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조불련을 대표하는 스님”
“현재 조불련을 대표하는 스님”
  • 이지범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
  • 승인 2016.11.10 11:4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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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범의 북녘 땅과 스님들] ② 리규룡 부위원장과 금강산

2000년대부터 북한을 자주 왕래했던 분들조차도 아직, 또 우리들이 곧잘 하는 말들 속에서 “진짜, 북한 스님들이 있어요.”, “우리처럼 수행하고 있나요”라고 한다.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에 대해 자기식대로 해석하거나 아니면 관성화된 생각으로 이해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북한에서도 정초나 특별할 경우에 종교에 관한 행위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를 단순히 생각만 해도 이런 입장이 달라질 수 있다. 종교는 인간의 문제를 넘어 근원적인 측면을 다루고 있기에 북녘 하늘밑에서도 신앙화된 측면들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세기동안 제한된 형태로 북한사회에서 종교를 이끌고 있는 수행승과 불자 그리고 그 분들과의 인연에 대해 이야기한다. /글쓴이 이지범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

 

▲ 리규룡 조선불교도연맹 부위원장. 그는 사실상 조불련을 대표하는 인물이다.(사진=이지범 고려대장경연구소장)

“교학과 불교의식에 정통한 학승(學僧)”

“천하절승 금강산 승려를 자칭”

리규룡 조불련 부위원장은 대선사(大禪師) 법계이다. 현재 조불련을 대표하는 스님 중의 한명이다. 리 부위원장은 강수린 위원장을 대신하거나 공식 법회와 행사에서 대표로서 사업을 주관하고 있다. 2010년 이후부터는 남북불교와 국제교류 등 각종 분야에서 조불련을 대표하고 있다.

나와는 1996년 9월 중국 북경의 해당화 식당에서 처음 만났다. 올해로 20년 인연이다. 나와 현재까지 가장 많이 만난 북한의 스님으로 꼽을 수 있다. 평화통일불교협회(약칭 평불협) 사무국장으로서 1996년 북경에서 리규룡 부위원장(당시 책임부원)을 처음 만났다. 그 당시, 필자와는 속세 나이가 똑같아 더 친근하게 우의를 나누었다.

“우리 오래토록 만납시다!”, “통일일꾼을 만나니 더 반갑습니다!” 등 북경 해당화식당에서 나눈 대화들은 불제자로서 같은 일을 하는 사람으로 느끼고 여겨질 만큼 2박3일의 일정이 너무 짧았다. 그 후로는 거의 매년 1회 이상을 리 부워원장과 만나 안부를 묻고 공동사업은 물론, 불교의 정신과 문화에 대해 이야기를 가졌다. 그 때에는 책임부원과 사무국장이라는 실무자였기에 각기의 감정과 사생활을 다루기에는 양측 어른 스님들의 눈칫밥이 더 컸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듯이 리규룡 부위원장은 지금 맡고 있는 직책만 보더라도 필자와는 격이 다른 인물이다. 작금의 북한불교 대표 리더를 도반으로 하기에는 필자의 성장이 미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11월 3일 개성 영통사에서 다시 만나서 리 부위원장과 깊은 포옹을 가졌다. 따스한 온기를 서로 느끼며 “나이든 모양입네다.”, “이제 이 국장이 아니라 소장이라 불러야겠구먼.”, “이 소장이 오니까 더 반갑습니다.” 등등 같이 나눈 말들에는 정(情)과 격(格)이 가득 묻어났다.

하룻날 일정으로 대표로서 또 해야 할 일이 많아서 그간의 속정을 다시 이야기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였다. 좋아하는 사람과의 대화는 꼭 말로 하는 것만 아닌 것 같다. 수차례의 눈짓과 곳곳에서 배려하는 행동으로도 개성에서의 만남은 동지와 불교도의 의미를 교감할 수 있었다. “(리 부위원장) 그 사진 많이 찍어서 뭘 할 겁니까.”, “(필자) 조불련의 역사를 잘 기록해야지요.”, “(리 부원장) 책 보았습니다. 우리 역사를 잘 정리해 주어 감사합네다.” 이것은 필자가 2010년에 민족공동체추진본부(민추본)의 요청으로 《남북불교교류의 흐름 - 남북불교교류 60년사》를 책임 집필한 것에 관한 내용이다.

