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도, 드러난 도
숨은 도, 드러난 도
  • 강병균 교수(포항공대)
  • 승인 2014.09.29 15:57
  • 댓글 1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17

부처님은 임종에 즈음하여 말씀하셨다. 나는 무엇을 주먹에 쥐고 감추어 보여주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모든 것을 숨기지 않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내 가르침에 의지해 수행하라.

그런데 사람들은 뭔가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가르침을 찾아 헤매는 성향이 있다.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가 있는데,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그리할까? 게다가 84,000경 장광설(長廣舌)까지 있는데, 뭘 찾아다니는 것일까? 아마, 도망가는 짐승과 식용식물을 찾아다니던 수렵채집기 습성의 흔적일지 모른다. 주거지 근처의 것은 다 잡아먹고 따먹고 캐먹었으므로, 멀리 이동해야 먹이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은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지으므로 옛 습성은 이미 오래 전에 쓸모가 없어졌건만, 사람들은 잠에서 덜 깬 듯 꿈속에 사는 듯 옛 습성의 숙취에 빠져있다. 그래서 태백산에 수십 년 은거한 도사를, 소백산 깊은 토굴에서 수십 년 참선한 스님을, 그리고 지리산 깊은 골에 세상을 등지고 숨어사는 수십 년 묵은 도라지 같은 때 묻지 않고 얼굴 맑은 수행자를 찾아다니는 것이다.

숨어있는 것이 최고가 아니다. 드러나 있는 것은 이미 검증을 거쳤으므로 위험하지 않다. 모르는 것을 잘못 먹으면 독에 중독될 수 있다. 낯선 버섯을 먹다 독버섯을 먹고 죽는 사람들이 매년 발생한다.

산에 은거하여 수십 년 도를 닦았다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한다. 세상은 무섭게 변하는데, 산속에만 살았다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들이 하는 기이한 주장은, 예를 들어 천둥·번개를 관장하는 용에 대한 믿음은, 그냥 현대과학에 무지해서 뱉어내는 말이다.

또한 이런 사람들은 독이 없을 지라도, 쉬운 말을 어렵게 표현하는 비상한 재주를 지니고 있다. 긴 시간을 들여 애써 파악하고 보면, 그 가르침의 그 평이함에 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뭔가 신비함을 찾아다니는 추종자의 마음’과 ‘시대에 뒤처진 도사의 표현방식’이 연합해서 오해를 빚은 것이다. 주어, 동사, 형용사, 부사, 전치사, 조사, 목적어가 문법의 우리를 박차고 뛰쳐나가 어지러이 제멋대로 날아다니면, 신비감은 가속화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최고의 진리가 숨어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언어도단 심행멸처(言語道斷 心行滅處 말길이 끊어지고 마음이 소멸한 곳)’라고 몇 마디 얻어들은 문자가 있으면, 무른 된장에 떨어진 야무진 돌처럼 확신은 깊어진다. 대장경 84,000권에 차마 기록하지 못한 진리를 저분이 독점적으로 그리고 배타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이런 사람들은 최악의 경우에는 진짜 독버섯일 수도 있다. 그것도 수십 년 묵은, 독이 오를 대로 오른, 독버섯! 온통 황당무계하고 괴력난신(怪力亂神)적인 데다가 혹세무민까지 하는 환망공상(幻妄空想 환상 망상 공상 상상)으로 이루어진 허깨비일 수 있다. 이런 생각에 물들면, 몸은 현대과학(자연과학과 인문과학)문명의 빛으로 휘황찬란한 백주대낮에 살아도, 마음은 햇빛 한 점 안 드는 만 길 깊이 동굴 속에 사는 것과 다름없다.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주 조심할 일이다.

중국에서 벌어진 기이한 일이 있다. 도로 건설 중 땅속에서 커다란 알이 발견되었다(이런 유의 사건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알을 자르자 알속에 좌정한 머리가 긴 사람이 나타났다. 알껍질은 그 사람의 손톱과 발톱이 자라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사람들이 누구냐고 묻자, 그는 “나는 석가모니부처님 바로 전 부처인 가섭불 때 수행자인데 석가모니불을 기다리려 선정(禪定)에 들었다”고 하며, “석가모니 부처님은 어디 계시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석가는 이미 2,500년 전에 입적했다”고 대답하자, 그는 ‘펑’하고 사라져버렸다. 그이는 자그마치 수백만 년을 선정에 들어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쉽고 멍청하게도 석가모니부처님이 득도하셨을 때 선정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지나쳐버렸다.

그가 설사 사라지지 않고 이 시대를 살아간다 해도, 바뀐 세상에 적응하려면 엄청나게 힘들 것이다. 수백만 년 전 사람이라면 인간은 생긴 것도 동물원의 침팬지보다 더 동물적이고, 지능도 더 저열하고, 문화도 침팬지보다 더 미개한 시절인데, 무슨 수로 이 어지러운 현대에 적응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현대교육을 받지 않았으므로 현대문명을 이해하고 거기 적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애완동물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들은 인간과 같이 살지만 인간이 이룩하고 향유(享有)하는 과학기술문명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과거의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며, 알려지지 않은 기이한 것이 더 우수한 것이 아니다.

