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태불교, 참나불교 비판과 진단 충분히 가능"
"변태불교, 참나불교 비판과 진단 충분히 가능"
  • 박병기 교수/한국교원대
  • 승인 2016.09.27 10:14
  • 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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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기] 왜 우리는 한국불교의 위기를 말하고자 하는가?

왜 우리는 한국불교의 위기를 말하고자 하는가?

박병기/한국교원대학교 교수, 정의평화불교연대 공동대표

 

▲ 박병기 한국교원대 교수, 정의평화불교연대 공동대표

위기(危機)라는 말은 병이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회복과 죽음 사이의 경계선을 뜻하는 서구 의학용어에 뿌리를 둔 번역어다. 한자어의 뜻에 주목해보면, 위험한 시기라는 의미와 함께 기회라는 말을 떠올릴 수 있다. 한자어 기(機)를 공유하면서 위기와 기회가 서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는 이러한 위기이자 기회인 시기 또는 계기가 포함되어 있기 마련이고, 그것을 얼마나 잘 넘기느냐에 따라 이후의 상황이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기도 함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위기는 그 앞에 특정한 사태 또는 영역을 더함으로써 구체화된다. 경제위기나 생태위기라는 말이 그런 대표적인 사례인데, 요즈음에는 ‘총체적 위기’라는 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여러 영역의 위기가 중첩되어 있다는 주장이 일반화되어 있다. 그만큼 위기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영역의 위기들이 서로 겹쳐 있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위기라는 말이 곳곳에서 사용되고 일부에서 남용되기도 하면서 더 이상 힘을 지니지 못하는 느낌을 받곤 한다. 위기를 과장하거나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은데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실을 왜곡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생긴 현상인데, 특히 21세기 초반 한국사회에서 그런 현상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사람의 본성 속에는 긴장 상태를 오래 견디지 못하는 경향이 있어서 지속적인 위기 담론에 적응해버린 탓도 있고, 언론 매체 등을 통해서 늘 위기를 말하는 주장들이 흘러넘친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제 위기라는 말은 쉽게 공감을 불러내지 못하는 수사학적 표현으로 자리잡은 듯한 느낌마저 갖게 된다.

내 삶의 위기와 한국사회의 위기

위기는 일차적으로 내 삶 속의 그것으로 온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주머니와 은행계좌에 돈이 거의 없는 경제적 위기와 만날 수도 있고, 삶의 의미를 찾기 어려워지는 실존적 위기와 만날 수도 있다. 전자와 같은 구체적인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그래도 나름의 방안을 찾는 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있는데 비해, 후자와 같은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위기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없어 헤매야 하는 깊은 수렁을 지니고 있다. 물론 각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서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는 일이 더 어려울 수도 있고, 이 위기가 지속되다보면 지쳐서 삶의 의미를 상실하는 정신적 위기 상황으로 내몰릴 수도 있다.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인의 위기는 사회적 차원의 위기와 일정하게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깊은 연관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프랑스 사회학자이자 도덕교육학자인 에밀 뒤르껭에 주목했던 것처럼, 사회적 상황에 따라 자살률이 높아지거나 낮아지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그 증거이다. 어떤 사회의 건강성을 측정하는 단 하나의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한 기준 중 하나는 그 사회에 속한 개인의 자아실현 가능성을 높여주는 역량(capability)이다. 이 역량은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를 전제로 하는 경쟁력(capacity)과는 다른 차원의 개념이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인도출신 경제학자이자 윤리학자인 아마티아 센과 예일대학 법과대학원 법철학교수인 마사 누스바움이 함께 국민소득(GDP) 개념을 대체하기 위해 제안하는 개념이기도 한 이 역량은 그 사회의 정의 수준을 측정하는 기준이다.

