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된 통도사 학춤, 80년 만에 공식 재현
단절된 통도사 학춤, 80년 만에 공식 재현
  • 김종일 기자
  • 승인 2015.10.16 17:1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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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백성 스님 “부친에게 사사 받아, 출가승으로 소임 다할 뿐”

지난 1935년께 단절된 것으로 전해지는 통도사 학춤[鶴舞]이 80년 만에 재현된다. 오는 18일 오후 3시 창건 제1370주년 개산대제에서다.

통도사 학춤은 지난 80년 간 선방 스님들을 중심으로 “스님이 마음공부는 하지 않고 춤만 춘다”는 이유로 배척당해 왔다. 통도사 학춤이 통도사에서 직접 공연무대를 깔아 주며 불자들 앞에 설 수 있었던 것은 한 스님의 평생 노고가 있었기 때문으로 확인됐다.

통도사에서 공식 공연을 개최하는 백성 스님을 만났다. <편집자 주>

▲ 백성 스님은 아버지로부터 학춤을 사사 받아 통도사 전통춤의 맥을 잇고 있다

-통도사 학춤에 대해 설명해 달라.

사찰학춤은 통도사 창건 이후에도 대대로 승려들에 의해 계승된 춤이다. 불교에서 학은 부처님의 화현이며 스님을 상징한다. 사찰에서의 학춤은 장삼의 넓고 긴 소매를 한껏 활용한 불교무용의 극치이다.

-전거가 무엇인가.

우리나라 불교문화 속에서 학은 게송, 이양, 승학, 화현, 식육, 육아, 출생, 장엄, 상서, 정령 등 다양 형태로 나타난다. 본보기를 들면, 석가모니불 정근에 학과 관련한 표현이 나온다. 학수쌍존(鶴樹常存)이다. 염송 가운데 ‘영산불멸 학수쌍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靈山不滅 鶴樹常存, 是我本師 釋迦牟尼佛)’이라고 한다. 이 때 학수쌍존이라고 한 이유는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열반하신 곳이 구시나가라의 사라나무 아래인데 부처님께서 누우신 양편에 있는 나무라는 뜻에서 사라쌍수라고 하며, 두 줄로 선 양쪽 나무 중 한쪽 그루가 부처님 열반이 슬퍼 희게 된 모습이 학의 깃과 같이 됐다고 하여 학수라고 한데서 기인했다고 한다.

-다른 내용은 없는지.

많다. 불교전통승려교육 기관을 줄여서 강원이라 부른다. 다양한 교재 가운데 초발심자가 배우는 <자경문>이 있다. 자경문은 야운비구(野雲比丘, 신라 원효 스님의 제자)가 작성했다. 야운 비구가 쓴 내용에 학이 나온다. <자경문>에서 나타나는 학은 추수한 논에서 벼이삭을 주워 먹고 스스로 만족하는 안빈낙도조(安貧樂道鳥)로 표현된다. 학은 욕심이 없는 사람, 적게 먹는 사람, 세속의 명예에 관심 없는 사람 등으로 의인화하게 됐다.

-학이 스님을 상징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맞다.

-통도사에서 학춤이 금지됐던 이유가 뭔가.

이야기가 길다. 내 증조부(통도사도감 歷任. 김두수)가 통도사로부터 땅을 임차한 이들이 생산한 쌀을 가을철에 통도사에 납품 대행하는 일을 했던 것 같다. 스님들에게 저녁공양 올리는 자리였다. 스님들이 “김 처사! 춤(학춤) 한번 춰 봐”라고 권했던 모양이다. 할배(할아버지)는 을의 입장이다보니 갑의 청을 당연히 들어줬다. 흥이 난 스님들이 울 할배하고 함께 더덩실 학춤을 췄다고 한다.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맥이 끊어졌다고 부친(김덕명. 92세. 1924년생으로 와병으로 누워 계시며 양산학춤의 대가로 불린다.)이 말했다. 차치하고, 한마디로 “고요해야 할 절간에서 왠 춤이냐?”라는 왜곡된 인식이 우세했다. 알고 보면 학춤은 우리 스님들의 것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통도사 학춤은 누구에게서 배웠나?

속가부친으로부터 배웠다. 부친은 학춤의 대가이다. 양산학춤의 원조라고 해야 한다. 부친은 학에 관한 생태학적 학술적 논리는 전혀 없다. “그냥 (춤을) 추셨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스님은 언제부터 학춤을 췄나?

