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에서 태어난 수양대군(1417-1468)이 성장하자 왕국의 법도대로 사저(私邸)로 나가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왕이 되기 전에 살았던 사저를 잠저(潛邸)라고 했다.
수양대군이 나중에 세조가 되었으니 그가 살았던 집은 잠저라고 한다. 세조의 잠저는 지금의 덕수궁 자리였다. 그 곳에서 계유정란을 일으켰다. 계유정란이란 왕이 되기 위해 정권을 탈취한 일종의 군사 쿠데타였다. 용이 발톱을 세운 것이다.
덕수궁 뒷능선에는 태조의 신덕왕후 강씨가 잠들었던 정릉이 있었다. 계모였던 신덕왕후릉을 보기 싫어한 태종 이방원이 능의 면적 1백보로 축소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 이에 세력 있는 집에서 분연(紛然)하게 다투어 좋은 땅을 점령하였는데, 좌정승 하륜(河崙, 1347-1416)이 여러 사위를 거느리고 이를 선점(先占)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볼 때 태종이방원의 공신이자 영의정을 역임한 하륜의 집이 이곳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후 세조는 장자 덕종의 아들인 장손 월산대군(1454-1488)에게 이집을 물려주었다.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의주로 피란 갔다가 한양으로 돌아오니 궁궐은 불타버렸으니, 1593년(선조26년) 10월4일에 정릉동(貞陵洞)에 있는 고(故)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집을 행궁(行宮)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이곳은 한양 사궁(四宮)에 속하게 되었다. 이곳을 광해군 때에는 경운궁, 인조 때에는 명례궁으로 부르다가, 순조 때에 덕수궁으로 개칭했다.
사람은 땅의 기운에 따라가기 마련
그러고 보니 덕수궁 자리는 세조와 성종의 잠저가 되는 셈이다. 성종은 형이 원산대군과 함께 이곳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덕수궁의 풍수적 입지를 살펴보면 결함이 많은 자리이다. 사신사를 살펴보면, 일단 주산이 위엄이 없다. 인왕산에서 내려온 능선으로 동네 뒷산에 불과하다. 좌청룡은 없고, 다만 남산에서 원구단을 지나 청계천까지 능선이 내려오고 있는 모습은 특이하다. 한양성벽이 우백호이다. 주산은 약한데 좌측에 있는 남산이 가깝고 거칠어서 흉한 모습이다. 덕수궁의 북동쪽이 청계천으로 뚫려 있다, 지금은 서울시청이 막아있어서 그런 느낌을 찾아볼 수 없다.
결론적으로 고종(1852-1919)이 이곳에서 승하하고, 순종(1874-1926)이 이곳에서 즉위하였지만, 꼭두각시에 불과했으며, 오래 살지도 못했다. 조선망국의 현장인 셈이다. 경복궁이나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과 비교해 보아도 궁궐의 면모를 보여주기 힘든 규모이다.
풍수적 관점에서는 궁궐을 볼 때 주산의 능력을 크게 친다. 그 다음에 안산의 모습이 중요하다. 덕수궁을 보면 주산도 힘이 없고 안산도 그냥 흘러가는 우백호의 한 자락에 불과하다. 국력이 미약하여 열강의 입김에 이리저리 끌려다녔던 조선왕국의 답답함과 백성들의 비참했던 현실이 우리 가슴에 그려진다. 그들이 곧 우리의 증조부 고조부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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