한 사회의 위기는 그 사회구성원 모두가 처한 위기임과 동시에 독자적인 존재성을 지니는 그 사회 자체의 위기이기도 하다. 21세기 초반 한국사회가 위기에 처해있다는 말은 우리 사회 구성원들 모두가 위기에 처해있다는 의미와 함께, 이 사회 자체가 붕괴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사회 위기론은 단순한 학문적 담론에 그치거나 현학적으로 재현된 선비의 우환의식(憂患意識), 다시 말해서 엄격한 도덕적 기준에 근거해서 무차별적으로 펼쳐내는 술자리의 ‘나라와 민족 걱정’ 수준을 훌쩍 넘어서는 실제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21세기 초반 한국사회의 총제적 위기와 한국불교의 위상

우리가 함께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21세기 초반 한국사회는 위기에 처해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해서는 관점에 따라 다른 답변이 가능할 테지만. 최소한 전혀 위기를 느낄 수 없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상황 속에 있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북핵과 사드로 상징되는 군사적 위기와 헬조선(hell朝鮮)으로 상징되는 사회분배 및 계층적 위기에, 이즈음에는 세월호와 지진 수습과정을 둘러싸고 확산된 사회 전반과 정치에 대한 신뢰의 위기까지 더해져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경주에서 일어난 강진은 세계적으로도 원전밀집지역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아파트 중심의 우리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 한국사회 속에서 주로 종교 영역이자 체계로 존재하고 있는 종교, 그 중에서도 불교 또한 여러 가지 위기 징후를 보이면서 무너져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조계종단 지도부의 도덕성 위기와 함께 총무원장 직선제를 둘러싸고 제기되고 있는 대표성의 위기로 나타나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최근 외국인 출신의 한국승려인 현각스님의 지적이나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일부 재가지식인들의 문제 제기 자체를 거부하는 불통(不通)의 위기이다. 이 불통의 위기는 이른바 ‘해종언론(害宗言論)’이라는 희귀어까지 만들어가면서 소통을 탄압하는, 시민사회에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야만적인 행태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회를 소통을 전제로 하는 체계들 사이의 관계로 보는 독일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에 따르면, 소통이 멈추면 사회와 그 구성원인 개인의 생명은 끝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 불교계는 이미 상당 부분 그 생명력을 잃어버린, 죽어가는 체계일 뿐이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까지 된 것일까? 원효의 화쟁정신(和諍精神)을 정신적 기둥의 하나로 내세우는 조계종 중심의 현대 한국불교가 도대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원인과 배경은 과연 무엇일까?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불교의 관점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각자의 존재 의미를 존중하는 연기적 독존(緣起的 獨尊)의 개념으로 해석해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국불교의 위기는 그 구성원들인 출가자들과 재가자들의 위기임과 동시에, 우리 사회의 종교체계로 이어지는 한국사회 자체의 위기이다. 역으로 보면 현재의 대통령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는 신뢰와 불통의 위기가 종교계 전반으로 확산되어 있고, 그 중심에 조계종단 집행부가 위치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불교의 지혜는 우리가 처한 위기와 대면하면서 직시할 수 있으면 그 안에 해소 방안도 들어있다는 여실지견(如實知見)의 지혜이다. 한국불교의 위기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직시할 수 있다면, 해결 방안 또한 당연히 찾을 수 있고 그 방안은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의 위기 극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나의 체계로 종교를 바라보는 루만은 종교의 핵심 기능이자 역할을 삶의 의미 부여라고 강조한다. 그런데 우리 불교를 비롯한 한국종교는 그 삶의 의미를 훼손하거나 왜곡하는 장치로 작동하고 있고, 그것이 한국불교 위기의 핵심이다.

