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청정한 종단, 어떻게 성취되는가 /정웅기
[전문]청정한 종단, 어떻게 성취되는가 /정웅기
  • 정웅기
  • 승인 2014.12.16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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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한 종단, 어떻게 성취되는가

정웅기 불교시민사회네트워크 운영위원장

종단 문제를 바라보는 기본 시각

불교공동체의 핵심인 ‘상가’는 어떻게 하여 2천6백년동안 이어져 올 수 있었을까?

각 문화권마다 조금씩 다른 양상이 있기는 하지만 보편적으로 세 가지 요인이 있다고 저는 봅니다. 먼저 ‘평등한 공동체 생활’이 기초를 이뤘습니다. 의식주 등 기본 생활을 바탕으로 의료, 교육 등 생활 전반을 공동체 차원에서 평등하게 해결하였습니다. 공동체 안에는 식구이자, 도반이자, 스승이자, 부모자녀라 할 만한 다중의 사회적 관계들이 존재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율이라는 공동체 윤리를 점검하고 탁마할 수 있는 실천적인 장, 포살이 있었습니다. 적절한 기초공동체 규모를 정하여(결계) 보름마다 빠짐없이 모여 생활을 점검하게 한 포살과 자자는 상가의 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본래 포살은 바라문교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만 불교 상가에서 더욱 발전하여 이렇게 핵심적인 공동체 운영 원리로 가꾸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갈마라고 하는 ‘대중공의제(대중공사)’가 있었습니다. 공동체의 중요한 현안이 있을 때 대중들에게 직접 의견을 물어 결정하도록 한 제도였습니다. 대중공사는 빨리 효율적으로 결정하기보다는 대중의 의사를 폭넓게 충분히 반영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이와 같이 공동체 생활문화가 바탕을 이루고 여기에 포살, 갈마라는 이중 삼중의 안전장치가 있었기 때문에 상가는 긴 세월동안 부침을 거듭하면서도 오늘까지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튼튼하게 자리 잡은 기초공동체들 간에는 사방승가라는 개념으로 연결되었습니다. 배타적 점유 없이 누구든 상가를 옮겨와 구성원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예컨대 종로 상가의 구성원들이 멀리 제주 상가에 가서도 공동체 구성원이 될 수 있었고, 이는 나라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도, 다음 세대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 열린 공동체였습니다. 촘촘하게 짜인 기초공동체로서의 ‘현전 승가’, 그리고 이 기초공동체들 간의 느슨한 연대체인 ‘사방상가’, 이 상가의 조직 전통이야말로 불교공동체의 청정성, 화합, 영속성을 가져온 원동력이었습니다.

개인적 경험을 좀 나누고 싶습니다. 제가 지금 일하는 불교시민사회네트워크는 이러한 상가의 조직운영 원리를 따르려 몇 가지 시도를 하였습니다. 첫 번째가 포살입니다. 비록 적은 숫자이지만 한 달에 한번 40여개의 계목을 함께 염송하며 활동가들이 포살을 엽니다. 지난 한 달 생활을 점검하고 반성하면서 참회의 절을 하고, 도반에게 지었던 허물이 있었다면 용서를 구합니다. 비록 인원도 적고, 계사도 없어 저희들끼리 하는 수준이지만, 삶의 뿌리를 튼튼하게 다져주는 포살의 이득을 맛보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대중공의의 원칙인 삼의제를 지키려 애쓰고 있습니다. 사안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구성원이 있을 경우 급하게 의사결정하기 보다는 재논의합니다. 생각의 차이를 잘 드러내어 확인하고, 인정해주는 것만으로도 신뢰가 높아짐을 경험하였습니다. 물론 바쁘다는 핑계로, 대중의 의사를 묻지 않고 제가 전횡하는 경향도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부족한 과정이나마 대중공의가 왜 중요한지, 어떤 것인지를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었습니다. 부처님이 만들고 2천6백년동안 이어져온 ‘상가의 정신과 제도’가 구시대의 낡은 유물이 아니라, 오늘날 현대사회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통용될 수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상가’라는 공동체의 운영원리들은 종단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을까요?

어떤 것이 수행자의 청정한 삶입니까? 라는 물음에 사람들은 흔히 “스님들이 율장대로 살면 되는 것 아닙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스님들은 항변합니다. “율장은 현대사회에 그대로 적용하기 힘듭니다. 비구계를 받고 산문을 나서자마자 어기게 됩니다.” 지난 세기 불교는 과거 겪었던 2천5백년과는 전혀 다른 시대상황에 직면했습니다. 고도의 물질문명, 교통수단의 발전, 정보화, 민주주의의 발전 등은 과거 상가가 직면하지 못했던 문제들입니다. 따라서 변화된 시대를 읽고 율장의 정신을 지키되, 변화된 현대사회에 그것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가 적극적으로 모색되어야 했습니다. 틱낫한 스님이 현대를 사는 수행승들을 위해 비구(니)계본인 개정 ‘바라제목차’를 새로 만든 것이 대표적 시도라 할 수 있을겁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비구(니)계를 현대화하려는 시도가 제대로 없었습니다. 율장은 한자 한 대목도 손댈 수 없다는 완고한 입장도 원인이었겠지만, 필요성에 대한 이해 부족, 현대화할 실력과 안목과 부족 등 이유는 복합적일 것입니다.

