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 위에 핀 꽃처럼... 지리산 사성암의 절경
허공 위에 핀 꽃처럼... 지리산 사성암의 절경
  • 오마이뉴스 김천령
  • 승인 2014.10.27 09:39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천령의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 섬진강 지리산 모두 볼 수 있는 사성암
기사 관련 사진
▲ 허공의 꽃 ⓒ 김종길

섬진강을 건너자 평지에 우뚝 솟은 산 하나가 앞을 가로막는다. '오산'이다. 포장길과 비포장길을 번갈아 내어주는 직각에 가까운 산길은 여전히 험했지만 발아래로 흐르는 섬진강은 언제 봐도 푸근했다.

지난 8월 28일 사성암 일원은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11호로 지정됐다. 그래서일까. 진입로를 새로 닦는 중인지 여기저기 벌건 생채기를 드러내고 공사가 한창이다. 진창길일망정 두려움을 떨쳐내고 구도의 마음으로 올랐던 아슬아슬한 옛길이 그립다.

누군가는 그랬겠지. 제아무리 경치가 빼어나도 오를 수 없다면 그것도 문제라고. 그러나 너도나도 쉬 올라 경외감을 잃어버리고 그 경치마저 오염되고 파괴된다면 이는 더 큰 문제일 것이다. 모든 편리는 영혼을 갉아먹을 수밖에 없다. 하물며 수행처인 이곳이 자본과 관광의 논리로 덧칠된다면 옛 성인들은 무슨 말을 할까.

기사 관련 사진
▲ 마애여래입상 ⓒ 김종길

벼랑의 마애불... 신비롭다

오산은 예로부터 많이 알려진 명산이었던 모양이다. 사성암에 대한 기록은 찾기 힘드나 대신 암자가 자리한 오산에 대한 기록은 더러 볼 수 있다. 송광사 제6세 국사인 원감국사(1226~1292) 문집에는 "오산 정상에 참선하기에 알맞은 바위가 있는데, 이들 바위는 도선·진각 양 국사가 연좌수도(宴坐修道)했던 곳"이라고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오산은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산 정상에 바위 하나가 있고 바위에 빈틈이 있는데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세상에 전하기를, '중 도선이 예전에 이 산에 살면서 천하의 지리를 그렸다'고 한다"고 적고 있다. 1800년 구례 향교에서 발간한 <봉성지>에는 "그 바위의 형상이 빼어나 금강산과 같으며, 예부터 부르기를 소금강"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 같은 기록들로 보아 예부터 오산은 고승들이 참선했던 수도처였던 것으로 보인다.

오산 꼭대기에 아스라이 걸려 있는 사성암은 네 명의 성인이 나왔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원효(617~686), 의상(625~702), 도선(827~898), 진각(1178∼1234) 등 네 명의 고승들이 이곳에서 수도했다고 한다.

기사 관련 사진
▲ 섬진강 ⓒ 김종길

의상 스님이 창건하거나 주석한 절은 하나같이 탁 트인 곳이라 이내 고개가 끄덕여졌지만 원효 스님이 이곳에 머물렀다고 하는 데선 조금 의문이 생긴다. 절의 창건 시기를 조밀하게 살펴보면 결국 의상 스님과 원효 스님은 사성암과 관련이 없는 인물로, 후대에 덧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이런 암자에 창조의 여백과 상상의 공간은 남겨두어야 할 것 같아 시답잖은 시비야 잠시 접어두고 볼 일이다.

네 분의 고승 중 진각국사 혜심은 이곳에서의 족적이 뚜렷하다. 진각국사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조계산에 들어가 보조국사 지눌의 제자가 되었다. 그가 오산에 있을 때 한 바위 위에 앉아 밤낮으로 도를 닦았다. 매일 오경(새벽 3시~5시)만 되면 스님의 게송 읊는 소리가 십 리 밖까지 들려 마을 사람들이 아침이 됐음을 알았다고 한다.

