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 용장성의 풍수
진도 용장성의 풍수
  • 김규순
  • 승인 2017.09.26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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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김규순의 풍수이야기 116.
▲ 용장성 석축_ 뒤로 산이 있으나 옹골차지 못하므로 힘이 약하다

완도에 청해진이 있었다면 진도에는 용장성이 있었다.

장보고의 청해진이 당과 왜를 거느리고 삼각 해상무역을 했다면, 용장산성은 삼별초난의 마지막 보루였다. 이곳에서 왕온과 배중손 그리고 김통정이 항몽투쟁을 했던 곳이었다.

용장성은 벽파진을 항구로 하고 능선을 따라 산성을 쌓았다. 벽파진은 진도의 관문으로 신라 때부터 이용하던 항구였다. 산성은 선황산에 의지해 있었고, 용장성은 그 옆 상봉 아래 있었다. 지형이 비록 북향이긴 하지만, 통치자는 남향을 해야 한다는 통설에 반하여, 사신사를 뚜렷이 갖춘 풍수지형임에는 틀림없었다. 지형이 북향이니 건물지도 북향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 벽파진_옛날 진도의 유일한 관문, 정유재란 때 이순신장군이 백의종군에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돌아와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다는 장궤를 올리며 잠시 머물렀던 곳이다.

삼별초는 왕온을 왕으로 추대하여 용장성을 근거로 정부를 수립하였으며 남해안의 여러 지방을 장악했고, 다수의 섬들도 호응하여 기세를 높였으나. 개경정부와 몽골 연합군이 절치부심하여 진도를 공격하였다. 전략과 전술의 부재 그리고 군사수의 열세로 삼별초의 난은 진도에서 왕온과 배중손의 전사로 기세가 꺾였으며, 김통정이 제주도로 피하였으나 뒤따르는 여몽연합군에 의해 섬멸되었다.

용장성은 벽파진에서 직선거리로 3km, 길따라 가도 10리정도에 불과하였다. 이런 곳에 정부를 둔다는 것은 막강한 해군을 거느려야 가능하다. 바다에서는 야간에 소리도 없이 상대의 군함이 턱밑에 도달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해안가를 통제하지 못한다면 언제 어디로 침투한 적이 우리의 배후를 기습할지 모르게 된다. 용장성은 병법으로도 아군에게 매우 불리한 지형이었다. 산이 매우 높아서 철옹성처럼 버텨주지도 않고 바다는 항시 열려 있으며 다도해이므로 시야가 좋지도 못했으니 아군에게 불리한 지형이었다. 애초에 강화도에서 내려올 때 제주도로 바로 가서 진지를 구축했더라면 나름대로 지방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 용장성 지형도_작은 고을로서는 안성맞춤이나 지방정부나 통치자의 자리로는 미약하다.

나라를 세울 때 지형의 선택은 매우중요하다. 교통지리적, 경제지리적, 생태지리적 여건이 적합하지 않으면 유구한 역사를 잇기 어렵다. 특히 전쟁에서 지형의 유리한 점을 파악하지 못하면 백전불승이다. 장군이라면 풍수사를 대동하여 지형의 유불리를 따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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