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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적 이념 기반 모색했지만 사상 정립 한계”
[전문] 민불련 30주년 기념 좌담회 ➁노선과 활동방향은
2015년 02월 21일 (토) 17:36:09 서현욱 기자 mytrea70@gmail.com

한국현대불교사에서 사회민주화와 불교개혁에 큰 발자취를 남긴 민중불교운동연합(이하 민불련)이 2015년 5월 4일 창립 30주년을 맞는다. 민불련은 1980년대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불교개혁운동에 참여했다. 우리 사회와 불교 내부에 끼친 궤적은 한국불교 현대사, 특히 운동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고리다. 94년 종단개혁이 가능했던 것 역시 민불련의 활동과 경험이 축적된 데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민불련은 민중불교운동을 위해 뭉쳤다. 민불운동의 정신은 현재도 여전히 유효하다. 민주주의불자회(구 민불동지모임, 대표 서동석)이 지난 12일 불교여성개발원 교육관에서 민중불교운동 활동과 계승, 그리고 시대적, 불교적 과제들에 대해 고민하는 좌담회를 가졌다.

민중불교운동연합에서 활동한 인물은 승·재가를 막론하고 우리 불교계 내부에 다양하다. 재가로는 종단과 불교개혁을 염원하는 재가불자 그룹으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김경호 바른불교 재가모임 공동대표도 민불련 출신이다. 교계단체를 맡아 활동하는 이들도 있고 제도권에서 활동하는 이들도 있다. 승가 역시 마찬가지다. 현 교육원장 현응 스님도 민불련 출신이다. 총무원장 자승 스님도 민불운동을 후원했다는 증언도 있다.

민주주의 불자회(구 민불동지모임)는 민불련의 활동을 지지하고 뜻을 함께 하는 일반 시민대중들과 불교 개혁, 청정승단 구현, 사부대중공동체 실현, 민주사회를 위한 사회적 실천과 기여, 소외된 이웃과 인권 문제 지원을 위한 제 사회단체와의 연대활동, 회원 상호간의 교류와 정보나눔 등 지속적이고 실현 가능한 활동을 모색할 예정이다. 1980년대 민불련이 추구했던 정신이 여전히 유효한 탓이다.

민중불교운동연합 30주년을 맞아 열린 좌담회 내용을 창립배경과 노선과 활동방향, 민중불교운동 정신계승과 향후 방향 등 3회로 나눠 전문을 소개한다. 민주주의불자회는 5월 4일 창립 30주년을 즈음해 세미나와 토론회 등도 준비하고 있다. 민불운동 정신을 계승하고 앞으로 불교운동, 그리고 사회운동을 어떻게 설정하고 조직화할 지를 고민하는 자리다. 좌담회는 이남재(전 민불련 3기 조직국장, 현 민주주의 불자회 사무총장) 씨의 사회로, 서동석(전 민불련 3기 의장, 현 민주주의 불자회 회장), 연담 스님(전 민불련 1기, 현 조계종 제주 천제사 주지), 김영국(전 대불련 회장, 전 민불련 기획국장, 현 ‘연경’불교정책연구소 소장), 이용성(전 민불련 2기 조직부장, 현 (사)풍경소리 사무총장), 김경호(전 민불련 3기 기획위원장, 현 지지협동조합 이사장) 씨가 참석했다. 유승무(현 중앙승가대 불교사회학과) 교수도 참석해 민불련에 대해 평가했다. <편집자 주>


이남재-사회정치적 공간이 형성되고 외적 공간이 만들어졌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주체적 역량들에 대한 것들이 충분히 자발적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이 없다면 스쳐 지나는 흐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민불련 모태인 민불연구회를 비롯해, 민불연구회 이전에 종단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점. 승가대 스님들이 자발적으로 연구회 만들고, 승가의 사회참여와 의식화 과정이 동인이 됐다. 승가와 재가가 함께 힘을 모아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측면의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 민불련이라고 본다. 이런 문제를 통해 사회정치적 조건들, 주위 역량 등에 대해 말했다. 창립 후 여익구 의장을 중심으로 집행부가 형성되고 사회적 투쟁을 벌여냈다. 노선과 방향은 어땠나?

