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장이 발표한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라는 글에 논쟁이 있다. 그래서 간화선 전공자이고, 간화선 수행으로 마음탐사를 하는 사람으로서, 대체 어떤 내용인가 궁금해 살펴보았다. 내용을 축약하면 다음과 같다.
‘ 깨달음은 원래 붓다와의 문답과 기억의 억념(憶念)을 뜻하는 사띠(sati)로 연기(緣起)와 공(空)을 ‘이해하는 깨달음’이었지 궁극적 완성의 ‘이루는 깨달음’이 아니었다. 조사선과 간화선을 봐도 기억을 뜻하는 사띠와 마찬가지로 깨달은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반추해서 ‘이해하는 깨달음’이다. 후기로 갈수록 사띠에 위파사나, 삼매, 선정들이 결합돼서 ‘이해하는 깨달음’이 ‘이루는 깨달음’으로 고준해지고 연금술처럼 신비화됐지만, 오늘날은 깨달음에 스마트 폰, 다양한 분야의 책들만 봐도 연기와 공의 이해가 가능하다. 독서와 사유야말로 이 현대시대의 사띠이자 간화선이다. 그러니 ‘이해하는 깨달음’은 가능하고 실천의 영역인 역사(사트바, 자비보살행)를 실천하지 못해도 깨달음은 훼손되지 않으며, ‘이루는 깨달음’은 자신도 중생도 구제하지만 그런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
그렇다면, 먼저 깨달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본다.
붓다는 책에서 볼 수 있는 것들, 의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출가한 것이 아니다. 어떤 문헌에서도, 어떤 의식의 이해로도 알 수가 없는 문제, 즉 인간이 나고 늙고 병들고 죽어야만 하는 가장 근원적 연유를 밝히기 위해서 출가했다.
붓다는 홀로 깊은 선정과 사유 중에 모든 것은 변해간다는 무상(無常)을 깨달았다. 무상한 중에 인무아(人無我) 법무아(法無我)도 깨달았다. 의식의 이해 차원을 벗어난 깊은 선정 중에 12연기로 생사와 세계를 통찰했으며, 고(苦)의 원인과 처방을 밝힌 4성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중도(中道), 중도로 가는 8가지 바른 길(八正道)을 밝혔다.
붓다의 수행이었던, 사띠(sati)는 37조도품뿐만 아니라, 대승불교의 지관(止觀) 정혜(定慧) 수행, 심지어 다른 종교의 명상수행에도 관통하는 키워드로, 이해(undetstand)가 아니라 마음집중(mindfulness), 깊은 알아차림(awareness)을 뜻한다. 이것은 몸의 감각과 마음의 의식, 무의식이 다 동원된 상태지, 그저 머리로 알아듣고 이해하고 통찰하는 수준이 아니다.
붓다가 행하던 호흡명상 수행법을 전한 중국 후한시대 안세고의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은 제목이 ‘아나바나(anapana, 들숨날숨) 사티(sati,念, 알아차림awarenesss, 마음집중mindfulness, 마음을 지킨다守意) 경’전이다.
붓다는 수시로 숲속에 들어 호흡명상을 했으며, 그 명상의 주요 수행법이 사티(sati,念) 인 것이다. 붓다가 호흡을 지켜보면서 선정에 들었다면 간화선자는 화두를 들고 선정에 든다. 호흡이든 화두든 사마타(止)든 위파사나(觀)든 선정(定)이든 지혜(慧)든 좌선이든 행선이든, 알아차리기(사티)는 모든 관찰 통찰 수행 명상을 관통하는 기저이다.
이 사티를 가르침을 외워 기억해 ‘이해하는 깨달음’의 차원에서 해석하는 것은 붓다의 말씀에도 어긋난다. 붓다는 “내가 한 말이라도 그냥 믿지 말고 꼭 스스로 확인해 보라.” 하지 않았는가?
나아가 붓다는 물질의 영역을 관찰하고 비물질의 영역을 관찰해서 소멸의 영역에 이른 이들은 생사윤회에서 벗어난다’(<수타니파타> 큰 장) 고 하였다. 물질의 영역은 감각의 영역이고 비물질의 영역은 정신의 영역이며 소멸의 영역은 물질과 몸, 정신과 마음의 장애를 모두 벗어난 영역이다. 이것을 어찌 가르쳐서 외우고 전달해서 이해로 깨달을 수 있겠는가?
붓다의 제자들 중 붓다의 말씀을 누구보다 잘 듣고 잘 기억해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던 아난이 깨닫지 못하여 오백나한이 모인 결집에도 참석하지 못할 처지라 낙담한 채 베개를 베고 돌아 눕다가 깨우쳐서 가까스로 아라한의 결집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일화와, 잘 외운 아난보다는 지혜제일인 사리자에게 법을 부촉했다는 고대 경전인 <수타니파타>의 기록, 그리고 꽃을 들어 보이자(拈花) 미소로 화답한 가섭에게 마음을 부촉했다는 <오등회원五燈會元>의 기록의 의미는 무엇이겠는가?
깨달음은 이해가 아니라 체험, 체득이다. 깨달음은 새가 알을 깨고 나온 것과 같기 때문에 절대 다시 달걀 속으로 돌아 갈 수 없다. 중생의 고통을 듣는 관세음보살과 중생의 고통을 건지러 간 지장보살이 어떻게 이해의 차원에 머무르면서 중생들을 구제하지 못해도 나의 ‘이해의 깨달음은 훼손되지 않는다’ 하겠는가.
