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부커상 수상작 한강의 '채식주의자' 小考
맨부커상 수상작 한강의 '채식주의자' 小考
  • 유응오 소설가
  • 승인 2016.05.30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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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미생전 본래면목’ 찾아가는 始原 회귀
동물성 버리고 식물성으로의 귀환…숨 막히는 문체미학

한국 최초의 맨부커상 수상작인 《채식주의자(창비)》는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등 3부작의 연작 소설이다. 이중 <몽고반점>은 2005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채식주의자》의 주인공은 어느 날 기이한 꿈을 꾸고 난 뒤 육식을 하지 않고 스스로 나무가 된다는 망상에 빠진 영혜이다. 그런데 각기 작품의 화자가 다르다. <채식주의자>의 화자는 둘이다. 영혜의 남편과 영혜이다. 영혜의 남편은 아내가 채식주의자가 된 뒤 붕괴되는 가족의 일상사를 말하고 있고, 영혜는 자신이 채식주의자가 된 계기가 꿈속의 이야기를 서술한다. 그러다보니 영혜가 화자로 등장하는 부분은 대단히 몽환적이다.

<몽고반점>의 화자는 영혜의 형부이다. 사진작가인 그는 처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남아 있다는 말을 들은 뒤 예술적 영감을 받는다. 그래서 처제와 자신의 몸에 꽃그림을 그린 뒤 성교를 함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나무 불꽃>의 화자는 영혜의 언니인 은혜이다. 그녀는 남편과 여동생의 불륜을 목격하고서 둘을 정신병동에 보낸다. 남편은 병원에서 정상 판정을 받은 뒤 재판을 받고 나온다. 가족 누구도 돌보지 않는 까닭에 영혜를 돌보는 것도 그녀의 몫이다. 영혜는 병원에 입원한 뒤 자신이 나무가 되고 있다는 망상을 갖게 된다. 이상이 《채식주의자》 줄거리의 골자이다.

《채식주의자》는 각각의 작품으로도 충분히 미학적 완성도가 높지만, 한 편의 장편소설로 봤을 때 작품의 가치가 더욱 빛난다.
《채식주의자》는 주인공인 영혜가 기이한 꿈을 꾸고 난 뒤 채식주의자가 되면서부터 사건이 전개된다. 따라서 영혜가 어떤 꿈을 꾸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채식주의자>에서 영혜의 꿈은 서체가 다르게 표시돼 있다.

헛간 같은 밝은 건물을 발견했어. 거적때기를 걷고 들어간 순간 봤어. 수백 개의, 커다랗고 시뻘건 고깃덩이리들이 기다란 대막대들에 매달려 있는 걸. 어떤 덩어리에선 아직 마르지 않은 붉은 피가 떨어져내리고 있었어. 끝없이 고깃덩어리들을 헤치고 나아갔지만 반대쪽 출구는 나타나지 않았어. 입고 있던 흰옷이 온통 피에 젖었어.
<중략>
하지만 난 무서웠어. 아직 내 옷에 피가 묻어 있었어. 아무도 날 보지 못한 사이 나무 뒤에 웅크려 숨었어. 내 손에 피가 묻어 있었어. 내 입에 피가 묻어 있었어. 그 헛간에서, 나는 떨어진 고깃덩어리를 주워먹었거든. 내 잇몸과 입천장에 물컹한 날고기를 문질러 붉은 피를 발랐거든. 헛간 바닥, 피웅덩이에 비친 내 눈이 번쩍였어.
그렇게 생생할 수 없어. 이빨에 씹히던 날고기의 감촉이, 내 얼굴이, 눈빛이.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분명 내 얼굴이었어. 아니야, 거꾸로, 수없이 봤던 얼굴 같은데, 내 얼굴이 아니었어. 설명할 수 없어.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생생하고 이상한, 끔찍하게 이상한 느낌을.

