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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들 실존적 결단 필요한 때
"40년 학력 위조 승려 당선, 대단히 실망스럽다"
2017년 10월 16일 (월) 09:57:19 홍창성 교수 미국 미네소타주
홍창성 교수(미 미네소타주립대)가 자신의 'Yumaa Hill' 계정의 페이스북에 설정 스님의 조계종 제35대 총무원장 당선 관련 글을 올렸다. 홍 교수는 앞서 "학력 허위 기재는 표절보다 나쁘다"는 글을 썼다.

이번 글은 "40년 허위 학력 기재자도 맹목적으로 뽑아 주는 시스템을 가진 조계종, 조계종은 자정 능력이 없다. 스님에 의지 말고 불자들 스스로 자각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홍 교수는 불교와 철학 관련 글을 'Yumaa Hill' 계정에 올리고 있다. 홍 교수의 허락을 얻어 다음의 글을 게재한다. 편집자 주.


불자(佛子)들의 실존적(實存的) 결단이 필요한 때
- 이제 불자들은 승보(僧寶) 없이도 스스로 삶과 세계에 마주설 수 있다 -


사춘기 시절 내 심장을 뛰게 한 둘은 시(詩)와 철학이었다. 아, 나는 원래 대학 2학년까지 바이런과 워즈워드를 읽던 영문학도였다. 그런데 다음의 짧은 문장이 어린 시절 내게 가장 매혹적인 구절로 다가왔다: ‘철인(哲人)은 홀로 존재세계 전체와 맞설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웅혼한 낭만적 기질이 흘러넘치던 독일 실존주의 철학자 니체다운 일갈(一喝)이었고, 이것이 그의 초인(超人) 사상의 정수(精髓)였다. 이보다 더 멋진 포효(咆哮)가 인간에게 가능할까? 

그런데 10여 년 전부터 불교를 공부하기 시작한 후 언제인가부터 나는 우리 불자(佛子)들이야말로 초인(超人)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한번 ‘불자초인론(佛子超人論)’을 집필해 보겠다고 마음먹기도 했다.

   
▲ 홍창성 교수의 ''Yumaa Hill' 계정 페이스북 갈무리


무아는 지혜와 용기 동시 갖춘 진리
막행막식 아닌 올바르게 살라는 것
초인들에 가능한 가르침, 조계종은?


석가모니 가르침의 기본인 무아(無我)는 모든 종교 가운데 유일하게 불교만이 가진 진리에 대한 통찰이다. 스스로의 본질적 또 독립적 존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이 가르침은 실로 초인다운 지혜와 용기를 동시에 갖지 않고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냉철한 진리다. ‘나의 영혼,’ ‘나의 구원,’ ‘나를 아낌,’ ‘나의 행복,’ ‘나의 평화’ 그리고 ‘나를 사랑함’을 추구하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인데 – 그래서 이런 가르침을 파는 다른 종교와 한국의 일부 스님들은 신자들을 모아 돈 벌기가 너무 쉽다 – ‘나’에 대한 이런 본능적 (동물적?) 욕구를 초월하여 그 욕구의 근원을 소멸시켜야 깨달음과 열반에 이른다는 불법의 깊이는 초인이 아니고서는 받아들여 실천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불교는 이보다도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존재자가 서로 연관되어서만 생성 지속 소멸한다는 연기(緣起)를 가르치며 스스로의 고통의 소멸보다는 모든 이와 함께 모든 고통을 소멸시켜야 한다는 절대적인 자비이타행(慈悲利他行) 또한 반드시 실행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무아(無我)를 받아들여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에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nothing to lose)’는 식으로 막행막식하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버리고 이기심 없이 (selflessly and unselfishly) 아무 대가도 바라지 말고 자비를 행하며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살라는 가르침이었다. 

