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이 “깨달음은 이해”라고 말해 촉발된 깨달음 논쟁이 학술세미나로 이어졌다. 교수들의 발제는 논쟁을 해소시키지 못했다. 다수는 철학적 시각에서 ‘깨달음의 사회화’에 방점을 찍었다. 알 수 없는 원형보다는 알고 있는 전통과 이성을 조화시켜 새로운 깨달음의 문화를 창조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달아난 양을 찾다가 여러 갈래 길에 이르러 길을 잃었다’는 다기망양(多岐亡羊)의 고사를 연상케 한 행사였다.
정의평화불교연대(공동대표 김광수 박병기 이도흠 최연 형난옥)는 15일 서울 화쟁문화아카데미에서 ‘지금 여기에서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행사에서는 ▷신승환 교수(카톨릭대)이 ‘서양 철학에서 깨달음의 문제’ ▷이도흠 교수(한양대)가 ‘깨달음의 쟁점과 맥락적 지향성’ ▷박병기 교수(교원대)가 ‘깨달음의 사회화 문제’를 발제했다.
서구식 사고는 깨달음도 절대자와 함께
신승환 교수는 “유럽 사유에서 ‘깨달음’ 문제의 주제화를 살피는 작업은 어려울 뿐 아니라 막연한 작업”이라며 로고스(logos)를 깨달음과 연관시켰다. “깨달음에 관한 유럽 사유는 인격적 최고 존재자로 상정된 신에 대한 관계를 떠나서는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신 교수는 “그리스도교적 신비주의 전통에 따르면 영적인 깨달음은 근본적으로 신적 존재와의 관계에서 이해된다. 신적 존재와 본성에 대한 이해와 함께 인간의 영적 특성에 대한 이해가 핵심 원리”라고 했다.
현응 스님도 비판자들도 서로 오류
이도흠 교수는 깨달음 논쟁의 당사자들의 오류를 지적하며 화쟁하려고 했다.
이도흠 교수는 “(깨달음 논쟁에서) 기존 돈점 논쟁에서 빚어진 문제를 답습하지 않으려면 불교 교리에 충실하되 불교 틀을 벗어나 기호학 인지과학 인류학 등 과학의 반열에 오른 인접학문을 과감하게 수용해 따져봐야 한다”고 했다.
이 교수는 부처님 법을 ①아난이 기억해 경전으로 남겨져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등으로 나뉜 교학적인 불법 ②언어에 한계가 있다고 보고 선정을 통해 본래면목에 이르고자 하는 선적인 불법 ③ ①과②의 길을 모두 인정하되 ②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새 길을 모색하자는 (현응 스님의) 새 불법으로 구분했다.
이 교수는 “현응 스님은 ③의 정당성을 위해 ①이나 ②보다 부처님법에 가깝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다. 원본을 알 수 없기에 스님은 그것이 처음 재현된 상황을 묘사한 <마하박가>를 인용하며 원본인 부처님법을 유추하려 했던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수불 스님이나 수좌회, 서재영 박사는 이런 핵심을 무시했다. 현응 스님이 선을 무시하거나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고 신랄한 비판을 쏟아 내거나 조사 어록을 인용하며 깨달음이 구경각임을 입증하려 했다”고 말했다.
“이해와 선정 뛰어넘는 새 길 찾아야”
이 교수는 “현응 스님도 ①②③ 길에 대해 좀 더 명료하고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원본인 불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재구해야 했다. 그 다음에 ①이 아닌 ③의 입장에서 ②의 한계를 지적했어야 했다”고 밝혔다.
이도흠 교수는 “석가모니가 최초로 깨닫고 가르쳐 비구들을 깨닫게 하는 상황을 보면 이해의 방식이 주로 활용됐다. 여기에는 선정 방식도 있었다. 조계종 종지인 간화선을 사수하려는 이든, 초기불교에 매료된 이든, 평행선을 달리는 논쟁을 그만해야 한다”고 했다.
이 교수는 “21세기 오늘의 상황에서 ③의 길, 곧 이해와 선정을 뛰어넘어 불법의 진여 실제에 다다르는 길이 무엇일까 함께 모색하는 것이 한국불교를 혁신하는 것이자 원본인 불법에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라고 했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 세 가지
이 교수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는 ①현응 식 말씀‧토론-> 이해 -> 깨달음 ②신수‧지눌 식 경전공부-> 점수-> 해오 ③혜능‧성철 식 수행->공안->돈오 등 3가지 길이 있다고 했다.
이 교수는 “③의 입장에서 보면 ①과②가 모두 깨달음의 장애 내지 근본 해악이다. ①의 입장에서 보면 ②와 ③은 석존과 다섯비구가 처음 깨달은 쉬운 길은 무시하고 어려운 길을 고집하는 모호한 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현응 스님과 수불 등 선 옹호 세력, 돈오점수 논쟁 등에는 불교 맥락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성의 사유가 지배하고 타자와 사이에 권력이 작동하고 있다”고 했다.
고집 말고 상대 주장 여지 둬야
이 교수는 선 옹호 세력을 겨냥해서는 “몰락 깨달았다고 해도 사유가 축적돼 얻어진 결과물을 바탕으로 재조직되거나 체계화된 것이다. 해오나 지해가 깨달음에 장애가 아니라 사다리일 수 있다”고 했다.
이 교수는 “현응 스님은 ‘이해’란 낱말 사용에 주의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스님의 ‘이해’는 소수자가 독점하는 깨달음을 대중에게로 끌어내리고 자비심과 결합해 사회화하려는 아름다운 결정이다. 프랑크푸르트 학파 철학자들이 ‘이해’를 선입견에 뿌리를 두고 있고 과거에 얽매여 기존 의식과 체제를 벗어나지 못한 개념체계라며 비판하면서 대안으로 변증법적 이성을 확립하라고 주장한 까닭을 잘 가늠하기 바란다”고 했다.