대신 승려법을 비롯한 종헌종법이 율장의 지위를 차지했습니다. 종헌종법은 세간의 법체계를 그대로 따왔습니다. 율장의 정신을 면밀히 검토하여 현대화하지 못하고, 세간의 법체계를 불교에 맞게 변용한 수준입니다. 통합종단이 설립되기까지 극심한 분규를 겪었던 종단이었으니 그럴 엄두를 못 냈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종헌종법이 율장을 대체하면서 ‘상가’의 세 가지 조직운영 원리는 급격히 사라지거나 쇠퇴하였습니다. 기초공동체의 저변이 되어 온 공동체 생활 규범은 급속도록 사라져왔고, 지금도 진행중입니다. 공주생활을 하는 일부 사찰들이 있다지만, 대부분의 사찰은 스님들의 생활공동체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합니다. 포살도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가 2008년 비로소 부분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교구차원에서 1년에 두 번 포살이 열립니다. 한계도 있지만, 그래도 포살이 이렇게라도 회복되어가고 있는 것은 크게 환영할 일입니다. 모든 상가의 대중들이 참여하는 명실상부한 포살로 자리 잡으려면 앞으로도 상당히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마지막 대중공사는 ‘선거’로 대체되었습니다. 현재 종단에서는 교구본사 주지(교구대중의 직선)와 총무원장(간선)을 선거로 뽑는 대의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대의민주주의는 사회적으로도 한계가 명백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선거를 통해 뽑힌 대통령이나 단체장들이 임기 동안 전횡을 하는 폐단이 반복되면서, 중요 사안에 대해 대중의 의견을 직접 묻는 공화적 요소가 세간에서도 보완될 것입니다. 스마트폰을 이용한 주민투표제 같은 것이 대안으로 모색되는 것으로 압니다. 상가 전통의 대중공사를 대신한 선거는 민주주의적 요소의 확대라는 순기능도 있었지만, 상가의 공동체성을 급격히 쇠퇴시켜 온 부정적 역할도 하였습니다.

문제를 종헌종법체계로만 돌릴 수는 없습니다. 무조건 옛 것을 고수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종단의 기초를 설계한 이들이 종헌종법을 만들면서 상가의 운영 원리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 어떤 것은 계승하고 어떤 것은 버렸어야 했는지를 면밀히 검토하지 않았거나, 생략한 채로 설계하였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종단의 운영체계들이 이렇게 세속의 흐름을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스님들에게 종단에게 세간보다 높은 도덕적 실천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수행자로서 수행공동체로서 당연히 요구받아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높은 도덕적 실천을 담보해줄 ‘상가’의 전통이 쇠퇴해지고, 종헌종법, 삼권분립, 대의민주주의와 같은 사회적 흐름을 채택한 이상 이 조직 안에서 세상과 유사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결과일지 모릅니다. 가톨릭이 전통적 교황선출방식인 콘클라베를 버리고, 선거로 교황을 뽑는다고 하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보면 이해 못할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94년 종단개혁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라고 묻게 됩니다. 짧게 말해 ‘종단의 근대화 민주화’의 계기였습니다. 여러 공이 있습니다만 한계도 명백합니다. 사회흐름에 조응하면서 규모가 커지는 등 근대적 성장을 이루었고, 권력은 일부 분산되었습니다만, 세상의 풍조대로 사유화 양극화가 물밀 듯이 진행되었습니다. 수입이 많거나 국고지원을 받을 수 있는 일부 사찰의 경우 경쟁이 치열해졌지만, 상당수의 사찰 형편은 정체 또는 나빠지고 있습니다. 세간의 수도권 쏠림현상과도 관계가 깊습니다. 또한 지역 내에서 본사나 수말사가 공동체의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거의 하지 못합니다. 그곳엔 어른인 장로그룹들도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선원에서 수행에 대한 탁마도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들었습니다. 선교율 이판의 역할은 급속히 퇴조되었습니다. 근대적 체계를 이끌어가는 사판의 역할은 지대해졌지만, 이 안에서 공동체의 미래를 염려하고, 연구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이 듭니다. 이러한 결과로 지금 종단의 전반적인 상태는 공동체의 붕괴-각자도생 풍조가 급격히 확산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94년 종단개혁은 상가 전통을 반영하지도, 이렇게 다가올 시대 흐름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던 한계가 있습니다.

