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불교의 살아 있는 부처”
“북한불교의 살아 있는 부처”
  • 이지범 고려대장경연구소장
  • 승인 2017.05.29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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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땅과 스님들’ ⑥ 청운 최형민 주지와 보현사
▲ 북한불교의 살아있는 부처로 불리는 묘향산 보현사 방장 청운 최형민 대선사.(사진=이지범 소장)ⓒ불교닷컴

2000년대부터 북한을 자주 왕래했던 분들조차도 아직, 또 우리들이 곧잘 하는 말들 속에서 “진짜, 북한 스님들이 있어요.”, “우리처럼 수행하고 있나요”라고 한다.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에 대해 자기식대로 해석하거나 아니면 관성화된 생각으로 이해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북한에서도 정초나 특별할 경우에 종교에 관한 행위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를 단순히 생각만 해도 이런 입장이 달라질 수 있다. 종교는 인간의 문제를 넘어 근원적인 측면을 다루고 있기에 북녘 하늘밑에서도 신앙화된 측면들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세기동안 제한된 형태로 북한사회에서 종교를 이끌고 있는 수행승과 불자 그리고 그 분들과의 인연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지범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

“북한불교의 살아있는 부처(生佛)”
“선교양종의 북청운 남법등(北靑雲南法燈)”
“서산 법맥을 이은 묘향산도인”
“북한의 삼보사찰 보현사 주인”

 

북한 유일의 총림 보현사, 방장 청운 최형민

북한에서 총림(叢林) 사찰은 묘향산 보현사뿐이다. 보현사가 총림인 것은 1931년 이은상이 언론에 연재한 《향산유기(香山遊記)》에서와 같이 조계문 현판 아래에 부착된 ‘관서총림규정문(關西叢林糾正門)’ 편액을 통해 알 수 있다. 총림은 강원, 선원, 율원 그리고 염불원을 갖춘 사찰에 부여하는 최고의 상징이다. 일제 31본산 제도에서는 북녘에 유점사, 석왕사, 귀주사, 보현사, 패엽사, 영명사, 법흥사, 성불사 등 8곳이 교구본사였다. 총림의 위상은 1967년 7월 총림법이 제정된 이후 복원된 불교전통이다. 북한에서 총림법이 별도로 없어 상징적으로나 사찰 규모를 통해 보현사를 총림으로 부른다. 남한에는 영축총림 통도사, 해인총림 해인사, 조계총림 송광사 그리고 덕숭총림 수덕사, 고불총림 백양사, 팔공총림 동화사, 쌍계총림 쌍계사, 금정총림 범어사 등 8곳의 총림이 있다.

직관적인 진리체험으로서 선수행을 중시하는 선문(禪門)의 풍토에서 보면, 총림의 최고 어른은 방장(方丈)이다. 그래서 오늘날 관서총림인 보현사의 방장은 청운 최형민 주지이다. 방장은 유마거사(維摩居士)의 수행일화에서 유래된 말인데, 사방 크기가 3m 가량(一丈)이 되는 방이다. 그 뜻이 달라져서 국사나 왕사, 화상(和尙) 등 고승들의 처소를 가리키기도 한다.

관서총림(關西叢林)의 보현사는 휴정서산, 유정사명대사의 공훈에 힘입어 조선 14대왕 선조(재위 1567∼1608년) 때, 팔도십육종도규정문(八道十六宗都糾正門)이라는 현판을 일주문에 내걸고, 승려의 생활을 감독하는 기관(糾正所)으로서 숭유억불 시대에 승풍을 진작하는데 앞장섰다. 그로부터 350여년이 지난 지금, 북녘 땅에 마지막 남은 총림으로 조불련 총본산의 위상을 지니고 있는 사찰이다. 그곳에는 반세기동안 오롯이 수행하여 오늘날 살아있는 부처(生佛)로 불리는 청운(靑雲) 최형민 대선사가 머물고 있다.