중생과 어우러지는 ‘보살행’이 진짜 깨달음 이 교수는 “참된 깨달음이란 이 세계의 연기와 공성에 대해 전적으로 이해한 바탕에서 모든 억압과 구속에서 벗어나는 소극적 자유, 노동과 창조를 통해 진정한 자기실현을 하거나 수행을 통해 자신을 해탈시키는 적극적 자유, 타자를 해탈시켜 내가 해탈이 되는 대자적 자유를 모두 쟁취하고 종합하는 것이자 타자를 깨닫게 해 내가 깨닫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자기를 비우고 중생을 붓다처럼 섬기는 중생의 삶에 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붓다의 삶이자 자타가 열반에 이르는 진정한 깨달음의 길”이라고 했다.
수행의 목적은 깨달음 아닌 열반
박병기 교수는 “한국불교 수행분위기와 관련한 비판 가운데 하나인 ‘깨달음에 대한 환상’과 그로 인한 막행막식 문화 잔존 등 문제는 깨달음을 목적으로 삼는 무명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박 교수는 “우리는 깨달음을 위해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뭇 삶의 고통을 직시함으로써 극복하기 위해 수행한다. 그 극복은 곧 열반이기에 수행의 목적은 깨달음이 아니라 열반에 있다”고 했다.
박 교수는 “이 시대 수행자로서 보살은 그 수행 과정에 간화선을 비롯한 대승의 수행방법에 기반한 정신적인 수행과 일상의 삶 속에서 자비심을 직접 실천하는 몸의 수행을 동시에 포용하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잘 이해한다’는 말 잘 이해해야”
법인 스님은 논평에서 “현응 스님은 ‘깨달음이란 잘 이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잘 이해한다’는 것을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스님은 “현응 스님의 주장에 다소 대중의 오해를 살만한 표현이 있었다. 돈오돈수 심행처멸 언어도단 확철대오 등 언어에 익숙한 불교현실에서 ‘깨달음은 잘 이해하는 것’이라는 주장에 대중이 당혹해 할만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스님은 “새로운 제시와 낯선 표현 몇 개에 갇혀 글의 맥락이 대중에게 제대로 읽혀지지 않았다”고 했다.
스님은 “탐구와 이해의 대상은 오온이라는 나와 세계이다. 이 오온이 공이고 연기임을 확연히 이해하면 모든 괴로움을 벗어날 수 있다는 반야지가 곧 ‘잘 이해하는 것’이라는 개념이라면 현응 스님이 말하는 이해하는 깨달음은 더 이상 오해와 시비의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붓다의 깨달음 이해는 불가능” 김재성 교수(능인불교대학원대학교)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선정 체험 등 맛만 볼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아라한과 체험이 깨달음일 것이다. 오늘 행사는 3가지 큰 문제를 한꺼번에 던져 놓고 물으니 재미는 있었지만 깨달음의 본질을 논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고 했다.
김 교수는 “불교에서는 연각 독각 등 불교를 접하지 않고도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한다”고도 했다.
한 청중은 “이번 세미나에서 절차상의 오류의 반복이 계속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간화선을 대신하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사유했어야 했다. 현응 스님이 주장을 전개하면서 전거를 잘못 든 것부터 한계를 드러낸 것”이라고 했다.
이도흠 교수는 “논쟁을 지켜보니 논문 내용이 아닌 오타 등 지엽적인 것을 갖고 공격하는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했다.
“오늘 나온 이야기 늘 접하던 것”
현응 스님은 행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다.
스님은 “행사를 참관하기 위해 왔다. 공정하지 못하다는 생각에 쟁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수불 스님 등과 양자토론은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어떤 자리라도 기꺼이 임하겠다”고 했다.
스님은 “지난해 9월 4일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를 발표한 것은 <깨달음과 역사> 발간 후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평소 역사, 보살, 자비 영역을 주로 천착해 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 뜻과 다르게 깨달음의 정의, 방법론으로 논쟁이 번지는 모습을 보고 씁쓸하고 안타까웠다. 내 말을 뛰어넘지 못한 것은 한국불교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고 했다.
스님은 “깨달음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다. 오늘 나온 이야기도 늘 접해오던 것들이다. 반론은 오늘의 나를 더 나은 모습으로 만드는 자양분이다”고 했다. 스님은 “내 생각으로 천하를 통일한다는 생각은 가진 적 없다”고 했다.
정의평화불교연대 최연 공동대표는 “오늘 행사는 깨달음 문제 본질을 드러낸다기보다 정리하자는 취지에서 마련한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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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속에서,깨달음은 이런것이다,?,,이런게 깨달음이다?.이런 완성된 문장을.이리저리 돌리고, 끼워넣고해서 문맥을 쭉~이어나간 하나의 글을 쓴거지,.ㅎ.숩게 깨달음에 대한 칼럼을 쓴걸..씨부리고 있는거제.저런건 논쟁도 아니고, 이바구도 아니네..
독서 나눔?글나눔? 이지.저래..열변하고 씨부리는것도 불교적으로 보면 오만한거제..남을 바꾸려 하지말라고..'안다는것과 본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네
아는만큼 보인다는 문맥이 틀렸다..보이는 만큼 아는게 더 맞는 표현이제. 깨달음의 경지인 '이세간품'은 각자의 깨달음으로 가야제. 난..돈수로 깨닫는게
깨달음이다,. 점수는 배움으로 알게
되는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