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은 이해”라고 주장해 지난해 논쟁을 일으켰던 현응 스님(조계종 교육원장)의 글이 다시 한 번 반박에 부딪혔다. 이번에는 간화선 대중화에 힘쓰고 있는 수불 스님(범어사 주지, 안국선원 선원장)이다. 수불 스님은 ‘조계종지의 현대적 구현-현응스님의 발제문을 읽고’를 소책자로 제작해 전국 선원과 승가대학 등에 최근 배포했다.
현응 스님은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를 통해 ‘깨달음이란 잘 이해하는 것’ ‘깨달음은 지혜와 이해의 영역이며, 선정수행을 통해 이루는 몸과 마음의 높은 경지를 뜻함이 아니다’ ‘깨달음을 잘 얻기 위해(잘 이해하기 위해) 설법과 질의응답, 토론, 경전과 어록 열람, 불교를 풍부하게 할 다양한 독서 등이 현대적인 수행방법이기도 하다’ 등을 주장했다.
길게는 1700년 한국불교의 전통, 가깝게는 한국 현대불교 선지식으로 꼽히는 성철 스님이 강조했던 간화선, 돈오, 깨달음에 현응 스님은 자기만의 새 주장으로 덧칠했다.
수좌회를 비롯한 제방의 수행자와 강병균‧우희종 교수, 오용석 박사 등 학자들이 현응 스님을 비판했다. 현응 스님은 지난해 10월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 반론에 대한 답변”에서도 부연설명을 더했을 뿐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현응 스님은 교계 한 매체와의 통화에서 “수불 스님의 글 내용을 안다. 이런 논쟁이 궁극적으로 한국불교가 우리 사회, 국가, 나아가 세계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수불 스님의 글은 ▷1. 한국불교 중흥을 위한 현응스님의 원력 ▷2. 조계종의 명칭을 변경하자는 주장에 대해 ▷3. 깨달음이란 마음을 깨닫는 것이다 ▷4. 깨달음은 사유의 영역을 초월한다 ▷5. 사교입선의 이유 ▷6. 범주오류 ▷7. 간화선에 대한 오해 ▷8. 유상(有相)의 입장은 전도몽상이다 ▷9. 조사스님들의 경책 ▷10. 알음알이 ▷11. 깨달음도 진화한다는 주장에 대해 ▷12. 조계종지의 현대적 구현으로 구성됐다.
‘1. 한국불교 중흥을 위한 현응스님의 원력’에서 “한국불교 중흥을 위한 현 교육원장으로서의 고뇌와 원력” 등 표현을 통해 현응 스님을 잠시 추켜세웠을 뿐 나머지 글에서는 현응 스님의 주장을 조목조목 날카롭게 비판했다. “깨달음은 불이법인데, 이해는 이법이다. 범주가 다른 것으로 설명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했다. 스님은 수행을 직접 안 해보고서 모르는 소리를 하고 있다고 현응 스님을 몰아세웠다. ‘9. 조사스님들의 경책’에서는 현응 스님의 주장과 대비되는 내용을 <전심법요> <육조단경> 등 선어록에서 가려 뽑아 대조해 실었다.
조계종 명칭 바꾸자에 대해 수불 스님은 조계종의 명칭을 변경하자는 현응 스님의 주장에 대해 “현대화 세계화된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고 해서 자기 성을 현대적 세계적으로 바꾸자는 것과 같다”고 했다.
스님은 “후배들은 선조들이 세워놓은 바르고 깊은 뜻을 헤아려 그것을 실현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시대 흐름을 따라야 한다는 구실 아래 쉽사리 이름을 바꾸려 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마 성철 스님이 조계종 이름을 바꾸자는 현응 스님 주장을 들었다면 ‘이 자슥이 마구니 아닌가!’ 하면서 주장자를 내리쳤을 것”이라고 했다.
깨달음이란 마음을 깨닫는 것에 대해
현응 스님은 “은둔하는 불교, 이기적 소극적인 불교, 기도(기복)만 하는 불교, 명상(참선)만 하는 불교에서 연기적(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사회적 자비를 실천하는 한국불교를 만든다는 것”이라고 했다.
