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불련의 연설기록비서관”
“조불련의 연설기록비서관”
  • 이지범/고려대장경연구소장
  • 승인 2017.04.26 11:45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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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땅과 스님들’ ⑤ 류인명 책임부원과 조불련

2000년대부터 북한을 자주 왕래했던 분들조차도 아직, 또 우리들이 곧잘 하는 말들 속에서 “진짜, 북한 스님들이 있어요.”, “우리처럼 수행하고 있나요”라고 한다.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에 대해 자기식대로 해석하거나 아니면 관성화된 생각으로 이해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북한에서도 정초나 특별할 경우에 종교에 관한 행위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를 단순히 생각만 해도 이런 입장이 달라질 수 있다. 종교는 인간의 문제를 넘어 근원적인 측면을 다루고 있기에 북녘 하늘밑에서도 신앙화된 측면들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세기동안 제한된 형태로 북한사회에서 종교를 이끌고 있는 수행승과 불자 그리고 그 분들과의 인연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지범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

 

▲ 류인명 스님, 개성 령통사 의천 대각국사 911주기 남북 합동다례(사진제공=이지범, 금강신문)ⓒ불교닷컴

“북한불교의 공식 기록자(注書)”
“통일을 위한 통사(統史) 집성”
“북한불교의 심장, 조불련의 역사”

분단 반세기동안 금단의 영역으로 여겨져 온 북한에서 불교에 관한 기록이 만들어지고 지금도 정리되고 있다. 북한의 불교는 곧 조선불교도연맹 중앙위원회(약칭 조불련)의 역사이기도 하다. 과거 왕실의 기록처럼 사관(史官)이든 기록하는 자(記者)와 같이 조불련에서도 공식적으로 다루는 기록이 있고 이를 담당하는 사람이 있다. 북한 불교계에 이런 사람이 활동하고 있는 반면, 오늘날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변해버린 서울시 구파발 산기슭에 있던 기자촌(記者村)에 관한 기억은 언론사 기자들이 모여 살던 곳이 아니라 조선시대의 왕실기록 등을 담당했던 사관과 더불어 환관, 궁녀들이 대거 머물렀던 집단마을(私家)이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북한불교에 대한 기록

북한의 불교는 1945년 11월 26일 결성된 ‘북조선불교총연맹’을 모체로 1955년경에 각 시․도위원회 등 체계적인 조직정비를 통해 출범한 조불련이 대표를 하고 있다. 그 당시 북한 당국이 종교에 대한 엄격한 통제와 제한을 가했던 상황으로 볼 때, 조선불교도연맹은 그 출발점이 전통적으로 내려온 종교적인 계보를 이루기보다는 당시 정치적인 국면과 북한 사회주의국가 체제 속에서 탄생하였다. 현재의 조불련 조직체계와 강령(종헌·종법), 조직과 사찰운영 등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종교적인 체계를 두루 갖추고 있다.

특히, 북한 당국은 1967년부터 전격적으로 단행된 사상․문화 부문에서의 숙청과 김일성 주체사상을 옹립하기 위해서 기존의 전통적 문화와 역사적 인물에 대한 비판적 재평가 작업을 시행하였다. 북한의 독자적인 사회주의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북한식 문화혁명사업’에 복무해온 북한 불교의 역사는 2,700여 년 동안 지속된 한국불교사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1945년 해방 이후, 북한지역에서 출범한 조불련은 분단과 6.25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종교 암흑기의 역사를 겪는다. 그러한 조불련은 1972년 9월 3일 안숙용 2대 위원장이 대외 담화문을 발표(《로동신문》1972년 9월 4일자)하면서 공식적인 대외활동을 시작하였다. 북한 종교계에서 가장 먼저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한 조불련의 역사는 1979년 5월 5일 제3대 위원장을 맡은 학림당(鶴林) 박태화(호), 朴泰鎬) 대선사로부터 본격화되었다. ‘조불련의 중흥조’(中興祖)로 부르는 박태화(호) 위원장의 시대로부터 조불련 70년의 역사는 청담(靑潭) 류인명 책임부원에 의해 다시 기록되고 있다.

