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기망양’ 된 깨달음 논쟁
‘다기망양’ 된 깨달음 논쟁
  • 조현성 기자
  • 승인 2016.01.15 19:07
  • 댓글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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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평불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세미나...현응 스님 "오늘 나온 이야기 늘 접하던 것"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이 “깨달음은 이해”라고 말해 촉발된 깨달음 논쟁이 학술세미나로 이어졌다. 교수들의 발제는 논쟁을 해소시키지 못했다. 다수는 철학적 시각에서 ‘깨달음의 사회화’에 방점을 찍었다. 알 수 없는 원형보다는 알고 있는 전통과 이성을 조화시켜 새로운 깨달음의 문화를 창조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달아난 양을 찾다가 여러 갈래 길에 이르러 길을 잃었다’는 다기망양(多岐亡羊)의 고사를 연상케 한 행사였다.

정의평화불교연대(공동대표 김광수 박병기 이도흠 최연 형난옥)는 15일 서울 화쟁문화아카데미에서 ‘지금 여기에서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행사에서는 ▷신승환 교수(카톨릭대)이 ‘서양 철학에서 깨달음의 문제’ ▷이도흠 교수(한양대)가 ‘깨달음의 쟁점과 맥락적 지향성’ ▷박병기 교수(교원대)가 ‘깨달음의 사회화 문제’를 발제했다.

서구식 사고는 깨달음도 절대자와 함께

신승환 교수는 “유럽 사유에서 ‘깨달음’ 문제의 주제화를 살피는 작업은 어려울 뿐 아니라 막연한 작업”이라며 로고스(logos)를 깨달음과 연관시켰다. “깨달음에 관한 유럽 사유는 인격적 최고 존재자로 상정된 신에 대한 관계를 떠나서는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신 교수는 “그리스도교적 신비주의 전통에 따르면 영적인 깨달음은 근본적으로 신적 존재와의 관계에서 이해된다. 신적 존재와 본성에 대한 이해와 함께 인간의 영적 특성에 대한 이해가 핵심 원리”라고 했다.

현응 스님도 비판자들도 서로 오류

이도흠 교수는 깨달음 논쟁의 당사자들의 오류를 지적하며 화쟁하려고 했다.

이도흠 교수는 “(깨달음 논쟁에서) 기존 돈점 논쟁에서 빚어진 문제를 답습하지 않으려면 불교 교리에 충실하되 불교 틀을 벗어나 기호학 인지과학 인류학 등 과학의 반열에 오른 인접학문을 과감하게 수용해 따져봐야 한다”고 했다.

이 교수는 부처님 법을 ①아난이 기억해 경전으로 남겨져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등으로 나뉜 교학적인 불법 ②언어에 한계가 있다고 보고 선정을 통해 본래면목에 이르고자 하는 선적인 불법 ③ ①과②의 길을 모두 인정하되 ②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새 길을 모색하자는 (현응 스님의) 새 불법으로 구분했다.

이 교수는 “현응 스님은 ③의 정당성을 위해 ①이나 ②보다 부처님법에 가깝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다. 원본을 알 수 없기에 스님은 그것이 처음 재현된 상황을 묘사한 <마하박가>를 인용하며 원본인 부처님법을 유추하려 했던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수불 스님이나 수좌회, 서재영 박사는 이런 핵심을 무시했다. 현응 스님이 선을 무시하거나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고 신랄한 비판을 쏟아 내거나 조사 어록을 인용하며 깨달음이 구경각임을 입증하려 했다”고 말했다.


“이해와 선정 뛰어넘는 새 길 찾아야”

이 교수는 “현응 스님도 ①②③ 길에 대해 좀 더 명료하고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원본인 불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재구해야 했다. 그 다음에 ①이 아닌 ③의 입장에서 ②의 한계를 지적했어야 했다”고 밝혔다.

이도흠 교수는 “석가모니가 최초로 깨닫고 가르쳐 비구들을 깨닫게 하는 상황을 보면 이해의 방식이 주로 활용됐다. 여기에는 선정 방식도 있었다. 조계종 종지인 간화선을 사수하려는 이든, 초기불교에 매료된 이든, 평행선을 달리는 논쟁을 그만해야 한다”고 했다.

이 교수는 “21세기 오늘의 상황에서 ③의 길, 곧 이해와 선정을 뛰어넘어 불법의 진여 실제에 다다르는 길이 무엇일까 함께 모색하는 것이 한국불교를 혁신하는 것이자 원본인 불법에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라고 했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 세 가지

이 교수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는 ①현응 식 말씀‧토론-> 이해 -> 깨달음 ②신수‧지눌 식 경전공부-> 점수-> 해오 ③혜능‧성철 식 수행->공안->돈오 등 3가지 길이 있다고 했다.