▲ 2015년 11월 3일 개성에서 리규룡 부위원장과 기념사진을 찍은 이지범 소장.(사진=이지범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

남북한 불교교류사의 주요한 골자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구한말까지 ‘금강산 승려’는 불교를 대표하는 신분 자격에 가까운 표상이었다. 이와 같은 내용들이 북한 스님들의 입에서 술술 나온다는 것만 해도 기쁜 일이다. “(리규룡) 부위원장 스님이 출가한 곳은 어딘가요?”, “어디긴요. 금강산이지요.” “그럼 표훈사인가요.”, “그렇다고 해 둡시다.” 등 말문에서부터 금강산에 대한 자랑이 퍽 깊었다.

일찍부터 옛 스님들은 스스로 칭하기를, 금강산인(金剛山人)이나 내금강인(內金剛人), 백화도인(百花道人)이라 표현하기를 즐겼다. 이것은 곧 금강산에서 수행하는 승려임을 가리킨다. 또한 조선불교를 대표하는 뜻으로도 통했다고 한다. 이러한 지칭은 일제강점기 때까지만 해도 가장 자랑스러운 명칭 내지 별호로 썼다고 한다.

1900년대 미국 여류작가 님 웨일즈(Nym Wales)의 《아리랑》(1941년 판)에서 ‘금강산의 붉은 승려’로 등장하는 김충창(운암 김성숙), 상해 임시정부 등과 관련하여 독립운동을 했던 수원 용주사 출신의 신상완(申尙玩) 스님은 자신의 신분을 스스로 ‘금강산 승려’라 칭했다. 특히, 신문에 기고한 「日本이 韓國佛敎에 對 압박壓迫」이란 논설《韓日關係史料集》에서는 금강산 승려로 적고 있다. 금강산이 그만큼 유명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 중국과 일본에서도 금강산은 한국을 대표하는 명산으로 불교성지로 알려졌다.

금강산(金剛山)은 ​일찍이 3천의 승려가 수행하던 곳인 유점사를 비롯하여 4대 사찰 그리고 최남선이 ‘1만 2천 금강의 심장’으로 부른 마하연(摩訶衍) 선원 등이 있는 금강산은 조선불교를 대표하던 ‘금강산의 붉은 승려’들이 살며 수행하던 곳이다. 이로 말미암아 불교가 금강산을 다 채우고도 남는다.

▲ 내금강 유점사 능인보전 옛 사진(사진=이지범 소장 제공)

금강산에 사찰과 암자(刹庵)들이 건립된 시기는 5~6세기부터이다. 대규모 사찰은 6~9세기에 걸쳐 금강산을 가득 채우게 된다. 금강산 4대 명찰인 유점사(楡岾寺), 장안사(長安寺), 표훈사(表訓寺), 신계사 등이 건립되었다. 그 밖에도 내금강에 정양사, 마하연사, 장연사, 문수사 등과 외금강에 발연사, 송림사, 도산사, 금장사, 삼장사 등 유명한 사찰이 있었고, 또한 신림암(神琳庵). 안양암. 보덕암, 만회암, 영원암, 보운암, 상운암, 불지암 등을 비롯한 수많은 암자들이 세워졌다. 3대 옛탑(古塔)으로 불린 정양사ㆍ장연사ㆍ신계사 3층탑과 그리고 금장암 3층 사자탑, 화천리 5층탑 등이 남아 있다.

흔히, 금강산의 많은 절에 대해 노랫말에까지 등장하는 ‘금강산 팔만 구암자’(八萬九庵子)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금강산에 사암(寺庵)이 많이 있다는 것을 뜻하지만, “팔방 구암자(八房九庵子)가 있었다.”는 것을 후대에 들어와 잘못 일컫는 경우이다. 전쟁 때 소실된 내금강의 유점사, 장안사와 더불어 현존하는 표훈사, 다시 복원된 외금강 신계사와 같은 사찰은 ‘여덟 전각과 여덟 방사(八殿八房) 그리고 산내(山內)에 암자 아홉 개소를 두는 것’이 가람배치와 사격(寺格)에 따른 일종의 기본 원칙이었다. 옛날부터 ‘팔방 9암자’를 둔 대규모의 사찰이 아니면 전각에 주련(柱聯)을 붙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 의미의 팔방(八房)이 언제부터인가 말뜻이 와전되어 팔만(八萬)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지금, 금강산에 현존하는 사찰은 내금강의 표훈사, 정양사, 보덕암, 마하연 칠성각, 불지암과 외금강의 신계사 6곳이 유일하다. 유점사와 장안사, 신계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금강산 사찰과 암자는 6ㆍ25 한국전쟁 때 미군 폭격이나 실화로 소실되었고, 1960년대 이후 전쟁복구 시기에도 대규모의 홍수와 산불 등으로 소실된 경우도 많았다. 그 중에서 신계사는 지난 2004~07년까지 남북공동 복원사업(조계종-조선불교도연맹)으로 추진되었다.