영혜는 이 기이한 꿈을 꾸고 난 뒤 육식은 물론이고 남편과의 잠자리도 거부하게 된다. 남편의 몸에서 나는 고기 냄새가 역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남편은 영혜의 소식을 처가 식구들에게 전하고, 처가 식구가 모인 날 사단이 난다. 월남전에 참전한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영혜에게 억지로 고기를 먹이려고 하자 영혜는 과도를 들어서 손목을 긋는다.

영혜가 한사코 육식을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해답 역시 영혜의 꿈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녀는 꿈에서 누군가의 목을 자르려고 한다. 그러나 끝까지 잘리지 않아 덜렁거리는 머리채를 잡고, 마저 칼질을 한다. 이런 악몽에서 깨어나면 그녀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다른 사람이 자신 안에서 솟구쳐 올라와 자신을 먹어버린 것만 같다. 이 대목에서 영혜가 육식을 하지 않는 이유가 다소 분명해진다. 영혜는 자신이 먹는 고기가 폭력적인 살해의 희생물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영혜에게는 육식이 살인과 다르지 않다. 영혜가 육식을 하지 않게 된 근원적인 이유는 손목을 그은 뒤에야 묘사된다.

아버지가 달리기 시작해. 개도 함께 달려. 동네를 두 바퀴, 세 바퀴, 같은 길로 돌아. 나는 꼼짝 않고 문간에 서서 점점 지쳐가는, 헐떡이며 눈을 희번덕이는 흰둥이를 보고 있어. 번쩍이는 녀석의 눈과 마주칠 때마다 난 더욱 눈을 부릅떠.
나쁜 놈의 개, 나를 물어?
다섯 바퀴째 돌자 개는 입에 거품을 물고 있어. 줄에 걸린 목에서 피가 흘러. 목이 아파 낑낑대며, 개는 질질 끌리며 달려. 여섯 바퀴째, 개는 입으로 검붉은 피를 토해. 목에서도, 입에서도 피가 흘러. 거품 섞인 피, 번쩍이는 두 눈을 나는 꼿꼿이 서서 지켜봐. 일곱 바퀴째 나타날 녀석을 기다리고 있을 때, 축 늘어진 녀석을 오토바이 뒤에 실은 아버지가 보여. 녀석의 덜렁거리는 네 다리, 눈꺼풀이 열린, 핏물이 고인 눈을 나는 보고 있어.

영혜의 무의식에는 씻기지 않는 상흔의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자신을 문 개를 학대해서 죽인 아버지. 아버지가 오토바이에 개를 매달아 끌고 다니는 동안 ‘나쁜 놈의 개. 나를 물어?’라고 생각하는 어릴 적의 영혜. 그리고 그 개를 잡아서 먹던 가족과 마을 사람들. 영예를 아픈 게 한 것은 개에 물린 상처가 아니라 학대당해서 핏물이 고인 개의 눈을 부릅뜨고 바라봤던 기억, 그리고 그 개고기를 넣고 끓인 국에 밥을 말아 먹은 기억이다. 영혜가 명치끝에 수많은 영혼들이 걸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영혜가 육식을 하지 않으면서 생긴 기벽은 젖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영혜는 육식을 할 때도 갑갑하다는 이유로 브래지어를 하지 않았다. 영혜가 남의 시선이야 아랑곳하지 않고 젖가슴을 드러내는 이유가 아래의 문장에 나타나 있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 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영혜에게 육식이 가학성 혹은 폭력성의 상징이라면 젖가슴은 그 반대급부에 있는 자비로움의 상징인 것이다.

연작 중 가장 충격적인 작품은 <몽고반점>이다. 형부와 처제의 근친상간이라는 설정 자체가 독자들을 아연케 한다. 그러나 작가는 이 치정의 관계를 탁월한 미학적 문체를 통해서 상처 입은 두 영혼의 만남과 식물성이라는 시원으로의 회귀로 그려낸다.