김영국-1980년대에 개인적으로 불교신자면서, 사회문제라고 편안하게 말하지만 그 당시에 학생 청년들은 절박한 문제였다. 전두환이라는 반란수괴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광주에서 수많은 민중을 학살하고, 이런 정권이 들어서 이런 부분을 이야기하면 학내에까지 경찰이 상주하고 유인물 뿌리면 잡혀가고 상설적으로 감시하고 탄압하는 시대상황을 겪으면서 청년불자들은 우리가 불교인이라는 양심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여익구 선배를 중심으로 불교를 바꿔보면 되지 않을까 해서 비상종단에 참여했다. 다시 비상종단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그 이후에 83년에 대불련 회장을 하면서 1984년 동국대로 돌아가 민추위원장을 맡았다. 불교에서 운동을 한 사람들이 대거 학내운동으로 돌아가던가, 아니면 노동현장이나 농민현장으로 갔다. 그런 데서 역량이 축적이 돼서 1985년에 민불련이 창립이 된다.

85년 민불련이 창립되기 전에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2·12총선이 있었다. 돌아온 사형수, 이철 의원이 민청학련 때 사형선고 받은 사람이 전격 당선되고, 미국에 망명한 김대중도 들어오고 야권세력이 재편되면서 사회운동이나 학생운동이 올라갔을 때다. 당시 저치권이 내세운 게 직선제 개헌이었다. 민불련이 만들어지고 나서 바로 야당 직선제 개헌 투쟁에 함께 참여했다. 당시에는 한 단계 사회운동에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했다. 직선제 개헌 투쟁에 참여하면서 민불련 조직이 일찍 약화된 것이 아니냐고 판단하는 것 같다.

이남재-노선과 방향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자 한다. 1기 참여한 분이 연담 스님이 있고, 1기 집행위원장을 서동석 대표가 했었고, 김영국 대표는 대불련 쪽으로 연결했었는데, 1기 노선과 방향부터 이야기 좀 해주시죠.

민불련 1기, 사례중심 운동론 정립 노력

서동석-민중불교 운동론, 1기 창립하면서 불사연 시절부터 한 성과물을 반영해 적립해 보려고 했다. 여익구 선배가 연구한 부분이 많았다. 1기 때는 실천적 사례 중심으로 운동론을 정립하려 했다. 우리 불교사, 부처님의 일생과 아울러 한국불교사에서 민중불교 운동의 원형을 찾아보려고 했다. 의상과 원효 스님, 의상 스님은 성골 출신으로 귀족불교를 한, 국가를 지키는 호국불교를 했다면 원효 스님은 육두품 출신으로 대중 속에서 불교를 전파를 했던 그런 유형에서 찾아보려고 했다. 외국에서, 반봉건 반외세에 대항한 베트남의 틱광득 스님의 분신 등 실천적 사례를 보며 운동의 방향을 정립하려고 했다.

   

1기 때도 운동론 정립과 함께 대중기반이 마련해야 하는 데 창립 때부터 사건 중심으로 가면서 내부 조직역량을 강화할 틈이 없었다. 대우 동맹파업으로 서부지역 총괄하는 단체 등, 민불련과 민통련 서울지부, 민문협 등 우리 쪽 사무실을 농성장으로 쓰면서 맨날 북적거리고, 그때 여름 8월 달에 학원안정법을 만들어 전두환이 학생들을 정신이상자로 만들어 싹쓸이 하려고 했다. 그래서 거기 매달렸다. 여성부에서는 구로동 톰보이 성도어패럴 사건에 매달려 우리 처음 구류살고 가두도 시위했다. 1985년에 민총련 민불련 청년단체 기독교에서 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EYC) 천주교 가톨릭 청년회 민문협 등 연대해 투쟁해 청량리 미주 상가 앞에서 횃불시위로 또 구속되기도 했다. 운동론도 운동론이지만 대중적 기반 갖출 세 없이 85년 당시 상황에 휘둘렸다. 1기는 자기역할 마쳤다. 2기는 민불련사(史)에서 왕성하게 대중적으로 활동한 때다. 86년 5·3사태 이후부터 직선제 개헌 대중투쟁에 휘말렸지만, 전국적 대중조직 성과도 컸다.