이 모두는 초인들에게나 가능한 도덕명령이다. 40년 동안 학력을 사칭하며 큰 자리 여럿 하고서는 급기야는 조계종 차기 총무원장으로까지 선출된 스님이나 그런 분을 맹목적으로 선출한 조계종 지도층 같은 분들에게 가능한 일이 아니다.

석가의 전법 비유하는 법륜은
사자후와 같은 강렬한 가르침
토끼 만드는 그런 가르침 아냐


무아(無我)라는 냉철한 진리와 존재세계의 본연의 모습인 연기(緣起)를 받아들이는 불자라면 혼자서도 존재세계 전체와 마주설 수 있는 용기를 길러야 한다. 불교는 원래 따뜻한 품에 편안히 안기고만 싶어 하는 토끼나 고양이를 위한 종교가 아니라 전쟁을 수행하는 전사들 가운데서도 그 최고인 왕족 출신 고타마 싯다르타가 창조한 사자(lion)의 그리고 사자들을 위한 가르침이다. 

예를 들어, 석가의 전법 활동이 법륜(法輪)을 굴림에 비유되곤 하는데 이때의 바퀴란 동네 달구지 수레바퀴가 아니라 드넓은 전장을 달리는 전차의 바퀴를 의미한다. 전투를 지휘하던 왕이 타던 전차의 바퀴 말이다. 그리고 부처의 가르침을 사자후(獅子吼)라고 하는데, 이것은 요즘 유행하는 대로 예쁜 얼굴의 강연자나 귀여운 스님이 내는 나긋나긋하고 편안한 목소리로 된 따뜻한 가르침이 아니라 사자가 포효하는 듯한 크기와 깊이를 가진, 심장을 뛰게 하며 우리의 존재 전체를 뒤흔드는 강렬한 가르침을 말한다. 

제대로 된 법문은 우리를 토끼로 만드는 가르침이 아니라 우리 안에 웅크리고 있는 사자를 깨우는 가르침이어야 한다. 불교가 언제부터 우리를 부려먹고 착취하기 쉬운 순치된(tamed) 가축이나 토끼로 만드는 노예들을 위한 가르침이었던가? 지난 수백 년 동안 한국 불교를 재정적으로 지탱해 온 여성불자들(보살님들)을 대단히 무례하게 대하는 비구스님들을 한국에서 많이 보아 왔는데, 도대체 누가 그리고 무엇이 사자의 가능성에 충만한 재가보살과 불자들을 그토록 우습게 보고 대하도록 만들었는가?

불자라면 삼보에도 의문 가져야
석가는 열반 당시 '법'과 '율' 강조
'율'따르라했지 스승 말한적 없어


초인이 될 불자라면 삼보(三寶)에 대한 귀의(歸依)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그리고 과감하게 의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초인으로서 삶과 세계에 스스로 맞선다기보다는 삼보에 의지하고 안겨 살아야 제대로 된 불자라는 것이 삼보에의 귀의가 요구하는 바이니까 그렇다. 

그런데 경전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든 간에, 이런 삼보 귀의가 정해진 시기는 분명 석가가 열반한 이후일 것이다. 석가모니는 요즘 일부 스님들처럼 스스로를 보배라고 여길 정도로 에고(Ego)가 거대했던 분이 아니셨고, 또 열반 당시에도 가르치신 법(法)과 율(律)을 믿고 따르라고 하셨지 자신과 같은 스승을 새로 찾아 의지하라고 하지 않으셨으니까. 

그래서, 비록 불자들이 이미 열반에 드신 석가를 믿고 의지할 보배로 여기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럽겠지만, 아무래도 석가께서는 자신을 불보(佛寶)로 보며 의지하려는 불자들의 노력을 좋아하실 것 같지 않다. 자신의 구원을 위해 석가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친견하고 싶어 했던 사망 직전의 병자를 어리석다고 꾸짖으셨다는 유명한 일화까지도 있을 정도니까. 