부처님은 ‘내 말이라고 무조건 따르지 말고, 행해보고 맞으면 따르라’고 하셨다. 이것은 진정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자세이다. 부처님은, 하늘나라에 태어나려고 제사를 지내는 사람에게 ‘과연 그 사람의 조상들이 제사를 지냄으로써 하늘나라에 태어났는지’를, 그 사람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부터 시작해서 수대에 걸쳐서 물었다. 그렇지 않다는 대답이 나오자, 부처님은 ‘그렇다면 제사를 지내는 것은 헛수고’라고 지적한다. 불경 도처(到處)에서 이런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면을 발견할 수 있다.

불교수행의 최고경지인 해탈조차도, 수행자가 자신이 해탈했음을 남이 말해주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아는 것이다: 이것은 오분향 중의 해탈지견(解脫知見)향에 해당한다. 자신의 번뇌가 소멸하였는지, 즉 누진통(漏盡通)을 이루었는지는 스스로 아는 것이다. (초기불전 ‘장로게(長老偈)’와 ‘장로니게(長老尼偈)’에는 이런 증언이 무수히 나온다.) 최고경지인 해탈이 그러할진대, 지금 바로 여기서 확인할 수 없는 것은 불교가 아니다.

따라서 신비주의적인 면은 선도(仙道)나 힌두교나 배화교(拜火敎) 등의 외도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후대의 가필(加筆)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한 아이가 ‘우리 아빠는 하늘을 날아다니고 총에 맞아도 죽지 않는다’고 큰소리치면, 다른 아이는 더 큰 목소리로 ‘울 아빠는 우주를 날아다니고 핵폭탄에 맞아도 죽지 않는다’고 응수한다. 뻔히 사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리 대꾸한다. 모든 종교적인 초자연적인 현상의 기원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기이한 주장을 하면 철저히 검증을 해볼 일이다. 그러고도 믿을 만하다면 당신은 대박을 친 것이다! 엄밀한 검증을 거치지 않으면 이미 시중에 유포되어있는 가르침보다도 못한 저질 싸구려 주장과 견해를 턱없이 비싼 값을 주고 살 위험이, 즉 된통 바가지 쓸 위험이 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십중팔구 당신이 게을러서 공부를 안 한 결과이다. 그래서 훨씬 더 품질 좋은 가르침이 이미 시중에 도처에 깔려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한탕을 노리는 당신의 사행심이 원인일 수도 있다. 심하게는, 생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권태에 뿌리를 둔 선정주의(煽情主義 sensationalism)일 수도 있다.

이런 분들에게는 베이어드 스폴딩(Baird T. Spalding)의 ‘극동의 스승들의 삶과 가르침(Life and Teaching of the Masters of the Far East)’이라는 5권짜리 책을 권한다. 인도 카슈미르 지방에 석가와 예수가 손을 잡고 나타나는 등 경천동지할 내용들이 펼쳐진다. 하지만 당신의 삶이 변용될지는 의문이다. 영화 ‘인디애나존스’를 보는 것과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볼 때야 기가 막히게 재미있지만, 다음 영화가 개봉될 즈음이면 그냥 흘러간 영화일 뿐이다. 아! 덧없는 이 세상에 대한, 부처님의 선언인 ‘무상(無常)’은 진리 중의 진리이다(無常是眞中眞).

이 세상(기세간과 우리 몸과 마음)은 연기(緣起)적인 것이므로, 개인과 도(道)는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회와 즉 타인과의 교류가 없는 도는 죽은 도이다. 그런 도가 의미가 있다면, 차라리 돌이 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돌 역시 번뇌도 없고 말도 못한다. 방편(方便)이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나온다면, 도(道)도 이미 그 안에 사회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침팬지가 깨달음을 얻어도 인간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은 분명하다. 침팬지의 깨달음은 침팬지들에게나 유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의식과 언어를 공유해야만 깨달음의 내용과 수준이 일치하고, 소통이 가능하고,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사반세기 전에 기이한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19세기 초반 혼란스러운 동북아시아 국제정세 속의 티베트를 무대로 한, 실화를 바탕으로 쓰였다고 주장하는, 소설이었다. 열심히 도를 닦은 한 티베트 스님이 예티(설인 雪人 눈사람)들을 교화한다는 내용이다. 눈 덮인 깊은 설산을 찾아가, 자신을 보고 도망가는 적대적인 예티들을 우여곡절 끝에 동굴에 모아놓고 설법을 한다. 이 스님의 전생이 예티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동굴이 바로, 그 스님이 직전(直前) 전생에 살던 곳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알아봤고 그들의 언어를 기억해냈다.

그러므로 우리들 사이에서, 즉 사회 안에서 숨쉬고 살아 움직이며 소통하는 드러난 도(道)가 진짜 도이다.

