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論語·爲政>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다.
모르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모른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그것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은 모르는 것을 고쳐 알게 되지만, 모르는지도 모르거나, 모르는 것을 알면서도 변명하려들면 영원히 모르며 살게 된다.
스티븐 호킹 박사가 세계적인 물리학자라고 하나, 어찌 그가 불교를 알 것인가? 비록 村夫(촌부)라고 하더라도 불교공부에 심취한 자라면, 불교에 관한 한 호킹박사보다 나을 것이니, 호킹박사도 불교가 궁금하다면 村夫(촌부)에게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제 아무리 불교철학 방면에서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혹 번역을 전문으로 하지 않았다면 번역을 전문으로 하는 이에게 배워야 마땅하고, 물리학의 기초가 되는 수학을 모르고, 곧바로 물리학을 배웠다면, 기초가 되는 수학만이라도 수학자에게 배워야하는 것이 마땅하다.
배움의 첫걸음은 下心(하심)에 있다.
불교철학을 전문으로 한 사람만이 불교를 아는 것은 아니다.
不立文字(불립문자)인줄도 모르고 문자에 穿鑿(천착)하는, 그래서 哲學(철학)방면에는 門外漢(문외한)이지만, 그에게도 재주가 있다면, 함께 호흡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줄 慈悲心(자비심)은 없는가?
中(중)이란 둘 사이의 꼭 중간이 아니지 않은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의 자연스러움대로 두는 것이 和(화)이고, 그것이 바로 中道(중도)가 아닌가?
피리와 같은 악기에서 각 管은 그 길이가 달라야 높거나 낮은 서로 다른 소리를 낼 것이고, 그 서로 다른 소리들이 어우러져야 비로소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조화라는 것은 처음부터 서로 다른 것이 전제되어야 성립될 수 있다. 즉 서로 같지만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을 ‘同而不和(동이불화)’라고 하고, 서로 다르지만 조화를 이루는 것을 ‘和而不同(화이부동)’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동안 漢文(한문)으로 된 佛典(불전)을 읽고 강의하며 책을 쓰면서 많은 곳에서 기존의 해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글을 써서 보내보았지만, 왜 그렇게 주장하는지를 이해하려고 들지 않고, 오직 기존의 해석방식만을 지키는 데에 혈안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마치 ‘지구는 분명 둥근데도 한사코 평평하다고 주장하는 것’ 같아 답답하였더니, 다행히 불교닷컴에서 연재코너를 마련해주시니 감사하기 그지없다.
지금 필자가 본 코너의 코너명을 '열린강원'으로 정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필자는 지금껏 諸學者(제학자)가 모두 동일하게 해석하였으며, 또한 그것이 분명히 옳다고 판단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알고 싶으면 누구의 책이라도 구하여 스스로 노력하면 얼마든지 깨칠 수 있을 것이며, 혹 깨치지 못했다면 마음이 없어 부지런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본 코너에서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諸學者(제학자)가 모두 동일하게 해석하고 있지만, 나만 홀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든지, 諸學者(제학자)가 모두 그렇게 해석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경우 등이다.
이런 문제는 사실 이미 꽤 많은 양이 수집되어 있기 때문에 당분간은 문제없이 본 코너를 운영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아직도 찾지 못한 수없이 많은 문제점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諸人(제인)들의 衆智(중지)를 모을 수 있었으면 한다.
한문으로 쓰인 經典(경전)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 궁금하여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자 한다면, “어떤 문장(가급적 語錄어록)에 대한 해석을, 누구의 어떤 책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있으나, 어찌어찌하게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며, 그 이유는 무엇이다.” 등으로 문제를 제기해 주시면, 그 의견에 필자의 의견도 덧붙여 올리고자 한다.
漢文佛典(한문불전) 해석에 관심이 있는 분은 누구나 모여 코너를 운영하다 보면 불교를 알게 되고 알게 되면 좋아지고 좋아지면 즐거워지지 않을까?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論語·雍也>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아는 것보다는 좋아하는 것이, 좋아하는 것보다는 즐기는 것이 낫다고, 알 필요도 좋아할 필요도 없이, 오직 즐기기만을 시도하라는 말은 아니다.
어찌 모르는데 좋아할 수 있으며, 어찌 좋아하는 단계가 없이 곧바로 즐거워 할 수 있겠는가? 모르는 자는 좋아할 자격도 없고, 좋아하지 못하는 사람은 즐길 자격도 없다.
알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궁금한가? 그리고 좋아하고 즐기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피나는 노력을 통하여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 한다.
배우고 또 배우며,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원리를 깨치고 나면, 아무 것도 배운 것이 없는 것 같으나, 남이 물으면 대답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게 되는 날도 있지 않을까?
안재철 교수(제주대)는 광주서중, 광주일고, 연세대학교를 졸업했다. 중국음운학을 전공한 문학박사이다. 저서에는 <수행자와 중문학자의 만남 『緇門警訓의 문법적 이해> <수행자와 중문학자의 만남 『禪源諸詮集都序의 이해』> <수행자와 중문학자의 만남 『禪要(上·下)』> <『本義로 이해하는 540部首 漢字』> <『本義로 이해하는 상용한자 1200』> 등이 있다. 여러 저서 가운데 <수행자와 중문학자가 함께 풀이한 『金剛經』>과 <수행자와 중문학자가 함께 풀이한 『無門關』>는 수암 스님(현 태고종 중앙강원 대교과 강백)과 함께 지은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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