석가의 법과 율은 깨달음 열반의 길
법보는 인격체 아닌 삶에 대한 진리
법보에 귀의는 귀의랄 것 없는 귀의


한편, 석가께서 가르치신 법(法)과 율(律)이 불자들이 믿고 의지할 만한 보배라는 점에 대해서는 별로 이의를 제기할 수도 또 그럴 필요도 없다. IQ 3,000이 넘으셨을 석가께서 그 깊은 지혜와 통찰로 내어 놓으신 법과 율이니 2,50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가 받아들여 삶에 체화해 사는데도 무리가 없이 우리를 깨달음과 열반의 길로 이끈다. 

물론 일부 경전 특히 <열반경> 계통의 문헌은 그 내용과 성립과정에 문제가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다른 경전의 대부분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이미 불설(佛說)로서의 진가가 확인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런데 이 법보(法寶)로 귀의하는 경우는 불자들이 믿고 의지하는 대상이 어떤 특정 신이나 사람과 같은 인격체가 아니고 삶과 세계에 대한 진리이기 때문에 실은 귀의랄 것도 없는 귀의다. 

이는 우리가 수학과 물리학의 진리를 믿고 의지할 때 그것에 귀의한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법(法)과 율(律)이라는 법보(法寶)의 진리에 의지한다는 것은 그 진리를 이용한다는 것이지 그것에 복종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승보 귀의는 예부터 논란 소지 많아
승가의 범위 전통마다 해석 다른 탓
허위학력승을 안식처로 의지할수는


불보나 법보에의 귀의와는 달리 승보(僧寶)에의 귀의는 예로부터 논란의 소지가 많다. 먼저 귀의의 대상인 승가(僧伽)의 범위부터가 전통에 따라 해석이 다르다. 남방에서는 스님들만이 승가를 이룬다고 보지만, 북전불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사부대중 전체가 승가를 구성한다. 

그래서 사부대중 전체 불자 사회를 불자들이 안식처로 여기고 그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요구가 승보에의 귀의라고 한다면 이에 대해 원칙적으로 반대할 이유가 없는데, 만약 귀의할 승가의 범위를 스님들의 그룹만으로 한정시킨다면 여러 문제가 발생한다. 

특히, 위에서 한번 지적한 대로, 요즈음 조계종처럼 학력을 허위로 기재하고 40년 동안 큰 자리 여럿 한 75세의 스님을 눈감고 지지해 종단의 행정수반으로 선출하는 분들의 집단을 귀의할 안식처로 여기고 믿고 의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스님들이 삼보에 승보 포함시켰을 것
자신 스스로 보배라 부르는 코메디언
존경 공경은 강요아닌 노력에 의한 것

 
한편 나는 오래 전부터 이 삼보(三寶)에 승보를 포함시킨 사람들은 분명 스님들 자신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무척 우스꽝스럽게 여겨 왔다. 자기들 스스로를 보배라고 부르는 염치없는 코미디언들이 이 세상에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가 아닌 유교문화의 이야기지만, 내가 어렸을 때 한국에서 만나는 모든 어른들로부터 ‘어른을 잘 모셔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유교근본주의 가르침을 귀가 따갑게 들었다.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분들 스스로가 모두 어른이었기 때문에 결국 그들에 의하면 ‘나 같은 사람을 잘 모셔야 너는 훌륭한 사람이 된다’라는 대단히 코믹한 훈계였다. (이런 사람들을 요즘 한국에서는 ‘꼰대’라고 부른다고 들었다.) 

이렇게 자기를 잘 모셔야 덕 있는 사람이라고 매일 같이 떠들어 대는 뻔뻔스러운 문화도 드문데, 유교뿐 아니라 불교의 승보 귀의도 실은 똑같은 코미디다. 가만히 생각해 보라. 당신은 당신을 존경하고 공경하고 잘 모시는 사람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할 만큼 뻔뻔스러울 수 있겠는가? 내가 약 2년 전 발표한 에세이에서도 썼지만, 존경과 공경은 강요되어서는 안 되고 (노력으로) 얻어져야 한다 (Respect should not be forced. It should be earned.).

