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공호에서 조차 그들은 내쫓겼다
방공호에서 조차 그들은 내쫓겼다
  • 합천 평화의 집
  • 승인 2016.01.05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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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70년, 한국인 원폭피해자와 후손들] 1. 원폭, 그리고 한국인 원폭 피해자

2015년은 광복 70주년이 되는 해였다는 것은 우리 국민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인류 역사상 최초로 핵무기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 70주년이 되던 해였다는 것은 많은 국민이 알지 못합니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미국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습니다. 폭발과 화재, 방사능에 노출된 사람이 70만 명에 달했습니다. 피폭 피해는 국적 인종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끌려가 강제징용 등에 동원됐던 조선인들 역시 원자폭탄에 그대로 노출됐습니다. 한국인(조선인) 피해자가 얼마나 되는 지조차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히로시마에서 약 7만 명, 나가사키에서 약 3만 명의 한국인이 피폭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중 5만 명은 현장에서 죽었습니다. 살아남은 피폭 한국인 가운데 4만 3,000여 명이 방사능에 피폭된 채 치료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우리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원폭 피해자들은 차별과 멸시에 시달리다가 죽어갔습니다. 일상적인 삶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이들을 우리나라 정부는 외면했습니다. 피폭자와 그 후손들은 정부의 도움 없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직접 소송을 걸어 ‘원폭피해자’로 인정받았지만, 배상은 없었습니다. 원폭피해자 자신만 고통을 겪은 것이 아닙니다. 그 2세와 3세까지 피폭의 상흔이 대물림됐습니다. 2015년 9월 30일 기준으로 국내에 2,524명의 원폭피해자가 있는 것으로 등록되어 있지만 실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들의 아픔은 우리 정부는 여전히 외면하고 있습니다. 특별법 제정도 요원합니다. 한국인 원폭피해자들과 그 후손들의 아픔을 어루만질 수 있는 법과 제도가 정비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뜻에서 ‘합천 평화의집’과 함께 ‘잊혀진 70년, 한국인 원폭피해자들과 후손들’을 연재합니다. <편집자>

-잊혀진 70년, 한국인 원폭피해자와 후손들-

1. 그날 그곳에…

‘원폭, 그리고 한국인 원폭피해자’

1945년 8월 6일과 9일, 미국은 인류역사상 최초의 핵무기인 원자폭탄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했습니다. 원폭으로 인해 생긴 열과 폭풍은 폭심지로부터 2km 이내의 모든 것을 전파, 전소했습니다. 또한, 원폭이 터진 후 폭발과 화재로 생긴 먼지와 그을음이 한데 뒤섞여 방사능 덩어리인 ‘검은비’를 만들어냈습니다. 이로 인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약 70만 명의 사람들이 피폭을 당했습니다.

▲ 1945년 8월 9일 일본 나가사키 원폭 투하 직후 버섯구름 (사진=합천 평화의집, http://pixabay.com)


하지만,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인해 피해를 당한 것은 일본 사람들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강제징용이나 일제의 식민지 정책으로 인해 일본으로 간 많은 당시 조선인들도 원자폭탄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현재까지도 한국인 원폭피해자 수, 사망자 수 및 피해 정도에 대해서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히로시마에서 약 7만 명, 나가사키에서 약 3만 명이 피폭되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두 차례에 걸친 원폭으로 인해 원폭피해자 10만 명 중 5만 명은 현장에서 숨졌고, 이들 중 4만 3천여 명이 한반도 남쪽으로 귀국했습니다.

‘죽어서도 차별 받는 한국인 원폭피해자’

“원자폭탄을 맞은 조선인, 그들은 모국어로 울었고, 모국어로 신음했다.
아파서 신음할 때 일본어로는 그것을 ‘이타이’라고 한다. 일본인들은 ‘이타이! 이타이!’ 하며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아이고…… 아이고……’하며 신음했고, ‘어머니…… 어머니……’ 부르며 울부짖었다. 그렇게 소리치며 한 사람씩 죽어갔다.
그 어떤 압제도 고통도, 질곡의 세월도 이 모국어를 빼앗아가지는 못했다. 그리고 일본인 구원대는 ‘아이고, 아이고, 어머니…… 아이고, 어머니’하고 울부짖는 조선인들을, 결코 병원으로 옮겨주지 않았다. 조선말을 하는 그들에게는 물도, 먹을 것도 주지 않았다. 방공호에서조차 그들은 내쫓겼다.“ - 까마귀(한수산 作) 중

원자폭탄은 일본인과 한국인(당시 조선인)을 구분하지 않고 떨어졌지만, 투하 이후 한국인들은 철저히 버림받고 차별받았습니다.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하고 대다수가 방치되었습니다. 심지어 나가사키에서는 원폭 투하 후의 사체처리나 복구 등 원폭의 잔해처리까지 담당하게 했습니다.

▲ 원폭이 투하된 나가사키의 모습. (사진=합천 평화의집, http://pixabay.com)


▲ 히로시마 원폭 돔. (사진=합천 평화의집, http://pixabay.com)


‘있어도 있지 않은 존재, 한국인 원폭피해자’

살아남은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은 목숨을 걸고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이들을 맞이한 것은 차별과 멸시였습니다. 일본으로 간 것이 친일로 왜곡되었고, 원폭으로 인한 상처와 흉터는 ‘몹쓸 병에 걸린 사람’이라는 낙인이 되었습니다. 결혼을 하는 것도,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모두 힘들었습니다.

한국인 원폭피해자는 자국민을 보호해야 할 한국 정부, 전쟁의 책임이 있는 일본 정부, 원자폭탄을 투하한 미국 정부로부터 어떠한 사과와 지원도 받지 못한 채 후유증과 빈곤 속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결국,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은 스스로 인권을 찾기 위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직접 소송과 재판을 해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아무런 외교적 지원과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오랜 재판 끝에 일본 정부로부터 ‘원폭피해자’라는 사실을 인정받고, 배상이 아닌 “인도적 차원”의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현재 국내에는 2,524명(2015년 9월 30일 기준)의 원폭피해자가 <한국원폭피해자협회>에 등록되어 있으나 실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합천에는 원폭피해자를 위한 유일한 시설인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이 있으나, 정원이 110명밖에 되지 않아 국내 거주하고 있는 원폭피해자 수보다 턱없이 부족합니다.

▲ 히로시마 원폭 돔. (사진=합천 평화의집, http://pixabay.com)

‘세계에서 원폭피해자가 두 번째로 많은 나라’

한국은 세계에서 원폭피해자가 두 번째로 많은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존재는 우리의 역사와 기억 속에서 잊혀져 있었습니다. 또한, 한국인 원폭 피해 규모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고,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법과 제도조차 없습니다.

원폭이 투하된 지 어느새 70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전쟁과 핵 피해의 증인인 한국인 원폭피해자도 6% 정도밖에 생존해 있지 않습니다.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의 평균 연령은 82세가 되었고, 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역사적, 정치적 배경 속에서 생겨난 희생자입니다.
한국인 원폭피해자 문제는 단순히 과거와 역사의 문제도, 특정 피해자만의 문제도, 개인의 문제도 아닌 우리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또한, 인권과 생명의 문제입니다.

▲ 경남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 (사진=합천 평화의집, @장성하)


합천평화의집은 2002년, 한국인 원폭2세피해자 故 김형률님의 커밍아웃에서 시작된 한국원폭2세 인권운동의 성과를 모아 2010년 3월, 한국원폭2세와 뜻있는 시민단체가 협력하여 ‘한국의 히로시마’ 합천에 설립한 비핵․평화운동 시민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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