범계행위가 사라지고, 청정한 승단이 유지되려면 나누고 서로 돕는 생활, 수행생활의 점검을 위한 포살과 자자, 부적격자의 정권, 퇴출과 같은 징벌의 문제까지 그 모든 것을 다루었던 ‘상가’라는 기초공동체가 살아 있어야 하는데, 그 공동체의 토대가 급속히 와해되는데도, 어디서도 이 문제를 자기 문제로 여겨 대책마련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나마 잘 살고 있다고 신뢰받는 스님들이, 공동체 문제에는 얼굴을 돌리며 손가락질 하는 현실이 잘 말해줍니다. 지금처럼 아무도 공동체라는 숲을 가꾸지 않고 그 숲에서 재목을 캐낼 생각만 한다면, 숲은 사라지고 결국은 나무도 홀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인데도요. 공업이라는 인식, 역사적 인식, 구조에 대한 인식, 그리고 문제의 발생과 발생원인, 소멸과 소멸원인에 공동의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인식이 이 공동체 안에서 살아나야 합니다.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공동체라는 숲의 일원으로서 제 역할을 모색해야 합니다.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부처님 당시의 승단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곤 합니다. 맞는 말이고, 누구나 바라는 바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과도한 오해가 깔려 있습니다. 첫째, 부처님 재세시의 승단을 오늘과 다른 매우 이상적인 상태로만 여기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의 출가수행자 집단 안에도 별별 사람들이 다 있었습니다. 숱한 사례를 담고 있는 막대한 양의 율장이 그 근거입니다. 오죽하면 부처님을 살해하려고 한 제자까지 있었겠습니까? 두 번째 오해는 승단에서 범계행위를 다루는 태도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계를 범한 스님들은 공동체에서 쫓아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바라이죄 외에는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바라이죄는 사람을 죽이거나, 깨달았다고 거짓말 하거나, 성적 교합을 하거나, 공동체를 파괴한 죄 4가지입니다. 이러한 바라이죄에 대해서는 엄격히 책임을 물어 추방했지만, 이를 제외한 모든 비윤리적 행위에 대한 징벌은 공동체 밖 추방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이 함께 고쳐가며 살도록 했습니다. 공동체가 잘 운영되어 잘못을 고쳐가는 것이야말로 진리의 관점에서 지향된 것이었습니다. 죄에 따르는 처벌이 아니라 개선, 그리고 개선을 위한 공동체의 노력이 불교공동체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의 자정노력은 미약하기만 합니다. 재가불자들의 역할이 중요해졌고, 그때마다 종종 등장하는 것이 코삼비의 사례입니다만, 이 코삼비의 사례에 대해서는 좀 더 면밀하게 생각할 점들이 있습니다. 코삼비의 사례를 옮겨봅니다.

코삼비의 사례

코삼비에 살던 한 비구가 용변을 본 후 뒷물을 버리지 않았다. 그 비구는 교법에 정통하고 명민한 비구였다. 계율에 밝은 다른 한 비구가 그 허물을 지적했다. 소소한 허물이지만, 범계에 들어간다고 말했다. 교학에 밝은 비구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며칠 뒤 지대방에서 율에 밝은 비구가 도반들에게 그 사실을 말하였다. “교법에 밝다고 하더니 그 비구는 사소한 율도 지키지 못하더라” 소문이 돌아 그 비구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교학에 밝은 비구는 “허물 축에도 들어가지 않을만한 작은 일인데도 뒤에서 비방을 하다니”하면서 율에 밝은 비구를 비난하였다. 율에 밝은 비구측은 갈마를 소집하였고, 교학에 밝은 비구는 정권(停權)조치되었다. 그는 항변하였다. “정권조치는 잘못된 것이다. 나는 계를 범하지 않았다.” 이제 분란은 두 비구에서 두 비구를 지지하는 집단으로 확대되었다. 양 그룹은 서로 패를 나뉘어 상대측을 비난했다.

이 사태를 전해들은 부처님께서는 서로 갈라져 싸우는 비구들을 찾아가 “만약 승단의 분열을 무겁게 여긴다면 이렇게 행동해서는 안된다”고 간곡하게 당부했다. 그러나 그들은 고집을 꺽기는 커녕 다툼을 계속하더니 급기야 포살과 갈마까지 따로따로 거행하였다.