한국불교 위기의 두 가지 요인과 극복 과제

한국불교의 위기는 기본적으로 총체적이지만, 그 총체성을 구성하는 몇 가지 핵심 요인을 중심으로 위기의 유형과 성격을 규명하는 일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다만 그 각각의 하부 위기로 온전히 환원되지 않는 총체성에 대해서 유념하는 일 또한 필요할 것이다. 위기 요인을 여러 가지로 분류해볼 수 있지만, 크게 나누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한국불교 위기의 첫 번째 요인은 외부적인 것으로 21세기 초반 한국사회를 이끌어가는 핵심 원리인 자본주의적 질서와 한국불교가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있다는 데서 기인한다. 자본주의적 질서는 각 개인의 고립성과 이기성을 바탕으로 그 개인과 개인들 사이의 계약의 산물인 사회의 이윤 추구 원칙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 이윤 추구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은 모두 폐기의 대상이고, 그것은 종교나 철학 같은 정신적인 것이라고 해도 예외없이 적용된다. 만약 종교가 각 개인의 이윤추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당연히 폐기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그 원칙을 먼저 인지한 개신교 일부에서는 적극적인 이윤 추구, 즉 교회를 다니면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말로 성장을 거듭했다. 불교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불교는 조선의 척불정책을 스스로 극복하지 못한 채 일제의 지원을 등에 업고 근대화 과정을 경험해야 했고, 광복 후에는 왜색불교의 청산을 역시 이승만정권의 지원에 힘입어 해내야만 했다. 그런 과정에서 몸에 배인 권력 의존성은 희대의 살인자인 전두환에게 의존하면서 불교 고유의 위상과 역할은 내팽개친 조계종단 지도부의 부도덕성으로 자리잡았지만 다행히 1994년 종단 개혁을 통해 일정한 극복이 가능해졌다. 문제는 이 개혁이 형식적인 차원의 장치, 즉 선거를 통한 총무원장과 본사 주지 선출 같은 외형적인 요건을 갖추는데 기여했지만, 불교 고유의 역할과 기능이 무엇인지에 대한 제대로 된 논의와 노력이 이어지지 못한 반쪽짜리로 전락한 데서 생겨난다.

한국사회는 20세기말의 충격, 즉 구제금융사태로 상징되는 외적 성장의 위기와 각 개인들의 생존 기반의 위태로움을 온몸으로 경험하면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해야만 한다는 과제와 직면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불교는 종교로서의 역할인 안심(安心), 즉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한편으로, 종교이자 철학으로서의 역할인 입명(立命), 즉 삶의 의미 물음에 관한 적극적인 해답을 찾을 수 있는 통로로서의 역할을 해내야만 했다. 전자의 경우 템플스테이 같은 몇 자기 장치를 마련함으로써 일정하게 해냈지만, 안심은 입명으로까지 이어져야만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일정한 수준 이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표류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그 한계는 국가의 예산지원이라는 외부 의존성을 전제로 함으로써 템플스테이관을 짓고 과시용 프로그램을 마련하는데 치중함으로써 이제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위기와 마주하게 되었다.

불교는 붓다가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을 때부터 이미 그 시대의 흐름과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대안적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다. 자본주의 질서가 모든 사람들과 사회의 몸으로까지 파고들면서 위협을 가하고 있는 21세기 초반 한국사회에서 불교는 소욕지족(少欲知足)의 즐거움을 근간으로 삼는 무소유의 이념을 중심에 두고 사람들의 고통을 껴안고자 노력해야 하고, 승가와 재가로 이루어지는 사부대중공동체가 그런 삶의 모형을 지속적으로 제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존재기반을 지니게 된다. 그런데 조계종단으로 상징되는 우리 불교는 그것과는 다른 방향을 택함으로써 스스로를 존립의 위기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