수불 스님은 “겉보기에는 그럴 듯한 말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참선수행을 비판하고 있는 의도가 분명해 보인다. 안거의 수행전통을 비판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현응 스님의 ‘(한국불교에서) 마음을 깨닫는다는 말은 부정확하다. 그 마음이 무엇인지 명확히 밝히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주장은 현응 스님 스스로가 마음이 무엇인지 확실히 모른다는 고백과 같다”고 했다.
스님은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그런 깨달음은 없다. 본인이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겠다고 해서 마음을 부정한다면 하늘에다가 침 뱉는 꼴”이라고 했다.
깨달음은 사유의 영역을 초월한다에 대해
현응 스님은 <마하박가>를 인용하며 “부처님은 깨달음을 고도로 수련된 높은 정신세계를 이루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다. 깨달음은 ‘잘 이해하는 것’이라고 하셨다”고 했다.
수불 스님은 “<마하박가>에는 이런 대목을 찾기 어렵다. 오히려 부처님은 깨달음은 사유의 영역을 초월한다고 했다”고 반박했다.
스님은 “진리란 ‘잘 이해하는’ 대상이 아니라 ‘보고 얻고 알고 깨우쳐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의심을 뛰어넘고, 의혹을 제거하고, 두려움 없음을 얻을 수 있다. 이해하는 만으로 안된다는 것은 수행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너무나 잘 안다”고 했다.
스님은 “이해하는 것만으로 인생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전세계 불교학자들마다 깨달았다고 해야할 것”이라며 “깨달음이 이해라는 주장은 수행자들을 모두 바보로 만드는 희론이자 책상물림의 말”이라고 했다.
사교입선 이유에 대해
현응 스님은 “한마디로 부처님을 깨달은 이라고 할 때 그 깨달음은 ‘연기관의 이해를 확립함이며, 삶의 괴로움의 문제를 이러한 통찰과 이해로서 해결하는 것’이라 하겠다”고 했다.
수불 스님은 “무명이 사라지면 순차적으로 결국 노사도 사라져서 괴로움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지만, ‘실제로 무명이 소멸되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언어로 전달될 수 없는 것이다. 말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체득해야 만이 실제로 무명이 소멸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무명만 소멸되면 순차적으로 노사까지도 소멸될 것은 분명하지만, 과연 ‘어떻게 해야 무명이 소멸될 것인가?’ 하는 것은 너무도 현실적인 문제이다. 현응 스님이 주장하는 ‘잘 이해하는 것’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다”고 했다.
스님은 “현응 스님은 연기법을 잘 이해하기만 하면 만사형통인 것처럼 말하지만, 깨닫기 전에는 연기법의 진면목을 바로 알기 어렵다”며 “‘중도’는 사무치고 사무쳐서 끝내 통해야 하는 것이지, 이해로서는 도저히 그 실상을 파악할 도리가 없다”고 했다.
범주오류에 대해
수불 스님은 “현응 스님이 초지일관 ‘깨달음이란 잘 이해하는 것이다’고 주장한 것은 ‘범주오류(category mistake)’를 범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논리학에서는 어떤 범주에 속해 있는 내용을 다른 범주에 속한 내용으로 설명하는 경우, 무의미한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스님은 “‘깨달음’은 불이법에 속하고, ‘이해’는 이법에 속하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이해하는 것이다’는 말은 곧 ‘상을 여읜 것(깨달음)은 상을 가진 것(이해)이다’라는 무의미하고 모순된 주장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상대적인 ‘이법’의 논리로 중도의 ‘불이법’을 재단하려는 모든 시도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와 같다. 그렇게 되면 ‘범주오류’에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까지 더하게 된다”고 했다.
스님은 “분별망상으로 불이법을 더듬다가 ‘마음’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다고 현애상(懸崖相)을 내어서, 하급의 차원으로 퇴타하여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 운운하는 것을 고봉 화상은 <선요>에서 ‘원숭이가 장대로 달을 따려한다’고 경책했다”고 밝혔다.