그러자 부처님은 정권 처분을 내린 비구들을 불러 말했다. “아, 이 비구승단은 부서졌고, 분열되었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사건이 있을 때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어떤 비구를 정권시켜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범계를 범계로 보지 않았다고 해서 정권시킨다면 그로 말미암아 승단에는 다툼과 논쟁, 시비가 일어나 승단은 결국 부서지고 더럽혀지고 나뉘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은 정권된 비구를 따르는 비구들에게도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비구가 범계를 저질렀는데 그는 그것을 범계로 보지 않고 다른 비구들은 범계로 보고 있소. 만약 그 비구가 승단의 분열을 무겁게 여긴다면, 다른 비구들을 믿고서 자신의 범계를 스스로 알려야 합니다.”

이렇게 양측에 간곡한 뜻을 전하였지만, 양측의 시비는 잦아들지 않았다. 저자거리에 있는 식당에서 서로 욕설을 하며 몸으로도 싸우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부처님은 그 말씀을 듣고 그 비구들을 불러 이르셨다. “비구들이여, 승단이 분열되고 교법대로 실천하지 않고 서로 우호적이지 않을 때라도 그대들은 서로 조리에 맞지 않는 몸짓과 말로 공격하거나 몸싸움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함게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오. 그리고 승단이 분열되었지만 교법대로 실천하고 서로 우호적일 때에는 다른 비구들과 이웃하여 함께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합니다”

이에 대해 어떤 비구가 이렇게 말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편안하게 기다리십시오. 이 다툼과 싸움과 논쟁 시비는 저희들의 일입니다.” 부처님은 거듭해서 “시비를 그만두시오”라고 말하였고, 비구들은 번번이 “시비는 저희들의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상황이 이 정도에 이르지 부처님은 “이들은 너무나도 어리석어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코삼비를 떠나신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의 싸움을 해결하지 못한 채 시자도 없이 먼 길을 거쳐서 사밧티(사위성)에 도착하셔서 제타 숲에 있는 아나타핀디카(급고독장자)의 동산에서 머무시게 되었다. 이때 부처님이 떠난 것을 알게 된 재가 제자들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이 코삼비의 비구들은 우리에게 엄청난 손해를 끼쳤다. 세존께서는 그들 때문에 이곳을 떠나셨다. 그러니 우리들은 코삼비의 비구들을 만나도 절을 하지 말고, 일어서서 합장의 예를 갖추어 존중•존경하지 말며, 그들에게 공양 올리지 말고, 혹 우리를 찾아와도 걸식물을 주지 말자. 만약 이들이 우리들에게서 존경•존중받지 못하고 공양을 받지 못한다면, 그 때문에 떠나거나 환속하거나 화합을 되찾아 세존과 화해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코삼비의 재가 제자들은 비구들을 만나도 절을 하지 않았고, 걸식물을 주지 않았습니다. (큰 곤경에 처한) 코삼비의 비구들은 신자들에게서 존경도, 걸식물도 받지 못하자 서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벗들이여, 우리 함께 사밧티로 가서 세존을 뵙고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합시다”

이 소식을 들은 마하파자파티 고타미가 세존께 다가서서 물었다. “세존이시여, 늘 다툼을 일삼고 소송을 제기하기 좋아하는 코삼비의 비구들이 사밧티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저희들이 그들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합니까?”

부처님이 답하셨다. “고타미여, 그대는 양쪽의 법을 다 들으시오. 양쪽의 법을 들어보고, 어느 한쪽 비구들이 정법을 주장한다면 그들의 견해와 주장을 선택하시오. 모름지기 비구니 승단이 비구승단에서 무엇인가를 전수 받을 때는 그 모든 것이 정법을 주장하는 이에게서 전수되어야 합니다.”

우바새를 대표하는 아나타핀디카 장자와 우바이를 대표하는 비사카 부인이 물었다. “저희들이 그들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합니까?” 부처님이 답하였다. “거사여, 부인이여.. 그대들은 양쪽에 다 보시를 베풀도록 하시오. 보시를 한 뒤에 양쪽의 법을 다 들어보고, 어느 한 쪽 비구들이 정법을 주장한다면 그들의 견해와 주장을 선택하시오.”

상황이 이렇게 된 뒤에야 문제의 발단이 되었던 비구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나는 범계를 저질렀다. 나는 정권 처분을 받았다. 내게 정권 처분을 내린 갈마는 법도에 맞고 정당하며 그래서 취소될 수 없다” 그리고서 자신을 지지하던 비구들에게 가서 말했다. “이것은 범계입니다. 존자들께서는 저를 복권시켜 주십시오.” 그러자 정권 처분을 받았던 비구를 지지하는 비구들이 그 비구를 데리고 부처님 앞에 가서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비구가 범계를 저질렀습니다. ‘저를 복권시켜 주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저희들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이것은 범계입니다. 이 비구에게 정권 처분을 내린 갈마는 법도에 맞고 정당하며 취소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비구가 자신이 범계를 저질렀고, 정권 처분이 정당한 절차라고 알고 있으니, 이 비구를 복권시키도록 하시오.”