이 교수는 “③의 입장에서 보면 ①과②가 모두 깨달음의 장애 내지 근본 해악이다. ①의 입장에서 보면 ②와 ③은 석존과 다섯비구가 처음 깨달은 쉬운 길은 무시하고 어려운 길을 고집하는 모호한 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현응 스님과 수불 등 선 옹호 세력, 돈오점수 논쟁 등에는 불교 맥락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성의 사유가 지배하고 타자와 사이에 권력이 작동하고 있다”고 했다.

고집 말고 상대 주장 여지 둬야

이 교수는 선 옹호 세력을 겨냥해서는 “몰락 깨달았다고 해도 사유가 축적돼 얻어진 결과물을 바탕으로 재조직되거나 체계화된 것이다. 해오나 지해가 깨달음에 장애가 아니라 사다리일 수 있다”고 했다.

이 교수는 “현응 스님은 ‘이해’란 낱말 사용에 주의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스님의 ‘이해’는 소수자가 독점하는 깨달음을 대중에게로 끌어내리고 자비심과 결합해 사회화하려는 아름다운 결정이다. 프랑크푸르트 학파 철학자들이 ‘이해’를 선입견에 뿌리를 두고 있고 과거에 얽매여 기존 의식과 체제를 벗어나지 못한 개념체계라며 비판하면서 대안으로 변증법적 이성을 확립하라고 주장한 까닭을 잘 가늠하기 바란다”고 했다.


중생과 어우러지는 ‘보살행’이 진짜 깨달음

이 교수는 “참된 깨달음이란 이 세계의 연기와 공성에 대해 전적으로 이해한 바탕에서 모든 억압과 구속에서 벗어나는 소극적 자유, 노동과 창조를 통해 진정한 자기실현을 하거나 수행을 통해 자신을 해탈시키는 적극적 자유, 타자를 해탈시켜 내가 해탈이 되는 대자적 자유를 모두 쟁취하고 종합하는 것이자 타자를 깨닫게 해 내가 깨닫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자기를 비우고 중생을 붓다처럼 섬기는 중생의 삶에 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붓다의 삶이자 자타가 열반에 이르는 진정한 깨달음의 길”이라고 했다.

수행의 목적은 깨달음 아닌 열반

박병기 교수는 “한국불교 수행분위기와 관련한 비판 가운데 하나인 ‘깨달음에 대한 환상’과 그로 인한 막행막식 문화 잔존 등 문제는 깨달음을 목적으로 삼는 무명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박 교수는 “우리는 깨달음을 위해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뭇 삶의 고통을 직시함으로써 극복하기 위해 수행한다. 그 극복은 곧 열반이기에 수행의 목적은 깨달음이 아니라 열반에 있다”고 했다.

박 교수는 “이 시대 수행자로서 보살은 그 수행 과정에 간화선을 비롯한 대승의 수행방법에 기반한 정신적인 수행과 일상의 삶 속에서 자비심을 직접 실천하는 몸의 수행을 동시에 포용하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잘 이해한다’는 말 잘 이해해야”

법인 스님은 논평에서 “현응 스님은 ‘깨달음이란 잘 이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잘 이해한다’는 것을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스님은 “현응 스님의 주장에 다소 대중의 오해를 살만한 표현이 있었다. 돈오돈수 심행처멸 언어도단 확철대오 등 언어에 익숙한 불교현실에서 ‘깨달음은 잘 이해하는 것’이라는 주장에 대중이 당혹해 할만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스님은 “새로운 제시와 낯선 표현 몇 개에 갇혀 글의 맥락이 대중에게 제대로 읽혀지지 않았다”고 했다.

스님은 “탐구와 이해의 대상은 오온이라는 나와 세계이다. 이 오온이 공이고 연기임을 확연히 이해하면 모든 괴로움을 벗어날 수 있다는 반야지가 곧 ‘잘 이해하는 것’이라는 개념이라면 현응 스님이 말하는 이해하는 깨달음은 더 이상 오해와 시비의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붓다의 깨달음 이해는 불가능”

김재성 교수(능인불교대학원대학교)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선정 체험 등 맛만 볼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아라한과 체험이 깨달음일 것이다. 오늘 행사는 3가지 큰 문제를 한꺼번에 던져 놓고 물으니 재미는 있었지만 깨달음의 본질을 논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고 했다.