한국불교 위기의 두 번째 요인은 좀 더 내부적인 것인데, 깨달음과 수행이라는 불교 신행의 과정에서 빚어지고 있는 이론적·실천적 혼란이다. 당연히 첫 번째 요인과도 긴밀하게 연계되는 것이지만, 특히 이 요인은 화엄과 간화선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온 한국불교의 정체성이 깨달음의 개념을 둘러싼 이론적 혼란과 화두선의 실참 과정과 성과를 둘러싼 실천적 회의로 이어지면서 승가는 물론 재가의 일상과 수행의 분리라는 부정적인 결과를 빚어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유입된 초기불교 수행체계에 관한 배타적 몰입과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 같은 학문적 논쟁의 잘못된 유입으로 많은 출가보살과 재가보살들이 정체성과 신행심을 상실한 채 외형적으로만 불자임은 내세우거나, 아예 감추고 사는 퇴행적인 모습으로 겨우 살아내고 있다.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 방향을 잡고 스스로의 수행과 함께 대중의 수행과 삶을 이끌어주기를 기대할 수 있는 승가와 출가보살은 강병균교수가 비판하는 ‘참나불교’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거나, 우희종교수가 강조하는 ‘변태불교’로서의 파행을 거듭하고 있다는 진단이 충분히 가능한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물론 이런 비판에 대한 반비판(反批判)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기도 하다. 그런 상황 인식에 바탕을 두고 우리는 함께 이야기하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한다. 한국불교의 근본적인 개혁을 주창한다는 점에서 불교계의 루터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우희종교수와 수학적 사고와 진화론이나 뇌과학 같은 최근의 자연과학을 바탕으로 삼아 윤회나 참나 같은 것은 없다는, 다소 파격적인 주장을 펼치는 불교계의 갈릴레오 강병균교수가 대화의 두 주인공이다. 이 두 학자의 주장이 펼쳐지는 담론의 향연을 향연답게 이끌어야 하는 책임을 맡고 있는 필자는 사회자이자, 불교계의 스피노자라는 별명을 부여받었다. 서양 근대의 초기를 살면서도 그 한계를 꿰뚫어보았던 스피노자의 통찰력과 대안적 지혜를 갖추어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하여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부디 2016년 9월의 마지막날 밤에 펼쳐지는 우리의 향연이 한국불교계의 위기를 직시하면서 그 위기 속에 포함되어 있는 문제 해소의 대안적 지혜까지 나눌 수 있는 장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 글의 서두에 해당하는 두 쪽의 글은 「한국불교의 위기를 말한다」는 제목으로 ‘불교닷컴’에 새로 연재를 시작하는 필자의 칼럼에서 따온 것임을 밝혀둔다.(2016.9.19.)

#이 원고는 9월 30일 오후 7시 서울 방배동 마지 아카데미홀에서 열릴 ‘Three Tenors 가을 밤 한국불교를 휘젖다’ 토론회에서 발표할 박병기 교수(한국교원대학교, 정의평화불교연대 공동대표)의 발제문이다. 박병기 교수는 한국불교의 위기를 진단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공동체의 고민을 이끌어내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한국불교의 위기는 단순한 종파나 종단의 위기가 아닌 불자 대중의 삶의 위기이며, 불자들의 위기는 곧 우리 사회의 위기와도 맞닿아 있다고 박 교수는 진단한다. 한국불교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곧 우리 사부대중의 삶이 위기에서 탈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박 교수는 ‘해종언론’ 사태에서 보듯 한국불교가 소통하지 못하고 야만적인 행태로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는 데 크게 우려한다. 이 원고는 정의평화불교연대가 조계종이 ‘해종언론’이라는 해괴한 덫을 씌운 <불교닷컴>에  '한국불교 진단-위기와 망상' 기고문의 일부가 포함돼 있다. ‘쓰리 터너스 토론회’ 주최 측의 이해를 구해 발제문을 미리 공개한다. <편집자>

[불교중심 불교닷컴. 이 기사에 대한 반론 및 기사제보 mytrea7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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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의이념이라니 2016-10-03 04:46:00
<박병기 교수>는 "종교가 각 개인의 이윤추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당연히 폐기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의 원칙"이라고 하면서 그 원칙에 반해서 무소유의 이념을 중심으로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니
결과적으로는 불교가 폐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서 앞뒤가 안 맞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인데,
부처님께서는 이런 앞뒤 안 맞는 말씀을 하신 일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자본주의가 생겨날 꿈도 못 꿀 시절에 재가신자들에게는 무소유가 아니라 정당한 노력으로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소유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박교수는 불교와 풍요한 생활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는 모양인데, 대승불교 운운하는 교수들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유마경의 설법주인 '유마힐' 거사는 부유한 장자였습니다.