숨이 막힐 정도 아름다운 문체는 ‘더 고요한 것, 더 은밀한 것, 더 매혹적이며 깊은 것’이라는 데 부합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문체미학이 빛나는 대목은 그(형부)가 그녀(영혜)의 몸에 페인팅을 하는 장면이다.

먼저 그녀의 어깨까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리고, 목덜미에서부터 꽃을 그리기 시작했다. 자주와 빨강의 반쯤 열린 꽃봉오리들이 어깨와 등으로 흐드러지고, 가느다란 줄기들은 옆구리를 따라 흘러내렸다. 오른쪽 엉덩이의 둔덕에 이르러 자줏빛 꽃은 만개해, 샛노란 암술을 도톰하게 내밀었다. 몽고반점이 있는 왼쪽 엉덩이는 여백으로 남겼다. 대신 그 푸르스름한 점 주변으로 그보다 흐린 연둣빛을 큰 붓으로 깔아, 연한 꽃잎 그림자 같은 반점이 도드라졌다.

이 장면은 대단히 육감적인 동시에 심미적인데, 그 이유는 페인팅 작업의 세밀한 묘사가 흡사 꽃 단청을 하는 것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온몸에 꽃을 새김으로써 영혜는 동물성을 버리고 식물성으로 귀화한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육체를 보면서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 그것이 젊은 여자의 아름다운 육체라는 모순, 그 모순에서 배어나오는 기이한 덧없음, 단지 덧없음이 아닌, 힘이 있는 덧없음. 넓은 창으로 모래알처럼 부서져 내리는 햇빛과, 눈에 보이지 않으나 역시 모래알처럼 끊임없이 부서져 내리고 있는 육체의 아름다움”이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몽고반점>이 다른 작품에 비해 미학적 성취도를 높은 이유 중 하나는 식욕과 성욕을 동일시하는 데 머물지 않고 동물성을 버리고 식물성으로 귀화한 두 남녀의 교합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몽고반점> 이전에도 식욕과 성욕의 상관관계를 그린 한국문학은 있었다. 이제하의 《초식(草食)》, 김이태의 <식성>, 오수연의 《부엌》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식성>의 주인공은 거식증에 걸린 여자이다. 그녀가 거식증에 걸린 것은 애인의 정액을 받아먹은 후부터이다. 화자에게 토악질을 유발하는 것은 기름기가 번들거리는 세상 그 자체인 것이다.

《부엌》은 연작 장편소설이다 보니 동일한 제재와 주제를 가져가면서도 단편인 <식성>에 비해 구조가 중층적이다. 주인공은 타국에서 집을 구하다가 흰 찬장이 달려 있는 부엌을 보고서 안심을 한다. 부엌을 보는 순간 고향집에 돌아온 것은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다. 이 부엌에서 주인공은 다모와 무라뜨를 만난다. 다모는 동물성 식품은 물론이고 기본적인 양념도 거부하는 반면 무라뜨는 온갖 향신료가 들어간 고기 요리만을 즐긴다. 소설 속에서 부엌은 욕망의 삼각형 구조를 띤다. 그러나 주인공을 구심점으로 형성된 이 삼각구도는 점차 위태로워진다. 끝내 주인공은 다모와 무라뜨의 인육을 먹는 환상을 보기에 이른다. 주인공은 자신의 전부를 그들에게 주고, 자신도 그들을 먹고 싶어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식욕은 성욕으로 곧바로 환치된다.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지우는 행위. 먹고 먹이는 관계 속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내가 모르는 체하는 사이에 굶고, 병들며, 죽고 있을 것’이라는 죄책감과 포식자이자 피식자일 수밖에 없는 인간 숙명에 대한 비의(悲意)이다.