미국서 종신고용보장, 교수와 사제
중대범죄 등으로 교수는 직업잃어
천주교 사제만은 철밥통 직장 가져


잠시 기분전환을 위해 요즘 서양의 사제들(priests) 이야기를 좀 하겠다.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미국에서는 천주교 신부들이 수십 년 동안 아동들을 성추행하고 성폭행해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켜 왔다. 그런데 천주교회는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면서도 이 신부들을 쫓아내지 않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 주는 등의 방법을 쓰면서 이들을 무조건 보호하고 있다. 

우스갯소리지만, 미국에서는 해고당하지 않는 직업이 둘 밖에 없다고 한다. 테뉴어(tenure 정년보장 – 미국에는 정년이 없어서 실제로는 종신고용보장)를 받은 대학교수와 천주교 사제가 그들이다. 그런데 테뉴어를 받은 대학교수라도 만약 그 소속 학과가 폐지되거나 대학이 문을 닫으면 직업을 잃게 된다. 중대한 범죄를 저질러도 마찬가지다. 

이런 면을 고려하면 미국에는 오직 천주교 사제만이 절대적으로 종신고용이 보장된 철밥통 직장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추악한 범죄행위를 저지르고도 무조건 보호받는 천주교회의 작태가 신자들을 사제들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하였고, 그래서 결국 미국 천주교에서는 새로 신부가 되겠다는 사람들의 수가 격감했고 또 들어오는 새 사제들의 자질도 예전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게 되었다.

미국 종교학 교수 목사 신부보다 낫기도
교수들 "새 시대 개신교 사제 역할" 생각
지식인층이 비도덕한 사제 계급 대신 해
 

개신교도 사정이 그다지 나을 것이 없다 (미국에서 잘 되는 얼마 안 되는 교회는 주로 모두 한인 교회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미국 대학에 재직하고 있는 종교학 교수들은 이제 자신들이야말로 새 시대의 개신교 사제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들 생각하기 시작했다. 

먼저 그들은 천주교나 개신교의 사제들보다 지적으로 월등히 우수하고 기독교에 대한 연구도 비교가 안될 만큼 더 깊으며, 또 교수의 도덕성에 대해 별로 기대가 많지 않은 미국이라고는 해도 연구를 열심히 하는 미국 교수들은 그래도 품행이 대체로 방정하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신부나 목사보다 낫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종교학과 교수들이 자기들은 새 시대에 기독교 전통을 전승하는 진정한 주체들이라고 여기며 소명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연구하며 활동하고 있다. 말하자면 서양의 지식인들이 이제 전문화된 사제 계급의 역량(또는 job performance)과 도덕성을 더 이상 신뢰하지 못하고 스스로들 그 역할을 짊어지겠다고 나서고 있는 것이다.

불교계도 스님들 없는 시대 준비해야
승보란 염치없는 자들 만든 개념일뿐
깨달음 열반에 스님은 필요하지 않다


이제 우리 불교계는 스님들 없이도 삶과 세계에 의연히 대처할 수 있는 불자들의 시대를 준비해야 하겠다. 승보(僧寶)란 원래 자기들을 믿고 의지해야 불자로 인정하겠다고 한 염치없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이니까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훌륭하신 스님들이야 물론 깨달음과 열반의 길에 길잡이도 되시고 또 도반도 되어 주시겠지만, 그분들조차 더 이상 우리의 깨달음과 열반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존재는 아니다. 그분들은 진리의 길을 함께 걷는 여러 도반 그룹의 하나로서 존재하고 또 그런 면에서 필요하다면 그렇게 필요할 뿐이다. 

아주 오랜 옛날 책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글도 못 읽던 사람들이 부처의 가르침을 전해들을 수 있던 유일한 통로가 부처의 말씀을 암송하고 있었던 스님들의 입이었을 때는 스님들의 존재가 법보(法寶)만큼 중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전혀 다른 시대에 살고 있다. 경전과 잘된 법문 그리고 괜찮은 강연이 인터넷에만도 넘쳐흐른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우리에게는 법보(法寶)만이 원칙적으로 중요할 뿐이다.