이어 정권 처분을 받은 비구를 지지하던 비구들이 정권 처분을 내린 비구들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벗들이여, 승단에 다툼과 싸움과 논쟁, 시비를 일으켜 결국 승단이 부서지고 더럽혀지고 분열하게 만들었던 사건에 대하여 당사자인 이 비구가 ‘범계를 저질렀고, 정권처분이 정당한 것이었다고 인정하고 복권 처분을 받았습니다. 벗들이여, 승단의 화합을 이룩하여 이 사건을 매듭짓도록 합시다”

그러자 정권 처분을 내렸던 비구들이 세존께 다가가 여쭈었다. “저희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처님이 답한다. “비구들이여, 그 비구는 자신이 범계를 저질렀고 자신에 대해 정당한 절차에 따라 정권 처분이 내려졌던 사실을 인정하여 복원이 되었소. 그러므로 그대들은 승단의 화합을 이룩하여 이 사건을 마무리 짓도록 하시오”.....

우팔리 장로가 ‘법도에 맞는 화합’을 여쭙자, 부처님께서는 “그 사건을 조사하고 근거를 갖추어 결론에 도달하여 승단의 화합을 이루어야 한다. 이것이 의미와 문자를 모두 갖춘 승단의 화합‘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때에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싸움이 없고 다툼이 없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엾이 여겨
일체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 것
모든 부처님의 기리는 바이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마땅히 인욕을 수행하라.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남방의 율장대품인 ‘마하박가’와 ‘아난존자의 일기’, 그리고 게송은 ‘증일아함경’을 인용하였다.)

코삼비 비구들의 다툼은 ‘뒷물’의 처리라는 매우 사소한 계율 위반 때문에 발생했습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싸움이나 분쟁이 의외로 사소한 일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잘못했다고 인정하고 주의하면 될 일을 자존심을 앞세워 맞서게 되면 다툼의 과정에서 미움과 원한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화해가 어렵게 됩니다. 잘못을 저질렀다면 사소한 것이라도 인정하고, 잘못을 인정한 사람은 기꺼이 용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소박하지만 공동체 윤리의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코삼비의 사례에서 우리는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코삼비에서 부처님은 모두 세 차례 분쟁을 말리기 위해 노력하십니다. ‘아난존자의 일기’에는 양 측의 비구들이 부처님 면전에서 치고받고 싸웠다고 적혀 있는데, 이렇게 제자들이 당신 앞에서 대놓고 싸울 때조차 부처님은 “비구들이여, 승단이 분열되고 교법대로 실천하지 않고 서로 우호적이지 않을 때라도 그대들은 서로 조리에 맞지 않는 몸짓과 말로 공격하거나 몸싸움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함게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오”라며 동반자로 인식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조건 싸우지마, 싸우면 나빠.. 이렇게 원론적인 말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처한 조건에서 제자들의 행위가 법에 부합하도록 최선을 다해 가르치려는 그 모습이 눈물겹습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태도는 참회하러 온 코삼비의 비구들을 어떻게 대하느냐고 묻는 비구니, 재가불자들에게 답하시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든 발 딛고 선 현실에서 그 행위를 고쳐가도록 이끌어주려 하십니다. 거기서 변화는 옵니다.

흔히 원시 승단이 부처님의 권위나 신통력으로 아무 문제없이 운영되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부처님의 권위는 제자들에게조차 진리를 바탕으로 한 대화와 설득 이외에 어떠한 권위도 사용하지 않았던 데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청정한 승단, 화합하는 교단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언가 절대적 권위를 가진 존재나, 외부적 힘에 의해 달성할 수 없습니다. 지지고 볶고 싸우더라도 지금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 안에서 진리를 꾸준하게 실천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그것이 공동체 구성원들간의 대화와 탁마로 확산되는 외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코삼비의 재가불자들의 대응도 어느 하나 진리에 위배됨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툼에 휘말리지도, 어느 편에 서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코삼비의 재가불자들은 공동체 전체에 책임을 묻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범계승만 공양을 거부하거나, 폭력승만 공양거부를 한 것이 아닙니다. 내 편의 스님께는 공양 올리고, 남의 편의 스님에게는 공양거부를 한 게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전체에 책임을 물었습니다. 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한 문제는 공동체 전체가 해결하라는 확고한 입장이 있었습니다.

또한 코삼비의 재가불자들은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왜 아무것도 아닌 일로 다툰다고 언성을 높이거나, 문제의 발단이 된 당사자들을 모두 쫓아낸다고 완력을 행사하거나, 밖으로 가서 폭로하는 식의 분노가 바탕이 된 직접적 물리적 개입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공양 올리기를 거부했습니다. 공양거부란 행위 자체가 너무 극적이어서 부정적으로 인식되기 쉽지만, 수행적 관점에서 문제되지 않을 행위였습니다. 수행자를 예경하고 공양 올리는 재가불자로서의 의무를 고요하게 멈춤으로써 그들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했습니다.

