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물질주의이다. 불교는 인간이 모든 생물 중 가장 귀한 존재라고 한다. 하늘나라 사람보다도 더 귀하다고 한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사람이 귀할까? 불성(佛性) 때문이 아니다: 불성은 동물에게도 있기 때문이다. 그건 몸 때문이다. 사람 '몸'을 받아야 도를 닦아 성불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몸이 있어야 불성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이 일은 몸이 없는 무색계(無色界) 천인보다도 몸이 있는 인간에게 더 쉽단다.) 그러므로 불교는, '깨달음을 얻으려면 거기 적합한 몸이 필요하다'는 물질주의이다.
이는 매우 모순적인 주장이다.
불성이 몸 안에 있는 게 아닌데, 왜 몸을 얻어야 불성을 찾기 쉬울까? 오히려 몸이 없어야 더 쉬울 것 아닌가? 온갖 육체적 쾌락을 제공하고 갖가지 물리적 제약 속에 갇히게 만드는 몸이 없어야 불성을 찾기 쉬운 것 아닌가? (한국불교에 의하면 불성 참나가 상락아정(常樂我淨)을 누린다고 하는데, 혹시 불성 참나가 육체적 쾌락을 즐기기 위해 몸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 몸에는 뇌가 포함될까, 안 될까?
불성을 우리가 구현해야 할 하나의 '가능성'으로 생각하지 않고 우리 안에 이미 갖추어진 완벽한 '완성품'으로 생각하면, 온갖 모순이 발생한다. 불성을 '기성품'이라 생각하면, 결코 불성을 찾지 못한다. 그런 불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어를 하는 능력은 우리 안에 갖추어져 있지 않다.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현대적 용어를 써서 설명하자면, 해당 뇌신경세포들과 (수상•축색)돌기들에 증가와 변형이 오지 않는 한 언어능력은 결코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언어를 전혀 배우지 않은 상태로 20살을 넘기면 모국어조차 배울 수 없다. 언어중추가 굳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는 석고가 굳으면 석고상을 뜰 수 없는 것과 같다. 또 아교가 굳으면 접착제로 쓸 수 없는 것과 같다. 언어중추는 석고나 아교와 달리 다시 녹여 쓰는 게 불가능하다. 이처럼 언어능력은 '이미 어디엔가 있는 걸 찾는 게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자면, 초고층 롯데빌딩은 그런 건물이 생길 가능성은 미리 존재하지만, 즉 설계도와 건축재료야 미리 존재하지만, 건물 자체는 건축하지 않는 한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이를 부정한다면, '지금의 서울은 조선시대 고려시대 신라시대에, 이미 물리적 실체로서 존재했다'는 심각한 모순에 빠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불성도 기성품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가능태로서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몸과 마음의 연기를 통해 오랜 기간에 걸쳐 점차적으로 발현된다. 35억년이 걸렸다는 점에서는 점차적이고, 한 생에 완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순간적이다.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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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레 어릴 적 부터 다니면 지옥 천당 하나님
입에 달고 다니고 ...그런데 자손을 낳으면
이런 것도 유전이 된다... 그 이후 죽으면
사라진다. 재생연결식이니 업이 공기중에 떠돌다
다시 들어와서 윤회한다고? 망상도 정도껏 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