vjdna 2016-09-29 10:18:09
불교는 이론보다
행이다
지금 조계종을 불신한 이유
종단 고위직 승려들 행태를
보면 기가막히다
딸딸이 아빠가 수장이되고 쌍둥이 아빠가
용주사 주지되고 나체사진이 돌고있고 결혼서약서
까지 써준 승려가 본사주지 하고 비구니 자매 성취행
자가 본사주지 후보되고 처자식있는자가 방장되는
조계종 현실이 불교를 죽이고 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총무원장을 잘 뽑아야한다

재가불자 2016-09-28 22:21:27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 방향을 잡고 스스로의 수행과 함께 대중의 수행과 삶을 이끌어주기를 기대할 수 있는 승가와 출가보살은 강병균교수가 비판하는 ‘참나불교’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거나, 우희종교수가 강조하는 ‘변태불교’로서의 파행을 거듭하고 있다는 진단이 충분히 가능한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번 토론의 핵심 주제는 “참나 불교”와 “변태불교”인 것 같다. 하나는 교리적인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겉으로 드러난 행정상의 문제다. “참나 불교”를 힌두교라고 비판하면서 불교가 아니라고 비판하는 것이 요지인데, 간단히 설명하겠다. “참나”라고 할 때는, “아트만”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앞에서 말했듯이, 대승비불설의 핵심 논쟁 주제 중 하나가 바로 “참나”와 관련된다. 즉, 다른 말로 “불성” 내지는 “여래장”과 관련된다. 더 나아가서 “법신”이나 “법계”라는 주제와도 관련된다. 불성 사상은 이미 2000년도 더 오래 전부터 불교도들이 믿었고, 불교의 논사들도 가르쳤던 것이다. 중론을 저술한 용수보살의 다른 저서들에서 이미 그와 같은 사상이 뚜렷하게 전개되고 있다. 물론, 여래장류에 속하는 경전들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현대의 전문적 불교학자들은, 니카야 경전 속에서 부처께서 아트만을 긍정적 맥락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발표하고 있다. 내 개인적인 관점으로는, 국내의 초기불교 학자들과 신도들은 아직은 제한된 범위에서만, 그것도 특정한 학자의 해석관점에 따라서 초기불교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불교에 대한 연구가 더 진행되면 여러 가지 관점에서 아트만에 대한 논의가 있을 것이다. 이 말을 하는 것은, 대승불교의 역사가 불성을 배제시키고서 말할 수 없고, 대승불교적 깨달음과 완성이 불성 내지는 여래장을 떠나서 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니카야 경전 속에서도 그런 증거들이 발견된다면, 박교수가 생각하듯이, “참나 불교”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박교수의 견해는 불교 전반에 대한 부정일수도 있다. 일본의 한 학자가 여래장은 힌두사상이라고 비판했는데, 그 사람의 개인적인 학문적 작업일 뿐이다. 여전히 학계의 논쟁이고, 그 논쟁은 2000년도 넘게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불교는 발전하고 풍부해졌다. 불교를 그냥 하나의 학문적 체계로 보면서 도식화된 개념비교를 통해서 불교를 이해하면 얼마나 이해하겠는가! 불교의 2500년의 역사에서, 한 가지 개념이 여러 가지 차원에서 이해되고, 전개되면서 변화에 변화를 겪었다. 과학이론이 수정되고 보완되면서 발전하는 것과 같다. 불교는 완성되지 않았다. 삼사라에 단 한 명의 중생이 존재할지라도, 불교는 보완되고 변화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부처의 궁극의 깨달음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 말도 불성의 맥락에서 가능한 것이다.

우교수의 “변태불교”에 관해서는 말할 가치조차 없다! 그런 논쟁을 하는 것조차 부끄러워하라!