이용성-5.3사태 이후 지도부 다 수배돼,

서동석-당시 내가 구속돼 있었고, 연담 스님도 구속됐었다가 나오고...여익구 선생은 도망다니고

2기, 사원화 참가자 흡수해 교육, 조직 재구성
불자인 박종철 열사 죽음이 불교참여 기폭제로


이용성-그러면서 민불련 사무실 지키는 사람이 여직원 허미선 씨 정도였다. 불교방송서 활약하는 김봉래 국장하고 허미선 정도가 사무실 지키고 있던 정도였다. 그 친구들이 당시 22, 23세 정도였을 때다. 2기는 고광진 씨가 의장되면서 조직을 추스르는 데, 그때 기억으로는 내부역량이 없어서 초기에는 밖으로 못나갔다. 사무실 인사동 5층에서 낙원동 공화춘 중국집 뒤쪽으로 옮겼다. 당시 주력한 게 조직사업이다. 그전에 사원화 운동이 깨지고 사원 중심으로 대학생들이 스터디 그룹을 하면서 학습하던 팀이 남아있었다. 이 팀을 민불련 조직으로 흡수하고, 새로운 회원을 발굴해 교육한 게 2기 활동의 시작이었다. 실무자들이 80, 82학번 정도. 70년대 말부터 82학번까지 구성돼 후배로는 85, 86학번까지도 민불련 회원으로 들어와 학습했다. 학습동아리가 몇 개 있었다. 그 힘이 87년도 본격적인 투쟁 때 직선제 개헌 때 민불련의 중요한 동원력이었다. 가령 민통련 100명 민청련 30명 민가협 80명 정도면 민불련은 항상 50명이었다. 허수가 아닌 실제 숫자였다. 1기에 비해 전문성은 좀 떨어지지만 동원 자체서 앞섰다.

서동석-전체적으로 넥타이부대가 나오고, 박종철 불자학생 죽음이 불교집안의 기폭제 됐다.

이용성-조직활동을 진행했고, 87년 6.29 이후에 YS DJ 자리싸움 통에 민불련 내부도 휘말려 고광진 의장이 동대문에 출마해 당시 조직들이 총선에 휘말렸다. 고광진 씨 선거에 동원되면서 그 이후 흐지부지됐다. 6.29 이후 선거에 휘말려 2기가 흐지부지됐다. 시간이 지나 3기가 재건 됐지만, 2기 때 여러 가지 사건이 많았다.

박종철 군이 남영동 분실에서 고문으로 죽게 됐다. 박종철 군이 불자고 어머니가 부산 독실한 불자였다. 사리암에서 49재 지내면서 이를 계기로 부산 대불련과 대불련 출신들, 불자들이 대거 부산에서 활동이 이루어졌다. 서울도 받아서 민불련 대불련 등이 49재 동안 여러 일을 조직한다. 박종철 49재 이후에 불교 쪽 역량이 확인되면서 중앙승가대 동국대 석림회 성연(연담) 스님, 지선 스님, 진관 스님 등 정토구현전국승가회가 불교적 투쟁에 전면에 나서는 계기가 됐다. 그러다 보니 전체 집회서 지도부에 자리 잡고 전체 국면을 이끌게 됐다. 그러면서 많은 경험이 있었다. 쭉 진행되면서 명동성당 투쟁 때 대거 들어가 농성할 때, 계엄 이야기가 있었다. 계엄이 떨어진다. 군대가 서울로 진주한다. 진주하면 첫 프로그램이 재야단체 다 죽었어 각오해, 그런 때도 있었다. 제 기억으로는 당시 구성원 조직원들이 결연했다. 즐거이 받아 내겠다는 입장이었다. 노선 말했는데 2기도 뚜렷한 운동노선이나 논쟁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재야단체 공간서 사회이슈와 사회적 연대를 받아내는 것에도 역량이 허덕였다.