▲ 2007년 10월 15일 금강산 신계사 낙성식. 청담 류인명 스님, 총무원장 지관 스님, 유영선 위원장(왼쪽부터).ⓒ불교닷컴

남측엔 이청담 북측엔 류청담 우스개도

청담 류인명 스님의 은사는 고(故) 박태화(호) 대선사이다. 은사로부터 받은 법명이 청담(靑潭)이다. 근세 한국불교 정화운동에 큰 획을 그었던 조계종 종정을 역임한 청담 스님과도 같아서 남북교류회의가 열릴 때마다 곧잘 회자가 된다.

현재의 법계는 선사(禪師)의 품계다. 법랍 30년과 나이가 60세를 더 넘긴 청담 스님의 행장은 북한 승려교육기관인 불학원 1기생이다. 또한 조불련 중앙위원회의 종무직 소임자이다. 한국식으로 보면, 조계종 총무원 등에 근무하는 부장급 승려이다. 굳이 비교하면 조불련의 청담스님은 총무원 사서실장 또는 기획실장의 업무와도 비슷하다. 또 다른 직책을 가진 분들을 보면, 조불련 중앙위원회의 책임부원은 부장 또는 실장급이고 서기장은 총무부장에 해당한다. 조불련의 부위원장은 교육원장 등 원장급이며, 위원장은 총무원장과도 직책상 비슷한 레벨이라 할 수 있다.

청담 류인명 스님의 출생지와 학력 등 이력사항에 대해 알려진 것은 없다. 필자는 1996년 9월 23일 중국 베이징 해당화식당에서 열린 남북불교회의에 참가한 청담 스님을 처음으로 만났다. 그 후 지금까지 평양, 금강산 등의 방북이나 각종회의에서 거의 대부분 만나고 있다. 당시에 ‘류인수 책임부원’은 그후 이름을 ‘류인명’으로 개명하였다. 조불련 임원스님들이 자기의 이름을 한 글자씩 바꾼 것은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고 3년 상(喪)이 끝난 1999년 9월에 단행된 것이다.

청담 스님은 특히, 2004년 11월 24일 서화 정서정 서기장이 새로 임명될 때 조불련 박태화(호) 위원장의 비서실장(수행비서)으로도 임명된 바 있다. 이러한 인사이동은 금산(錦山) 황병대(준) 부위원장이 2003년 9월 8일에 갑자기 입적하면서 생긴 조직개편이었다. 분단이후 2003년 3월 2일 서울 봉은사에서 처음으로 열린 ‘3.1절 기념 조국통일기원 남북불교도 합동법회’에 대표단으로 참가했던 청담 스님은 2004년 12월 7일~8일까지 동남아시아의 말레지아 사알람시 그랜드호텔에서 개최된 ‘제22차 세계불교도우의회’(WFB) 총회에 박태화(호) 위원장, 심상련(진) 부위원장과 함께 조불련 국제부장의 자격으로 참석한 바 있다.

조불련의 공식 기록자 - 주서(注書)

조불련의 책임부원 직책으로서 위원장 비서실장을 맡았던 청담 스님은 오늘날 국가기관 등의 연설기록비서관과 같은 문안담당의 업무를 주관하고 있다. 위원장과 서기장의 아래 직책에서 공식적인 문안을 작성하고 관련 내용을 정리하는 등 기록을 맡고 있다.

청담 스님이 맡고 있는 업무적인 직함으로 본다면, 조선의 기록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된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직접 담당하던 정7품 관직의 주서(注書)에 해당한다. 오늘날 국가기관의 비서실장과 같은 도승지(都承旨) 밑에서 문서의 보관과 기록, 왕명의 전달과 관청 간 연락을 담당하였던 주서(注書)와 같이 북한의 종교기관인 조불련의 역사를 기록하고 공식적인 문건을 만드는 일을 맡고 있다.

