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향산의 붉은승려, 서산의 후예들"
"묘향산의 붉은승려, 서산의 후예들"
  • 이지범
  • 승인 2017.06.21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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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땅과 스님들’ ⑦ 묘향산의 수행승들

2000년대부터 북한을 자주 왕래했던 분들조차도 아직, 또 우리들이 곧잘 하는 말들 속에서 “진짜, 북한 스님들이 있어요.”, “우리처럼 수행하고 있나요”라고 한다.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에 대해 자기식대로 해석하거나 아니면 관성화된 생각으로 이해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북한에서도 정초나 특별할 경우에 종교에 관한 행위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를 단순히 생각만 해도 이런 입장이 달라질 수 있다. 종교는 인간의 문제를 넘어 근원적인 측면을 다루고 있기에 북녘 하늘밑에서도 신앙화된 측면들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세기동안 제한된 형태로 북한사회에서 종교를 이끌고 있는 수행승과 불자 그리고 그 분들과의 인연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지범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
 

20여 명의 묘향산 수도승

북한의 5대 명산, 묘향산에서 수행하는 승려들은 20여 명이 넘는다. 이와 같은 보현사의 승려에 대한 수치는 1989년 1월 20일 묘향산 보현사 대웅전에서 개최된 ‘조국통일기원법회’에 법당으로 입장하는 사진 한 장면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날 법회는 보현사 단독으로 치러진 행사이다. 행사 보도사진에는 홍가사(紅袈裟)를 입은 13명의 북한 스님들 모습이 등장한다. 또한 이 법회를 보도한 기록사진 등을 관찰해 보면 묘향산의 보현사, 상원암, 금강굴, 불영대, 하비로암, 계조암 등지에서 수행하는 수도승이 2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날 법회는 북한 당국이 허가한 공식 행사이다. 분단이후, 최초로 북한지역에서 150여 명의 대규모 인원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는데 북한 언론에서도 이를 취재하고 보도한 바 있다.

묘향산 보현사와 산내 암자의 수도승들에 대한 소개는 전쟁과 분단 이후에도 나타난다. 월남하여 성균관대에서 교수를 역임한 조흥식 선생의 증언은 확실하다. 조흥식 교수는 “10대 중반에 묘향산의 암자인 법왕대에서 법천(法泉) 노장스님을 모셨고, 큰절(보현사)에는 주지스님 등 여러 명의 노장스님들이 계셨다”고 당시의 현황을 자신의 회고록인 <달처럼 매화처럼>에 기록하였다.

숭유억불 정책이 단행된 조선시대의 불교는 쇠퇴하고 전반적으로 침잠되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명종시기에 승과제도가 시행되는 등 중흥된 불교의 전통은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져 묘향산 보현사에서 불교전문강원(講院)이 운영되었다. 100여명이 넘는 학인 스님들이 보현사 강원에서 수학(經學)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그 당시에 걸출했던 서산, 사명대사 등 이름난 스님(名僧)들의 덕화로부터 이어졌다.

묘향산의 붉은 승려

‘붉은 승려’라 부르는 것은 묘향산의 수도승들이 붉은색 가사(紅袈裟)를 입고(授) 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만 해도 금강산의 붉은 승려가 조선의 불교를 대표했다. 분단 이후에는 묘향산의 수도승들이 그 자리를 굳건하게 채우고 있다.

▲ 보현사 스님들 백운 홍법 진명 스님(왼쪽부터, 사진=이지범 소장)ⓒ불교닷컴

삭발에 홍가사를 두르고 있는 보현사 스님들의 지금 모습은 구한말 일제에 항거하고 앞장섰던 조선의 붉은 승려들과도 겹쳐진다. 전통적으로 전해진 붉은색 가사는 북한의 상징이기도한 붉은 머플러와도 이미지가 겹친다. 1946년에 만 7∼13세 어린이들로 구성한 북한의 조선소년단은 붉은색의 삼각 형태로 된 '붉은 머플러'를 두르는 것이 정장이다. 또 마오쩌둥(毛澤東)이 1927년에 준(準)군사조직으로 결성한 홍위병(紅衛兵)도 붉은색 이미지를 모티브로 삼아 중국 문화대혁명시기의 정치적 대중운동을 상징화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붉은색은 한국과 중국 등 동양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전통색이다.

