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德)
덕(德)
  • 안재철 교수
  • 승인 2017.10.07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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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안재철 교수의 열린강원 4.

...(도가에서 말하는)...德(덕)은 각 萬物(만물)의 원리를 말한다고 할 것이다. 요~ 부분에 대한 이해가 언뜻 잘 안갑니다. 인연법을 강조하는 불교에서 왜 德이 상대적으로 道에 비해서 덜 다루어졌는지(저의 짧은 경전지식에 비추어보면요)...오히려 더 많이 다루어져야 하지 않았는지...德不孤必有隣(덕불고필유린, <論語> 里仁篇)처럼 말이죠.궁금합니다. 즐거운 추석되시구요! (연재물의 댓글 가운데)

>> 잠시 머리를 어지럽혀드려 죄송합니다.

“덕德은 각 만물萬物의 원리를 말한다.”라는 설명은 이해가 쉽지 않았을 것 같으며, 더군다나 저의 의도가 제대로 전달될 수도 없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중국음운학을 전공한 사람이 자꾸 철학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 어렵고 힘듭니다마는 제가 제기한 논의이니 잘 정리해 보겠습니다.

아래의 글에서 경어敬語를 쓰지 않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德’은 ‘道’로부터 각각의 만물에 부여된 원리이다.

일반적으로 ‘덕德’은 인간의 바람직한 인격과 그 인격의 발현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행위와 결과를 뜻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독자가 말씀하신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이나 ‘공덕功德·은덕恩德’ 등에 쓰인 ‘덕德’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도道’의 상대어로서 ‘덕德’은, ‘도道’가 ‘우주의 총 원리’이자 ‘만물의 근원’이며, ‘진리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것에 반해, ‘덕德’은 그러한 ‘道로부터 각각의 만물에 부여된 원리’, 그리하여 ‘각각의 만물에 부여된 자연스런 능력이나 그것의 생명력’ 또는 ‘각 만물의 속성’을 말한다고 할 것이다.

사실 흔히 알고 있는 ‘덕德’은 인간이 사고를 통해 지성으로 획득하고 실천을 통해 인격으로 획득한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이나 ‘공덕功德’, ‘은덕恩德’ 등에 쓰이는 ‘덕德’은 인간의 행위와 관련된다.

그러나 우리는 간혹 ‘물의 덕德’과 같은 말도 사용하는데, 그 때의 ‘덕德’은 결코 인간의 행위와 관련된 것이 아니며, 이것은 산스크리트어의 guṇa, 즉 성질, 특질, 특성, 속성 등으로 어떤 사물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실체의 성질을 말한다고 할 것이다.

잠시 우주가 생겨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자.

지금으로부터 137억 년 전 하나의 점에서 대폭발이 일어나 이 세상의 모든 원자와 별, 은하가 탄생하게 되었다고 하며, 또 갓 태어난 우주는 약 10-33cm 정도로, 머리카락보다 작고, 나노보다도 작은 크기였다고도 한다.

처음에는 그렇게 미세하였던 우주가, 지금은 무한하지만 유한하다고 하더라도 그 반지름이 적어도 137년 광년은 되어야 한다.

1광년이란 빛이 1초에 지구를 7바퀴 반을 돈다는 속도, 즉 30만Km를 간다고 하니, 그런 속도로 1년만 간 거리라고 하더라도 상상이 안 되는데, 137억년을 간 거리가 우주의 반지름이라고 생각하면, 수미산을 중심으로 하여 해·달·사대주四大洲·범천·욕계로 이루어진 세계를 하나의 소천세계小天世界라 하고, 즉 오늘날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의 은하계를 하나의 소천세계小天世界라고 하고, 그것이 3000개 모여 중천세계中天世界, 중천세계가 다시 3000개 모여 대천세계大天世界, 대천세계大天世界가 다시 3000개 모여 3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가 된다고 파악한 부처님의 지혜에 놀랄 따름이다.

