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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6일, 부모님과 이복 언니․오빠 등이 히로시마에서 피폭된 한국인 원폭2세 피해자 한옥경(가명, 58세)님의 증언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졌던 당시, 우리 집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아버지의 8형제, 이복 맏언니, 이복 오빠, 그리고 나의 어머니까지 열 네 식구가 살고 계셨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재혼하셔서 어머니는 그 당시 큰 오빠를 임신 중이셨다. 그날 집안에서 청소를 하고 계시던 어머니는 갑자기 담이 무너지면서 건물더미에 깔렸다가 겨우 빠져 나오셨다.
그러나 할머니와 삼촌들은 밖에서 일을 하고 계시다 열선에 화상을 입고 다섯 번째 삼촌은 발뒤꿈치가 날아가 버리는 중상을 입으셨다 한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던 날 어머님은 첫째 오빠를 임신 중이었는데 그 이듬해 한국으로 돌아와, 돌이 지날 즈음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 또한 귀국한지 얼마 안 되어 돌아가시고 할머니는 뇌졸중과 치매로 고생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는 귀국 후 2남 4녀의 자녀를 더 낳으셨고 아버지는 심장병을 앓다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셨다. 이 가족이 현재 우리 형제들의 구성원들이다.
나(한옥경, 가명)는 2남 4녀 중 다섯째(언니 3명, 오빠 1명, 나, 남동생)로 태어났고, 특별한 질병은 없었는데 어릴 때부터 몸이 아주 약했고 잘 넘어지곤 했다. 그렇게 성장을 하면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양쪽 다리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중학교 졸업 후 대구로 나와 직장 생활을 했는데, 주야간 근무에 하루 종일 서서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근무 중이나 퇴근 후에 심한 통증을 느껴 결국 사회생활을 하기조차 힘들어졌다.
어느 날 너무 힘들고 통증이 심해 병원을 찾아가 X-ray를 찍어 보고 진료도 받았지만 병원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며 ‘양호’, ‘정상’이란 진단만 내렸다. 병원에서도 아무런 이상이 없다기에 아파도 참고 견디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이런 와중에 직장 생활을 하다 말다를 반복하다가 24세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듬해 기쁨과 설렘으로 첫 아이를 낳았고 나는 비로소 어머니가 되었다는 생각에 세상 모든 것을 가진 듯 꿈같은 신혼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아기가 뇌성마비의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감을 느꼈다. 그리고 홑이불이 흥건히 젖도록 며칠 밤낮을 숨죽여 울었다.
그 후 뇌성마비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로 산후조리를 채 마치기도 전에 힘든 일은 모두 혼자 해야 했고 시어머니의 차가운 눈초리와 아이를 외면하는 남편을 보며 나의 신체적 아픔과 고통까지도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시간이 흘러 둘째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아이를 낳아도 괜찮을까, 혹시 또 어떤 장애가 있으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과 두려움이 닥쳤다. 몇 개월이 지나 둘째가 태어났다. 나는 아이의 건강이 걱정되어 우선 아이의 소식 먼저 물었다. 다행히 ‘건강하단다.’ ‘괜찮단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큰 한숨을 몰아쉬며 나도 모르게 ‘하느님 감사합니다.’하고 간절히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이렇게 둘째가 태어나고 나는 두 아이의 당당한 엄마가 되었다. 비록 첫째 아이가 뇌성마비의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두 아이의 엄마가 된 후에도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의 두 다리 통증은 날로 더해갔고 그 아픈 다리로 큰 아이를 등에 업고 이 병원 저 병원 찾아다니면서 큰 아이의 재활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큰 아이는 자라면서 팔다리가 휘고 굳어지면서 점점 병세가 악화되어 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작은 아이가 다섯 살 무렵, 나 또한 ‘대퇴부 무혈성 괴사증’이라는 병명조차 생소한 판정을 받아 인공관절 수술을 받았다.
그 때 내 나이가 겨우 서른둘이었다.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병원 원장은 “이 몸으로 지금까지 어떻게 사셨습니까, 관절 자체가 다 녹아 버렸는데… 이 질환은 빠르면 50대 아니면 60~70대 남자 중 술을 많이 드시는 분한테 오는 병인데 30대 초반, 술도 전혀 마시지 않는 여자한테 나타나는 건 드문 일입니다.”라며 의아해 했다. 그러면서 원인이 무엇이냐는 나의 물음에 자신도 원인을 알 수가 없다고 했다.
수술 후 한두 달이 지나자 아픈 다리도 점점 회복되어 자연스럽게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지만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고 시어머니의 싸늘한 눈초리와 남편의 폭력은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그럼에도 나는 한껏 꿈에 부풀어 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굳은 다짐을 했지만 남편의 잦은 폭력과 도박은 나를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한계에 이르게 했다.
결국 나는 이혼하기로 결심을 하게 되었고 인공관절도 빨리 마모되어 40대에 또 한 번 수술을 받아야 했다.
수술한 다리는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다리가 붓고 통증이 되살아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피폭 당시 히로시마에 있었던 원폭피해자 1세인 어머니는 무너지는 담장에 깔려 등뼈가 휘는 중상을 입고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서 생활하고 계신다.
그리고 그곳에 함께 있었던 이복 오빠는 심장병과 뇌졸중으로 쓰러져 68세에 돌아가시고, 이복 언니도 30대 초반에 병명도 모른 채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원폭피해자 2세인 우리 형제자매 중 네 자매는 홍반이라는 피부병을 앓았다. 붉은 반점이 여기저기 생기기 시작하면서 달걀 크기만큼 커지면서 엄청난 통증이 왔다. 만지면 단단해지고 움직일 수조차 없을 정도로 통증이 오면 약을 먹고 바르고 해도 쉽게 가라앉지 않고 길게는 몇 개월이 지나야만 수그러들었다.
큰 언니 한경자(가명, 69세)는 늘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워 병원을 다녀도 전혀 나아지지 않고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다. 둘째 언니 한경옥(가명, 66세)은 어깨 관절에 석회질이 생겨 양쪽 팔 수술을 받았고, 셋째 언니 한혜경(가명, 63세)는 나와 같은 대퇴부 무혈성 괴사증으로 인공관절 수술을 받았다. 오빠 한석근(가명, 61세)은 심근경색 협심증 수술을 받았다. 동생 한영철(가명, 56세)은 치아가 다 빠져 버려 젊은 나이에도 틀니를 해 넣어야 하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우리 형제자매는 모두 혈압 약을 복용하고 있으며 언제 좋아질지도 모르는 기약 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다.
원폭피해자 3세인 우리 큰 아들은 이제 나이가 서른네 살이 되었다. 몸은 완전히 굳을 대로 굳어버리고 혼자서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먹는 것부터 대소변까지 모두 옆에서 일일이 도와줘야한다. 내 몸으로 가슴으로 낳은 아들의 뻣뻣한 몸을 만지면 나무토막 같은 느낌이 들어, 한없이 눈물을 흘렸건만 여전히 아들을 보면 쏟아지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다.
우리 가족은 원폭피해 후유증이 3대에 걸쳐 이어지고 있다. 씻을 수 없는 형벌처럼 3대가 원인도 모를 병마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대퇴부 무혈성 괴사증․홍반․심근경색 협심증….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소중한 믿음으로 함께 하고 손을 잡아 주기에 한줄기 희망을 보며 힘차게 외칠 수 있다.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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