미국, 유럽 등 외국과 국내언론에까지 소개된 북한 승려들은 대부분이 묘향산의 승려들이다. 그들은 주지 청운스님, 부주지 청벽스님, 금강굴 주지 백운스님을 비롯하여 보현사에서 부전을 맡고 있는 혜광·월광·진명·홍법스님 등 20여 명의 스님들이다. 현재, 이들 스님은 보현사의 산내암자인 금강굴, 상원암, 축성전, 능인암(법왕대), 계조암, 불영대, 화장암, 하비로암 등 12곳 사암에서 수행하고 있다. 조선 말기까지만 해도 보현사의 산내암자는 24개소였다.

▲ 보현사 부주지 청벽스님(2008년 8월, 사진=이지범 소장)ⓒ불교닷컴

60대 초반의 세납인 청벽 스님은 보현사 부주지로서 2003년부터 모든 종무를 관장하고 있으며, 60대 후반의 백운 스님은 상운암과 금강굴(암)의 주지를 맡고 있다. 특히 40대 후반의 세납인 진명 스님은 청운 스님의 아들이다. 현재 하비로암의 주지를 맡고 있다. 그리고 혜광·월광·홍법 스님 등은 보현사 불학원을 졸업하고 관음전과 수충사 등에서 종교업무와 수행을 하고 있는 40대 중반의 젊은 스님들이다. 필자는 지난 2000년 9월로부터 2007년도까지 매년 1~2회씩 보현사를 방문하고 특히, 2008년 8월 8일 오전에 보현사를 방문하였고, 인터뷰를 통해 스님들의 법명 등 인물을 정리한 것이다.

서산대사의 후예들

경남 밀양(密成)에서 ‘서쪽 산에 해가 떨어지는 곳(日落處)’인 서산(西山)대사를 찾아간 사명대사는 묘향산 금강굴에서 법제자가 된다. 서산대사는 금강산에서 40대 후반에 묘향산으로 들어와 입적할 때까지 약 반세기를 이곳에 머물렀다. 묘향산에 오래 주석하여 서산대사라 부르게 된 청허휴정(淸虛休靜)대사는 1520년(조선 중종15) 3월∼1604년(선조37) 보현사 금강굴에서 입적(圓寂)하였다.

서산대사는 1604년 정월 23일 묘향산 금강굴에서 마지막 설법을 한 후에,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라는 임종게를 그 자리에서 적어 유정과 처영대사에게 전하고 가부좌로 입적하였다. 법랍 67세, 세납 85세였다. 입적한 뒤에는 21일 동안 방 안에서 오묘한 향기가 가득하였다고 전한다. 묘향산 안심사(安心寺)와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는 대사의 부도(浮屠)가, 내금강 백화암에는 비(碑)가 세워졌고,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와 전남 해남 대흥사의 표충사(表忠祠), 경남 밀양의 표충사에 각기 제향되었다.

▲ 보현사 홍법 스님.(사진=이지범 소장)ⓒ불교닷컴

특히, 서산대사는 전남 해남 대흥사에 가사와 발우(衣鉢)를 맡기면서 “만년이나 파괴되지 않는 명당이다(萬年不破之地)”는 말로 비유하고, 내금강 백화암 등에 그의 유품을 두루 분산시킨 것은 숭유억불 정책으로 말미암은 전국 사찰과 스님들의 피해를 줄이고자 했던 뜻이 반영되었다. 또 대사는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마라(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라는 ‘야설(野雪)’의 시를 통해 모름지기 수행자의 격조와 품위를 가르쳤다.

이러한 전통은 보현사 강원(講院)에서 1938년 2월 1일 발간한 <탁마(琢磨)> 창간호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 묘향산 불교전문강원은 소조적막(蕭凋寂寞)한 반도의 극서단(極西端)인 청북(淸北) 일우(一隅)에 있는 불학원이지마는, 그 창설의 연원을 말하면 금(今) 구백 여 년 전이다. 보현사의 개창조인 탐밀(探密), 굉확(宏廓) 두 분의 대사는 원효 화엄종의 계통인 것이 분명하다. 고려불교 융성시대에는 이 보현사 국(局) 산내에만 삼천 법려(法侶)가 머물렀다(住錫)고 한다.”하여 보현사의 사격(寺格)을 보이고 전하였다. 1931년 2월에 창간된 <관서불교(關西佛敎)> 등에서도 보현사를 소개하고 있다.

오늘날까지 관서총림의 지위를 가진 보현사의 강원인 불학원은 현재 10명 안팎으로 사중에서 직접 운영하고 있다. 경전강독과 역사, 교리 수업을 비롯하여 염불습의 및 참선수행 등 불교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절에서 사용하는 목탁이나 염주 등은 직접 만들고 있으며, 계절에 따라 생산되는 묘향산 송이와 나물 등 채집과 채취에도 울력(運力, 雲力)을 펴고 있다.