불교적 이념 정책 노선 정립 못해…현재도 한계

김영국-불교계 내부서 이념적 논쟁은 없었지만, 민불련 운동하던 사람들이 학내조직에서 학습을 거쳐 온 사람들이었다. 민불련 조직에 들어와 보니 학내 지하조직에서 공부한 학습을 불교라는 공간서 어떻게 창조적으로 다시 적용할 것인가 항상 고민했다. 여익구 선배가 당시에 저에게 ‘그런 부분을 너가 정립해봐라’해서, 실제 <민중법당>에 5회인가를 연재했다. 학생운동서 공부한 그 당시 사회 모순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볼지, 불교적 입장서 우리 사회모순, 불교모순을 바라보고 이념정립할지 고민했지만, 실제 논의의 장은 없었다. 매일 대중장으로 나갔다. 86년에 해인사를 갑자기 가게 돼서 가기 전에 여익구와 상의했는데 ‘그것도 중요하다 해인사 현장서 활동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해인사 가서 강원 다니는 스님들과 역사공부 모임 만들어서 일주일에 한 번 공부했다. 공부한 주축 멤버 중 한 분이 진화 스님(불교문화사업단), 당시 여익구 선배도 대중조직 만들어 운동하지만 불교계 자체 이념이나 정책노선이 있어야 한다는 데에 고민했다. 실제 못 만들어 낸 것이 불교계 여러 문제가 된 게 아닌가. 지금이라도 그동안 경험 바탕으로 불교만의 이념이나 노선을 만들어 봐야 하지 않을까.

   

이남재-말했듯이 노선과 관련해 최석호 법사, 지금은 법륜 스님이죠.그분은  불교적 세계관에 입각해 수행 강조한 측면이 있고, 사회운동 계급투쟁을 통해 가야하는 측면이 있었다. 노선에 따라 각 조직의 성격에 따라 학습되는 성격이 달랐다. 사회구조 모순 바라보는 것과 해결하는 게 주사와 비주사, 일명 PD적 관점이 조직에 투영되게 되는데, 이런 부분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비판적지지 후보 단일화, 독자노선 등 정치노선이 갈라지는데...

김경호-사상투쟁은 계급투쟁이라고 본다. PD NL 논쟁은 계급에 기반하지 않은 공허한 지식인들의 사변적 투쟁이었다. 웃기는 일이었다. 그것이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면 단기간에 소멸되지 않았을 것이다. 계급투쟁이 되지 못한 사변 투쟁을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도 웃기는 일인 것 같다. 불교내적으로 민불련이 만들어지는 상황에서 우리도 고민이 많았다. 비상종단이 깨질 때 내부에서 많은 고민이 있었다. 강남포교원의 성열 스님은 토대강화론이었다. 불자대중의 신앙의 밑바탕이 건강해지지 않으면 상층부 개혁해도 반동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보았다. 강남포교당서 새로운 신앙을 실험하고 지금도 고민하고 새로운 시도를 한다. 그 당시 비상종단의 주역인 젊은 승가들도 종단 권력을 손에 쥐고 제도적 개혁을 치고 나가면 불교가 근시일내에 뒤집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비상종단이 8개월 만에 깨졌다. 비상종단 때 트라우마가 94년 종단개혁 시기에 그대로 반영된다. 종단개혁의 주역들인 현응 스님(현 교육원장) 등은 어렵게 획득한 종권을 빨리 안정화해야, 모든 개혁 프로세스를 진행할 수 있다. 권력 안정화가 안 되면 우리가 어렵다. 그래서 정치권력과도 타협하고 보수반동과 타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졌다. 그래서 94년 개혁종단이 이름은 개혁인데 실제로는 왜곡되고 불건강한 주체가 형성되고 그 과보를 지금도 받는 것이다.