중이 되겠다고 맘먹기 전 1980년 11월 22일 부산에서 지금은 작고하신 명창 박동진, 안비취, 장소팔, 고춘자 선생들과 함께 속가 부친을 모시고 공연을 한 적이 있었다. 시쳇말로 생계유지형 ‘딴따라’였던 셈이다. 그 공연을 마지막으로 1981년 월하 스님을 은사로 출가를 했다. 그 때 출가 동기가 “학춤은 불무(佛舞)다. 통도사 학춤을 기필코 이어 나가야겠다.”고 화두(話頭)로 삼았다. 벌써 34년 전 이야기이다.

-

▲ 부화기 속의 학알
당시 스님들이 학춤을 인정해 줬나?

어데요? 명색이 중이 춤질이 뭐냐? 차라리 다른 종단으로 가라는 등 막말도 많이 들었고 구박도 심했다. 공식적으로는 부르지 않았다. 가끔씩 제사 지낼 때나 불렀다. 1년에 서너 번이나 췄나 싶다. 돈 한 푼 받지 못했다. 참 배고팠다. 그나마 내 춤을 조금이나마 알아주는 사람들이 불러줬다.

-누가 통도사학춤을 인정해 줬나요?

월정사 정념 스님이 자주 불러줬다. 그 분은 일찍부터 학춤에 대해 깊은 조예를 갖고 계셨던 분이다. 정작 내 본사에서는 인정은 고사하고 공식적으로 불러 주는 것조차 꺼려했다. 어느 날 통도사에 평생교육원이 생긴 1년 후 쯤에 동진 스님(현 통도사 서운암 감원)으로부터 밤에 전화가 왔다. 성파 스님이 찾는다는 이유였다. 성파 스님은 “백성(스님)이가 추는 학춤은 통도사 꺼다. 그러니 평생교육원 프로그램에 넣어라”라고 했다. 나는 성파 스님 전화번호도 몰랐다. 동진 스님이 성파 스님 전화번호를 알려줘서 전화 드렸다. 그랬더니 “내일 당장 들어와라”라고 했다.

-성파 스님이 인정해 주셨으니 매우 기뻤을 것?

“오래 살다보니 이런 일도 다 있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하하(스님은 회한이 담긴 웃음을 보였다.) 무시와 멸시를 당한지 24년 만이었다.
통도사평생교육원에 가보니, 다도가 어떻고 사찰 음식이 어떻고, 여하튼 다른 사찰에서 하는 것은 모두 가르치고 있었다. 음식과 차를 무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차별적인 콘텐츠가 통도사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말이다. 막상 가르치려하니 배운다는 학생이 거의 없었다는 이유였다. 고생 좀 했다.

-그 후로 통도사 공식행사에 참여하셔서 학춤을 선보였는지.

어데요(강한 경상도식 부정을 뜻하는 표현)? 턱도 없었다. 통도사 학춤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교정되지 않았다. 여전히 ‘춤쟁이’라고 불린다. 그래도 뜻을 굽히지 않고 열심히 추었다.

-춤만 췄는지?

학술적인 배경이 있어야겠다는 판단 하에 대학에서 조류학과 생태학 불교학 등을 공부했다. (백성 스님은 이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학술적 증명이 없다면 내 춤은 공허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공허할 뿐 만 아니라 “영원히 ‘춤쟁이’라는 낙오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독했어요. (KTX 차표 한 묶음을 보여주며) 서울에 첫 기차타고 가서 공부한 다음 안동으로 내려가서 또 공부했다. 그래서 그런지 변변한 집한 채 없이 살고 있다. 허허허. 비 가리고 눈 맞지 않으면 된 것 아닌가.

▲ 두루미
-공식적으로 사부대중이 모인 자리에서 통도사 학춤을 선보인 것은 몇 년 만의 일인가? 그것도 본사인 통도사에서.

80년 만이다. 1935년에 맥이 끊겼고, 내가 1981년부터 다시 추기 시작했으니까. 정확히 80년 만의 재현이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한 구절 소개해도 되겠나.            
“날이 저무니 학은 절에 깃들이고, 가을에 중은 돌다리를 지나간다.(瞑鶴樓金刹, 秋僧過石橋)”는 시(詩)이다. 조선 광해군 6년(1614) 이수광이 지은 ‘<지봉유설>에 나오는 시이다. 원작자는 송나라 때 승려인 혜숭으로 알려진다. 이 말로 대신한다.

-감성적인 부분만 물은 것 같다.
중이나 속가 분들이나 다 사람이다. 중에게 감성이 없다면 이미 그는 적멸)한 생불이거나 아니면 몸이 불편한 사람일 뿐이다.
 
