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단이 상징하는 한국불교는 대승불교인가, 변태불교인가?
우희종/바른불교재가모임 상임대표, 서울대 교수
붓다의 길은 자신을 아는 것이고,
자신을 아는 것은 자신을 잊는 것이며,
자신을 잊는 것은 세상 만물에 의해 깨어나는 것이다.
- 도겐(道元:1200~1253)의 ‘현성공안’ 중에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종파의 하나인 선종을 표방하는 조계종입니다. 대승불교는 나 하나의 해탈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서로 의존해 존재하기에 내가 너와 다르지 않고, 내 삶의 변화가 너와 나의 삶의 변화를 위한 실천이라는 보살의 삶을 지향합니다. 간화선 기반의 선종을 표방하는 조계종 역시 대승불교의 한 종파로서 그 지향하는 바가 이와 그리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위에 인용한 도겐 선사의 게송에서 자신을 잊는다는 무아의 공(空)의 경지는 새삼 자신이 세상 만물에 의해 깨어나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화엄의 모습을 간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생노병사라는 고통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시작된 싯달타의 삶은 스스로 아라한의 붓다(覺者; 깨어있는 자)가 되어 49년의 삶을 거리 위에서 탐진치 화택 속에 고통받는 중생을 위해 받치게 됩니다. 승속을 떠나 불자라면 붓다가 보여준 자타불이와 동체대비라는 이고득락의 가르침에 따라 깨어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대승불교 가르침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 상징화된 것이 보살입니다. 보살의 삶을 살아갈 것을 가르칩니다. 보살의 수행이 어떠한 것인지는 대승경전 속에 잘 제시되어 있습니다. 대승경전인 금강경이나 유마경 내지 화엄경 속에서 제시된 수행방법은 중생과 차별 없이, 중생 속에서, 중생과 함께 함으로서 이뤄집니다. 보원행원품에서도 나와 있듯이 ‘수순중생(隨順衆生)’이요, ‘일체극중고과 아개대수(一切極重苦果 我皆代受)’의 모습으로 행을 닦는 것입니다.
"개인 깨달음 중요, 하지만 세속에 회향이 수행의 완성"
그런데 선종을 표방하는 한국불교에서는 한 개인의 깨달음이 수행의 목적인 양 가르칩니다. 그래서 평생 선방에 앉아 있다 죽는 것이 소원이라는 이도 있고, 그런 것이 최대의 가치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물론 개인의 깨달음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쪽인가 하면 초기불교에서 강조되던 유형의 수행방식입니다. 초기불교나 대승불교나 붓다의 정신을 구현하고자 각자 노력해 온 훌륭한 가르침에는 틀림없으나 서로 강조점이 다르다보니 각자의 추구하는 가치에 가장 적절한 수행방식을 제시합니다. 초기불교에서는 아라한과의 증득이겠지만, 대승불교란 모든 것을 중생에게 회향함으로서 마무리됩니다. 그 점에서 대승에서의 개인의 깨달음이란 화엄경 보원행원품에서처럼 세속에서의 회향으로 비로소 완성됩니다. 대승이란 수행과정과 회향이 둘이 아닌, 초발심시변정각의 구조입니다.
깨달음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개인 깨달음만을 강조하다보니 그것이 ‘대오각성’이라는 ‘깨어있음’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개인 기복 구조로 전락합니다. 깨달음이 깨어있음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아상과 인상에 근거해 나부터 깨닫고 너를 제도하겠다는, 최소한 종단의 소의경전인 금강경 가르침마저 무시한 수행은 버려야 합니다. 중생 수순의 회향이 없는 깨달음은 나 하나 편해진 것일 뿐이고, 회향이 이뤄지지 않은 반쪽의, 미완의 깨달음이니 입전수수(入廛垂手)가 누락된, 제대로 된 선종이라고도 볼 수 없습니다.
깨달음만을 강조하며 스스로 반쪽 불교로 자리 잡게 된 조계종단이기에 승려와 불교학자들조차 깨달음의 돈점 논란으로 세월 보내면서 오히려 깨달음 이후 (悟後)의 일을 물으면 구체적 답을 명확히 제시하고 실천하지도 못합니다. 이미 경전에도 잘 나타나 있는 깨달음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망각한 채, 실천에 대한 분명한 지침을 제시하지 못하다보니 삶이 현장에서는 개인 기복의 미신 형태의 불교로 안주하는 것이 현실이고요. 대승불교에서 삶의 현장과 수행의 터는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개인 깨달음이 중요한 성문이라면 몰라도 염불, 기도, 참선 등 깨달음의 수행이 이처럼 나라는 아상에 근거한 개인 수행이 되는 왜곡된 가르침이 횡행하는 한국불교 상황에서는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으며, 끝도 좋은 붓다의 가르침을 우리사회에 전하고 실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보살행 없는 조계종, 언행불일치의 변태불교"
이처럼 물질은 풍부하되 가르침의 실천이 빈약한 조계종단의 현실은 결코 이유 없이 나타나는 상황은 아닙니다. 출가해 간화선을 한다 해도 그 다음을 제시하지 못하는 조계종 교리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중생과 함께 하는 보살정신에 근간한 대승불교를 표방하면서도 진정한 대승 경전에 근간한 수행을 버리고 개인 수행을 강조하며 보살행도 없는 현재 조계종의 모습, 이것은 대승의 말을 하면서 초기불교의 개인 수행을 강조하는 격으로서, 언행의 불일치로 생겨나는 변태불교입니다.