대승불교 가진 공덕 쌓기 믿음
자신 안갖고 남에게 회향하기도
생전예수재와 면죄부 뭐가 달라


영어권 불교학자들조차 잘 알고 있는 사실인데,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공덕(功德)이 이전(transfer)될 수 있다는 믿음은 내게 언제나 웃음을 짓게 만드는 이야기다. 요즈음은 어떤 좋은 불교 행사를 하고서는 거기서 생긴 공덕을 행사 주체들이 차지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회향한다고까지 하고 있다. 

이런 생각의 취지는 물론 좋다. 그런데 자기가 쌓아 놓는다고 정말 물건 쌓듯이 쌓아지는 것이 공덕일까? 또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 예를 들어, 기도와 염불로 공덕을 많이 쌓았다는 스님들이 절에서 돈 받고 수험생들을 위해 기도해 주며 – 나눠 주기도 한다고 들었는데, 우리 모두 21세기를 사는 사람으로서 한번 솔직히 이것이 얼마나 웃기는 코미디 같은 소리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작년과 올해 여름 한국에 머무르며 절마다 ‘생전예수재’를 지낸다고 플래카드 걸어 놓은 것을 많이 보았는데, 한글로 쓰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예수님이 살아생전 무슨 재를 지냈다는 것인가 하고 어리둥절했었다. 알고 보니 죽은 뒤 후손들이 지내주어야 할 천도재를 죽기 전에 자기가 미리 확실하게 지내 놓는다는 것이었다, 죽은 다음 좋은 곳으로 가고 싶어서. 

주지하듯이 16세기 초반 서양에서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당시의 천주교회가 천당행 티켓이라며 면죄부를 강매하는 신성 모독적 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돈 주고 면죄부를 사면 악인도 천당으로 간다는 블랙코미디였는데, 개방적이면서도 강직한 성품을 가졌던 루터가 분노할 만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요즘 절에서 수입원으로 인기가 많은 듯한 생전예수제라는 것은 그 성격이 이 면죄부 판매와 다를 바가 전혀 없다, 미리 돈 내고 재를 지내 극락에 가겠다는 것이니까. 나는 한국 불교계도 가까운 미래에 루터의 종교개혁에 준하는 변화를 이룩하지 못한다면 그 동안 쌓여 왔고 또 지금도 계속 쌓이고 있는 적폐를 결코 청산하지 못하리라고 염려한다. 

그런데 생전예수재와 같은 적폐의 주체는 많은 경우 자신들이 보배라고 떠벌이는 스님들이다.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은 많은 경우 서양(철학)보다 2천 년 이상 앞섰는데, 현재 자칭 승보라는 분들의 작태는 서양보다 5백 년 이상 뒤졌다. 엉터리 스님들이 한국 불교의 미래를 가로막고 있다.

사제들 커미션 지적한 루터 종교개혁
불자들도 스님 통하지 않고 자각할 때
책, 인터넷 등 법을 접할 통로는 많다


루터는 신으로부터의 구원은 자신과 신 사이의 직접적 비즈니스지 그 중간에 사제들이 끼어서 엉뚱한 커미션을 챙기게 내버려 둘 수 없다고 주장하며 종교개혁의 불길을 당겼다. 나는 우리 불교에서도 이제 우리가 스님들을 통하지 않고서도 우리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열반에 이를 수 있음을 자각하고 확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그 오랜 옛날 글도 없고 읽을 경전도 없던 시절에는 경전 구절들을 암송하고 있던 스님들이 재가자들의 공부와 수행을 위해 분명 필요불가결한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사정이 전혀 다르다. 주머니 속의 스마트폰 하나만으로도 경전, 법문 그리고 강연을 언제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다. 참선 수행을 도와주는 앱도 수없이 많다. 

