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유럽 선원들의 삶은 처절했다. 거친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면 바다로 추락해 물고기 밥이 되었다. 무풍지대에 갇히면 굶어죽었다. 용케 이런 일들을 피한다 해도, 해적의 대포와 칼에 맞아 눈 팔 다리를 잃고 불구가 되거나 적국의 전함에 포로가 되어 노예로 팔리기도 했다. 심지어 트라팔가 해전의 영웅 넬슨조차 오래전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외팔이였다. 음식은 구더기가 우글거리는 비스킷에 돌처럼 딱딱한 빵에다 콩수프 정도였다. 그런데도 선원이 된 것은 그래도 그게 보통사람의 삶보다 나았기 때문이다.
예전에 여인들의 삶은 가혹했다. 시집살이는 모질었다. 그럼에도 딸을 시집보낸 이유는 (딸이 낳을) 자식이 (딸의) 고통스런 삶에 진통제가 그리고 미구에 찾아올 늙음과 질병에 대한 방패막이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 삶이 힘들어도, 결혼생활이 홀로 살다 죽는 것보다는 나았기 때문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사회적 유리란 정신적인 죽음이다. 교통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과거에 '홀로 삶'이란 문자 그대로 사회로부터의 단절이었다. 지금은 교통•통신의 발달로 인하여, 홀로 살더라도 SNS를 통해 무수한 관계망을 만들 수 있다. 또 생물학의 발달은 배우자 없이도 아이를 만들 수 있다. 뇌과학•생물학•종교학•심리학•인류학•정치학•사회학은, '인간(개인) 의식의 많은 부분을 사회가 만든다'는 걸 증명하고 있다.
이 점에서 불교에서의 대승운동은 시대를 앞서간 운동이었다. 초기불교에서의 깨달음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건이었지만, 대승에서는 집단적인 사건이다. 동기도 그렇고 결과도 그렇다. 그래서 중생(집단)이 아프니 나(개인)도 아프고, 부처(개인)가 깨달을 때 일체 중생(집단)이 더불어 깨닫는다: 분리•단절되지 않은 정체성에 대한 깨달음은, 융의 집단무의식에 앞서는 위대한 발견이다. 분리•단절되지 않았음을 아는 것이 지혜요, 분리•단절되지 않았기에 나오는 것이 자비이다. 그래서 생명체의 완성은 지혜와 자비로 나타난다.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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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을 영위하는게 대중들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물론 고통이란 연민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계선의 여지가 잇음에도 불구하고 그생활을 계속 한다는건 더 참아줄 대중은 없어요.
그건 타락이 분명하고 자신에게도 바라보는 대중에게도
크나큰 오점이요 어둠속의 방탕한 한마리 짐승같은 삶이 오래될수록
사회의 어둠만을 조성하고 하루라도 빨리 척결해야할 대상입니다
방황을 끝내고 돌아오는 석가탄신일은 대명천지에 부끄럽지않은
승이 되기를 두손모아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