스님은 “대승경전과 조사어록에는 ‘마음을 깨닫는 것’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 수도 없이 많이 나온다. 현응 스님이 그 많은 가르침을 무시하고 ‘깨닫는다는 그 마음이 모호하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안목이 모호하다는 자백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간화선에 대한 오해
현응 스님은 “간화선의 ‘간(看)’은 잘 살펴보다의 뜻이며, ‘화(話)’는 이야기, 또는 대화라는 뜻이다. 즉 간화선은 ‘이야기, 또는 대화를 잘 살펴보는 선’이다. 어떤 이야기고 대화인가? 뛰어난 조사스님들이 설법한 이야기거나 주고받은 대화이다. 결국 간화선은 조사스님들의 설법이야기나 주고받은 대화들을 잘 기억하였다가 수시로 사유하는 수행이다”고 했다.
수불 스님은 “현응 스님은 여기서 ‘화두’의 원리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내며 ‘간화선’을 오해하고 있다. 명안종사의 지남 아래에서 활구 화두를 들고 실참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흔히 수행 상에서 병통으로 간주하는 ‘사구 수행’을 ‘바른 간화선’인양 오해하기 쉽다”고 했다.
그러면서 “화두를 ‘조사스님들의 설법이야기’로 보는 것은 간화선에 대한 무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실언”이라며 “선지식께서 믿음을 낸 이에게 화두를 들게 하는 것, 즉 참의심을 불러일으켜 깨닫도록 한 것이 간화선이다”라고 했다.
유상의 입장은 전도몽상이다
수불 스님은 “현응 스님은 이후에도 계속 ‘깨달음이란 ‘마음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연기와 공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는 확신 하에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이 기본전제가 바로잡히지 않는 한, 뒤에 이어지는 내용은 오류를 벗어나기 힘들다”고 했다.
스님은 “유상의 입장에 머물고 있으면, ‘괴로움을 없애고 깨달음을 이루어야 한다’고 믿게 된다. 그런 사람은 <금강경>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얻을 수 있는 법이 조금도 없음[無有少法可得]을 일러 무상정등각이라 한다’는 가르침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고 했다.
임제 스님의 “도 닦는 이들이여! 참 부처와 참된 법은 형상이 없는데, 그대들은 다만 허깨비 위에서 모양을 짓고 있구나. 설사 구하여 얻는다 하더라도 모두가 들여우요, 도깨비일 뿐 참 부처는 아니니, 곧 외도의 견해이다”라는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수불 스님은 “돈오를 확실히 체험하면 단박에 본래 괴로움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제거해야 할 미혹은 물론 이루어야 할 깨달음마저도 없다는 실상이 밝혀진다”고 했다.
현응 스님은 현대인들을 위한 수행법에 대해 “깨달음을 잘 얻기 위해(잘 이해하기 위해) 설법과 질의응답, 토론, 경전과 어록 열람, 불교를 풍부하게 할 다양한 독서 등이 현대적인 수행방법이기도 하다”고 했다.
이에 대해 수불 스님은 “본인이야 자기 신념에 따라 그렇게 해도 상관없지만, 우려스러운 일은 한국불교의 공식수행법인 간화선을 경시하는 풍조를 조장하지나 않을까 한다. 상대적인 ‘이법’의 차원에서 아무리 설법과 질의응답, 토론, 경전과 어록 열람, 다양한 독서를 하더라도 모두 꿈속의 일일 뿐이다. 꿈속에서 삼아승지겁을 갈고 닦더라도 단박에 꿈을 깨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알음알이에 대해
수불 스님은 “현응 스님이 반론에 대한 답변에서도 중요한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 현응 스님의 글은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오랜 선정수행에만 몰두하고 있는 한국불교의 일부 풍조를 비판하는 것이었다’고 해명하면서, ‘선정수행’과 ‘닦아 증득하는 것[修證]’을 배격하고 있다”고 했다.
스님은 “현응 스님의 비판은 한국불교 현실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한편으로 일리 있는 것이지만, 선정수행과 수증을 싸잡아 배격한 것은 무리한 주장이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라고 했다.