만약 코삼비의 재가불자들이 분노로 분쟁에 개입했다면, 또는 이 기회에 우리가 상석을 차지하자고 욕망으로 임했다면, 공양거부는 결코 효과를 거둘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재가자들 또한 분열되었을 것이고, 이탈자가 나왔을 것입니다. 효과를 거둘 수 없었을 것입니다. 코삼비의 재가불자들이 자기 내면의 불의를 해결하는 법다운 방식으로 공동체의 불의를 다뤘기 때문에 문제는 해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코삼비 비구들의 분쟁은 화합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화합으로 더 이상 문제를 삼지 않았습니다. 애초 발단이 되었던 범계행위를 당사자가 인정하고 참회하는 것으로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툼의 과정에서 파생되었을 여타의 폭력행위에 대해서도 경중을 가림 없이 덮었습니다. 지금 세상이라면 설혹 공동체 안에서 화합하며 문제를 해결했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폭력이나 불법이 있었다면 덮어질래야 덮어질 수 없겠습니다만, 부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승가의 화합을 무엇보다 우선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코삼비의 경우처럼 재가불자들의 공양거부가 필요한 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때조차 우리는 코삼비의 재가불자들처럼 욕망과 분노에 물들지 않고 공동체에 책임을 묻는 태도를 견지해야 합니다. 한 명의 이탈자도 없이 지극한 마음으로, 철저하게 해야 하고, 수행승들이 탁발로 생계를 유지하지 않는 현실을 감안하여 가장 효과적으로 정확하게 우리의 뜻을 전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청정한 종단은 어떻게 성취되는가
주최 측에서 논제를 묻기에 저는 ‘청정한 교단, 어떻게 성취되는가’로 하고 싶다고 전했습니다. 제가 ‘청정한 교단’이라고 말한 이유는 현재 종단의 문제를 주로 범계 행위로 보는 분들이 저를 이 자리에 초청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청정이라는 범주에 국한하기보다는 더 포괄적으로 우리가 바라는 종단이 어떤 것인지, 바람직한 종단의 모습은 무엇인지 그 고민을 나누어보고 싶습니다. 그래야 청정함이란 우리의 희망도 달성될 것입니다.

청정한 종단이란 무엇인가요?
사람들은 흔히 종단의 행태가 못마땅할 때 “중들이 산에서 도나 닦지...”라고 비난합니다. 언론에 스님들에 대한 부정적 보도가 있을 때도 그렇지만, 피신 온 철도노조원들을 조계사에서 보호할 때도, 스님들이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탄원서를 제출했을 때에도, 얼마 전 속칭 종북 콘서트 장소 사용을 허락해줄 때도 이러한 표현이 어김없이 등장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이들에게 바람직한 종단은, 그리고 스님들은 세속의 일에 참견하지 않으면서, 고요한 산사에서 참선하는 모습일지 모르겠습니다. 이들에게 불교는 세상 속에 있어서는 안될 탈속, 범속한 것이어야 하는 것이지요.

불자들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불교와 관련된 부정적인 뉴스를 접할 때마다 어떤 재가불자들은 “스님들이 기도나 하고, 수행이나 열심히 하시지”라고 말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수행이나 열심히 하시지라는 말에도 스님은 법당에서 염불하거나 선방에 앉아있어야 한다는, 세간과 분리되어 살아야 한다는 묘한 이원론이 숨어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바람직한 스님들의 모습이어야 한다면, 스님들은 모두 세상과 동떨어져서 세상일에 간여하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조선시대의 산중불교가 이상적인 모델이 될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 모두가 청정한 종단, 청정한 수행자를 바란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대체 청정함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면 생각이 다 제각각일 것입니다. 제가 바라는 청정함은 세상과 동떨어져 홀로 고요한 곳에서 머무르는 독각승이 누리는 고아함이 아닙니다. 혼탁한 세상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혼탁한 세상에 발 딛고 서서, 중생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보살승을 저는 바랍니다. 진흙탕에 핀 연꽃처럼 세간에 굳건히 뿌리내리고 서 있으되 세간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그런 것이어야 합니다. 남의 아픔을 따뜻하게 품어 안되,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바른 진리의 길을 몸소 보여줌으로써 고통에 처한 뭇생명을 완전한 해탈의 길로 이끌어주는 그런 공동체를 저는 바랍니다. 청정한 교단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없으면, 한국사회 상황에서, 불교대중들의 상황에서, 청정=탈속이라는 비현실적인 결론으로 귀결되고 말 것입니다.