▲ 상원암 주지 백운 스님(2008년 8월, 사진=이지범 소장)ⓒ불교닷컴

묘향산의 천년고찰

묘향산은 백두산, 금강산, 칠보산, 구월산과 함께 북한의 5대 명산이다. 향나무와 측백나무가 산에 많아 이 나무에서 나오는 오묘한 향기로 그 이름이 붙여진 산이다. 11세기부터 연주산, 태백산, 서산, 향산 등으로 불렀던 묘향산은 조선 후기 영‧정조 때의 학자 성대중(成大中)이 쓴 <청성잡기(靑城雜記)> 5권에는

“장백산은 신령스럽고 광대한 것이 복희씨와 같고(長白靈邃旁薄如伏羲)

묘향산은 웅장하고 빼어난 것이 노자와 같다(妙香沈偉神秀如老子)

금강산은 기이하고 변화무쌍한 것이 석가와 같고(金剛瑰奇變眩如釋迦)

구월산은 가지런하고 우뚝 솟은 것이 이천과 같고(九月整齊特尊如伊川)”

이라 하여 중국 고대 전설의 제왕인 복희씨(伏羲氏)와 노자, 석가모니 그리고 중국 북송 때의 유학자인 이천 정이(伊川程頤)라는 성현들에 비유하여 산의 기상을 노래했다. 더욱이 신라 헌강왕이 오악신(五嶽神)에게 제사를 올렸고, 고려에서는 태조 왕건이 오악(五岳)과 명산(名山)·대천(大川)을 섬기라 하였다. 조선에서는 중국의 오행(五行)사상에서 비롯되어 나라의 수호신(守護神)으로 여긴 백두산·금강산·묘향산·지리산·삼각산(북한산)과 같이 대표적인 산(五嶽)으로 어깨를 나란히 했다.

묘향산과 같은 명산에는 명승고적과 고승들이 있기 마련이다. ‘산에 가면 절이 있다’는 말처럼, 전국 방방곡곡에는 산이 있고 그곳에는 반드시 천년의 고찰(古刹)과 명찰(名刹)이 자리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들이 마음대로 갈 수 없는 금역(禁域)과 동토(凍土)의 땅이다. 산의 동남쪽 영변군에는 보현사ㆍ안심사터ㆍ운필암(潤筆庵)ㆍ금선대(金仙臺)ㆍ만수암(萬壽庵)ㆍ현성암(現性庵) 등이 있고, 북쪽인 희천군에는 광제사ㆍ원명사 등이 자리하고 있다.

보현사는 한반도 5대 사찰의 하나이다. 현재, 묘향산에는 골짜기마다 12곳의 암자가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묘향산에는 369개의 사암이 자리하였고, 일제강점기에는 112개소가 있었다. 이들 사암은 묘향산에서도 가장 경치가 좋은 상원동·만폭동·천태동·칠성동·비로봉 등에 자리하고 있다. 이 수려한 산하(山河)에 들어선 암자는 이름 붙이기조차 어려운 비경과 역사를 자랑한다. 향산 팔경(香山八景)에는 탐밀봉의 짙은 녹음(探密滿醉), 심진정자에서의 손님맞이(尋眞送客), 금강소(金剛沼)의 물고기 구경(金剛玩魚), 불영대의 달구경(佛影玩月), 설령대의 구름돌이(雪暎歸雲), 백운대의 단풍(白雲觀楓), 단군대의 저녁노을(檀君落照), 인호대에서의 폭포구경(引虎觀瀑)을 손꼽는다.

▲ 보현사 안내도와 청벽 스님(사진=이지범 소장)ⓒ불교닷컴

묘향산 제1경은 불영대(佛影臺)이다.

부처님의 그림자가 머무는 곳이다. 정유재란 때 전주사고(全州史庫)의 <조선왕조실록>은 1597년(조선 선조30)에 보현사 이곳으로 옮겨 보관되었다. 그 실록은 보현사 팔만대장경보존고에 옮겨져 있다. 불영대는 1570년(선조3)에 창건되어 1700년(숙종 26)에 고쳐지었다. 예로부터 불영대 달돋이(佛影玩月)가 유명해서 향산8경으로 꼽힌다. 1980년 1월에 천연기념물 제91호로 지정된 불영대 철쭉꽃은 묘향산 두봉화 군락(妙香山斗蜂花群落)으로 불리는데, 봄의 달빛과 함께 붉은 광장을 이룬다. 이 진경을 보기 위해 전국적으로 수십만 명의 노동자들이 이곳을 찾는다고 북한의 <평양방송>(2009.2.29)이 보도한 바 있다. 두봉화는 진달랫과에 속하는 낙엽 활엽관목으로 ‘겹산철쭉’의 북한말이다. 남한에서는 산철쭉이라 부른다.