▲ 류인명 스님 평상복 차림.(사진=이지범 소장)ⓒ불교닷컴

‘기록의 나라’ 조선에서 그 기록을 맡았던 사관(史官)은 왕조실록 등 정부의 공식적인 기록을 담당한 사람이고, 내사주서 또는 문하주서였던 고려시대의 관직인 주서(注書)는 조선시대 승정원의 공식적인 기록을 맡았다. 과거에 문관이 아닌 무관도 임명될 수 있던 승지(都承)와 달리 주서는 반드시 학식과 문장이 검증된 문관 출신이었다. 왕과 신료들과의 대화 내용을 빠짐없이 적어야 하는 주서의 기본사항은 뛰어난 문장력과 속필을 갖추는 것이다. 지금의 속기사와 마찬가지인데, 사관 2명과 함께 같은 일을 했기 때문에 겸사관(兼史官)으로 인정을 받았다.

청담 스님이 책임부원으로서 조불련의 공식적인 문건을 생산하고 또 이를 기록하는 일들은 조선시대의 사관, 주서들과 마찬가지로 정신노동에 종사하는 사무원직에 속한다. 그래서 청담 스님은 북한의 직업상 분류에서 ‘행정관리일꾼’이라 할 수 있다. 북한의 사회주의 노동법에는 ‘모든 근로자들의 희망과 재능’에 따라 선택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당성과 출신성분에 기초한 사회부문별 노동력 배치계획에 따라 대체로 선택이 아닌 배치로 이루어진다.

북한의 사회단체로 분류되는 조불련은 조직적인 성격상 소속되는 직장의 결정과 배치는 해당지역 행정기관의 당위원회 간부부에서 관할을 받는다. 대졸자·국가 사무원(정신노동 중심) 등과 같은 조불련 임원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각 사찰 등의 주지와 교역자들은 해당지역 인민위원회 노동과에서 주로 담당하고 있다. 조불련 중앙위원회와 사찰에 소속된 분들은 개인의 적성과 희망보다 당의 결정이 더 좌우한다. 또 한 번 결정된 직장을 마음대로 옮기는 것도 매우 제한적이다. 《노동당 규약》에 따르면 북한의 “각 사회단체는 대중의 사상교양 조직이며, 당과 대중의 인전대(引傳帶)이며, 당의 충실한 보조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당의 외곽단체”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등과 같은 통일단체를 비롯하여 민족화해협의회(북측 민화협), 세계인민들과의연대성조선위원회 등이 외곽단체로 활동하고 있다. 종교단체로는 조선가톨릭교협회,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조선불교도연맹,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 등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부’(통전부)의 산하조직 단체로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단체의 역사를 만드는 청담 류인명 스님은 기록자의 고충과 사명을 동시에 안고 있다. 청담 스님이 작성한 공식적인 발표문이나 연설문과 같은 것이 잘못되면 결국 조직의 책임이라는 부담감도 있다. 공적 문서인 담화문과 연설문은 그 자체로 조불련의 주요한 정책이 된다. 그것은 곧 기관이나 기관장의 생각이 담겨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공식 문건을 작성하는 사람은 주제를 정하고 자료를 찾아 그 구성안을 만든다. 짧은 문장 안에 핵심메시지를 담는 것이 관건이다. 그래서 1995년부터 발표되다가 1997년~2008년까지 공식화된 부처님오신날 남북 공동발원문 등을 비롯하여 6․15와 8․15 등에 발표된 공동선언문 등이 청담 스님의 생각과 손에 의해 초안이 마련되어 남북 공동행사에서 발표됐다.

조선시대에 여섯 명의 승지(承旨)를 모신 승정원의 주서와 같이 조불련의 임무와 역할이 다양한 점에서도 청담 스님의 업무적인 스트레스와 비례하여 과업도 크다. 전국 단위로 조직된 북한의 사회단체들은 단체별로 당이 제시한 과업에 대한 총화, 사업대책 토의 등을 위해 매년 2∼3회씩 ‘조불련 전원회의’를 개최하면서 구성원들에 대한 사상교양사업 등 정기적인 사업을 추진하는 것도 주요한 과제이기도 하다.

