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산목(山木)'에 쓸모없는 나무 얘기가 나온다. 장자가 산 속을 거닐다 잎과 가지가 무성한 나무를 보았다. 그런데 그 옆에 있는 목수가 그 나무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무라는 것이 이유였다. 장자는 "쓸모없다는 점이 오히려 천수(天壽)를 누리게 한다"고 탄식한다. 곧은 나무는 작은 것은 화살대 용도로, 중간 것은 지팡이 용도로, 큰 것은 기둥 용도로 베어지지만, 옹이투성이의 뒤틀리고 굽은 나무는 살아남는다.
중국 고사성어 새옹지마(塞翁之馬)에도 같은 사상이 나타난다. 새옹의 아들이 말을 타다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져 불구가 되었다. 새옹은 위로의 말을 건네는 마을사람들에게 세상일은 두고봐야 한다면서 개의치 않았다. 얼마 후 전쟁이 나자 다른집 성한 아들들은 징집되어 전사했지만 새옹의 불구자 아들은 (쓸모가 없다고) 징집되지 않아 무사했다.
이 이야기들은 전설에 지나지 않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다음의 예들을 보시라.
그리스 크레타 섬에는 3,000살짜리 올리브나무가 있다. 이 나무가 이렇게 오래 살아남은 이유는 속이 비었기 때문이다. 속이 찬 다른 올리브나무들이 베어질 때, 이 나무는 빈속이 닭장으로 이용되면서 살아남았다.
'쓸모없음의 쓸모있음'의 놀라운 예이다. 속이 비어 목재로서는 쓸모가 없었기에 살아남았다. 게다가 그 빈속이 닭장으로서 쓸모가 있었기에 더 오래 살아남아 있다.
쓸모가 없어서 오래 살아남았던 나무가 또 있다. 2012년에 사망한 미국 플로리다 주의 '상원의원나무(The Senator Tree)'이다. 당시 3,500살이었던 이 나무는 속이 비어있어 벌목을 피해갈 수 있었다. 쓸모가 없어 오래 살아남은 것이다. 이 나무는, 직경이 6m에 가까운 몸통에 사람이 들어가 설 수 있을 정도로 큰 구멍이 나 있었는데, 십대청소년들이 이 구멍을 마약흡입장소로 사용하다 낸 불에 타죽은 것이다. 쓸모가 없어 살아 있다가, 갑자기 쓸모가 생겨 갑자기 사망한 기이한 경우이다.
장자 소요유(逍遙遊)에서 장자는 맞수인 혜자가 자기더러 "너는 우리집에 있는 뒤틀린 옹이투성이의 가죽나무처럼 쓸모없는 놈"이라고 비난하자, 너희집 가죽나무는 그늘이나 쉼터로 쓸 수 있다면서, "세상 어느 것이나 쓸모가 있다"고 주장한다. "쓸모없어 보이는 것도 알고 보면 다 쓸모가 있다"는 말이다. '세상에 쓸모있음'과 '천수를 누리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장자에게는 분명히, 천수를 누리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이에 비해, 대승불교의 근본사상인 '상구보리 하화중생'은 ‘세상에 대해서 쓸모가 있자’는 사상이다. 보리(깨달음, 깨인 마음, 맑고 밝고 어질며 지혜로운 마음)를 얻은 다음 그 보리로 중생을 구제하자는 사상이다. 이는 보리를 얻어 그 결과 우주가 없어질 때까지 천수를 누리고 나아가 우주가 없어진 후까지도 무한한 수명을 누리자는 사상이 아니다, 즉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상주불변(常住不變)하는 참나(眞我 진아 true atman)를 주장하는 사상이 아니다. 고통의 사바세계로 뛰어들어 타인의 고통을 구제하자는 이타적이고 적극적인 사상이다.
쓸모가 없는 것도 쓸모가 있다. 이처럼 쓸모는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다. 쓸모는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쓸모가 고정된 것도 아니다. 시공에 따라 쓰일 곳이 달라진다. 쓸모가 있던 것이 쓸모가 없어지고, 쓸모가 없는 것에 쓸모가 생긴다. 이때 여기 쓸모가 있었던 것이 저때 저기에 쓸모가 생기기도 한다. 누구나 시공에 따라 그때그때 환경에 맞는 쓸모를 스스로 만들어 가면 될 일이다. 세상에 대한 쓸모이건 자신에 대한 쓸모이건 이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이런 관점이 가능한 것은 일체가 무아(無我)이고 무상(無常)이기 때문이다. 고정된 주체와 객체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쓸모 있는 것들과 쓸모없는 것들은 모두 상호작용을 통한 끝없는 변화 속에 있다. 이걸 연기(緣起)라고 한다. 그래서 알고 보면 쓸모없는 것도 없고 쓸모 있는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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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switched to the doctrine of the Self (atman), = 아트만-교리로 바꾸고
……insisting nirvana (P., nibbana) is the true Self. = “열반이 참나”라는 주장을 하고
-- 그들의 주장에 空/無我가 있는가? 本覺이 있는가? 또 다음과 같은 열반에 관한 내용이 있는가?
"비구들이여, 태어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는 것이 있다.
비구들이여, 태어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는 것이 없다면,
세상에서 태어나고 생겨나고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것으로부터의 여읨이 알려질 수 없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태어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는 것이 있으므로
세상에서 태어나고 생겨나고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것으로부터의 여읨이 알려진다.”
(우다나, 열반의 경)
근데와 같은 한국의 여래장-진여론자들도 저들과 같은 당당한 취급을 해달라는 것인~겨?
-- 안 될 건 뭔가? 꼭 바미얀 大佛 날리듯 날려야 겠냐?
저~엉~말? --- 알았네… 외도는 나의 친구네…
-- 자기를 친구삼는 것도 좋은 방법이야. 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