북녘의 살아있는 부처(生佛)로 불려

1931년에 출생한 청운 스님은 올해로 세납 86세, 법랍 57년이다. 법계가 대선사인 청운 스님은 일제 강점기에 보현사 주지를 지낸 김법룡(金法龍) 스님의 상좌로 알려져 있다. 고 박태화 조불련 위원장과 고 홍화두 고문이 청운 스님의 사형(師兄)이고, 보현사 부주지 청벽(靑碧) 스님과 산내암자인 금강굴 및 상원암의 주지를 맡고 있는 백운(白雲) 스님 등이 그의 사제(師弟)들이다. 또 아래로는 10여명의 상좌들이 청운 스님과 법연을 맺고 있다. 청운 스님의 상좌 중에는 아들인 진성 스님이 보현사에서 출가하여 수행정진하고 있다.

청운 스님은 오늘날 북한에서 ‘살아 있는 부처(生佛)’로 알려져 있다. 도교의 상징적인 말로서 “큰 도는 애써 하지 않는 것”(大道無爲)이라는 뜻과 같이 ‘있는 그대로의 삶을 추구하는 분’이 바로 청운 최형민 대선사이다. 그 삶은 한마디로 백장청규(百丈淸規)의 전형이다. 중국과 우리나라 선종의 사찰 규범서인 백장청규는 중국 당(唐)나라의 백장회해(百丈懷海, 749~814년)가 만든 ‘칙수백장청규(勅修百丈淸規)’로서 1335년에 원(元) 순제(順帝)의 칙명으로 덕휘(德煇)가 여러 청규(淸規)를 참조하여 소실된 백장청규를 복원한 것이다. 이보다도 청운 스님을 생불로 부르는 것은 서산대사가 1564년(조선 명종19) 묘향산에서 경서(經書) 50여 권의 명문을 간추리고 게송과 역주한 내용을 달아 만든 《선가귀감(禪家龜鑑)》의 뜻 그대로 “수행자들이 거울로 삼아 본받을 만한 모범이 되는 것”을 본보기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수 년 전부터 연세로 말미암은 청력을 보완하기 위해 보청기를 사용하고 있다.

살아 있는 북한불교의 상징적인 인물인 청운 스님은 주민들에게 생불로 불리는 것은 열악한 여건에서 묘향산과 보현사 등 산내암자를 잘 관리하는 것은 물론, 대대로 불교집안의 인연을 잇고 60갑자 동안 한 곳에서 불도(佛道)를 닦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1970년대부터 수차례, 그리고 1981년 5월 묘향산과 보현사를 찾은 김일성 주석에게도 불교와 사찰의 내력을 자세하게 설명한 독특한 이력도 있다. 또한 1980년대 초부터 1983년까지 10여 차례 북한을 방문했던 독일의 여류소설가인 루이제 린저(Luise Rinser) 등에게 보현사를 안내하는 등 북한승려로서 서방 언론에 처음 인터뷰를 하면서 널리 알려진 인사이다. 또 2000년대 이후 국내 언론에도 가장 많이 등장하기도 했다.

선교양종의 전통, 북청운 남법등

▲ 청운 최형민 대선사. 홍가사를 수한 모습.(사진=이지범 소장).ⓒ불교닷컴

중국 당대(唐代)의 ‘남설봉(南雪峰) 북조주(北趙州)’에 빗대어 한국불교에는 상징적인 여러 인물들이 회자되었다. 이러한 전통이 살아졌다고만 여겨지던 북한불교의 승가(僧伽)에서도 북쪽인 묘향산에 청운 최형민 스님을 선승(禪僧)으로, 남쪽인 평양에는 법등 홍화두 스님을 교학승으로 각기 선교양파(禪敎兩派)의 상징으로 꼽히고 부르고 있다.