1기, 불교내부 성장한 인물들 책임 안 져

민불련 1기의 특성은 불교가 주체가 아니었다. 건설과정에서 불교에서 대불련 출신, 사원화운동 출신, 최석호의 중앙불교연구원 등이 다 붙었다. 그런데 실제 1차 집행부는 어떻게 됐나, 서동석 대표가 집행위원장 맡았다. 그 다음에 각종 직을 맡아 책임진 사람들의 반 이상이 불교내부에서 성장한 사람들이 아니라 대부분 밖에서 온 사람이었다. 그만큼 불교계 있던 사람들이 입만 살아서 왔다가 실제 역할은 안 맡고 다 빠진 겁니다. 2기가 풍성해 진 것들이 1기가 선도적 투쟁으로 나간 노선이 사원화 멤버 등에 공감 받고 힘 받아 대거 2기에 참여해 나간 것 같다. 1기 상시 사원화 소그룹 있었지만 민불련에는 동참 안했다. 5.3사태로 다 수배되고 잡혀갈 때 비록 조직이 부서지지만 방향은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2기로 집결하게 됐다고 본다.

유승무-맥락들이 정치권력이 부정부패하지만 시간 지나면 선거 국면 통해 교체도 되는 데, 그러면서 정치적 공간이 열렸다가 닫히기도 한다. 사회운동 흐름에서도 사회운동이 외적 조건 정치사회 경제 조건, 종단도 외적 조건에 포함해야 한다. 정화할 거냐 10.27니야, 비상종단의 조건이 있다. 운동주체 역량인데 주체는 크게는 조직과 이념학습 등 의식의 측면이다. 크게 보면 외적 조건과 종단의 조건, 주체역량의 조건 등 세 가지가 연동돼 맞물리면서 운동 흐름이 형성된다. 외적 요건 때문에 운동 노선도 NL PD 민족 계급 이니 혁명 이니 계급 등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정치권력의 부정부패, 혹은 정치적 사건 정치적 교체기 선거 국면이 맞물려 여러 운동 노선이 창조 유포 소멸되는 과정이 흐르고 있었다. 종단 내부도 이슈 사건 형성되고 그러면서 주체가 투쟁을 통해 이념적 차원 조직적 차원을 구성했다가 흩어지는 과정 거치면서 1기 2기 역사들이 만들어져 온, 형식적 운동의 흐름과 틀을 만들어서 설명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의구현사제단 본 따 정토구현전국승가회 만들어

연담 스님-승가입장을 말하면, 민불련이 다른 승가 조직이 없어서 스님들과 재가자가 뭉쳐서 민불련에 가담했다. 그러다가 승가는 승가대로, 처음에는 승가 자체가 사회과학 인문과학에 어두워 부처님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을 사회과학을 통해 해보려 한 것이다. 일반 스님들은 학습하고 조직의 핵심은 사회과학을 공부하고, 승가대가 진보운동이나 사회운동을 하고 있으니까, 동대는 법안 스님 등 학내 분위기 있었겠죠. 석림회 중심으로 역량 키운 것 같다.
가톨릭에 사제단 있고 기독교도 있으니, 우리도 승가 구성원들이 안으로 만든 것이 정토구현승가회 만들어 냈다. 이걸 만들어 민중불교에서 역량을 집결하다보니 나름대로 당시 사제단 못지않게 일정부분을 해왔다고 해도 민족불교운동연합이 재가 중심으로 하다보니까 역량이 반감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정토승가 없었다면 출재가 뭉쳐 1기에서 2기로 넘어갈 때 뒷심이 있었을 텐데 아쉬움 남는다
이념적으로 승가 쪽만 더듬어 보면, 법정 스님도 들 수 있고 법우 스님(현 동국대 김호성 교수) 사원화 사건도 있고, 나름대로 개별적 스님들이 진보적으로 열려가는 사람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승려대중이 진보적으로 묶는 것은 승가대학서 불교를 사회과학으로 바라보면서 눈을 뜨고, 사회과학 정식으로 접하면서 되어 갔다. 우리는 민중불교운동연합 시절이든 정토승가회 시절이든 부처님 사상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구원할 사상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없었다. 스님들 입장에서도 그렇고, 사회과학에서 부처님을 이 시대에 접목하려했던 것 같다. 그런 게 아쉽다. 항상 부처님 사상 속에서 승려가 부처님 제자로 세상에 뛰어들 수 없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지금은 초기불교에 많은 시간 갖지만 지금과 달랐지만 그런 것 있었다.