기사 관련 사진
▲ 벼랑을 내려오는 스님 ⓒ 김종길

진각국사는 지리산 금대암에 있을 때 눈이 이마에까지 쌓여도 움직임 없이 단정히 앉아 오직 구도에 몰두했고, 1208년 보조국사가 수선사(송광사)의 주지 자리를 맡으라 하자 지리산으로 피해 숨어 지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1210년 결국 스승 보조국사가 입적하자 왕명에 의해 수선사에 돌아가 조계종의 제2세가 되었다. 고려 무신정권의 핵심인물이던 최충헌의 아들 최우가 자신의 두 아들을 진각국사에게 출가시킬 정도로 그에 대한 믿음은 절대적이었다. 보조국사에 의해 시작된 수선사 선풍은 진각국사에 의해 확립되어 이른바 수선사(송광사) 16 국사가 배출됐다.

벼랑을 오른다. 수어 번 다녀갔지만 높은 벼랑에 아득히 걸려 있는 약사전의 풍광은 황홀하다. 약사전 전각이 세워지기 전 벼랑에 그대로 새겨진 마애불을 본 적이 있었다. 원효 스님이 선정에 들어 손톱으로 그렸다는 마애불은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오후의 햇살이 비치면 선은 사라져 본래의 바위가 되고, 빛이 사라지면 선 윤곽이 또렷이 살아나 부처의 모습이 보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애불에 보호각(약사전)이 지어진다는 말에 걱정이 앞서 몇 번을 부러 찾았다. 다행히 새로 지은 전각은 주위 산세와 잘 어울렸다.

벼랑 곳곳에는 한 뼘 정도의 공간들이 있다. 이 좁은 공간들에 겨우 건물 서너 채가 각기 들어앉았는데, 그 자리매김한 자세가 참으로 오묘하다. 벼랑 곳곳에 걸쳐 있는 높다란 바위는 수도하기에 맞춤인 좌선대가 되고, 벼랑 사이에 삿갓배미처럼 들어앉은 좁은 공간들은 암자의 건물이 설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된다.

기사 관련 사진
▲ 허공의 꽃 ⓒ 김종길

오묘한 공간... 자유자재한 삶을 맛보다

법당을 오르기 위해서는 돌층계를 올라야 한다. 반대편 약사전에서 보면 돌 속으로 사람이 걸어 들어가는 것 같다. 마침 스님 한 분이 내려오는데 마치 돌 사이에서 나오는 기인으로 보인다. 스님이 공중에 떠있는 종무소 누각을 걷는다.

벼랑 끝에서 길이 끊겼는데 스님은 무심코 내딛는다. 길이 끊긴 것인가. 허공이 잘린 것인가. 벼랑 끝으로 한 발 내디딜 용기가 없다면 아예 허공 밖으로 한 발 내디딜 일이다. 허공에 뜬 누각 위를 걷는 스님, 한 떨기 꽃 같다. 층계를 올랐다. 바위 벼랑에 꽃 한 떨기 피었다. 허공의 꽃. 어디서 날아와서 하필 벼랑에 피었단 말인가. 천길 벼랑 끝 허공에 핀 꽃. 오고 감도 없이 피어난 것이니 꽃도 그 무엇도 아닌 것.

"중생이 생멸이 없는 데서 헛되이 생사와 열반을 보는 것은 마치 허공에서 꽃이 피고 지는 것과 같다"고 했던가. 서산 대사는 <선가귀감>에서 성품에는 본래 생멸이 없으니 생사와 열반이 없는 것이요, 허공에는 본래 꽃이 없으므로 꽃이 피고 지는 것도 없는 것이라고 했다. 생사를 본다는 것은 허공에 꽃이 핀 것을 보는 것이고 열반을 본다는 것은 허공에 꽃이 지는 것을 봤다는 것인데, 본래 피어날 것도 질 것도 없는 꽃인데 무엇을 따진단 말인가.