-모두(冒頭)에 스님이 학은 부처님의 화현이라는 말했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아미타경> 금수연법분(禽樹演法分)에는 아미타불이 화현으로 만든 다양한 종류의 새 가운데 백학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좀 길다. 사리불 피국 상유종종 기묘잡색지조 백학공작앵무사리 가능빈가 공명지조 시제중조 주야육시 출화아음 기음 연차오근오력 칠보리분 팔성도분 여시등법 기토중생 문시음파 개실염불 염법염승(舍利佛 彼國 常有種種 奇妙雜色之鳥 白鶴孔雀鸚鵡舍利 迦陵頻伽 共命之鳥 是諸衆鳥 晝夜六時 出和雅音 其音 演暢五根五力 七菩提分 八聖道分 如是等法 其土衆生 聞是音波 皆念佛 念法念僧). 이 말은 “사리불이여. 그 불국토에는 오근과 오력과 칠보리분과 팔정도를 밤낮으로 가리지 않고 항상 화평하고 맑은 소리로 노래하는 백학 공작 앵무새 사리새 가릉빈가 공명조 등 아름답고 기묘한 여러 빛깔을 가진 새들이 있느니라. 그 나라 중생들은 그 노래 소리를 들으면, 부처님을 생각하고 법문을 생각하며 승가를 생각하게 되느니라”라는 뜻이다. 따라서 학을 부처님 화현으로 보는 것이며, 스님으로 판단하는 근거이다.

-통도사 학춤은 불무(佛舞)인가 승무(僧舞)인가

불무이다. 불무가 자기 수행을 내포하고 있다면, 승무는 제3자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통도사 옛날 스님들은 수행 방편으로 학춤을 췄다.

-스님 뒤를 이을 후계자는 있나?

불행히도 없다. 내가 죽으면 통도사 학춤은 맥을 잇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등재해야 되는 것 아닌가?

그 판단은 내 몫이 아니다. 승려가 사심(私心)과 사심(邪心)으로 학춤을 가까이 한다면, 그것은 이미 불무(佛舞)가 아닌 놀이에 불과 할 뿐이다. 나는 통도사 학춤을 다음 세대에 이어줘야 할 풀무(불을 피울 때 바람을 일으키는 기구)일 뿐이다. 통도사 학춤이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등재될 것이냐 말 것이냐는 통도사와 국가의 몫이다. 나는 출가승으로써 내 소임을 다 할 뿐이다.

▲ 학춤을 시연하는 백성 스님. 스님은 무형문화재 지정은 통도사와 국가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말한다

백성 스님은

속가명은 김성수다. 올해 63세로 1981년 월하스님을 은사로 통도사에서 출가했다. 통도사내 암자인 자장암 현문스님과는 사형사제지간이며, 통도사 교무과장과 교무국장을 지냈다. 1981년 불가에 입문 한 후 줄곧 통도사 학춤만을 위해 수행과 연구를 거듭해 왔다. 1972년 부산에 있는 부경대학교 전신인 부산수산대 화공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한동안 일반 회사에서 실험실장을 지내기도 했다.

부친인 양산학춤 대가 김덕명 옹(翁)의 뒤를 이어 자타공인 대한민국 최고의 학춤대가로 손꼽힌다. 수행 생활 중 동국대에서 한국음악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 다시 불교학과에 들어가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또 안동대 민속학과 박사과정도 수료하는 등 학문연구에 끝없이 정진했다. 경북대학교에서 조류생태학으로 이학박사를 취득했다.

2015년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금선불원장으로 주석하고 있다. 울산 범서읍에 있다.
통도사 창건 1370년 개산대제를 맞아 공식적으로 통도사에서 오는 10월 18일 시연한다. 스님은 부산 동래학춤, 양산학춤, 울산학춤, 통도사 학춤 등을 통틀어 최고의 학식을 갖췄을 뿐 만 아니라 학춤에 대한 최고 권위자로 꼽힌다.

한편 국내 최고의 학춤 권위자 백성스님 분류에 따르면, 우리나라 학춤은 탈학춤(궁중학춤), 갓학춤(민속학춤), 관학춤(사찰학춤) 등이 있으며, 탈학춤은 악학궤범에 수록되어 있고, 민속학춤인 갓학춤은 양산과 부산 동래 및 울산학춤 등으로 갈라진다. 관(冠)학춤은 유일하게 통도사에서만 전래되고 있다고 한다. 최근 학춤의 국가중요무형문화재 등재에 백성 스님이 최우선 거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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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탑 2015-10-19 11:34:41
우리의 고유 전통문화
잘 보존하시고
많은 후학들을 많이 많이 길러 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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