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 기나긴 여로
사랑, 그 기나긴 여로
  • 강병균 교수(포항공대)
  • 승인 2015.05.11 10:5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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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47.

사랑은 과거입니까? 아니면 현재입니까?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흔히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현재 이 순간의 사랑을 하라.’
 
하지만 이 말은 문제점이 큽니다. 우리가 처음 사랑할 때는 가능할지 모르나, 나중 사랑은 그렇지 않읍니다. 이미 많은 과거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또는 첫눈에 누구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에는, 절대, 현재만 개입되어있지 않읍니다. 그 사람이 살아온 과거가 들어있읍니다. 과거에 싫어하던 사람의 성향을 가진 사람은, 처음부터 싫어할 수 있읍니다. 예를 들어 지나치게 검소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면 그런 성향의 여자는 싫어할 수 있습니다. 또는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폭력을 겪으며 자란 여자에게, 술 잘하는 남자는 기피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거꾸로,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의 경우나, 또는 무척 사랑했으나 피치 못해 헤어진 경우는, 그와 비슷한 사람을 보면 처음부터 좋아할 수 있읍니다. 이런 경우는 처음 그 순간부터 크고 강렬한 사랑을 할 수 있읍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사랑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사랑을 키워가다 보면 많은 역사가 쌓입니다. 첫눈에 반한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어느 것도 머물러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사람들은 변화를 좋아합니다. 변화를 당하는 것은 싫어할지 모르나, 변화를 만드는 것은 좋아합니다. 그래서 당 현종(玄宗)은 천하절색 양귀비 이외에도 후궁이 있었읍니다. 심지어 학문을 광적으로 사랑한 성군 세종대왕도 5명의 후궁을 두었습니다. 이처럼 왕이 후궁을 두지 않는 경우는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계역사상 유일한 예외는 조선 제 18대 왕 현종(顯宗) 정도입니다.

그 순간에는 모든 과거가 들어있읍니다. 지금 헤어지지 않는 것은 과거의 힘입니다. 그리고 헤어지는 것도 과거의 힘입니다. 현재 이 순간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읍니다. 구태여 폭이 있는 현재를 말하려면, 현재는 사실상 지금부터 얼마 전까지를 말합니다. 짧게는 한 시간 전부터 지금까지이고, 길게는 십년 전부터 지금까지입니다. 두뇌는 과거에 대한 지식을 단기기억 형태로 일정기간 동안 어느 정도 저장하고 있으므로, 현재를 이렇게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합니다. 회의에 참석하면 회의가 끝날 때까지 참석자들이 한 중요한 발언을 기억하고 있어야 하며, 거래를 하는 경우는 거래가 끝날 때까지 상대방과 자신의 발언을 다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추상적인 개념은, 외부에 독립적으로 고정불변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뇌에서 구성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현재는 우리 뇌의 창조물일 따름입니다.

당신이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된 사람이 중병에 걸려 입원했을 때 수년간 그 사람의 대소변을 받아가며 간호할 수 없지만, 오래된 사랑에게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은 과거 때문입니다. 사랑의 역사 때문입니다. 험난한 생존경쟁의 장에서, 그리고 개체보존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는 자연계에서, 둘이 합쳐 진사회적(eusocial) 사랑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단순하지 않읍니다. 그리고 현재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인류를 그리고 생명계를 멸종하지 않고 지금까지 생존하게 한 위대한 힘입니다.

35억년 진화의 역사가 바로 사랑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시작할 때, 바로 이 35억년의 사랑이 다시 펼쳐지는 것입니다. 지금 진행 중인 지구상 모든 생명체의 사랑은, 35억년짜리 사랑이라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 어떤 사랑도 35억년 사랑의 반영이고 결실입니다. (사랑의 몸짓, 말짓, 마음짓이 모두 그렇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에게 일어나는 그 사랑의 목격자입니다. 사랑이 위대한 것은, 무기질에서 출발했지만 지금 이 위대한 생명과 문화를 이루게 한 근본적인 힘이기 때문입니다.

늙은 부인 또는 늙은 남편이 힘겹게 암투병을 합니다. 배우자로 하여금 잠을 설쳐가며 간병을 하게 하는 것은 둘 사이의 사랑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배우자와 마찬가지로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삶을 지금까지 유지하게 도와준 혈맹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입니다.

그 사랑과 고마움은 기억이 없으면 작동할 수 없습니다. 즉 기억이 사라지면 사랑도 불가능합니다. 중증치매에 걸린 배우자를 간호하는 것은 사랑이지만, 정작 환자는 간호해주는 배우자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장기기억까지 다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역사이고, 사랑은 기억입니다. 남녀 간의 사랑뿐만이 아니라 일체 모든 사랑이 그렇습니다. 이걸 불교에서는 업(業)이라고 합니다.

미국의 유머작가 프란 레보위츠(Fran Lebowitz, 1950~)는 말했습니다.

“단지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짓이다. 제일 친한 친구와 결혼하는 게 더 말이 된다. 당신은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를, 당신이 앞으로 사랑할 어느 누구보다도 좋아한다. 당신은 어떤 이가 ‘귀여운 코’를 가졌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로 삼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이 결혼상대를 택할 때는 바로 그런 짓을 한다: ”나는 당신의 (참을 수 없이 매력적인) 아랫입술로 인하여 당신과 남은 인생을 같이 살고자 합니다.“ 하하하. 하지만 이런 사랑의 열정은 인간으로 하여금 생의 고통과 부조리에 눈이 멀게 하여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만듭니다.

앞서 든 암 투병의 예처럼 부부는 살아가면서 친구가 됩니다. 시작은 레보위츠의 지적처럼 ‘아랫입술’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혹은 호르몬의 작용이었는지 몰라도, 부부는 살아가면서 결국 친구가 됩니다. 제일 친한 친구가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대소변을 받아가며 간병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은 정말 이상합니다. 원하는 것을 얻었다 싶지만 실제로는 쓸모없는 것을 얻고, 현자들이 비판하는 이상한 짓을, 그것도 이상한 이유와 동기로 하였지만, 결국 원하는 것을 얻기도 합니다. 사랑이라는 열병(熱病)이 우정이라는 양약(良藥)으로 변합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이상한 이유로’ 태어난다 합니다. 불교에 의하면 탐욕과 증오와 어리석음으로 태어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태어나지 않으면 반야지혜로 빛나는 깨달음도 삼독심(三毒心)의 불이 꺼진 열반도 없을 것이기에, 이 세상은 정말 기이한 세상입니다. 엉뚱한 구멍으로 들어가지만 결국 탈출을 하게 되는 기묘한 세상입니다. 중국산 들깨를 집어넣고 한국산 참기름을 짜내는 신통방통한 세상입니다.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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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한 해석 2015-05-11 13:40:29
'현재 이순간의 사랑을 하라'라고 말한 뜻을 정확히 알고 평을 해야 하는데,
지극히 자의적으로 뜻을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과거와 미래의 영향을 받는다고 하여도 그것에 대해서 뭘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지금-현재-에서만 가능하다.(과거로 돌아가고 미래에 가서 뭘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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