김 교수는 “불교에서는 연각 독각 등 불교를 접하지 않고도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한다”고도 했다.

한 청중은 “이번 세미나에서 절차상의 오류의 반복이 계속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간화선을 대신하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사유했어야 했다. 현응 스님이 주장을 전개하면서 전거를 잘못 든 것부터 한계를 드러낸 것”이라고 했다.

이도흠 교수는 “논쟁을 지켜보니 논문 내용이 아닌 오타 등 지엽적인 것을 갖고 공격하는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했다.

“오늘 나온 이야기 늘 접하던 것”

현응 스님은 행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다.

스님은 “행사를 참관하기 위해 왔다. 공정하지 못하다는 생각에 쟁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수불 스님 등과 양자토론은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어떤 자리라도 기꺼이 임하겠다”고 했다.

스님은 “지난해 9월 4일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를 발표한 것은 <깨달음과 역사> 발간 후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평소 역사, 보살, 자비 영역을 주로 천착해 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 뜻과 다르게 깨달음의 정의, 방법론으로 논쟁이 번지는 모습을 보고 씁쓸하고 안타까웠다. 내 말을 뛰어넘지 못한 것은 한국불교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고 했다.

스님은 “깨달음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다. 오늘 나온 이야기도 늘 접해오던 것들이다. 반론은 오늘의 나를 더 나은 모습으로 만드는 자양분이다”고 했다. 스님은 “내 생각으로 천하를 통일한다는 생각은 가진 적 없다”고 했다.

정의평화불교연대 최연 공동대표는 “오늘 행사는 깨달음 문제 본질을 드러낸다기보다 정리하자는 취지에서 마련한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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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다리가처 2021-12-20 05:49:07
저 자리에는.깨달은 이가 없지싶은데,.왜들 저라고 있노.ㅎ 할 얘기는 아닌거 같은데.. 저건 말장난이제
머리속에서,깨달음은 이런것이다,?,,이런게 깨달음이다?.이런 완성된 문장을.이리저리 돌리고, 끼워넣고해서 문맥을 쭉~이어나간 하나의 글을 쓴거지,.ㅎ.숩게 깨달음에 대한 칼럼을 쓴걸..씨부리고 있는거제.저런건 논쟁도 아니고, 이바구도 아니네..
독서 나눔?글나눔? 이지.저래..열변하고 씨부리는것도 불교적으로 보면 오만한거제..남을 바꾸려 하지말라고..'안다는것과 본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네
아는만큼 보인다는 문맥이 틀렸다..보이는 만큼 아는게 더 맞는 표현이제. 깨달음의 경지인 '이세간품'은 각자의 깨달음으로 가야제. 난..돈수로 깨닫는게
깨달음이다,. 점수는 배움으로 알게
되는것이지..

핸드폰 2016-02-17 18:59:12
깨달음이든 뭐든 그것은 뒤에 두고...
사진에 나온 핸드폰 보는 승려님은 누구신지요?
한창 토론중인데 핸드폰 보는 모습이 참 가관입니다.

dangun7 2016-02-07 14:23:45
禪 覺 깨달음 의 논란 ;
교육원장 현응 의 주장 , (見性 은 覺이 아니고 , 잘 理解하는것 ) 이라니?
禪 을 모르고 대승불교 를 모르는 , 불교 초보자 의 발언이다 , 수행 은 理解로서는 되지않고 , 禪 기도 주력 等 不立文字 의 覺에서만 가능하다 ,
범어사 수불 의 誤謬 , 현응 의 반대주장하는 수불 의 論理 가운데 , 수불 의 誤謬 ;
불교 의 說法 을 할때 佛說 에 없는 말 이나 글文 표현은 佛說 이 아니거나 , 佛說 에 違背 되는 文句 語句 의 주장은 誤謬 이거나 外道 이다 .
수불 이 주장한 내용 중에 , 다음3가지 誤謬 에대해서 점검해보자 ;
1, 수불 : ( 실제로 깨달아야 터득되는 ‘중도불이 )
輪覺 의 評 ; 중도 또는 중도불이 는, 佛說 대승경전 어디에도 없다 .
2, 수불 : ( 무명이 사라지면 결국 老死도 사라진다 )
輪覺 의 評 ; 무명 은 사라지는것이 아니고 , 覺하면 보리 지혜 佛心이 된다
3, 수불 : ( 覺 은 말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체득해야 무명이 소멸된다)
輪覺 의 評 ; 覺 은 몸으로 체득하는것이 아니고. 心의경지 實存이다