반면에,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요즈음은 사제들의 존재가 그들의 자질 저하로 인해 오히려 구원이나 깨달음 그리고 열반의 길에 방해 요소로 작용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승려그룹을 포함하는 모든 사제 계급의 존재가 어느덧 우리가 과감히 박차고 나가야만 할 장애로까지 변질되고 만 것인지도 모르겠다. 

불자들은 이제 스님들 없이도 부처와 직접 마주 앉아 깨달음과 열반의 길로 나갈 수 있다. 석가모니 부처가 적멸 직전 말씀하셨듯이, 결국은 법(法)과 율(律)이 우리의 진정한 스승이다.

40년 허위학력 설정 스님 교수로서 용납못해
허위학력 눈감고 맹목적 당선 시스템도 문제
21세기 한국 불교를 어떻게 이끌겠다는 건지


나는 올해 8월까지만 해도 스님들에 대한 비판을 극도로 삼가왔는데, 이번에 새로 총무원장으로 선출된 설정스님의 허위 학력 기재 건은 평생을 대학에 재직하고 있는 교수인 나로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어서 침묵을 깰 수밖에 없었다. 

지난 20년 동안 ‘다섯 단어 이상 이어서 글을 옮겨 적었는데도 그 출처를 밝히지 않으면 표절’이라는 엄정한 규칙을 나이 어린 대학생들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하고 처벌까지 받도록 해 온 내가 어떻게 지난 40년 동안 학력을 허위로 사칭하고 광내고 다니다가 급기야는 종단의 행정수반 자리에까지 오른 분을 인정하고 따를 수 있겠는가. 

그리고 또 그런 그를 눈감고 압도적으로 지지해 총무원장으로 선출한 조계종 지도층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학력을 사칭한 분마저도 이렇게 맹목적으로 뽑아 주는 시스템으로 도대체 어떻게 21세기 한국 불교계를 이끌어 가겠다는 것인가?

몇 해를 지켜봐도 조계종 자정 능력 없다
애착이 많아 큰 기대가 가진 탓이라 여겨
삼보 중 승보 인정 않을터, 불자들 결단을


지난 몇 해 동안 조용히 관찰해 보았지만, 조계종은 이 모든 추한 문제들을 극복할 자정 능력이 없어 보인다. 대단히 실망스럽다. 

그런데 이렇게 실망하는 것도 근본적으로 내가 조계종단에 너무 많은 기대를 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처음부터 높은 기대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책 읽을 만큼 읽었다는 나도 역시 한국인답게 애착이 많아 어리석은 기대를 했다. 

그래도 아직 불자인 나는 이제 삼보(三寶) 가운데 법보(法寶)만을 따를 뿐 승보(僧寶)는 인정하지 않기로 한다. 나로서는 종교로서의 불교 전통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중대한 실존적 결단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다른 모든 불자도 스스로 어떤 실존적 결단을 내려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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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시간 : 2017-10-16 09:57:19]  
[최종수정시간 : 2017-10-16 11:29:00]  

   
기사 댓글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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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봉 2018-05-19 14:17:29

    속이 시원한 글이다..!나도 늘 그런생각을 해왔다.분ㆍ법까지는 인정한다.!그런데 .승.을 부처와 동급으로 봐서..3보라고?? 요즘 승가들이 그럴 역량이 되나? 승가는 점차 힘을 잃을것이다..제가불자와 법사 주도의 한국불교로 변하게 될것이다.신고 | 삭제

    • 먹물은 어쩔 수 없다 2017-10-17 10:12:37

      홍창성은 한국불교의 실상을 잘 모른다. 그는 사찰에서 신행활동을 하지 않고 짧은 경험치와 글만 읽어서 인지 인지와 판단의 한계가 고스란히 드러난 글이다. 조목조목 따져 볼까. 글 초반부터 헛발질이다. 불자 초인론? 니체에 고취된 나머지 망상이 심하다. 니체는 기독교 유일신에 의존하지 않는 신인류를 초인에 비유한거다. 욕망의 문제를 다루는 불교와 거리가 멀다. 니체는 신을 죽여야 인간은 자유를 얻게 된다는 점을 강조한거다. 절대자에 대한 의존성을 탈피해야 인간이 성장한다는 거. 니체는 자신안의 탐진치를 제거하라 하지 않았다.신고 | 삭제