스님은 “현응 스님의 주장은 알음알이에 해당 한다. 조사스님들이 본분의 입장에서 흔히 말씀하시는, ‘실상은 환히 드러나 있어서 찾고 닦으려 할수록 어긋난다’ 혹은 ‘입 열면 벌써 틀리고, 생각이 움직이면 바로 어긋난다[開口卽錯 動念卽乖]’는 등 법문을 머리로 이해해서 ‘수증’을 배격해버리면, 실참수행을 통해 깨달을 기회마저 놓치게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주장을 펼치면 본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깨달을 기회마저도 방해하는 것이니 참으로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깨달음도 진화한다에 대해
현응 스님은 “나는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부처님 그 분의 깨달음으로 완성되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본다. 깨달음이란 부처님 이후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라고 했다.
수불 스님은 “이것 또한 무리한 주장이다. 불교가 시대에 따라 변화해가야 하는 것은 지당한 말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깨달음도 시대에 따라 진화해가야 한다는 것은 다시 한 번 치명적인 범주오류를 범한 것이다. ‘깨달음’과 ‘시대적인 진화’는 서로 범주가 다르다. 현응 스님은 그냥 ‘불교가 시대에 따라 발전해야 한다’고 말하면 될 것을 괜히 ‘깨달음도 시대에 따라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윤리’ ‘정의’ ‘평화’ ‘공정’ ‘평화’등은 <깨달음과 역사>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역사’의 영역이다. 즉 불교에서 ‘지혜’와 대비되어 말하는 ‘자비’의 영역이다. 하지만 ‘역사’ ‘자비’의 영역이 깨달음과 다른 차원의 영역이라 하여, 깨달음과 역사라는 이 둘을 분리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이어 “다른 차원의 두 영역을 하나의 삶에 결합해야 한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 현응 스님은 ‘깨달음’과 ‘역사’가 다른 차원의 영역에 속한다는 점은 이해하고 있다. 문제는, 실제로 깨달아야 터득되는 ‘중도불이’를 머리로 이해해서 서로 다른 차원인 깨달음과 역사를 통합하려고 무리하게 시도하다보니까 ‘깨달음은 진화한다’는 전혀 엉뚱한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스님은 “실참을 통해 생사일대사를 해결하고 불법에 대한 안목을 열지 않고서는, ‘중도불이’는 영원히 불가사의로 다가올 것이다. 본인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큰 해를 미치는 것이어서 조심해서 삼가야 한다”고 했다.
조계종지의 현대적 구현에 대해
스님은 “시대에 맞추어 한국불교를 현대화하자는 총론적인 입장에 대해서는 소납도 흔쾌히 동의한다. 한국불교 중흥의 방법론이라는 각론에 있어서의 내 생각은 다르다”고 했다.
이어 “현응 스님은 한국불교가 오랜 역사와 전통을 모두 담아내기 위해서 협소한 ‘조계종’의 명칭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오히려 본연의 조계종지에 보다 더 충실하여 ‘돈교법문’을 대중화, 세계화하는 것이야말로 한국불교의 중흥과 세계인류를 위한 ‘전법도생의 보살도’를 실현하는 지름길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스님은 “불조의 정법에 따라 깨달음을 얻는 가장 효율적이고, 쉬우며, 빠르고, 올바른 수행법은 한국불교 최고의 자산이자 조계종 공식수행법인 ‘간화선’”이라며 “후손이 못나서 선조의 훌륭한 가르침인 간화선 수행법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가 분발하여 간화선 본연의 가치를 회복해야 하는 것이 바른 길이다”고 했다.
스님은 “이미 갖고 있는 보물을 바르게 되살려내야지, 자가보장(自家寶藏)을 버리고 어설프게 이것저것 묶어내려고 하는 것은 아무런 실속이 없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어리석은 짓이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불교의 사활은 간화선 수행에 실패한 낙오자들의 퇴타하자는 주장에 따를 것인가, 아니면 간화선 수행의 정법당간을 올곧게 세우는 길에 매진할 것인가에 달려있다”고 했다.
‘조계종지의 현대적 구현-현응스님의 발제문을 읽고’ 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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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깨달음은 언어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언어로는 절대 깨달음을 정확히 지칭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