이 두 분은 그 수행력(修行歷)의 위상과 선객들로부터 인정받고 있는 북한 최고의 고승들이다. 청운 스님의 은사인 김법룡 스님과 법등 홍화두 스님은 1915년대, 젊은 시절의 일본 유학파로서 당나라에 유학을 했던 의상대사라면, 청운 최형민 스님은 단 한 번도 묘향산과 보현사를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원효대사와도 같은 국내파에 속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법등 스님이 1998년 8월에 입적하여 두 분의 차원 높은 법거량을 오늘날에는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분들이 북한 스님들과 불자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된 것은 많은 상좌들과 그 분들의 활동이 행해지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누구로부터 계를 받았습니까?”, “청운스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는 짧은 대화 속에서 승가(僧伽)의 전통을 엿 볼 수 있다. 아직 절기에 따른 안거제도 등을 시행하고 있지는 않지만, 현재 조불련에서 부여하는 법계인 대선사, 법명, 상좌제도, 의식주 등 선문의 전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여기에다 총림사찰에 머물면서 그곳에서 반평생을 수행하고, 반세기를 넘어 제한적인 종교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북한사회에서 그 주민들로부터 생불(生佛)로 추앙받고 있는 ‘진정한 의미의 성자’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대표적인 묘향산인(妙香山人) 청운 스님은 말 그대로 푸른 빛깔의 구름(靑雲)과 같은 삶을 묘향산에서 보내고 있다. 북한말에서도 청운은 ‘속세를 떠나 은거하는 생활’을 일컫는다. ‘오고가고 한다’는 뜻으로 흰 빛깔의 구름을 가리키는 백운(白雲)은 선방의 기둥이나 벽에 글씨를 써 붙여 입방자의 자리를 알게 하는 표시인데, 경주 불국사의 다리처럼 청운과 백운은 깨달음의 세계로 가는 길의 두 다리(橋)이다.

생불, 보현사에 주석하다

살아 있는 부처(生佛)로 불리는 청운 스님은 관서제일총림 보현사 해장원(海藏院)에 머물고 있다. 보현사 경내에 위치한 해장원은 총림 방장실이 있는 곳이다. 고려 중기에 보현사의 산내암자로 창건되어 선승(禪僧)들의 수도처로 유명했던 빙발암(氷鉢庵) 또는 빈발암(賓鉢庵) 건물을 1915년에 옮겨 짓고 해장원이라고 이름 붙였다. 빈발암은 인도에서 불경 제1결집(結集)의 장소인 빈발라굴(賓鉢羅窟)을 상징하는데, 1635년(조선 인조13)에 중수할 때 나이든 스님들이 머무는 육자당(六慈堂), 대중 공양간이던 향적원(香積院), 방장실, 종무소와 같은 숙정소(熟淨所) 등도 같이 보수되었다. 빈발암은 내금강 마하연사 인근의 가섭암지(迦葉庵址)와 그 유래가 비슷하다. 신라 선덕여왕 3년(636)에 지장율사가 당(唐)나라에서 귀국한 뒤, 이곳에 이르러 “이 굴은 그윽하고 조용(幽靜)하고 말할 수 없이 빼어나고 훌륭(明妙)함이 서역의 빈발암을 방불케 한다”고 하여 가섭암으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청운 스님은 198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주지를 맡고 있는데 총림의 방장, 북한 최고의 선승 등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최근에는 보현사 부주지 청벽 스님이 거의 다 사찰운영을 맡고, 청운 스님은 수행에만 전념하고 있다고 전한다.

서산대사의 법맥과 정신을 오롯이 잇고 있는 청운 대선사는 묘향산도인 또는 묘향산인(妙香山人)으로 통한다. 그가 머물고 있는 곳이 바로 묘향산(1,909m) 보현사이기 때문이다. 옛말에 “향나무는 자신을 찍어내는 도끼에도 향(香)을 묻힌다”고 한다. 여류소설가인 루이제 린저가 자신의 책에서 ‘묘향산 깊은 곳에서는 아직도 수도하는 수도승들이 남아 있다’고 기록한 것처럼 청운 대선사는 여러 스님들과 같이 묘향산 보현사에서 불법을 호지(護持)하고 있다.

