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림사터 입구에 <가야불교 초전법륜성지 봉림사터>라는 간판이 서 있다. 봉림사터는 경남 창원 봉림산에 있는 폐사지인데, 신라 말에 세워진 구산선문 중 봉림산파의 사찰로 알려져 있다. 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 때(372년)에 전래되었다는 것이 공인된 학설이지만, 가야사를 연구하는 분들은 해양루트를 통하여 가야국의 허황후와 함께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학설이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와 김해지방에 전해오는 설화가 근거이다. 특히 허황후와 관련하여 전해오는 쌍어문에서 그 연결고리를 찾고 있다. 쌍어문은 현재 인도 아요디아가 속한 주정부의 문장(紋章)이다. ‘가락’과 ‘가야’는 인도 드라비다어로 물고기라는 뜻이기도 하다.
김해를 위시한 가야의 영역에서 고기 어(魚)자가 들어간 지명이 있다. 범어산・신어산・만어산 등의 지명이 허황후와 남방불교가 관련이 있다는 증거로 본다. 우리가 빠뜨리지 말아야 할 증거가 하나 발굴되었다. 명월사지에서 발견된 사왕석(蛇王石)은 인도불교의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여기 출토기와에서 발견된 ‘건강원년(健康元年)’이라는 글자는 ‘서기 144년’을 가리킨다. 이러한 일련의 증거들로 가야불교는 한층 설득력을 지니기 시작했다.
진경대사보월능공탑(보물 제362호) 비문에 의하면 “(진경대사(855-923)는) 얼마 안 되어 멀리 김해(金海) 서쪽에 복림(福林)이 있다는 말을 듣고 문득 이 산을 떠났다. ..(중략).. 이 절은 비록 지세가 산맥과 이어지고 문이 담장 뿌리(墻根)에 의지하였으나, 대사는 수석이 기이하고 풍광이 빼어나며, 준마가 서쪽 산봉우리에서 노닐고 올빼미가 옛터에서 운다고 하였으니, 바로 대사(大士)의 정에 과연 마땅하며 신인의 ▨에 깊이 맞는다고 하겠다. 그래서 띠집을 새로 수리하고 바야흐로 가마를 멈추고, 이름을 봉림(鳳林)이라 고치고 선방을 중건하였다.”
‘띠집을 새로 수리하고’라는 기록이 보여주는 것처럼 진경대사가 오기 전에 이미 이곳에 건물이 있었다. 지명도 복을 주는 곳이라는 복림(福林)인 것을 보면 종교적 장소라고 추정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그 기원이 가야에 닿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도 있다. 비록 건물은 사라졌지만, 봉림사터의 북현무와 서로 환포하는 좌청룡・우백호, 그리고 기개를 보이는 조산(朝山)을 보고 가야인 또는 신라인의 풍수적 공간을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이천년전에도 우리의 조상들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는 공간감각을 지녔다는 것이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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