재가불자 2016-09-28 22:00:28
초기불교 수행체계에 배타적 몰입의 특징이 나타나는 것은, 수행에 집중하고 해탈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수행에 대한 몰입은 초기불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간화선 불교이든, 염불수행이든, 대승불교이든, 모든 수행과정에서 발생하는 필연적인 과정이다. 배타적인 몰입 없이 어떻게 수행에 진전이 있겠는가! 입시공부하는 수험생도 일정한 기간 동안 배타적인 환경에서 공부해야 하는데, 하물며 삶의 현장인 이 삼사라로부터 벗어나는 데는 얼마나 큰 배타적인 몰입이 필요하겠는가!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리고 대승비불설은 오늘만의 논쟁이 아니라, 족히 2000년이나 된 오랜 논쟁이다. 그렇게 오래도록 대승비불설로 논쟁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교가 퇴보하거나 신자들이 신행심을 상실하고 불교를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불교는 더욱 풍부해졌고, 견해를 더욱 명확하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학문적 논쟁은 더 진행되어야 하고, 더 다양하고 치열하게 전개되어야 한다.

재가불자 2016-09-28 21:59:41
“한국불교 위기의 두 번째 요인은 좀 더 내부적인 것인데, 깨달음과 수행이라는 불교 신행의 과정에서 빚어지고 있는 이론적·실천적 혼란이다. 당연히 첫 번째 요인과도 긴밀하게 연계되는 것이지만, 특히 이 요인은 화엄과 간화선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온 한국불교의 정체성이 깨달음의 개념을 둘러싼 이론적 혼란과 화두선의 실참 과정과 성과를 둘러싼 실천적 회의로 이어지면서 승가는 물론 재가의 일상과 수행의 분리라는 부정적인 결과를 빚어내고 있다.”


조계종의 종지인 간화선 전통에 대한 언급은, 교학적 수행적 맥락에서 할 수 있는 것이지, 종단의 권승의 부패와 파행의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불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적 실천에는 그 과정중에 혼란과 시행착오가 생기는 법이다. 그것은 필연적이다. 부처조차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많은 혼란과 시행착오를 거쳤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단순한 기계조차 작동 중에 오류가 발생하는데, 인간들 그 자체인 무지한 범부들이 번뇌의 세계를 이해하고 그로부터 해탈하고자 애쓰는 데 있어서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와 혼란이 있겠는가! 불교에 입문해서 깊은 확신에 이르는 과정 그 자체가, 반드시 혼란과 시행착오라는 과정을 겪는다. 다시 말해, 불교신행의 과정 자체가 혼란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그런 혼란이 없다면, 누구나 단박에 부처가 되었을 것이다. 화엄과 간화선을 아는지 묻고 싶다. 한글 화엄경이라도 완독을 하고서 말하는 것인지 묻고 싶다. 화엄과 간화선을 중심으로 한국불교의 정체성이 형성되어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한국불교는 정말 심오하고 위대한 불교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부처 시대부터 깨달음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논쟁을 해 왔고, 실참상의 결과에 대해서 끊임없이 논쟁을 해왔다. 불교전통은 그런 논쟁을 통해서 발전해왔다. 다시 말해, 논쟁이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논쟁이 없어서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논쟁으로 인해서 일상과 수행의 분리가 발생한 것이 아니다. 본래 간화선은 심도 깊은 수행자들의 수행이다. 그렇기 때문에, 깨우침이 없으면, 일상과 수행의 분리를 피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더 철저하게 간화선에 임하지 못했고, 더 철저하게 화엄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일상과 수행의 분리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일상과 수행이 분리된 사람들은 두 부류 밖에 없다. 해탈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무지한 범부와 해탈한 성인들이 그 두 부류다. 그 중간단계에 있는 모든 수행자들과 신도들은 일상과 수행의 분리라는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자신도 부처가 아니면서, 사람들에게 당장 부처이기를 요구하는 것인가! 일상과 수행의 분리는 부정적인 결과가 아니고, 필연적인 결과이고, 해탈로 나아가는데 겪어야 할 매우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결과다.


“이 과정에서 유입된 초기불교 수행체계에 관한 배타적 몰입과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 같은 학문적 논쟁의 잘못된 유입으로 많은 출가보살과 재가보살들이 정체성과 신행심을 상실한 채 외형적으로만 불자임은 내세우거나, 아예 감추고 사는 퇴행적인 모습으로 겨우 살아내고 있다.”

초기불교 수행체계에 배타적 몰입의 특징이 나타나는 것은, 수행에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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