그가 수행하고 있는 관서총림 보현사(普賢寺)는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에 있다. 해방이후 분단으로 말미암아 보현사는 1947년 5월에 묘향산역사박물관이란 이름을 달고서 개관하였다. 그후 1997년 5월 6일에는 묘향산 보현사에서 열린 ‘묘향산역사박물관 창립50주년 기념보고회’를 통해 이 박물관에 국기훈장 1급이 수여되었다. 이후 법타 스님, 이수자 여사 등 보현사를 방문했던 남측 및 해외인사들의 건의로 2000년대부터는 보현사로 통칭하고 있다. 한편, 북한 당국은 1984년 11월까지 보현사의 대웅전, 천왕문, 조계문 등 건물과 석탑 등에 대한 보수와 단장을 추진하면서 “법당 안에 불상(제불보살상)을 안치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고 사회주의청년동맹(약칭 사로청)의 기관지인 《노동청년》의 기사 내용이 《동아일보(1984.11.29》에서 보도한 바 있다. 또한 1988년 5월부터는 묘향산 관광자원화를 위한 개발이 추진되면서 보현사를 외국인 방문코스로도 지정하고, 1974년부터 지어서 1978년 8월에 완공된 ‘국제친선관람관’과도 같이 연계시켰다.《동아일보(1988.5.3)》

▲ 묘향산 안심사 부도.(사진=이지범 소장).ⓒ불교닷컴

북한의 삼보사찰, 보현사

보현사는 북한에서 가장 유명하고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사찰이다. 향나무가 많아 그 이름이 붙여진 묘향산의 명당자리에 있다. 보현사는 968년(고려 광종19)에 창건되었고, 1028년(현종 19)에 탐밀(探密) 대사가 개창하고 1042년(정종 8)에 굉확(宏廓) 대사가 대규모로 중창한 사찰이다.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서산과 사명, 처영 대사가 거처하였던 곳으로 유명하다.

보현사는 부처님 사리를 모신 용주봉 사리탑과 팔만대장경 그리고 서산 대사 등 수많은 스님들이 살았으며 지금도 스님들이 살고 있는 삼보(三寶)사찰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북한 국보급 제40호인 보현사는 고려 4대왕 광종 19년(968)에 창건된 이후 1216년(고종 3) 9월에 여진족이, 1218년 거란군의 침략 방화로 건물이 모두 불타는 등 1634년과 1761년 세 차례의 큰 화재를 비롯하여 전쟁 등으로 인하여 1765년까지 대규모의 중수, 중건을 거듭하였다. 6·25전쟁 때에는 미군 폭격으로 대웅전, 만세루 등 14채의 건물 등이 소실되었다. 대웅전은 1976년, 만세루는 1979년에 각기 고려, 조선시대의 건물의 특색에 맞게 원상대로 복구되었다.

보현사 창건의 역사는 고려 인종 19년(1141)에 왕명으로 김부식이 비문을 짓고(撰) 문유(文裕)가 해서체로 쓴 《영변보현사사적비(寧邊普賢寺事蹟碑)》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금석문》상권에 의하면, 사적비의 앞쪽 윗부분에는 ‘묘향산보현사지기(妙香山普賢寺之記)’라는 인종의 친필행서 제액(題額)의 비명이 있고, 그 아랫부분과 뒷면에는 보현사의 내력을 적은 1,200여 자의 비문이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비의 앞면에는 보현사의 연혁이 기록되어 있고, 뒷쪽면에는 탐밀, 굉확 대사의 교훈을 이어받은 여러 주지 등 문도(門徒)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다.