성철 스님 과 禪 , 中道 誤謬 ;
◆현 인류의 정신은 방황하고 있다.그리스도교의 우주만물 창조론, 全知全能 , 唯一神敎 는 , 다위인 의 進化論에 의해서, 모순 과 한계의 장벽에 부디쳐있다.
인류의정신을 이끌어갈 종교는, 한국의 간화선 밖에 없다.
看話禪은 인간의 마음을 창조개발하여 인류의 정신문화를 발전시키는 수행이다
禪 과 敎理를 正立 하는것이 첫째의 과제이다.
◆□ 參考資料 :
金剛經 , 華嚴經 , 六祖法寶檀經 敦煌本 , 德異本 , 韓國佛 敎所依經典硏究(李智冠著) , 六祖法寶檀經(大正新修大藏經) , 百日法門(성철스님법어집) , 佛敎의本(著者,大田由紀 江) , 釋迦 (著者,히로사찌야) , 佛敎란무엇인가(著者,大正大學 佛敎學科 編)
慧能硏究 (駒澤大學禪宗史硏究會 編著) , 가장위대한神 은 예수도 석가도 공자도 아니고 , 세계인류 이다 (Duke W. Koo 의 論文)
◎ 禪 을하는데 꼭 알아야할 성철스님의中道 의 非合理 ,中道는 불교의 敎理 와는 관계가없고 六祖大師 또한 中道 에대한 用語 자체도언급하신바 없다.
유마경 , 금강경 , 육조단경 원본 돈황본(돈황신본) , 대승경전 어디에도 중도라는 ,
용어자체도 없다 , 중도라는 사량 의 망상 은 , 禪 의 장해물 일 뿐 , 禪 좌선 과는
아무런 관계 도없다
중도생활 中道 에 對 한 부처님의언급 ; 전법륜경(초전법륜경) , 부처님이 成佛하시기 前 시딸타王子로서,29歲에 當時 인도 바라문교 의 바라문으로 出家하셔서,바라문교 의 수행방법인 忍慾 과 苦行 으로서 , 6년간 斷食(극 小食)하셔서,피골이상접하여 一時졸도 하셨다. 苦行의 무모함을 깨닫고 ,시딸타는 고행을 포기하셨다 , 왕자시절 초호화생활이나 , 극단고행에 치우치지 말고, 보통생활 , 中道생활이 수행에 적합하다고 , 같이 고행수행하든 5비구에게 주장한것으로 中道 用語 를 처음 사용하신것이다 .5비구는 시딸타가, 갗이하든 고행을 포기하고 탈락한 배신자이고, 타락한수행자라고
비난하고 시딸타왕자를 떠나버렸다 .
중도 즉 중도생활 의 주장은 , 대각하시기 전 의 일이었다 .
혼자남은 왕자시딸타는 어느정도 건강을 회복한후에 ,보리수아래 에서 ,7일 밤낫 사색 선정에 드신후에 처음으로 , 弱肉 强食 生老病死 에 대한 大覺을이루시고 成佛하셧다.大覺하신 내용은, 佛이고, 佛의 大覺을 위한 , 四聖諦 八正道로 시작하셨다.
中道는 大覺의 목적 이 아니고, 苦行또한 목적이 아니고. 覺 깨달음 을위한 수단인데 ,  수행을 하는데 , 苦行이나 호화安樂(王子시절)의 극단적인 어느한쪽의 생활이 아니고, 苦行과安樂 의 中間의生活이 수행생활에 도움이된다 고 說하셨다.
中道는 불교 교리와는 관계가없고, 수행자 들의 생활 태도에 불과하다 .
中道의生活 은 백장스님의 修道僧 청규 (一日不作 一日不食 이라는 백장청규)와도같은것이다. 宗敎와 學文은다르다. 학문을 경시하는것이 아니고, 禪과學文(敎理)을 선명히 구분하고, 상호 이해를 깁히 하자는것이다.
宗敎는 心身의 實體 實在이고 ,學文은 억만가지도 가능한 인간의 思 量 이다.
부처님이 보이신 三處 傳心(佛 佛心)을 가르치기 위해서,그렇게많은 經을 설하셨다.
그러나 經은 말이나 글 (書) 이지 佛 佛心은 아니다. 용수 삼장을포함해서 많은스님들 학자들의 著書들은 학문이지, 佛 佛心은아니다.불교의 觀点에서 말하면 思 量 이다.
법달이 삼천번 法華經을 독송 했어도,見怯成佛하기전에는, 思 量 이다.
불교에대한 연구 저서 분석 들은 궁극적으로,思 量 이다.
마치 부처님을가르키는 손가락이다 .가르키는 손가락이지, 부처는 아니다.가르키는 손가락을보고, 見 性 했다든가 부처로 착각하는 가짜도인( 道人 )이 너무많다.
