가라고 할 뿐이다.
 

차선생 한유미(韓有美)는
중국 항주다엽연구소(杭州茶葉硏究所) 심배화 선생에게 차심평(Tea Tasting)을 배웠다. 2003년부터 심평과 가공, 차 고전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주해서 《육우다경》과 《동다송·다신전》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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