제2경은 가장 높은 곳, 법왕대(法王臺)이다.

법왕인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능인암(能仁庵)이 정식 사명이다. 15세기에 창건된 법왕대는 서산대사가 수도하던 곳으로 평안북도가 아니라 자강도 희천시 장평리에 속하는 묘향산 부용봉에 자리하고 있다. 1576년(선조 9)에 세워진 보존유적 제815호인 다층탑(靑塔) 1기가 서있다. 탑의 기단 밑돌 측면에 '석가여래유교제자 겸판선교사사구 도대선사휴정원'이라는 글을 새겨 서산대사가 이 탑을 건립한 것을 알 수 있다. 법왕대 건너편에는 15세기에 창건된 금선대(金仙臺)가 있다. 보존유적 제814호 금선대에 남아 있는 백탑(白塔)의 1층 네면 중에 가운데 남쪽에 '1576년에 세웠다(萬曆四年立)'라고 판독할 수 있는 글이 새겨져 있다. 남쪽 지리산의 묘향대가 직접 가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의 암자라면, 법왕대는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곳에 현존하는 암자이다.(北法王 南妙香) 예로부터 선승들도 가서 머물기 어려워하는 오지 중의 오지 암자로 명성이 높다. 현재로서는 갈 수 없는 곳이지만, 근래까지 법천대사가 머물던 북한불교의 유일한 법맥처(法脈處)이다.

▲ 불영대 전경과 두봉화(사진=이지범 소장)ⓒ불교닷컴

제3경은 영원한 수행처, 금강굴(金剛窟)이다.

커다란 바위, 하나가 통째로 지붕을 이루고 있다. 고려 말기에 창건된 이 암자는 선 수행을 하는 납자(衲子)들에게 모든 모범이 되는 영원한 수도처이다. 금강굴에는 ‘청허방장(淸虛方丈)’이라는 편액이 있다. 편액 뒷면에는 서산대사가 여기에 있었다는 것과 병자년(1576년, 선조 9년) 봄에 새로 중건(新建)하였다는 기록이 적혀 있다. 지금으로부터 413년 전, 1604년 정월 23일 서산대사가 열반한 곳은 묘향산 금강굴이다. 대사가 입적한 곳이 종종 원적암(圓寂庵)으로 잘못 기록되기도 한다. 현재, 이 암자의 주지는 백운(白雲) 스님이다.

▲ 묘향산 금강굴(사진=이지범 소장)ⓒ불교닷컴

제4경은 묘향산 최고의 비경, 상원암(上元庵)이다.

향산 제1경이자 최고의 암자(香山第一庵)인 상원암의 현판은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유작이다. 상원암 본전 툇마루에서 묘향산의 인호대 등을 탁 트이게 조망하는 것(引虎觀瀑)을 으뜸으로 꼽는다. 국보 문화유물 제41호로서 고려 말에 창건된 상원암은 본전 상량문에 의하면, 1580년에 중창된 것으로 1794년에 다시 중수한 것이다. 상원암은 본전과 칠성각, 산신각, 불유각(佛乳閣), 용후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노새를 타고 가는 신선(神仙) 벽화가 유명한 칠성각은 하나의 통나무를 잘라 4개의 기둥으로 삼아 세웠다고 한다. 특히, 불유각에서 샘솟는 우유빛깔의 샘물은 한반도 최고의 물맛으로 정평이 나있다. 앞뜰에는 수령 300년이 넘는 보리수와 100년이 넘는 은행나무, 500년 된 소나무가 지키고 서있다. 이 암자의 주지는 세납 70세 가량의 백운(白雲) 스님인데, 금강굴 주지를 같이 맡고 있다.

▲ 상원암 전경(사진=이지범 소장)ⓒ불교닷컴

제5경은 조선 한옥의 축성전(祝聖殿)이다.

축성전은 국보 문화유물 제42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원암 뒤쪽에 있다. 1875년(고종 12)에 명성황후가 왕세자의 무운장수를 위해 금강산과 묘향산 등 여러 명산에 절을 짓고 부처님께 축원하기 위해 지은 사찰이다. ㄷ자형의 팔작집인데, 한옥 살림집의 형태로 된 것이 특징이다. 본채인 축성전과 좌우 전각에는 백련사(白蓮寺)와 우당(愚堂)이라는 쓴 현판 2장이 나란히 걸려 있다. 축성전의 벽화는 묘향산에서 가장 우수하고 유명하다.