最近代 성철스님은 學者僧으로서, 中道를 主張하여 한국불교에, 가짜道人을 量産하여, 수많은 스님들이 수행은하지않고 것넘엇다. 성철스님은 백일법문 等 에서,六祖法寶壇經 에 中道라는 表現이 있다 하시지만, 六祖壇經 의 眞本(原本) 인 돈황본( 돈황신본 )에는 中道라는 表現 用語자체가 한마디도 없다. 六祖壇經에는 不立文字 言語道斷 , 禪을모르는 學者僧이 모르는 部分이 있다. 성철스님 또한 學者僧의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學者僧들은 思量으로서, 끗까지 전부를 해석해야 직성이 풀리는 모순을 갖이고잇다. 육조단경은 六祖大師님이 入寂하신후 數百年후에 여러學者僧들에 의해서 原本(돈황본)뒤에 써서붙여서 개조된, 혜흔본,흥성사본,대승사본,설승본, 종보본, 덕이본 等等 많은기록이 있다. 성철스님은 이中에 넓이 알려진 덕이본 을 예로들어, 육조대사 의 中道를 主張하시지만. 덕이본 은 六祖大師님이 入寂하신후 5百77年후에 , 原本뒤에, 學者僧들이 써서붙여서 변조해서 출간된것이다.
또한 성철스님이 그의설법 백일법문에서,中道文字가 포함된, 덕이본一部를 기재했는데(大正藏48 , p.360) , 아무설명없이,중간부분 不立文字가 포함된, 한줄10字로 17줄 을 삭제하고 기록하였다.中間에 삭제함으로서 전후의 내용 의미가 , 달라질수도있다.구렁이담넘어가듯 있을수없는일이다.
中道란 불교에 맞지않는 주장이다. 예를들어서, 有 또는 無 에서,한쪽을선택하면.편견 단견 이 되어서,見性의 答이 되지않는다고치자, 有도아니고 無도아니니까, 中間 中道 또한 存立할수 없으니, 中道 또한 存立할수없다. 中道는 思量으로 生成된 妄想이다.
유교 를 공부한 사람들 의 誤謬 , 有 無 中庸 의 선입감을 버리지 못한다
누구나 , 시심마 話頭를 제대로 들어보면, 本人이 見性했는지 못했는지 선명하게 알수있고, 보림에는 定한법이없는상태이고, 話頭는알고자하는 ? 인데 ,中道라는 先入見 思量을갖이고 어떻게 修行에 精進할수 있겠는가?
육조단경 에서,見性은 반드시, 눈밝은 禪 師의 점검을 받지않으면,外道에 떠러진다는 , 六祖大師의 경책을 想 起해야한다 . 輪覺 書
附書, 참회하고 돌아가신 ,
성철스님 의 반성하는 참회문懺悔文 ;
生平欺狂男女群 彌失罪業過須彌 活陷阿鼻恰萬端 一輪吐紅掛碧山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輪覺 의 評 :
성철 스님 의 懺悔文 은 , 글 그대로 懺悔文 이다 .神聖 視 해서도 안되고 ,
評下 해서도 안된다 . 그의 法文集 이나 활동 을 보면 , 禪師라기보다 學者僧이다 .
순수하게 참회하고 가신분 을 그대로 尊重해야 한다 .
(참회문懺悔文 以上)

냅둬 2016-01-22 04:14:11
부처님이 얼마나 위대한분이신지 수많은 경전에 자세히도 써놓으셨는디 어떻게 이뭣꼬를 해서 부처님을 알것이며 이해를 한다고 해서 알겠는가~~공의체험 공성을 증득했다고 해서 그자리가 부처님과 같은 레벨이 될 수 있는가~~~

1234 2016-01-18 13:22:34
종정 사서살에서는 뭐하냐 지금 조게종의 종지가 의심받고 있는 상황인데... 곧 사기꾼 집단으로 몰리거나 초기불교로 돌아가야 할지도... 종정도 없고 선방도없다!! 아니면, 현응이에게 200방을 내려라 사문난적도 유분수지 혼자 이렇게 나댈 일 아니 잖은가 병신년이 수상하구나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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