‘이해하는 깨달음’과 ‘이루는 깨달음’이라는 용어는 형태상 기왕의 해오(解悟)와 증오(證悟)를 풀이한 듯하다. 하나의 삼매를 제대로 이루면 백천삼매가 가능해지듯, 참으로 이해한 깨달음이라면 이루는 깨달음으로 변해가는 게 아니다. 자비보살행으로 확장될 뿐이다.
‘깨달음과 역사…’ 저자는 시종일관 사띠와 간화선 모두 대화를 기억하고 잘 성찰해, 이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염(念)을 그저 기억의 억념(憶念) 차원으로 이해하는 것은 선종(禪宗)인 대한불교조계종의 취지에도 맞지 않다.
‘직(直)’, ‘돈(頓)’으로 본래 마음으로 바로 들어가 성품을 보라는, 조계종의 연원인 조사선의 돈오(頓悟) 취지에도 어긋난다.
‘마른 똥 막대기’를 들고 기억해서 잘 성찰하라는 말인가? 화두와 하나가 되어서(打成一片) 바로 비추라(照顧脚下)는 간화선의 취지에도 어긋난다. 맑음과 밝음은 스스로 아는 작용이 비추는 보너스다.
‘간화선은 참구(參句)해야지 참의(參意)해서는 안 된다’는 선사들의 가르침에도 어긋난다.
모두 체험을 강조한 수행법들이다.
‘깨달음이 이해’라는 저자의 왜곡된 인식은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중국 선불교의 탄생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도 드러난다. ‘깨달음과 역사…’ 저자는 중국선불교의 탄생이 ‘중국 교학 불교의 난해한 학자적 불교의 장벽에 대한 대중 불교의 필요로 탄생하였다’고 하였다.
중국 선불교의 탄생은 인도승 달마의 도래를 계기로 중국 교학 불교의 이해에 치중한 이론적 천착이나 지적 이해에 갇힌 사변적 불교를 붓다의 깨달음, 실천정신으로 다시 돌이키자는 성찰적 심자각(心自覺)에서 비롯됐다. ‘깨달음과 역사…’ 저자가 언급한 선불교의 대중불교화라는 측면은 오히려 남종선 이후에 가능해진 것이고, 실제로 초기 선종은 달마대사의 9년간 면벽이나, 혜가의 단비, 도신, 우두종, 김무상 스님들에서 보듯 마음의 본질에 도달해보려는 선사들의 치열한 추구로 가득 차 있다. 마조스님, 백장스님 대에 와서야 평상심(平常心), 생활선의 대중적 전통이 확립된다. 그리고 혜능은 마음의 좌선을 강조한 것이지 ‘좌선을 배격’한 것이 아니다.
‘깨달음과 역사….’ 저자는 ‘현대 사회에서 깨달음을 얻는 방법’으로 타 학문의 영역까지 두루 제시하지만, 막상 선정 명상에 대한 언급은 ‘이루는 깨달음’에 대한 회의(懷疑)로 일관한다. 2000명의 선사들을 변방으로 돌리고, 스마트폰으로 자료 찾고 책 읽고 토론하고 ‘이해하는 깨달음’을 중심 수행법으로 주장하니, 대한 불교조계종이 새로운 종파로 전환하려나 보다.
화두의심은 쉽지 않다. 그래도 끝까지 수선(修禪)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혹한의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것은 무모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산을 넘는 뜻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불가능에 도전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인류는 비행기를 탄다. 마음의 의식을 넘어 무의식의 영역을 탐사하여 생명의 비밀을 알고 싶은 사람도 있다. 인류의 앎과 지혜, 삶은 인류의 힘으로 개척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에 의해 인류의 지평은 확장될 것이다. 명상 수행을 도구로 유가사(불교요가 수행자)들이 도달했던 아뢰야식을 탐사하는 이들도 있다. 눈을 돌리면 달라이라마, 틱낫한, 아잔브람 등등 세계적 불교 명상가들이 있다.
우리 불교 현재를 생각하면 슬프다. 책 읽고 토론하고 이해해서 깨닫고(?) 나서 승려들은 ‘불교자본론’으로 돈을 관리하고, 보살행은 신도들이 하는 종파가 탄생하려는가? 이 지경이 된 데는 승가에 만연한 물신주의를 바로 잡지 못하고 종단 지도부도 바로 잡지 못하는 선승들의 허물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곡학아세(曲學阿世)를 해서는 안 된다. 남도 속이고 나도 속이고 세상을 다 속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기(緣起)하는 진실 자체는 속이지 못하니 어쩌랴.
유경 (도서출판 마인드랩MindLab대표, 동국대 선학과 대학원졸. 석사. 간화선 수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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걔들 누가 관리해요? 탁마 님이요? 얘들이 산 중에서 서울역, 버스터미날, 지하철 여기저기로 다시 쫓겨나면 사회가 지저분해집니다. 식당에서 밥 먹을 때면 늘 대하게 되는 것이 이럴 겁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셈보살 탁-탁-탁... 그러니 대답 기대하지 마세요. 그냥 두는 것이 나아요. 홍등가 없애는 것과는 좀 달라요.
보시면서도 모르는 걸 보면 탁마 님도 안과에 가 보심이 좋을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