▲ 현존사찰 내금강 표훈사 전경(사진=이지범 소장)

예로부터 사찰들이 많기로 유명한 금강산에 대한 이야기는 “고려의 금강산을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다”는 중국인들의 말이 첫 번째이다. 이 유래는 《조선왕조실록》「태종실록」태종 4년 9월 기미조(條)에 기록되어 있다. 왕(太宗)이 하륜ㆍ이거이ㆍ성석린ㆍ이무ㆍ이서 등과 정전에서 정무를 논하다가 “중국 사신들이 (조선에) 오기만 하면 왜 금강산을 보려고 하는 것인가?” 하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묻자. 재상 하륜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일찍이 송나라 시인(소동파)이 노래하기를 ‘원컨대 고려국에 태어나 한 번만이라도 금강산을 보았으면’(願生高麗國 親見金剛山) 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즉, 당송(唐宋) 8대가로 불리는 소동파가 “원컨대 고려국에 태어나 한 번만이라도 금강산을 보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역사적인 기록이지만, 재상 하륜이 왕의 질문에 한 번도 고려를 방문한 적이 없는 소동파를 대답 속에 끌어들여 그의 유명세를 핑계로 삼은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두 번째의 유래는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이고, 1460년(세조6) 매월당 김시습이 금강산을 직접 순례하고 쓴 『탕유관동록후지』이다. 또 16세기 양사언의 『금강산유람기』에 실은 금강산을 예찬한 시일 것이다. 근대에는 육당 최남선이 1928년에 쓴 『금강예찬』에 이 한 구절이 다시 기록될 만큼, 이 글귀를 통해 금강산의 아름다움은 먼 옛날 시인묵객과 호사가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와 노래로 자주 회자되었다.

그리고 금강산에 대한 예찬은 그 자체가 금강산이다. 금강산을 너무나 사랑하고 아낀 나머지 자신의 호를 스스로 봉래(蓬萊)라 칭한 조선 중종 때의 양사언이다. 조선전기의 4대 명필 양사언은 내금강 만폭동의 평평한 돌에다가 초서(草書)로 쓴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이라는 여덟 글자를 커다랗게 새겨 놓았다. 이에 대해, 조선후기의 실학자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는 양사언이 내금강 계곡바위에 새긴 여덟 글자를 “이 글자의 획이 살아 움직이는 용과 호랑이(龍虎) 같으며 날개가 돋아 하늘로 너울너울 날아가는 것 같다”고 했고, 이 글씨는 속설에 “만폭동 경관의 값이 1,000냥이라면 그중 500냥은 양사언의 글씨 값일 것’이라고 할 정도로 유명하다.”고 표현하였다.

철따라 독특하고 매혹적인 장면이 연출되는 금강산은 그 때문에 계절마다 다른 이름이 붙여져 있다. 봄 금강산(金剛山), 여름 봉래산(蓬萊山), 가을 풍악산(楓嶽山), 겨울에는 개골산(皆骨山) 등으로 불린다. 금강산을 예찬한 수많은 예인들의 향연에는 이름 모를 백성들과 수행자의 숨결까지 고스란히 서려있다.

지금, 우리에게 닫혀있는 금강산은 개골산, 열반산의 이미지로 변신하고 있다. 과거에 금강산 승려로 불리던 스님들은 이곳에서 더 이상 수행할 수가 없다. 수행의 전형으로 선 보였던 지난 2007년까지의 신계사 도감제도는 단절되었지만, 오늘날 북한 스님들에 의해 다시 변화하고 있다. 금강산의 붉은 승려로 지칭하는 리규룡 조불련 부위원장 등이 있기 때문이다. 북한 스님들은 평상시에 양복을 착용하지만, 불교의식 등에서는 붉은색 가사인 홍가사(紅袈裟)를 입는다.

1989년부터 평양의 조불련 중앙위원회에서 책임부원(부장급)으로 공식 활동을 시작한 리 부위원장은 1964년 평양에서 출생했다. 리 부위원장은 2005년 11월 입적한 고 박태화 위원장의 상좌이다. 세납 25~26세 때에, 조불련의 불학원과 법계위원회를 거치 ‘연암’(蓮庵)이란 법명을 받았다. 지금은 대선사의 법계를 가지고 있다.