▲ 묘향산 축성전(사진=이지범 소장)ⓒ불교닷컴

제6경은 만폭동의 꽃, 하비로암(下毘盧庵)이다.

묘향산 만폭동 계곡의 맨 아래에는 하비로암이 자리하고 있다. 그 위로는 중비로암 터와 상비로암 터가 남아 있다. 이 3곳의 암자는 모두 고려 말기에 창건되었으나 현재 하비로암만이 남아 있다. 1882년에 모두 개건한 하비로암은 본전과 보련대, 칠성각, 산신각이 4동의 건물이 있다. 그 중에서 보련대는 원래 하비로암에서 마주보이는 높은 언덕에 있던 것인데, 1915년 홍수로 무너진 것을 이곳으로 옮겨 다시 세웠다고 한다. 이 암자의 주지는 진명 스님이다.

▲ 묘향산 하비로암(사진=이지범 소장)ⓒ불교닷컴

제7경은 방장스님이 살던 곳, 계조암(繼祖庵)이다.

준국보급(보존급) 제94호인 계조암은 지금의 보현사 건너편, 향산천을 사이에 두고 있다. 11세기에 창건된 이 암자는 보현사의 법통을 계승하는 불교종파의 최고 어른(方丈)이 사는 암자라는 뜻으로 조원암(祖院庵) 또는 계조암이라 하였다. 일제시기까지는 주로 여승(女僧)들이 이 암자에 살았다고 한다. 오늘날 북한에는 비구니 스님들이 없기 때문에 계조암은 건물만이 덩그렇게 남아 있다. 지금 계조암의 본전과 산신각, 요사채는 1898년에 지은 건물이다. 계조암 일대계곡은 천연기념물 제82호인 묘향산 파랑새(靑鳥)의 서식지로도 유명하다.

▲ 향상천과 향상호텔(사진=이지범 소장)ⓒ불교닷컴

제8경은 묘향산의 원찰, 안심사(安心寺) 터이다.

안심사는 향나무와 사철나무(萬年枝, 冬靑)가 많은 묘향산에 처음으로 세워진 사찰이다. 968년(고려 광종19)에 창건되었다는 안심사는 1028년(현종 19)에 탐밀대사가 개창하였다. 사명은 ‘중국 선종사의 1조(初祖)인 달마대사가 2조 혜가대사(慧可大師)의 마음을 편안케 하였다’는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특히 고려 말기에 인도에서 온 고승 지공(指空)대사의 사리가 봉안된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361년 중국 원나라에서 지공대사가 입적했을 때 나온 사리(유골) 일부를 고려로 가져와 개성 화장사와 묘향산 안심사 두 곳의 사찰에다 석종형(石鐘型) 부도에 봉안하였다. 보존급 제122호 안심사 부도 중에는 청허당비(淸虛堂碑)인 서산대사비가 있었다. 입적한 지 26년 후인 1630년에 세웠다가 비가 마모되어 비석을 1711년에 다시 만들어 보현사의 조계문 뒤에 세웠다.

▲ 국제친선관람관 테라스에서 본 묘향산 전경(사진=이지범 소장)ⓒ불교닷컴

제9경은 내원암 터와 국제친선전람관이다.

보현사의 부도는 안심사 외에도 내원암(內院庵) 터에도 자리한다. 내원암은 국제친선관람 제1관의 계곡 옆 풀숲에 자리하고 있다. 필자는 이곳을 지난 2008년 8월 8일 오전에 직접 참배하였다. 조선 중기의 승려로, 서산대사 문하로 편양파(鞭羊派)의 개산조(開山祖)인 언기(彦機)대사가 이곳에서 입적하였다. 대사의 사리는 묘향산과 금강산에 각기 부도를 세우고, 두 곳에다 비를 세웠다. 묘향산의 비문은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 금강산의 비문은 백주(白州) 이명한(李明漢)이 지었다고 한다.

▲ 묘향산 내원암 부도(사진=이지범 소장)ⓒ불교닷컴

국제친선관람관 제1관(김일성 주석관) 5층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묘향산의 산줄기는 그야말로 백미이다. 약 40년간 묘향산에 머물렀던 서산대사는 이 친선관이 세워지기 전에, 바로 옆의 탁기봉에서 묘향산 전체를 탐미했을 수도 있다. 또 제2관람관(김정일 국방위원장관)은 신발버선을 신고 입장할 수 있다. 두 곳의 전시관에는 나라 수 180개국에서 기증한 총 222,522점의 유물과 밴츠 등 승용차까지 다양한 기념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 다음에는 <조불련의 창립자 홍화두 고문>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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