이 사적비에 의하면, 보현사는 고려 현종 19년(戊辰年, 1028년)에 탐밀·굉확 두 고승이 창건한 절이다. 탐밀 대사는 1028년에 연주산(延州山, 묘향산의 전신)으로 들어가 절(안심사)을 짓고 머물렀다. 1037년에 출가한 굉확 대사는 탐밀의 조카로 탐밀의 제자가 된 뒤, 5년 지나 동남쪽 모퉁이에 택지하여 243칸의 24개소 이르는 정사(精舍)를 짓고 산의 이름을 묘향, 사찰이름(寺名)을 보현(普賢)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에 3,000명 넘는 대중이 머물며 수행하였다고 한다. 탐밀과 굉확의 사후에도 사찰이 번창하자 1067년(고려 문종21)에 왕이 보현사에 토지(田地)를 기증하고, 만약 주지직이 비게 되면 문인 중에서 조사(祖師)의 뜻을 이을 자를 뽑도록 명하였다고 한다. 이에 성문연각 등 문인들이 이를 길이 전하고자 사적을 기록하였다고 한다.

그 후에 보현사는 1160년(고려 의종14) 10월 12일 왕이 이 절에 직접 행차하여 음식대접(飯僧)을 하였고, 《조선불교통사》에 보면, 1096년(고려 숙종1)에는 달보(達寶)가 재창하고, 1361년(공민왕10)에는 나옹(懶翁)선사가 3창하였으며, 1449년(조선 세종31)에는 해정(海正)이 4창하였다. 1634년(조선 인조12) 화재를 입자 명조(明照)와 각성(覺性)대사가 중창하였으며, 1761년(영조 37) 9월 실화(失火)로 절이 모두 불타버리자 4년 동안에 걸쳐 남파(南坡)·향악(香岳) 등이 여섯 번째로 중창하였다. 1818년(조선 순조18)에는 한월(漢月) 스님 등이 당시에 대웅전의 석가여래좌상과 미타존상(彌陀尊像), 2분의 보살상을 개금(改金)하고 십육나한상(十六羅漢像)은 다시 색칠(改彩)하였다. 한편, 1912년 12월 23일에는 보현사가 ‘선교양종대본산묘향산보현사(禪敎兩宗大本山妙香山普賢寺)’라는 공식 이름으로 30본산 중의 하나로 지정되었고 말사로는 안심사, 계조암, 상원암 등 112개소였다고 한다.

보현사는 고려 초기에 9층 석탑을 중심으로 대웅전과 1탑 1금당의 구조였다. 그런데 절의 규모가 커지면서 그 가운데 만세루가 들어섰고, 대웅전 앞에 13층 석탑을 새로 만들어 중심 탑으로 삼았다. 이로써 두 개의 탑이 앞뒤로 서있는 독특한 구조를 갖게 된 것이다. 현재는 총 5만㎡ 부지 안에 남북의 중심축을 따라 1전(殿)-2탑(塔)-1루(樓)-3문(門)의 가람구조로 조계문, 해탈문, 천왕문을 지나면 4각9층탑(국보문화유물 제7호), 만세루, 8각13층탑(국보문화유물 제144호), 대웅전이 차례로 놓여 있다. 원래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왼쪽에 명부전·심검당·수월당(水月堂)·명월당(明月堂)·진상전(眞常殿)·동림헌(東林軒)과 응향각이 있고, 횡측 선상인 오른쪽에는 우물이 있는 만수각(萬壽閣)·관음전·대장전(大藏殿)·영산전(북한 국보 141호)·사리각(舍利閣)·수충사(酬忠祠)이 자리 잡고 있었다. 대장전과 영산전 앞쪽에는 극락전이 있었고 그 옆에는 팔도십육종도규정문(糾正門, 酬忠祠門)를 지나면 서산, 처영(處英), 사명 대사의 영전을 모신 조사전이 있었다. 사당건물인 수충사에는 충의문, 영당, 수충사 비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대웅전·만세루·심검당·수월당 등 여러 채의 건물들이 6·25전쟁 때 모두 훼손되었다.