▲ 리규룡 위원장.

다소 늦은 나이에 출가한 리규룡 부위원장은 1989년부터 평양의 조불련 청사 법당 및 사찰, 불교학원(佛學院)에서 염불 등 불교의식을 담당하는 등 북한불교를 대표하는 교학과 불교의식의 최고 권위자이다. 이러한 사실은 1996년 9월 중국 북경 남북불교회의에 처음 참석한 연암스님과의 인터뷰에서 확인하였다. 그동안 조불련 중앙위원회의 주요한 업무를 관장하고, 염불 등에 많은 지식과 기술을 겸비하였다. 특히 2003년경 신설된 것으로 알려진 조불련 중앙위원회의 포교부 부장(책임부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2007년부터 개성 영통사 복원 이후 주요한 업무를 관장하였다.

2009년 5월 조불련 중앙위원회 서기장에 공식 취임한 연암 리규룡 스님은 남북한 교류 및 국제교류 등 주관하는 조불련 서기국을 총괄하였고, 2012년 11월부터 부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연암스님의 대표적인 교류사업 활동은 2003년 3월 2일 서울 강남 봉은사에서 열린 조국통일기원 남북불교도 합동법회에 당시 황병준/대 부위원장(2004.9.8 입적) 등과 함께 직접 참가하였다. 2009년 10월 13일 금강산 신계사 복원 2돌 기념법회를 주관한데, 이어 매년 금강산 신계사에서 남북불교도 합동법회와 개성 영통사 대각국사 의천스님 다례재 등을 주관하고 있다.

오늘날 북한불교를 대표하는 조불련 리규룡 부위원장이 스스로를 ‘금강산 승려’라 칭하기까지 꼭 60년이 흘렀다. 옛 조사와 선사들이 칭한 별칭과 같이 일제강점기의 임시정부에까지 그 명칭이 쓰인 것은 일종의 대단한 스펙(specification)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지난해 말 개성 영통사에서 리규룡 부위원장 스님이 직접 “나도 금강산 승려다”라고 한 의미에서 불교적 수행이 강조되고, 불교의 전통적인 문화에 이르기까지 확산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는 것이다.

/다음 연재는 ‘소명 차금철 서기장’ 편입니다.

참고
-팔방(八方)은 동서남북, 동북동남서북서남을 일컫는 여덟 방위. 건(乾)감(坎)간(艮)진(震)손(巽)이(離)곤(坤)태(兌)의 여덟 방향임.
-중국의 소동파 소식(蘇東坡 蘇軾 : 1037〜1101년)은 ‘고려를 직설적으로 오랑캐라 부르고, 금수(禽獸)와 같다(王子不治夷狄論)’고 했지만, 그 이면에는 중화에 대한 우월적 사상, 고려에 대한 시기심과 열등의식이 반영되어 있었다. 그의 동생으로서 당시 관직에 있던 소철(蘇轍)은 고려 사신이 송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조치하고(1089년 11월, 論高麗進奉狀), 고려에 대한 왕래 금지, 대각국사 의천이 불교전적을 수집하자 이를 방해하는 것은 물론, 여타 서적을 고려에 판매하는 것을 금지하자는 상소문(1090년 8월 乞禁商旅過外國狀, 1093년 2월 論高麗買書利害箚子三首)을 7차례나 올리기도 했다. 또한 송의 연호를 쓰지 않는다 하여 고려로부터 온 서신을 돌려보내는 등 다섯 가지로 ‘고려 해악론’을 주장하며 극력 배척한 인물이다.
-봉래, 풍악은 금강산의 또 다른 이름이며, 원화동천은 만폭동의 다른 이름으로 금강산의 기묘하고 아름다움을 다 구현한 으뜸가는 곳이라는 뜻을 가리킨다.
-금강산의 겨울을 나타내는 개골산(皆骨山) 이외에도 설봉산(雪峰山), 열반산(涅槃山)ㆍ기달산(怾怛山) 등으로 부른다. 『화엄경』에 있는 “바다에 떠있는 섬” 뜻의 기달산(怾怛山)의 명칭은 지달산(枳怛, 怾達)으로도 부르는데, 이것은 산이름기(怾)자를 탱자나무지(枳)자로 잘못 읽은 것이거나 표기상의 오류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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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연 2017-03-01 11:22:39
귀한 인연 담은 따뜻한 글 감동적으로 다가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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