결국 '허공의 꽃'처럼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있지도 않은 허공의 꽃을 볼 수는 없는 일. 그러니 시비를 따진들 무엇할까. 모든 법은 공하니 색즉시공이요. 공 자체에서 인연으로 온갖 모습이 드러나니 공즉시색이다. 오로지 법의 진실을 알고 색(色)에도 걸리지 않고 공(空)에도 걸리지 않는 자유자재한 삶을 살 뿐...

기사 관련 사진
▲ 도선굴 ⓒ 김종길

벼랑 틈에 자리한 산신각 좌우엔 도선굴과 관음 바위가 있다. 겨우 한 사람 앉을 만한 작은 굴에 도선국사의 이야기가 얽혀 있다는 것이 다소 의아하지만 오른편 관음 바위를 보고 나면 사람 얼굴, 그것도 부처의 얼굴을 쏙 빼닮았음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만다.

산신각 앞으로는 돌담을 쌓아 경계를 만들었다. 돌담 너머로는 천 길 낭떠러지이다. 승계와 속계를 이처럼 극적으로 구분한 곳도 없으리라. 옛 고승들은 발아래로 펼쳐지는 사바세계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암자 뒤편으로 우뚝 솟은 절벽을 돌아 오산 정상에 올랐다. 풍월대, 망풍대, 신선대, 좌선대, 우선대, 낙조대 등 기묘한 바위들의 12 비경이 펼쳐진다. 오산은 해발 530.8 미터로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사방이 한눈에 들어오는 뛰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구례 들판과 그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 굳건한 성벽처럼 버티고 있는 노고단, 노고단에서 옥가락지가 흘러내린 삼남의 명당 오미리 운조루까지 사방 풍경이 한꺼번에 들어온다.

선승들이 높은 수행처를 추구하는 이유는?

기사 관련 사진
▲ 약사전 허공을 오르는 스님 ⓒ 김종길

무릇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기운이 중요하다. 땅과 하늘의 기운을 받지 못하는 현대의 아파트 생활은 사람의 정서 또한 삭막하고 메마르게 만든다. 부드러운 대지의 기운과 푸른 하늘과 초록의 숲에서 멀어지니 그럴 수밖에. 일반인들도 이러할진대 수행을 하는 이들에게도 기운이 남다른 곳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높은 벼랑에 암자를 지었을까. 불가에서 도를 깨치는 것을 '돈오'라 하고, 깨치고 난 후 수행을 계속하는 것을 '점수'라 한다. 성철 스님처럼 단박에 깨쳐 더 이상 수행할 것이 없다는 입장이 '돈오돈수'라면, 깨치고 난 뒤에도 중생의 습기를 없애는 등의 수행이 필요하다는 것이 '돈오점수'다.

오산은 평지에 우뚝 솟은 산이지만 넉넉하다. 너른 구례 들판과 넉넉한 지리산, 어머니 젖줄 같은 섬진강이 있으니 포용이 넓다. 비록 절벽에 들어선 암자지만 이곳에서 보는 조망은 충분히 포용력을 갖게 한다. 사방이 탁 트여 있으니 어느 한 곳 막힘이 없고 저 멀리 풍경까지 속속들이 들어온다. 눈에 들어온다는 것은 이 모든 것들을 수용하고 포용한다는 말이다.

도를 이룬 선승들이 이처럼 툭 터진 곳을 수행처로 삼는 것은 당연한 일. 도를 깨치기 전까지는 한 지점만 응시한 채 자신을 들여다보지만, 깨치고 난 뒤에는 자신을 넘어 세상의 모든 것을 수용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를 불가에선 '오도(불도의 진리를 깨달음)'와 '보림(깨달은 뒤에 더욱 갈고 닦는 수행법)'의 과정으로 설명한다.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길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 높은 곳에서 진리를 깨치고, 도를 이뤄 부처가 되기 위해 정진하는 동시에 저 아래 사바세계의 고해에서 헤매는 일체중생을 구제해야 한다는 보살의 일념을 되새겼을 것이다. 이렇게 확 트인 곳으로 여수 향일암, 낙산사 홍련암, 지리산 금대암, 남해 보리암 등을 들 수 있다.