민불련, 불교적 활동근거 찾으려 고민했지만…

이용성-스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대부분 참여한 활동가들이 학내서 공부하고 민불련으로 넘어왔다. 마음 속에 가진 갈증이 불교적 교리 내에서 활동 근거를 찾으려 하고 그런 갈증이 있었다. 시원하게 해결되는 부분도 없었고, 불교운동의 바이블 같던 여익구의 민중불교론이 활동가의 바이블같이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외부의 NL, PD 논쟁이 불교 안으로 들어오기 힘들었다. 최석호 계열은 PD 성향이 모이고 우리는 NL 쪽이 모인 것 아니냐고 했지만, 막연한 구분이었다. 그런 데에 사상 투쟁을 해보지 않았다. 실제 사투가 필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뱃속 깊이 받아야 했던 힘과 활동의 준거가 필요했는데 시대적으로 준비되지 않았다.

김경호-형태로 결실 못 맺어도 굉장히 고민 많았다. 삼계교에 대한 연구라든가, 불교사적으로 일본 중국 동남아 여러 변혁 운동에서 불교가 배울 게 뭔지 모색하고 고민했다. 그런 부분이 약했다는 것은 자기비하일 수도 있다. 요즘은 우리가 한 만큼 공부 안한다. 우리를 딛고 넘어가려 하지 않는다.

   

김영국-민불 운동하던 동지들을 보수 스님들은 빨갱이다. 기독교인들이 위장 활동한다고 공격했다. 민불련 활동 하는 사람들은 우리 논리 갖추려고 고민을 많이 했다. 삼계교도 요즘 번역됐지만 당시 일본어 책인데 저도 민중법당에 실은 것 같다. 시도는 있었지만 문제는 조직이 일찍 깨져서 정리하는 일을 못했다. 벌이기만 하고, 조금씩 건드리고. 나이 들었지만 그런 작업을 우리가 해야 하지 않을까

이남재-성과와 한계에 대해 같이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성열 스님의 토대가 우리 투쟁 동력을 가지려면 내적역량 강화를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시 외적으로는 현장에서 투쟁에 참여하고 투쟁에 동력을 가져가자고 한 측면도 있었다. 최석호 법사는 불교가 무장해서 가자는 신행중심적 사고도 있었다. 그러면서 2기 조직역량 풍성해 지고 내적 역량들이 뭔가 해보자 하다가 총선 대선국면서 정치국면서 조직이 갈라졌다. 왜 그렇게 드러났을까.

민불련 노선, 개인적 정치성향 따라 갈려

서동석-1기 2기 3기 운동론이 확립돼 노선을 정한 게 아니라 개인 성향에 따라 움직인 것 같다. 토론 거쳐 노선이 정립된 것은 아닌 것 같다. 고광진 씨는 민통련에서 결정하고, 민통련은 다 시민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을 때, 민중운동론자들이 구속돼 있을 때다. 그들이 10월 달에 이른 바 비판적 지지를 결정한다. 마침 고광진 씨도 거기에 있었고, 여익구 씨는 비판적 지지는 아니다 해서 후보단일화로 갔고, 나는 민중후보로 갔다. 세 사람이 골교롭게 갈라졌는데, 내부에서 토론 거쳐 확립되거나 반대를 해서 간 게 아니라 시류 따라 개인적 선택이었다. 이 것이 조직 강화로 이어지지 않는 87년이라는 좋은 시기를 지나,전국단위 조직도 있었는데 민주헌법쟁취불교운동본부라는 전국 단위 조직이 그마저도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대중사업도 못하고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부 확립 결정으로 움직일 세가 없었다. 86년 5월부터는 구속되고 수배되고 도망을 다니고 새 조직 만들고 그럴 상황이 되지 못했다. 모두 우리의 한계였다.