이 종단 내에서는 그래도 잘 산다고 평가받는 스님들이 “저런 부류의 가짜 수행자와는 상종을 안해야 돼”라고 홀로 고아하게 떨어져 남을 손가락질 하며 사는 한 청정한 종단은 절대로 오지 않습니다. 어디 외진 곳에 저만의 외딴 성을 쌓아놓고, 거기서 왕 노릇을 하려고 하는 한 청정한 종단은 절대 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홀로 청정한 것은 혼탁한 세상과 만나자마자 금새 시들고 썩어 버립니다. 세상을 떠난 청정함은 유한하고, 위태합니다. 더러움을 겪어내지 못한 깨끗함은 작은 경계에도 금새 물들어 버립니다. 오늘날 진흙탕을 뒹굴며 지혜와 자비심으로 청정한 삶을 빚어내는 스님들이 어디에 얼마나 있습니까? 그런 분들이 많아진다면 이 종단은 저절로 청정해질 것입니다.

재가도 엄연히 책임이 있습니다. 만약 재가대중들 대다수가 스스로는 청정하지 못한 방법으로 재물을 쌓고, 남을 해치고 싸우며, 미망에 젖어 살면서, 출가 승단에 청정하고 지혜로운 삶을 요구한다 해서, 청정한 종단이 올 수 있을까요? 어떤 이는 말합니다. “우리 재가신도들은 출가수행승들에게 보시물을 제공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비록 그렇게 못살더라도, 출가자들에게 청정한 생활을 요구할 권리가 있지 않을까요.” 출재가의 관계를 마치 거래 관계처럼 여기는 이런 생각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반대로 내가 받는 보시물의 양만큼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출가수행승의 거래적 태도를 낳을 것입니다. 청정한 공동체란 이런 거래적 태도로는 오기 어려운 것입니다.

재가자들은 출가한 수행승들이 생활을 이어갈 수 있도록 보시를 베푸는 한편, 여기에만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 청정한 일상을 영위하면서, 시민의 삶에 현장에 나아가 그들의 아픔을 나누고, 거기서 나가 바른 진리의 길을 함께 실천함으로써 고통에 처한 뭇생명을 완전한 해탈의 길로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그 길에서 재가의 청정함은 달성될 것입니다. 재가의 청정함 역시 세파를 떠난 고아함이 아니라 세상을 위한 지혜, 세상을 위한 자비심으로 내 일터와 삶터를 구르고 구르면서 그 속에서 피워낸 청정함이어야 합니다.

청정한 종단은 사부대중이 청정한 삶을 살아가는 종단을 말합니다. 구성원 대다수가 청정한 삶을 살고 있지 않다면 어떤 좋은 제도와 장치를 만들어도 그 공동체는 청정해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청정한 종단은 어떻게 구현됩니까?
저는 청정한 종단이란, ‘상가’가 청정 화합의 공동체로 이어져온 세가지 전통(생활공동체, 포살, 대중공의)을 현대사회에 맞게 어떻게 창조적으로 구현해내는가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지금은 이 3가지 전통이 다 쇠약해져있기 때문에 하나하나 해야 할터인데요. 상가의 조직운영 원리를 창조적으로 회복하지 않는 한 상가는 더 쇠퇴해질 것이며, 여러 문제에 부딪칠 것입니다. 예전으로 무조건 되돌리자는 것이 아니라 ‘상가’를 지탱해 온 그 정신과 방향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부터 실천하는가 라고 물으신다면 실천이 그나마 용이한 대중공의 - 포살 - 생활공동체의 복원 순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활공동체의 복원은 단기간에 될 일이 아니지만 대중공의는 현재의 종헌종법 체계 안에서도 가능합니다. 변화된 시대에 맞게 재가불자의 적절한 참여와 역할을 보장하도록 문호를 개방하는 것도 꼭 필요합니다. 지금 부분적으로 시행되는 포살을 심화하는 것도 함께 병행되어야 합니다.

언론지상에 범계행위가 오르내리는데, 먼 미래의 일로 덮어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현실의 불의와 부당함을 눈감아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방식이 코삼비의 재가불자들처럼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편을 들어 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공동체에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해야 합니다. 잡초의 뿌리를 뽑지 않고 낫으로 깨끗이 잘라내도 잡초는 또 올라옵니다. 잡초의 뿌리를 여실하게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조적이고 통찰적인 인식이 필요합니다. 코삼비의 재가불자들처럼 공동체에 책임을 지우고, 공동체 전체가 그 문제의 해결에 나서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강력한 방안이 고민되어야 합니다. 이런 주제를 놓고 치열한 대중공사가 벌어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문제제기의 기본은 늘 상가의 복원을 염두에 두고 되어야 합니다. 붓다가 일구었던 공동체는 ‘문제없는 조직’이 아니라, ‘문제를 잘 다루는 조직’이었으며 우리가 바라는 청정한 종단은 문제가 없는 종단이 아니라, 문제를 잘 다루는 종단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방법도 법다워야 합니다. 외부로 의혹을 폭로하기 보다는 끈질기게 내부의 자정능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해야 합니다. 당사자들을 지속적으로 만나 대화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삼비에서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 사건을 조사하고 근거를 갖추어 결론에 도달한 명백한 사안’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행동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사안에 대해서는 코삼비의 재가불자들처럼 공정하고 예리하게, 고요하되 힘찬 물결처럼 밀려가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체 내 불의를 다루는 우리의 태도는 어때야 할까요?