보현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관음전이다. 1042년 창건 당시에는 원통전으로, 조선시대에 다시 중건하면서 관음전으로 개칭되었다. 관음전은 보현사의 강학(講學) 공간으로 지금의 건물은 1894년(고종 31)에 중건하였다. 국보 문화유물인 영산전은 관음전 동쪽에 있는 불전이다. 원래 보현사 동편 500m 지점에 있었는데 1983년 현재 위치로 옮겨진 것이다. 옮길 때 발견된 영산전 상량문에 의하면, 지금의 건물은 1875년(조선 고종 12)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관음전 옆에 있는 만수각은 조선 말기인 1894년에 당시 왕실을 위해 세웠다. 그 만수각의 우물은 깊이도 깊지만, 상원암의 우물 다음으로 맛이 좋기로 정평이 난 샘물이다.

현재 남아 있는 대웅전은 1976년에, 만세루는 1979년에 북한 당국에서 직접 원상대로 복구하였다. 선종의 상징문이자 산문의 첫 번째 문인 조계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보현사비(북한 국보 149호)를 비롯한 여러 석비가 세워진 비숲(碑林)이 있다. 1644년에 지은 조계문과 해탈문, 1775년에 지은 천왕문 등 여러 건축물들이 남북축을 중심으로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수충사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인 서산 대사와 사명당, 처영 대사의 공적을 기념하여 보현사에 세운 사당이다. 수충사 안에는 서산 대사와 사명당의 진영과 함께 그 스님들의 관련 유물의 일부가 전시되어 있다.

▲ 1989년 1월 20일 보현사 조국통일기원법회(사진=이지범 소장).ⓒ불교닷컴

보현사 경내에는 1983년에 세워진 팔만대장경보존고가 있고 그곳에 대장경판본이 보관되어 있다. 대장경 인쇄(印經)본은 6·25전쟁 직후에는 보현사 대웅전에 보관했던 것이다. 그 수장고에는 5,000여점의 유물들이 총집합되어 있는 보물창고이다. 1호동에는 경남 합천 해인사의 경판으로 찍은 팔만대장경이 보존되어 있으며, 2호동에는 묘향산지구와 전국각지에서 발굴된 불상, 공예품, 미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종각에는 1469년에 2만2천근의 구리와 주석을 녹여 만든 높이 2.1미터 둘레는 4.1미터 무게가 7.2톤으로 그 소리가 장중한 금강산 유점사의 범종(국보문화유물 제 162호)을 1984년 9월에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이 범종은 1991년 4월 8일을 기해 북측 청운 스님(홍가사), 고 도안 스님(미국 관음사 주지, 모자 쓴 분), 법타 스님(평불협 수석부회장) 등이 참가한 통일타종을 통해 묘향산에 종소리를 처음으로 울렸다.

보현사의 유물유적으로는 1층 탑신후면에 새긴 명문을 통해 1044년에 세웠다는 연대기를 알 수 있는 4각 9층탑(일명 다보탑)이 있다. 보현사의 원래 중심축이던 9층탑에는 감개(龕蓋) 또는 감실이 2곳이 있어 다보여래를 모셨다고 전한다. 또 8각 13층탑(일명 석가탑)은 강원도 월정사 8각 9층탑과도 아주 유사하다. 고려 석탑의 백미로 손꼽히는 석탑이다. 팔각으로 된 이 탑의 각층 옥개석 끝 추녀에 달린 바람방울(風磬)이 원래 108개였던데 전쟁 때 파괴된 다음 현재는 104개가 달려 있다. 《평양방송》은 1989년 2월에 8각 13층탑과 4각 9층탑을 원형대로 복구했다고 보도했다.<경향신문(1989.3.4일 기사)>

