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관의 서원
징관의 서원
  • 현각 스님
  • 승인 2015.01.21 13:0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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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현각 스님의 <클릭! 마음의 두드림>- 82.

아마 여러 해가 지난 듯하다. 책상에 탁상시계가 놓였던 햇수가 말이다. 해도 바뀌었으니 시계에 생명을 불어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선 쌓인 먼지를 닦아냈다. 기계치 가운데 상급에 속하는 터이라 배터리를 갈아 넣으면 작동이 잘 될까 걱정도 되었다. 어쨌든 시도해 보는 것이다.

예전과 같이 바늘이 움직인다. 환생이란 저런 유형이 아닐까하여 신비스럽다. 늘보원숭이의 기지개 같기도 했던 시계가 제꺽제꺽 톱니바퀴 돌아가는 소리가 역력하다. 깊은 밤에는 그 소리가 더 하다. 마치 어린 시절 한글 자음과 모음을 익히듯 음절마다 쉼표가 있는 듯하다.

지난 가을 돌 틈에 생명을 드러낸 회양목 십여 그루를 모아 평지에 옹기종기 심어 놓았다. 눈이 쌓인 대지에도 회양목 주변만은 원을 그려놓은 듯 눈이 녹아 있다. 살아 있는 것들의 공통점이 있다. 소리로도 들려주고 모습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참 신기하기도 하지. 생명 있는 것들의 속성은 온기가 아닌가 한다. 가변적이라는 말이다. 사람에게 비유하자면 가변성은 곧 수행이 될 것이다. 그 결과 향상일로(向上一路)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사람이 허우대가 좋으면 눈길이 더 간다. 반면에 왜소해 보이면 그냥 눈길은 스쳐가고 만다. 사람을 외모로만 평가하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실은 외모 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인간의 내면세계가 아닐까 한다. 겉치장이야 화장품으로 가능한 일이지만 내면세계 만은 치장할 수 없다. 그래서 일까. 퇴계 선생은 자신의 생활을 <산거(山居)>라는 짧은 시로 드러내고 있다.

산중에 사는 사람이라고 아무 할 일 없다 말을 마오 (莫道山居無一事)
내 평생 하고 싶은 일 헤아리기 어려워라 (平生志願更難量)

이렇게 젊은 시절에 학문에 몰두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허송세월을 보내지 않겠다는 젊은이의 아름다운 맹세에 나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화엄종의 제4조인 징관(澄觀 ?~839)이 있다. 스님은 상조(常照)율사에게 보살계를 받고 감동하여 서원을 세웠다. 그 가운데 눈에 번득 띄는 원이 들어온다.

삼의일발(三衣一鉢)로 일생을 살겠다
명리를 버린다
평생 밤낮으로 눕지 않겠다

그저 감동이다. 이 시대의 교단에 경종을 울리는 서원이다.
인도와 같이 더운 나라에서는 삼의일발이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ㆍ일본은 기후나 풍토가 다르기 때문에 삼의일발로는 수행이 불가능하여 사유물이 인정되었다.

토굴만 해도 그렇다. 인도에서는 아란야(araṇya)라 하여 마을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장소였다. 더위를 피하여 나무 밑 빈터나 석굴 속이야말로 수행하기에 적절한 곳이었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하여 인도의 수행자와 같은 조건에서 수행하라고 한다면 누구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추우면 군불을 지피지 않으면 체온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그러다 보니 하나 둘 소지품은 늘어나게 되었다.

‘명리를 버린다’는 징관의 서원만이 아니라 모든 수행자들은 원론적으로 명리를 버린다. 지금도 나의 사유세계를 지적지적하게 하는 것이 있다. 손때 묻은 낡은 책 한권이다. ≪초발심자경문≫이 쾨쾨한 행자실 구석에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그 책을 넘기다 보니 구명구리여조로(求名求利如朝露)라는 글귀에 시선이 멎었다. ‘명예를 구하고 잇속만 챙기는 행위는 아침이슬과 같다’는 야운(野雲)의 자경문(自警文)이었다.

자경이란 몸과 입과 뜻을 항상 경계하라는 것이다. 신ㆍ구ㆍ의를 스스로 경계한다는 것은 퍽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수행은 필수조건이 된다. 수행이란 제깃물에 비유할 만하다. 간장을 담글 때 간장을 그대로 두면 증발하여 장독에 넣을 간장은 없어지고 말 것이다. 빈 장독 속에는 초파리도 낄 리 없다. 뭔가 유용해지기 위해서는 담금질이 꼭 필요한 것이다.

‘밤낮으로 눕지 않겠다’는 서원이야말로 나에게는 기가 죽는 구절이다. 보조국사는 ≪수심결≫에서 ‘티끌 같은 긴 세월동안 몸을 태우고 팔을 태우며 뼈를 두드려 골수를 내고 몸을 찔러 피로써 경을 쓰며 오래도록 앉아 눕지 않고’의 내용에서 장좌불와(長坐不臥)를 볼 수 있다. 그렇다. 장좌불와 한다 한들 마음을 깨치지 못하면 쓸데없는 고행으로 끝나 버릴 수도 있다. 토르소를 보아라. 장좌불와의 대표 선수쯤으로 보인다. 그 조각상에는 혼이 담기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과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지고 만다.

옛날에는 도인 노릇도 쉬웠을 것 같다. 우선 교통이 불편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므로 제주도에 있는 수행자는 금강산에 있는 도인을 만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어디에 무슨 도인이 있다 하더라’ 정도로 듣고 넘어가는 것이다. 오늘날은 판이하다. 교통이 편리해졌고, 더더욱 신속한 것은 인터넷 세상이 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가히 지구촌에 일어난 일을 속속들이 실시간으로 정보를 공유하게 되었다.

문명의 이기를 누리는 것만큼 우리는 벌거벗은 상태로 광야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삶의 면면만이 아니라 행위의 결과들이 또한 그렇다. 현재 무엇을 하고 있는 사람도, 무엇을 하려고 하는 사람도 숨기려고 하면 할수록 늪에 빠져들 수가 있다. 초파리가 장독 속에서 본 하늘을 하늘의 모두라고 생각하는 좁은 소견을 사람들은 우치하다고 피식 웃어넘긴다.

무엇을 하겠다는 사람이 나서면 대중은 우리의 공복(公僕)이 될 수 있는 자질이 있는 사람인가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아지는 것이다. 그러한 행위를 섭섭해 할 일이 아니다. 진위여부를 진솔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 대목에서 대중은 감동할 수 있다.

   

속리산 법주사로 출가 수행정진했고, 동국대학교 석ㆍ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학교 선학과 교수, 미국 하버드대 세계종교연구센터 초청교수, 동국대 불교대학장, 정각원장, 한국선학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동국대 불교학술원장 겸 동국역경원장으로 불교학계 발전과 후학 양성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는 『선학의 이해』, 『선어록 산책』, 『선문선답』, 『선문보장록』, 『선 사상론』, 『선 수행론』, 『한국선론』, 『벽암록의 세계』, 『한국을 빛 낸 선사들』, 『선심으로 보는 세상』 연보로 구성된 『최현각 선학전집』(전11권), 『내 사유의 속살들』, 『현각스님의 마음 두드림』등이 있고, 그 외 다수의 논문과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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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 2015-01-23 16:41:53
"~참 신기하기도 하지.
생명 있는 것들의 속성은 온기가 아닌가 한다."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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