이런 변태불교의 폐해는 막중합니다. 사람들의 신앙의 출발이란 대부분 삶의 고통이나 존재의 이유를 찾고자 할 때 시작됩니다. 대부분의 출발이 개인 문제라는 점에서 초기 신앙생활의 형태가 이기적인 것은 자연스럽습니다만, 출발이 개인 기복적이라 해서 신앙이 그 상태로 계속 머물러 있다면, 비록 그 마음의 순수성과 지극함을 인정한다 해도, 그런 형태의 신앙생활이란 자리이타와 동체대비라는 불교적 가르침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개인의 고통에 대한 문제의식의 출발점으로부터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연기실상에 대한 자각과 깨어있는 삶의 주인공이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종단 승려 스스로가 불교를 미신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성찰이 필요합니다. 힘들어 하고 상처받은 이들이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만, 진정한 붓다의 가르침으로 이어지는 신앙의 변화 내지 도약으로의 유도가 수반되지 않은 채, 개인 위로와 문제 해결에 신앙이 머물게 하는 모습입니다. 불행히도 종단 포교 활동의 주역인 스님들이 스스로 이 수준에 머물러 전법하고, 이 수준의 신앙생활을 신도들에게 강조하는 모습이 일반화되었습니다.
"소외된 이웃과 함께 하지 않는 불교는 퇴행이자 소멸"
초심자의 열정이 가득한 신도의 초기신앙을 진정한 붓다의 가르침에 근거한 성숙한 신앙으로의 전환이 가르침의 요체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기설법과 방편설이라는 미명하에 신도들을 철저히 비불교적으로 몰아가는 현실 상황은 신앙의 성숙을 통해 스스로 삶의 주인공이 되어 살아가면서 주변의 힘들고 소외된 이웃과 함께 하는 붓다의 가르침을 죽이는 행위로서 곧 불법의 퇴행이자 불교의 소멸을 의미합니다. 이 상황에 변태불교가 작동하는 것입니다.
기복신앙으로부터 이타적 신앙으로의 기본적인 연결 고리가 결여된 변태불교는 이처럼 재가자에게도 그리고 개인의 온 삶을 던져 출가라는 형태로 구도의 길을 떠나는 이들에게도, 승속 모두에게 더 이상 추구해야 할 진리로서의 가치를 제시하지 못하고 방황하게 만들면서 생명을 잃은 기복 불교를 강요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왜곡된 한국불교의 현주소를 성찰하지 않는다면 21세기 신자유주의 시대의 한국불교는 물질 추구와 개인 욕망의 합리화에 기여하는, 다시 말하면 욕망에 빌붙어 먹고서는 초라한 불교로 한국불교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한국불교가 우리사회에서 대승적 가르침을 말한다면 사교입선을 넘어 사선입속(捨禪入俗)의 입전수수를 실천해야 합니다. 중생에 수순하며 ‘일체극중고과 아개대수’라는 보현행원의 구현으로 수증일여(修證一如)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보리살타의 정신이 사라진 한국불교의 가르침이란 결코 대승불교 모습이 아님을 재차 강조합니다.
#이 원고는 9월 30일 오후 7시 서울 방배동 마지 아카데미홀에서 열릴 ‘Three Tenors 가을 밤 한국불교를 휘젖다’ 토론회에서 발표할 우희종 교수(바른불교재가모임 상임대표, 서울대 교수불자회 불이회장)의 발제문이다. 최근 우희종 교수가 종교전문 팟캐스트 ‘쇼! 개불릭’을 동명의 책으로 출간했다. 조계종 종무원조합을 비롯해 중앙신도회 등이 우 교수의 ‘변태불교’ 등의 발언에 참회를 요구하며 불자지식인을 ‘해종자’로 몰고 있다. 우희종 교수는 30일 토론회에서 자신이 왜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을 변태불교로 지칭했는지를 설명할 예정이다. 이 원고는 변태불교로 지칭하는 이유의 일부이다. 토론회 주최 측의 이해를 구해 발제문을 미리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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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로서 제대로된 비판을 해라. 엉뚱한 도겐선사 말 갖다붙이지 말고. 수준 이하다 정말.
사자 몸에서 나온 벌레가 사자를 먹는다더니 우희종이 딱 그 벌레같은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