▲ 2003년 3.1절 남북불교도 합동법회 참가(좌측 첫 번째: 류인명 스님, 사진=이지범)ⓒ불교닷컴

북한불교의 심장, 조불련의 역사

북한 조불련의 1세대에 속하는 청담 류인명 스님은 먼저, 박태화(호) 위원장을 모셨고 6대 강수린 위원장까지 모시는 조불련의 살아 있는 역사체이다. 시성(詩聖) 두보가 민중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시로 역사(詩史)를 썼듯이, 청담 스님도 통일을 기반으로 하는 북한불교의 역사인 통사(統史)를 집성하는 장본인이다.

북한불교의 모든 것이자 심장은 평양의 조불련 중앙위원회이다. 1945년 11월말에 출범한 조불련은 1972년 9월부터 대외 활동을 시작하였다. 특히 조불련은 1980년 9월 27일 조불련 전원회의와 11월 25일 개최한 조불련 중앙위원회 제7기 제3차 전원회의를 통해 실질적인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북한의 언론기사를 보면, “전체 불교도들은 고려민주련방공화국을 창립할 데 대한 새로운 통일강령의 실현을 위하여 한 사람같이 떨쳐나서자”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조직의 목표와 실천 목적사업을 확정하였다.(《로동신문》1980년 9월 28일과 11월 26일 기사내용)

이러한 조불련의 사업 기조는 2005년 11월 11일 갑자기 입적한 박태화(호) 위원장을 이어서 2006년 5월 8일 취임한 4대 위원장 유영선 대선사에 의해 2007년도 말까지 공식적으로 유지되었다. 그 후 조불련 내부승진의 형태로 당시 서기장과 부위원장을 지낸 심상진 대선사가 5대 위원장에 취임하여 2008년 7월 30일~2012년 10월까지 위원장을 맡았다. 이 사이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10년 12월 17일 사망하고 김정은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의 시대가 새로 열리면서 조불련에서도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와 해외동포원호위원회 등에서 대외 활동을 해온 제6대 강수린 위원장을 2012년 11월 19일자로 선출하였다. 취임 후에 별도의 활동을 하지 않았던 지성 강수린 위원장은 2014년 6월 29일 금강산 신계사에서 열린 만해스님 열반 70주기 남북합동다례 행사를 시작으로, 그해 10월 16일~18일 중국 산시성 바오지시(寶鷄市)에서 열린 제27회 세계불교도우의회(WFB) 총회에 참가하면서 국내외의 공식 활동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조불련의 대외적인 활동에 대한 이면에는 청담 유인명 스님과 같이 이를 뒷받침하는 이들의 수고로 움이 깔려 있다.

북한의 불교계에 있어 강수린 위원장의 등장은 조직으로서의 위상과 역할에도 변화를 갖게 되었다. 남북 불교교류를 비롯하여 조불련에서 발표되는 거의 모든 성명서나 기념사 등 연설문의 문장과 내용도 좀 더 세련되게 작성되어 발표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에는 청담 스님의 수고와 역할이 녹아 있다. 공식화된 조불련의 연설문 등에는 작성자의 생각이 들어가서도 안 되고, 또 자기의 이름이 안 들었다고 서운한 감정을 가질 필요가 없기에 청담 스님에게는 사명감이 더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 문안의 초안이나 그 일을 맡은 청담 스님은 간혹 불교행사에서 사회를 맡은 바도 있으나, 공식적인 연설이나 담화문을 낭독한 경험은 거의 없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중국 송나라의 사신이었던 서긍은 그의 저서 <고려도경>에서 “고려의 김부식은 박학해 글을 잘 짓고 고금의 역사를 잘 알고 있다”고 한 것처럼, 오늘날의 조불련 역사는 청담스님에 의해 다시 기록되고 있다. 조불련의 복심(腹心)으로까지 불리는 청담 류인명 선사는 그래서인지 조불련의 보이지 않는 입과 귀를 담당하는 또 다른 얼굴이다.

#다음 차례는 ‘청운 최형민 보현사 주지’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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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 2017-06-11 20:47:22
비공감 꾹꾹누르신 분들 때가되면 비공감 꾹꾹누르신거 후회많이 할껄요.기다려 보셈 잊지마시고 가끔 들러 보시면.....

신도 2017-04-27 1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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