이용성-조직적 한계이기도 했고 87년이 긴박했다. 6.29라는 항복선언을 받아내면서 성과물 가졌다. 실제 성과물을 어떻게 내 것으로 만들지에 대한 것들이 조직적이지 못하고 개별적으로 이루어졌다. 자기 선호되는 쪽의 조직에 있던 회원이 자기 선호 쪽으로 몰려서 갈라졌다. 2기 고광진 의장이 동대문에 출마하면서 대불련 인원들이 대거 가서 운동하는 데, 그러고는 거의 흔적 없이 사라졌다. 선거판이 경험한 분들은 알지만 잔뜩 기대하고, 되도 실망 안 되도 실망한다. 조직 신뢰나 비전을 망가뜨리는 독약 같은 거다. 이후 조직에 관한 비전을 공유하지 않고 일반 정치하는 사람처럼 낙선해 캠프를 깨자 로 한 것 같다. 3기 때 거의 안남아 있었다.

고광진 의장 선거 출마하면서 조직 와해

서동석-대선 끝나고 총선 넘어가기 전에, 고광진 씨가 그만둬도 내부 평가하고 가면 되는데 그런 걸 안했다. 대선 끝나고 한동안 안보이고, 조직은 공중에 붕뜨고 나는 이제 안 나오겟다고 하곤 안 나와. 좋은 시절 끌어온 사람으로 많이 아쉽고, 이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이 남아있다. 잘 마무리하면 조직적 성과가 남아있었을 것.

이용성-민불련 리더들을 세우는 데 불교집안서 성장하고 토대를 형성한 사람이 리더가 되지 않고 밖에서 활동한 사람들이 필요에 따라 지도를 했다.

이남재-궁금한 게 민통련 결정에 따라 해도, 민불련의 지도부가 충분한 토의와 협의를 통해 합의 과정 없이 개인적 성향에 따라 간 게 아쉽다.

김영국-제 기억으로는 고광진 의장이 비판적 지지로 간 후 민불련 회의 한 번 한 것 같다. 그 회의 때, 정식 회의 였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사무실 가니 고광진 의장의 개인적 판단인데 민불련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독자적인 노선으로 가기로 하자 박수치고 했던 기억이 있다.

서동석-그 얘기를 하면 씁쓸하고, 누구를 헐뜯는 자리 될 수 있다. 토론해서 얼굴 붉힌 적이 있다.

민불련, 불교정신으로 시대를 산 사람들의 성과

김경호-불교 내부역량과 불교 외부역량으로 구분했는데, 사실 민족종교로서의 불교가 내부적으로 축적한 역량이다. 불교 내에서 자기 활동 공간을 갖지 못하고 사회 운동하던 분들이 우호적으로 민불련에 동참했다. 예컨데 안희재 장기표 등이 머리 깎고 절에 숨었던 분들이 대거 들어왔다. 여익구 선배가 자기 인맥으로 다 들어와라. 다 부처님 덕분에 한 시절 보냈으니 힘 보태라. 그래서 그들이 동의했고, 해인사 주지 산 고은 선생은 말할 것도 없고, 서동석 선배는 강남포교원서 해서 왔고, 대불련 사원화 등 협의한 틀로 보면 밖에서 온 분이지만 그렇게만 보면 불교를 왜소하게 만드는 것 아니냐, 불교 역량을 왜소화할 필요 없다. 큰 틀로 보자. 절 집안이나 종단하고 관계 맺지 않아도 불교를 정신으로 시대를 살았다면 불교운동의 큰 성과로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닌가.

   

서동석-그렇죠. 다 우리 불교 자산으로 보아야 한다.

이용성-조직적 책임에 관한 부분이 있다. 관계성들. 예를 들어 김영국 소장과 저와는 대불련 20대 초반부터였다. 관계라는 게 조직의 기본 틀을 유지하고 개인적 책임성 등을 강하게 확보하는 것이 된다. 그렇지 않고 개인적 성향에 관한 부분으로 되다보니 관계 속에서 갖는 제어장치가 부족했다. ‘아’하면 ‘어’하고 알아듣는다든지 하는 것들은, 조직결합도에서는 떨어지는, 결과적으로 조직에 대한 책임성이나 지속적 관계가 약한 부분이 있었다.