아무튼 지금은 무한한 크기의 우주로 온갖 만물이 그 안에 존재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약 10-33cm 정도의 크기였다고 하니, 그 속에 무엇이 있었겠는가? 그것을 무無라고 하자니, 오늘날 있는 만물도 또한 없어야 할 것이니, 그것을 ‘유有’라고 해야 할 것 같아, ‘유有’라고 하니, 이번에는 단 하나의 ‘유有’라면 오늘날의 수없이 많은 종류의 만물은 없고 단지 그 하나밖에 없었을 것이므로 둘을 가정하여 유가에서는 음陰·양陽이라고 하였다.

유가에서는 그 처음을 ‘태극太極’이나 ‘무극無極’이라고 하고, 도가에서는 ‘도道’라고 하며, 불가에서는 그것을 ‘일물一物’, ‘공空’, ‘부처’, ‘위음왕불威音王佛’ 등의 용어로 이렇게 저렇게 불러보지만, 그것들은 모두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인식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도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그 처음이 ‘道’이며 그 ‘道’에는 우주만물이 생겨나는 모든 원리가 들어있어 그것에 따라 만물이 생겨난다고 할 것인데, 그 원리 중에는 인간이 만들어지는 원리, 개가 만들어지는 원리, 돌이 만들어 지는 원리 등이 있을 것이니, 그 각각의 만물들이 생겨나는 원리를 ‘德’이라고 한 것이다.

또 ‘덕德’은 ‘득得(얻다)’과 통하기도 한다.

善者吾善之, 不善者吾亦善之, 德善 ; 信者吾信之, 不信者吾亦信之, 德信. <老子>
착한 이를 나는 착하다 하고, 착하지 않은 이도 나는 착하다 하니, 착함을 얻고, [또한] 믿는 이를 나는 믿고, 믿을 수 없는 이도 나는 믿으니, 믿음을 얻는다.

필자筆者는 ‘덕德’이 왜 ‘득得’과 통하게 되었는지가 궁금하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의하면 “동東, 동야動也”나 “장葬, 장야藏也”라고 하고 있는데, 그것은 ‘동東’은 ‘동動’이라고 읽고, ‘장葬’은 ‘장藏’이라고 읽는다는 의미이며, ‘동東’은 아침에 해가 동쪽의 나무에 걸려있는 모습을 그려 ‘동쪽’아라는 뜻을 나타내고 그 시기에는 만물이 움직이지 않은 상태에서 움직이는 상태(動)로 변하기 때문에 ‘동動’으로부터 소리를 취한 것이며, ‘장葬’은 숲속(茻)에 시체(死)를 감추어 둔다는 의미에서 ‘장藏’으로부터 소리를 취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즉 소리와 뜻은 때로 관련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덕德’도 ‘덕’(본래 국제음표를 써서 기술해야 하겠지만 논문이 아니므로 한국한자음으로 쓴다.)이라고 읽는 것은, ‘도道’에 내재되어 있는 ‘우주만물이 생겨나는 어떤 원리’로부터 얻은 것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것은 필자의 생각일 뿐 누구도 그렇게 말한 사람은 없다.

사실 ‘덕德’뿐 아니라 많은 글자들이 문장에 쓰일 때, 단 한 가지 의미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극단적인 표현이겠지만, 특히 주자학이나 양명학 등의 신유학과 관련된 책을 읽어보면, 그 모두가 ‘성性·정情’이나 ‘경敬’, ‘지知’ 등과 같은 몇 글자에 대하여, 각각의 학자들이 어떻게 달리 생각하였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전부라고 할 수도 있다. 이것으로 보아 각 글자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 수밖에 없고, 그 중 어느 하나는 옳고 다른 것은 그른 것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단지 서로 다를 뿐이라고 할 것이다.

‘상常’이 ‘도道’의 다른 표현이라고 하면, 도가에서는 언제나 그렇게 해석된다고 생각하거나, ‘중中’이 유가에서는 항상 ‘꼭 중간을 나타낸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예를 들면 아래에서 쓰이고 있는 ‘상常’과 ‘중中’은, 각각 ‘상常’이 도가의 글임도 불구하고 ‘도道’인 것이 아니고, ‘중中’이 유가의 글임에도 불구하고 ‘꼭 중간’이 아니지 않는가?

聖人無常心, 以百姓心爲心.<老子>
聖人은 정해진 마음이 없고, 百姓의 마음으로 자기의 마음으로 여긴다.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庸>
희노애락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을 때를 中이라 하고, 나타났지만 모두가 節에 맞는 것을 和라 하나니라.