평화적으로,
공정하게,
대중공의로.

종단을 조금 오래 지켜본 분들은 평화적으로 문제를 푸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동의하실 것입니다. 문제를 다룰 때 폭력을 사용하는 습관은 절대로 없어야 합니다. 98년, 99년 종단사태 이후 많이 사라졌지만, 적광 사미에 대한 폭력처럼 여전히 그 씨앗은 잠재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은 안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하고 지적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공정하게 문제를 다루지 못하는 것에 대한 대중의 불신이 깊습니다. 특히 사법부에 해당하는 호법부와 호계원에 대해서 그렇습니다. 그분들 입장에서는 대체로 공평하게 다루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한 두가지 사건이라도 공정하지 못하게 다루어지면 대중의 신뢰를 얻기 어렵습니다. 어제오늘의 문제도 아니어서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합니다. 총무원장이 호법부장을 임명하고, 중앙종회가 호계위원을 선출하는 지금의 구조로는 신뢰를 얻기 어렵다고 봅니다. 선교율에서 복수로 적임자들을 추천하는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평화적으로 문제를 다루지 못하는 관행의 불씨를 완전히 없애고, 공정한 풍토를 만드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 생각합니다.

이런 과제를 대중공사로 다루는 것이 본질적으로 중요합니다. 승가의 제일의제를 화합이라 하고, 승가를 화합중이라고 부른 이유는 문제를 적당히 덮으라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공동체적으로 풀라는 데에 있었습니다. “왜 그런 행위를 근절시키지 못합니까?” 공동체에 책임을 묻고, 공동체가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였던 것이지요. 사찰에서, 교구에서 대중공사로 문제를 다루는 전통을 살려낸다면, 문제를 다루는 태도도 성숙해질 뿐만 아니라, 상가 전통을 복원해내는 길이기도 합니다. 바보 셋이 모이면 문수지혜가 나온다 했습니다. 대중공사로는 소도 잡아먹는다 했습니다. 그만큼 대중공사가 중요하고 가치 있다는 말입니다. 대체 이 대중공사마저 부인하면, 어떤 방법으로 변화를 이루어내자고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오늘의 이 자리처럼 대중공사가 지속적으로 만들어져야 합니다.

여러 측면에서 종단은 전환기에 놓였습니다. 오늘날 종단이 안고 있는 여러 문제들은 해결하는데 있어 어느 하나 녹록한 과제가 없습니다. 그러한 문제들은 종단이라는 공동체가 걸어온 역사, 전체 구성원들의 삶의 태도, 사회적 여건과 외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업으로 빚어졌고, 연기적으로 우리 앞에 있는 문제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우리 모두가 공업으로 빚은 문제이니 공업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실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사찰의 양극화, 지역사찰 공동화, 승려 감소, 신도 감소 등 내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의 갈등과 양극화, 남북 문제, 중국의 성장과 동북아 정세의 불안 등 외부 환경까지 고려하였을 때 향후 10년 정도가 종단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고비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국현대사에서 종단은 세상을 물들여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세상의 흐름에 물들어 살아왔습니다. 그나마 2천년대 들어 환경생태, 생명평화운동에서 몇분의 스님들이, 최근에는 사회갈등에 대한 화쟁적 개입이 그나마 세상에 영향을 미친 시도였습니다. 묻고 싶습니다. 종단이 청정해진다면, 그 종단이 무엇을 하기 바라십니까? 그 뒤에 생각하자고 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그럴 정도로 우리 앞에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도 않습니다. 안팎을 함께 보고 함께 실천해야 합니다.

틱 낫한 스님은 미래의 부처님은 공동체로 화현하실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조계종이라는 공동체 다수의 구성원들이 불신과 패배주의, 개인주의를 넘어 문제 해결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야 합니다. 병든 나무 몇 그루 때문에 숲 전체를 불태워서는 안 될 것입니다. 숲을 살리기 위한 가장 효과적이고 정확한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 간절한 바람을 성취하는가 아닌가는 과제나 사안 자체에 달려있다기보다는 우리가 지금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 제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법답지 못한 표현이 있었다면 너그러이 용서하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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