또 보현사가 불보종찰(佛寶宗察)이란 근거는 ‘석가세존금골사리탑’이 있기 때문이다. 대웅전 뒤편에 솟아 있는 용주봉 마루에 있다. 이 5층 석탑은 산의 정상에 서 있는데,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사리탑이다.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가 통도사의 진신사리가 유출될 것을 염려하여 1603년에 통도사의 진신사리를 금강산 유점사로 일부 이운했다가 그 사리함 중에서 또 일부가 묘향산 보현사로 옮겨진 것이다. 이 때 보현사 내원암 지구에 5층 석탑을 건립하였는데, 1915년경 대홍수로 피해를 입자 내원암동(洞)의 사리탑은 그 후에 1930년경 용주봉 마루에다 옮긴(移設) 것이다. 사리봉안의 내력이 기록되어 있는 석가여래사리부도비(釋迦如來舍利浮屠碑)는 팔만대장경보존고의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 이 부도비의 비문은 서산대사가 직접 쓴 것이고, 통도사의 진신사리 일부가 전해진 것을 알 수 있다. 이 진신사리는 북한에서 유일한 것으로 보현사가 최고의 총림 위상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경내 마당에는 평북 피현군 성동리 불정사지에 있던 성동리 다라니석당(국보문화유물 제 59호)이 1987년에 이곳으로 옮겨져 있다. 1027년경 세워진 고려시대 불정사라는 옛 절터에 있었던 석조물이다. 묘향산 역사박물관 학술조사단의 이 발굴과정에서 기단 부분의 원형 사리홈 안에서 고려시대의 석당형 청동탑과 4각 청동거울, 동전 등을 발견하였다. 발견된 동전에는 ‘순화원보(淳化元寶)’라는 명문이 있는데 순화(淳化)는 송나라에서 990년∼994년에 사용된 연호이다. 이 동전은 1027년 이전에 송나라와의 무역에 쓰이던 송나라 화폐로써 다라니석당의 건립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이 다라니석당은 해주다라니석당과 더불어 현재 남한지역에는 그 원형을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유형의 고려시대 석조물이다.

▲ 보현사 통일타종식. 1991년 4월 8일 도안 스님 청운 대선사 법타 스님 등(사진=이지범 소장).ⓒ불교닷컴

산뽕나무 열매, 보릿고개 넘다

보현사 서쪽 뜰에서 서 있는 수령 400년가량 되는 산뽕나무(천연기념물 제88호)는 1680년경에 심었다고 하는 이력을 가진 나무이다. 5월 중순경에 이삭꽃차례(穗狀花序)를 이루는 산뽕나무는 현재 높이 15m, 뿌리목둘레 4m, 가슴높이둘레 3m로 북한의 산뽕나무 가운데서 가장 크고 오랜 나무이다. 그밖에도 묘향산 들메나무와 보리수, 상원암 은행나무 등도 유명하다. 산뽕나무에서 열리는 오디, 오들개, 상심(桑椹)·상심자(桑椹子)로 부르는 열매는 배고픔을 잊게 하지는 못할지라도 몸 좋은 당분 공급원으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뽕잎으로 하는 누에고치 농사일도 바쁘지만, 날다람쥐가 오디를 다 먹지 못하도록 뽕나무 경비에까지 나선다고 한다.

지금, 절기상으로 망종(芒種)이 가까워져서인지 북한 주민들은 살면서 가장 넘기 가파르고 힘든 고갯길인 보릿고개 또는 감자고개를 넘고 있다. 실학자 박제가는 《묘향산소기(妙香山小記)》에서 묘향산을 찾아 “외로운 등불 고요할 제 범패(梵唄: 절에서 재(齋)를 지낼 때 부르는 노래) 소리 들린다”고 아름다운 경치를 유람하며 벗들과 노래했지만, 묘향산의 도인 청운 대선사의 가슴에는 피멍울이 맺히고 있다. 얼마 남지 않은 청운 스님의 세연(世緣)을 다시 말하지 않더라도 새로 출범한 문재인 정부에서 생불을 친견할 수 있는 일이 하루빨리 앞당겨졌으면 하고 기원해 본다.

* 다음에는 <묘향산의 수행자들>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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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 2017-06-05 22:13:46
힘들고 고단해도 부처님모실 그날을 생각하며 살았던때를 돌이켜보고 현재 자신의상을 살펴 초심의 마음으로 돌아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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