다만, 이 탁 트인 곳이 모든 사람에게 좋은 곳은 아니다. 아직 수행이 부족하거나 떠도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이 이런 곳에 있게 되면 마음을 잡지 못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산으로 아늑히 둘러싸인 어머니 품속 같은 곳에 있어야 마음을 다잡고 공부가 제대로 된다. 지리산 벽송사가 그러하다. 벽송사가 조선 선불교의 종가라는 별칭을 갖게 된 데는 우연이 아니다.

벼랑 사이로 숨은 해를 쫓아 밖으로 나왔다. 강 건너 산 능선에 반쯤 걸려 있던 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푸른빛 어스름 속에서 스님 한 분이 붉은 가사를 입고 높다란 벼랑을 오른다. 잠시 후 벼랑을 빠져나온 염불 소리가 사방 허공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기사 관련 사진
▲ 암자에서 내려다본 구례들판와 섬진강 ⓒ 김종길

네 명의 고승이 수도했다는 사성암, 이런 추측도 가능
지리산과 섬진강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사성암은 오산 정산 부근의 깎아지른 암벽에 지은 암자로 원래 오산암이라 불렀다. 544년(진흥왕 5년) 연기조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오산(鰲山)은 바위가 거북이(자라) 등껍질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성암사적>에 4명의 고승, 즉 원효대사, 도선국사, 진각국사, 의상대사가 수도하였다고 하여 사성암이라 부르고 있다. 

사성암은 연기조사가 544년(진흥왕 5년)에 화엄사를 창건한 후 지었다고 하나 이는 다소 무리가 있다. 화엄사는 <화엄사사적>과 <구례속지>에 544년(진흥왕 5년)에 연기조사가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진흥왕 당시 구례는 백제의 땅이었고 화엄사의 석조물들이 대부분 8~9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미루어 이런 기록을 믿기는 어렵다.

게다가 1979년 발견된 <신라화엄경사경> 발문에는 연기조사가 754년(경덕왕 13년) 8월부터 화엄사에서 <신라화엄경사경>을 만들기 시작해 이듬해 2월에 완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써 화엄사는 8세기 중엽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는데 사성암도 연기조사가 창건했다면 이와 비슷한 시기로 추정된다. 물론 이렇게 볼 때 그 이전에 살았던 원효(617~686) 스님과 의상(625~702) 스님이 사성암에서 주석했다는 것은 후대에 오산암이 사성암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덧붙여진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연기조사는 생몰연대가 확실하지 않다. 인도의 승려라는 설도 있으나 확실한 건 신라 경덕왕 때의 황룡사 소속의 승려였다는 사실이다. 연기조사의 흔적은 지리산 일대에서만 화엄사를 비롯해 대원사, 연곡사, 법계사 등에서 볼 수 있다.

약사전 암벽에는 구례 사성암 마애여래입상(전남유형문화재 제220호)이 조각되어 있다. 음각으로 생긴 이 마애여래입상이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밝혀지면서 이 암자가 언제 지어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불교중심 불교닷컴, 기사제보 cetana@gmail.com]
"이 기사를 응원합니다." 불교닷컴 자발적 유료화 신청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들불 2014-10-28 17:32:21
편벽되지 아니하고 사실을 밝혀가면서 쓴 글 좋습니다
사성암은 굳이 연대를 높이거나 고승들이 수행했다는 연원을 강조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성암은 그 암자의 모습과 풍광으로 사람들이 찾는 곳이니까요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11길 16 대형빌딩 4층
  • 대표전화 : (02) 734-7336
  • 팩스 : (02) 6280-255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만
  • 대표 : 이석만
  • 사업자번호 : 101-11-47022
  • 법인명 : 불교닷컴
  • 제호 : 불교닷컴
  • 등록번호 : 서울, 아05082
  • 등록일 : 2007-09-17
  • 발행일 : 2006-01-21
  • 발행인 : 이석만
  • 편집인 : 이석만
  • 불교닷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불교닷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san2580@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