차제에 ‘중中’과 ‘덕德’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단, 이 글은 누구의 학설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필자筆者가 이해하는 방식을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시비是非를 가릴 생각은 전혀 없다.

먼저 ‘중中’을 위의 설명과 같이 ‘미발未發’이라고 하면, 유가도 역시 ‘중中’이 ‘딱 중간’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筆者의 생각에 따르면 같은 ‘미발未發’이라고 할지라도 유가와 도가, 불가의 ‘미발未發’이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다.

즉 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우주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있어야 하는 그 무엇(佛·一物, 道, 太極·無極)이, 어떤 원리를 얻어(德), 어느 것들은 사람이 되고, 어느 것들은 오리가 되며, 어느 것들은 돌이 되는데, 그 사람들 중에는 나도 있고 너도 있으며, 오리들 중에는 이 오리도 있고 저 오리도 있으며, 돌들 중에는 이 돌도 있고 저 돌도 있게 되어 만물은 서로 구분된다.

여기에서 유가는 사람 중심이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너의 다리는 길고 나의 다리는 짧기 때문에 너의 다리를 자르고 나의 다리를 늘려 중간으로 맞추는 것이 ‘中’이 아니고, 서로의 다리길이대로 그대로 두는 것이 ‘미발未發’이고 ‘중中’인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또 도가는 ‘도道’로부터 어떤 원리를 얻어(德), 존재하는 각각의 만물에 어떤 작위作爲도 하지 않는 것(無爲)을 자연自然스러운 것(스스로 그러한 것)으로 삼기 때문에, 오리를 죽여 사람의 먹이로 삼는 것은 작위作爲이며 자연自然이 아니다. 따라서 ‘中’이요 미발未發이라 함은, 오리는 오리대로 스스로 그러하게 살도록 하고 인간은 인간대로 스스로 그러하게 살도록 하는 것이 ‘中’이요 ‘미발未發’이라는 생각이다.

불가佛家의 중도中道는 전문가도 한마디로 말하기 어려울 터인데, 어찌 필자筆者와 같은 비전문가가 말할 수 있을까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보잘 것 없는 생각이나마 말해보자면, 불가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부처(一物)일 뿐이고, 만물萬物은 망상妄想이요 헛것이기 때문에, ‘중中’은 그저 ‘불佛’자체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즉 유가의 ‘중中’은 인간들 사이에서 미발未發이요, 도가의 ‘중中’은 만물萬物들 사이에서 未發이며, 불가의 ‘중中’은 ‘불佛’이 연기緣起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 ‘미발未發’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따라서 ‘덕德’도 처음에는 도가에서 말하는 ‘덕德’과 같이 ‘도道로부터 부여 받은, 각 만물이 그것이 될 수 있는 원리이며 속성’이라는 뜻이었던 것이, 유가에서는 ‘각 만물의 원리’ 중의 하나하나인 ‘사람의 덕德’, ‘오리의 덕德’, ‘물의 덕德’, ‘돌의 덕德’과 같은 것 중에서, 유가는 사람 중심이기 때문에 ‘사람의 德(속성, 자질)’을 부각시켜, ‘인간의 바람직한 인격과 그 인격의 발현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행위와 결과’를 뜻하게 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본다.

위의 생각이 독자제현의 머리를 더 어지럽히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안재철 교수(제주대)는 광주서중, 광주일고, 연세대학교를 졸업했다. 중국음운학을 전공한 문학박사이다. 저서에는 <수행자와 중문학자의 만남 『緇門警訓의 문법적 이해> <수행자와 중문학자의 만남 『禪源諸詮集都序의 이해』> <수행자와 중문학자의 만남 『禪要(上·下)』> <『本義로 이해하는 540部首 漢字』> <『本義로 이해하는 상용한자 1200』> 등이 있다. 여러 저서 가운데 <수행자와 중문학자가 함께 풀이한 『金剛經』>과 <수행자와 중문학자가 함께 풀이한 『無門關』>는 수암 스님(현 태고종 중앙강원 대교과 강백)과 함께 지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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