      • 전혀 도움이 안되는 글 2017-10-17 07:54:59

        뜻있는 불자들이라면, 필자가 말하는 실존적 결단은 벌써 내렸다.

        이제와서 이런 검증되지도 않은 난해한 글을 싣는 이유를 모르겠다.

        300만불자는 자승이 백양사승풍사건이 돌발하자 재임하지 않겠다고 공약해놓고는
        불교광장을 조직하여 마직막날 후보자로 등록하여 재임을 하겠다고 뛰어들때부터
        "야 이것은 몽키비지니스다!"라는 것을 알았고,

        그때 바로 실존적 결단을 내려 조계종을 탈퇴한지 오래다.

        제발 때늦은 이런 글을 써서 혼란을 가중시키지 말라.

        지금 조계종의 야당들은 구심점이 없다.
        갑론을박하여 혼란스러울 뿐이다.신고 | 삭제

        • 법보신문 2017-10-16 19:06:26

          법보의 "금권.흑색선전...."35대총무원장.선거를 뒤돌아보며..란 기사 내용에 어이상실임.신고 | 삭제

          • 처용 2017-10-16 17:38:51

            서역인의 처용가 처용무 설화처럼, 불교는 종교를 떠나 문화적으로도
            오래전 신라시대 때 부터 이미 선불교 수행으로 농익어 소박하지만
            깊은 기품으로 고난과 설움의 근현대역사를 우리 민족과 함께 하고 있다.
            이미 가르침이 완성되어 각각이 그 실참실수 선택하면 처용무가 되는데..신고 | 삭제

            • 다시 2017-10-16 16:18:09

              http://m.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00353신고 | 삭제

              • 창성이 보아라...... 2017-10-16 16:17:24

                창성아 법보신문 김상영교수님의 글을 한번 읽어봐라.
                김상영 불자의 글과
                비불비속의 창성의 글과 누가 심금을 울릴까

                제발 부탁이니 불교관련 논문이나 글쓰지 마라

                http://m.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00353신고 | 삭제

                • 투쟁노선을 제시해보라. 2017-10-16 15:54:03

                  실존적 투쟁이,

                  불자들이 범계종단인 조계종단을 떠나라는 소리냐
                  아니면 스님들이 조계종단을 떠나라는 소리냐?

                  -홍교수는 긴긴밤을 썰을 풀지말고,
                  노선을 간결하고 분명하게 밝혀라신고 | 삭제

                  • 조선왕조 500년 2017-10-16 14:59:06

                    숭유억불정책으로 불교가 탄압받던 시대, 승려들은 개백정 보다 못한 신분으로 4대문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했다. 그때도 선불교 였다, 보살을 호구로 알았으면 그때 도움도 안되는 선불교 버렸겠지. 그런 암흑기 500년 산속에서 나물,뿌리,버섯 이런거로 연명하고 시주받으러 다니면서도 유지한게 선불교야.

                    일제 강점기에 협력한 다수의 승려들 대신
                    독립운동하면서 갇은 고초를 겪은 스님들 대다수가 선승들이고 경허의 제자들이었다.

                    선불교가 진짜 보살들을 호구로 알고 사는 수준이하의 인간군상이었다면
                    굳이 저렇게 힘들게 살지도 않았지,신고 | 삭제

                    • 머고? 2017-10-16 14:43:32

                      교수라고 지멋대로 매도할 권리는 없거던!
                      뭔 수행과 뭔골부 뭔 포교를 햇는지 질문한다.
                      답해라???신고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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