사회자(이남재)-유승무 교수님. 객관적으로 한 번 봐주십시오.

유승무-자생적 프레임들이 만들어 지기 전에 외부 프레림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 운동이 이루어지면 선거국면 6.29 이후 정치참여 공간 열릴 때, 개인적 성향이라고 했지만 우리 자체 확고한 프레임과 조직 이념 노선에 따라서 정치화 프로그램 확보 안 돼 그런 공간이 열리면 이해관계나 정치적 노선에 따라 흩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때 리더가 중요하다. 내부에서 성장하거나 외부서 수혈되거나, 불교는 승가라는 리더가 있다. 리더 그룹이 잡아주고 챙겨줄 수 있는데, 그럴 정도의 성숙이 총체적으로 축적 안 돼 흩어진 것으로 평가될 수 있겠다. 그럼에도 이런 열악한 조건에도, 지금 불교역사에서 이런 자취 남긴 운동이 없다. 허약한 조건에서도 개개인이 열정과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런 성과라도 냈다. 조직이나 프레임이나 열악함에도 불구하고, 친분 인연 같이 한 분들이 일상적 만남에서 끈끈하게 형성된 게 큰 힘 아니었나 싶다.

사회자(이남재)- 2기 때 와서 갈라졌다. 당시 스님들은 어떤 입장이었나.

스님들도 지역적 성향 따라 DJ-YS 갈려

연담 스님-대선 국면에 있어서 각자 입장을 달리한 점이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초기불교를 내일도 배우는 데, 그때나 지금이나 실력은 없지만, 내가 아함경을 가르치다가 모른다하고 전문가한테 배우면 3개월이면 될 줄 알았다. 3개월은 아니구나 3년 배우니 3년 더해야겠더라 3년 하다보니 10년은 채워야 되나 보다했다. 10년 채우니 10년 더하면 끝날 줄 알았다. 20년 지나니 이제 끝장낼 수 있겠다 싶은 데 세월이 기다려 주지도 않는다.
지금 와서는 승가 자체가 항상 승가교육이니 포교니 역경이니 해도, 전해진 불교는 본래불교에서 많이 곡절이 있었을 것이다. 시간적으로 2500여년, 공간적으로 문화적으로 얼마나 달라졌겠나. 지금이면 부처님 공부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볼거냐 잘 못볼거냐, 정견이냐 사견이냐, 정치 경제 사회 모든 것이 답이 거기서 나올 것이다. 승려들의 율도 2500년 전 가지고 적용하라면 안 된다. 그때도 스님들은 재가보다는 첨예한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다. 분위기로 봐서는 지역적 성향이 있을 수 있는데, 덜했던 것 같다. 객관적으로 비판적지지 입장에서 선 것 같다. 지역적으로 선 것 같다.

서동석-지선 스님을 비롯해서 그런 분들인데, 일부가 반대해 대승불교승가회를 만든 현응 여연 스님 등이 있었다.

연담-저는 실천불교전국승가회 한다고 했을 때 손 뗐다. 왜냐하면 밖의 사정은 몰라도 절집 내부의 고질적인 관건에는 뛰어났다. 안 했다. 지선 스님, 청화 스님, 진관 스님 모두 그쪽 출신이고 광주항쟁과 법난 겪었지만 그런 영향도 사상적으로 있었을 것이다. 두 분을 놓고 봤을 때 그분이 더 괜찮은 것 같고 그랬을 것이다.

이남재-민불운동 정신을 계승해야 하는데, 앞으로 불교운동을 지속하는 데 민불운동을 어떻게 갈 것인가? 이것 때문에 이 자리가 있다.

'민불련 30주년 기념 좌담회 ➂계승과 향후 방향은' 기사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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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시간 : 2015-02-21 17:36:09]  
[최종수정시간 : 2015-02-22 21: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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