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危機)라는 말은 병이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회복과 죽음 사이의 경계선을 뜻하는 서구 의학용어에 뿌리를 둔 번역어다. 한자어의 뜻에 주목해보면, 위험한 시기라는 의미와 함께 기회라는 말을 떠올릴 수 있다. 한자어 기(機)를 공유하면서 위기와 기회가 서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는 이러한 위기이자 기회인 시기 또는 계기가 포함되어 있기 마련이고, 그것을 얼마나 잘 넘기느냐에 따라 이후의 상황이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기도 함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위기는 그 앞에 특정한 사태 또는 영역을 더함으로써 구체화된다. 경제위기나 생태위기라는 말이 그런 대표적인 사례인데, 요즈음에는 ‘총체적 위기’라는 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여러 영역의 위기가 중첩되어 있다는 주장이 일반화되어 있다. 그만큼 위기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영역의 위기들이 서로 겹쳐 있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위기라는 말이 곳곳에서 사용되고 일부에서 남용되기도 하면서 더 이상 힘을 지니지 못하는 느낌을 받곤 한다. 위기를 과장하거나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은데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실을 왜곡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생긴 현상인데, 특히 21세기 초반 한국사회에서 그런 현상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사람의 본성 속에는 긴장 상태를 오래 견디지 못하는 경향이 있어서 지속적인 위기 담론에 적응해버린 탓도 있고, 언론 매체 등을 통해서 늘 위기를 말하는 주장들이 흘러넘친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제 위기라는 말은 쉽게 공감을 불러내지 못하는 수사학적 표현으로 자리잡은 듯한 느낌마저 갖게 된다.
내 삶의 위기와 한국사회의 위기
위기는 일차적으로 내 삶 속의 그것으로 온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주머니와 은행계좌에 돈이 거의 없는 경제적 위기와 만날 수도 있고, 삶의 의미를 찾기 어려워지는 실존적 위기와 만날 수도 있다. 전자와 같은 구체적인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그래도 나름의 방안을 찾는 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있는데 비해, 후자와 같은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위기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없어 헤매야 하는 깊은 수렁을 지니고 있다. 물론 각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서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는 일이 더 어려울 수도 있고, 이 위기가 지속되다보면 지쳐서 삶의 의미를 상실하는 정신적 위기 상황으로 내몰릴 수도 있다.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인의 위기는 사회적 차원의 위기와 일정하게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깊은 연관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프랑스 사회학자이자 도덕교육학자인 에밀 뒤르껭에 주목했던 것처럼, 사회적 상황에 따라 자살률이 높아지거나 낮아지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그 증거이다. 어떤 사회의 건강성을 측정하는 단 하나의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한 기준 중 하나는 그 사회에 속한 개인의 자아실현 가능성을 높여주는 역량(capability)이다. 이 역량은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를 전제로 하는 경쟁력(capacity)과는 다른 차원의 개념이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인도출신 경제학자이자 윤리학자인 아마티아 센과 예일대학 법과대학원 법철학교수인 마사 누스바움이 함께 국민소득(GDP) 개념을 대체하기 위해 제안하는 개념이기도 한 이 역량은 그 사회의 정의 수준을 측정하는 기준이다.
한 사회의 위기는 그 사회구성원 모두가 처한 위기임과 동시에 독자적인 존재성을 지니는 그 사회 자체의 위기이기도 하다. 21세기 초반 한국사회가 위기에 처해있다는 말은 우리 사회 구성원들 모두가 위기에 처해있다는 의미와 함께, 이 사회 자체가 붕괴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사회 위기론은 단순한 학문적 담론에 그치거나 현학적으로 재현된 선비의 우환의식(憂患意識), 다시 말해서 엄격한 도덕적 기준에 근거해서 무차별적으로 펼쳐내는 술자리의 ‘나라와 민족 걱정’ 수준을 훌쩍 넘어서는 실제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21세기 초반 한국사회의 총제적 위기와 한국불교
우리가 함께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21세기 초반 한국사회는 위기에 처해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해서는 관점에 따라 다른 답변이 가능할 테지만. 최소한 전혀 위기를 느낄 수 없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상황 속에 있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북핵과 사드로 상징되는 군사적 위기와 헬조선(hell朝鮮)으로 상징되는 사회분배 및 계층적 위기에, 이즈음에는 세월호와 지진 수습과정을 둘러싸고 확산된 사회 전반과 정치에 대한 신뢰의 위기까지 더해져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경주에서 일어난 강진은 세계적으로도 원전밀집지역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아파트 중심의 우리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 한국사회 속에서 주로 종교 영역이자 체계로 존재하고 있는 종교, 그 중에서도 불교 또한 여러 가지 위기 징후를 보이면서 무너져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조계종단 지도부의 도덕성 위기와 함께 총무원장 직선제를 둘러싸고 제기되고 있는 대표성의 위기로 나타나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최근 외국인 출신의 한국승려인 현각스님의 지적이나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일부 재가지식인들의 문제 제기 자체를 거부하는 불통(不通)의 위기이다. 이 불통의 위기는 이른바 ‘해종언론(害宗言論)’이라는 희귀어까지 만들어가면서 소통을 탄압하는, 시민사회에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야만적인 행태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회를 소통을 전제로 하는 체계들 사이의 관계로 보는 독일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에 따르면, 소통이 멈추면 사회와 그 구성원인 개인의 생명은 끝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 불교계는 이미 상당 부분 그 생명력을 잃어버린, 죽어가는 체계일 뿐이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까지 된 것일까? 원효의 화쟁정신(和諍精神)을 정신적 기둥의 하나로 내세우는 조계종 중심의 현대 한국불교가 도대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원인과 배경은 과연 무엇일까?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불교의 관점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각자의 존재 의미를 존중하는 연기적 독존(緣起的 獨尊)의 개념으로 해석해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국불교의 위기는 그 구성원들인 출가자들과 재가자들의 위기임과 동시에, 우리 사회의 종교체계로 이어지는 한국사회 자체의 위기이다. 역으로 보면 현재의 대통령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는 신뢰와 불통의 위기가 종교계 전반으로 확산되어 있고, 그 중심에 조계종단 집행부가 위치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불교의 지혜는 우리가 처한 위기와 대면하면서 직시할 수 있으면 그 안에 해소 방안도 들어있다는 여실지견(如實知見)의 지혜이다. 한국불교의 위기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직시할 수 있다면, 해결 방안 또한 당연히 찾을 수 있고 그 방안은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의 위기 극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나의 체계로 종교를 바라보는 루만은 종교의 핵심 기능이자 역할을 삶의 의미 부여라고 강조한다. 그런데 우리 불교를 비롯한 한국종교는 그 삶의 의미를 훼손하거나 왜곡하는 장치로 작동하고 있고, 그것이 한국불교 위기의 핵심이다. 이 칼럼을 통해서 ‘한국불교의 위기’라는 다소 식상한 화두를 다시 꺼내들고자 하는 이유이다.
/ 박병기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정의평화불교연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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