이제하의 《초식》은 식욕과 권력욕의 관계를 밀도 있게 다룬 작품이다. 소설은 화자가 부친의 국회의원 출마벽에 얽힌 일화를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 과정에서 자유당, 4.19, 5.16쿠데타에 이르는 격동의 현대사를 묘사하고 있다. 소설의 압권은 5.16쿠데타가 일어나자 도살장 주인이 마을사람들 앞에서 소를 도살하는 장면이다. 소설 속에서 육식성은 파시즘으로, 초식은 파시즘에 억압된 징후로 풀이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세 편의 소설들은 육식성에 내재된 폭력성의 메타포를 잘 간파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몽고반점>은 형부와 처제의 근친상간이라는 충격적인 설정을 골자로 하고 있는데도 조금도 어색하거나 거북하지 않다. 그 이유는 그와 그녀의 교합이 꽃으로 장엄된 서로의 몸을 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와 그녀는 그 기이한 교합으로 식물성의 세계로 귀환하는 동시에 생명의 시원으로 회귀하고 있다. 그가 그녀에게 끌린 것은 그녀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그녀는 그와 교합한 뒤 깨닫게 된다. 꿈속에 등장하는 아주 낯익은 얼굴인 동시에 낯선 얼굴이 누구의 것인지. 그 얼굴은 다름 아닌 자신의 ‘뱃속 얼굴, 뱃속에서 올라온 얼굴’인 것이다. 영혜의 엉덩이에 남아 있는 ‘몽고반점’과 영혜가 꿈 속에서 본 ‘희미한 얼굴’은 선어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인 것이다.

연작의 마지막 작품인 <나무 불꽃>은 남편과 여동생의 불륜장면을 목격한 뒤 이혼을 하고 여전히 여동생을 돌보며 살아가는 은혜의 일상을 그리고 있다. 어린 자식이 있는 집과 아픈 동생이 있는 요양병원을 오가는 그녀의 일상은 참혹할 지경이다. 특히 선혈을 흘리면서 “자신이 오래 전부터 죽어 있었다는 것을. 그녀의 고단한 삶은 연극이나 유령 같은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선 죽음의 얼굴은 마치 오래전에 잃었다가 돌아온 혈육처럼 낯익었다.”고 느끼는 대목에서는 은혜와 영혜 두 자매의 삶이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소설 제목인 ‘나무 불꽃’은 나무가 되고 있다고 믿는 영혜를 상징하는 동시에 비극적인 생의 유전을 견뎌야 하는 은혜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래서 영혜는 나무들을 보면서 “형제 같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미 새가 나오는 지우의 ‘슬픈 꿈’과 그녀의 일상이 겹쳐지면서 이 소설은 대미를 장식한다. 그렇게 진(眞)과 망(妄)이 경계가 허물어지고 현실은 슬픈 꿈이 되고 슬픈 꿈은 현실이 된다.

《채식주의자》에는 불교적 메타포들이 충만해 있다. 육식을 하지 않는 영혜의 모습을 보면서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채식주의가 불살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또한, 시원으로 회귀하는 영혜의 모습을 보면서 욕망을 버린 자리에 진아(眞我)를 발견한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참혹한 은혜의 일상을 보면서 삶이 실은 한낱 환영(幻影)의 작란(作亂)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른 메타포들은 차치하더라도 소설제목이 ‘채식주의자’이고 채식주의를 제제로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만큼 채식주의가 불살생의 계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간단이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보우경(寶雨經)》에는 ‘보살이 걸식하는 열 가지 이유’가 쓰여 있다.

첫째, 생명 있는 존재들을 다 포용하기 위해서
둘째, 차례로 평등하게
셋째, 피곤하거나 나태심을 없애기 위해
넷째, 만족함을 알기 위해
다섯째, 나누어 베풀기 위해
여섯째, 탐착하지 않기 위해
일곱째, 스스로의 양을 알기 위해
여덟째, 원만하고 선한 품성을 나타내기 위해
아홉째, 선근(善根)을 원만하게 심기 위해
열째,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리기 위해

‘보살이 걸식하는 열 가지 이유’에서 알 수 있듯 초기 승가공동체의 탁발 문화는 잉여(剩餘)를 금지함으로써 무소유를 실천하고, 그 과정에서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림으로써 선근을 심는 데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류의 고등종교는 서양을 중심으로 발달한 유일신교와 동양을 중심으로 발달한 다신교 혹은 무신교로 나눌 수 있다. 전자의 종교들은 중세의 철학은 물론이고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의 구성주의 철학에 바탕이 됐다. 구성주의 철학에는 세상을 어떻게 편리하게 구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룬 자본주의와 세상을 어떻게 도덕적으로 구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룬 마르크스-엥겔스주의 둘 다 포함된다. 이 두 철학은 근대이성주의의 산물이어서 여러 문제를 야기했다. 정치학적으로 근대화의 3요소로 민족주의, 과학기술의 발달, 자유인의 출현을 꼽는데, 민족주의는 파시즘이라는, 과학기술의 발달은 자연파괴라는 문제를 양산한 것이다.

이런 연유로 1966년 기독교의 인간 중심주의와 생태학적 위기에 대해 광범위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글을 썼던 UCLA의 역사가인 린 화이트(Lynn. White, Jr.)는 “기독교는, 특히 그 서구적 형태에서 세계가 보아 왔던 것 중에 가장 인간 중심적인 종교이다. …… 기독교는 고대의 이교도 신앙이나 아시아 종교들과는 완전히 대조적으로 …… 인간과 자연의 이원론을 수립했을 뿐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목적을 위해서 자연을 착취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라고 주장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자연을 도구화 내지는 대상화함으로써 산업혁명에 성공한 국가들이 역사적으로 기독교적 전통이 강했던 것도 유연의 일치는 아닐 것이다.
서양의 종교와 달리동양의 종교는 그 사상적 기반이 기본적으로 자연과의 상생을 모색하고 있다. 그 이유는 동양에서는 자연이 최고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최고의 질서란 그것의 상위 질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특히 불교는 모든 유정물(有情物)은 불성의 씨앗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까닭에 생명평화 사상을 강조해왔다. 붓다가 불살생의 계를 강조한 이유는 모든 생명은 죽음과 폭력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이후 승가공동체는 육식을 전면 금지했다.
불살생계가 중국에 전해지면서 《열반경》, 《능가경》, 《범망경》, 《승만경》 등 대승경전 속에 육식금지 사상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불살생계에 입각한 육식금지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구절로 《능가경》의 “보살은 마땅히 모든 고기를 부모의 피와 살로 생각하고, 그와 같이 관찰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고기 중에서 생명 아닌 것이 없으니 죽이지 말아야 한다.”는 구절을 들 수 있다.

과도한 육식문화의 폐해는 자연을 무한하고 광대한 것으로 보았으므로 인류의 진보도 계속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에서 기인한다. 이는 자연과 인간을 서로 별개의 존재라고 보고 인간에게 우월성을 부여하는 이분법적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다.

붓다가 성도(成道) 후 처음으로 말한 내용은 연기(緣起) 사상이다. 연기 사상을 설명하면서 붓다는 “이 세상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하나를 떼어내면 다른 한쪽도 넘어지는 갈대 묶음처럼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 또한 없게 된다.”며 ‘갈대다발의 비유’를 들었다.

이 연기사상에 기초해볼 때 법계의 모든 존재는 개별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전일론적(全一論的) 관계성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갈대다발처럼, 인드라망의 구슬처럼 연결돼 있는 이 법계에서는 외따로이 존립하는 존재란 있을 수 없다. 연기적인 시각에서 보면, 이 지구의 모든 생명 하나하나가 소중하지 않은 게 없는 것이다.

-소설가, 전 주간불교신문 편집부장

* 이 기사는 제휴매체인 <불교저널>에도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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