부처님의 45년 전법인생(傳法人生)은 중생과 같이 한 소통의 삶이었다. 부처님은 임종 당일 병으로 인한 극심한 육체적 고통 속에서도, 부처님을 찾아와 기어코 제자가 되겠다고 떼를 쓰는 120살이나 먹은 외도(外道) 수행자 수발타라를 마지막 제자로 받아들이고 그와 문답을 나누었다.

도(道)가 물이라면 깊은 산속의 옹달샘이 아니라, 마을 한가운데의 우물이다.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불교중심 불교닷컴, 기사제보 cetana@gmail.com]

"이 기사를 응원합니다." 불교닷컴 자발적 유료화 신청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8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2014-10-04 12:05:28
아생이진-범행이립-소작이작-자지.불수후유 (我生已盡-梵行已立-所作已作-<自知>.不受後有)
--- <'번뇌가 사라졌음을 스스로 안다' (自知.不受後有) ~ 해탈지견의 주체가 '있다'>

~ 스스로, 그리고 주체 ~
이것들은 속제적 ‘자아’ 또는 세간-언설적인 ‘나’의 표현입니다.

아래 분은 어떤 의미로 ‘무아론’을 불교의 2대악의 하나라고 하고 있는지 모르겠고,
또 그 아래 분은 이러한 ‘自’의 표현적 세간-언설을 “참나의 언명”으로 연장하고 계시네요.

강교수의 무아론은 과학적 해체의 존재론적 무아에서 끝나기 때문에 그 무아를 문제 삼는 것은 당연하겠습니다. ~ (강교수님이 수행적 증득이 되신 상태에서 무아를 속제적 표현으로써 하고 계시는 것은 설마 아니시죠? 혹시나 하고 확인해 봅니다.) ~ 그 정도의 이성적/과학적 이해 수준의 무아론을 배경으로 “무아-행!” 하면서 선동하는 이들은 불신천국/예수지옥^^이라고 우기는 거와 “똑”-같답니다.

그리고 “自知-不受後有”의 나를 “참나”의 증거로 들이대는 분들도 조금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이라는 파라독스도 사유하시면서요. 듣기에는 남방불교에서도 사쌍팔배 성인-도과의 성취를 스스로도 언급하지 않으며, 또 앞선 선지식의 성인이 인가해 주는 것도 아니라고 하네요. 맞나요? 또 그러한 섣부른 행위들은 사기적인 의혹을 받는다고 하기도 하고요. (이런 정도의 높은 수준을 설마 신비주의라고까지 여길 강교수님-류의 ‘石’^^은 없으시길 바랍니다.)
--- 이 과정에 대한 사유가 없는 “참나”의 표방은 듣는 이들의 입장에서도 굳이 반발까지는 않더라도 속으로 당혹스러운 것은 아마 같을 것입니다. __()__

마하반야 2014-10-03 21:06:26
불교의 2대악 = 단멸론자, 무아론자
불교의 2대법 = 단번뇌, 증열반(참나)

도는 막연한게 아닙니다 2014-10-03 16:58:00
불교에서 말하는 도는 간명합니다. 마음의 본성을 알면 도를 아는 것이고 모르면 도를 모르는 것이죠. 불교는 마음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본성을 모를 때는 중생심을 내어 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고(두카)라는 문제에 직면할 수 밖에 없고 윤회하면서 지속적으로 두카에 매이게 되죠. 마음의 본성을 알아서(도를 깨우쳐서) 윤회를 끝내자는게 불교입니다.

헌데 불교는 시대별로 본성을 깨우치는(도를 깨우치는) 수행법을 달리 제시했습니다. 사람들 근기에 맞게 가르침이 다르고 지역적 특성이 가미 되면서 불교언어의 색채도 다양해 졌습니다.

강교수는 이 사실을 간과하고 마음의 본성을 깨우치는 한 방법인 선불교가 불교가 아니다,라고 억지 주장을 하니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는 것입니다.

강교수가 보기에는 선불교는 제법무아의 가르침과 맞지 않고 심지어 힌두교의 아트만 사상을 가르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선불교의 참나,주인공등 진리를 가리키는 용어들이 힌두교 아트만 사상으로 '유아'론에 해당한다고 믿고 있어요. 마치 신상처럼. 선불교에서 소소영영한 그 놈이란 표현도 강교수에겐 '유령'에 해당하는 말에 불과하죠.

어쨌든 강교수는 '무아'에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어떤 것도 다 힌두교이고 유아론이므로 공격대상입니다.

그런데 본문 칼럼에서 강교수는 지금까지 주장했던 무아론에 맞지 않는 얘기를 합니다.
'번뇌가 사라졌음을 스스로 안다'라는 말을 한 것이죠.
해탈지견의 주체가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아여서 아무것도 나라고 할 것이 없다고 줄창 주장하다가
번뇌가 사라졌음을 스스로 아는 무엇이 있다,고 말하니 이는 강교수가 그토록 비난했던 선불교의 말과 똑같죠. 번뇌가 사라졌음을 아는 놈이 바로 소소영영한 그놈이자, 참나라 불려지는 것이니까요. 무아여서 아무것도 '나'라고 할 것이 없다라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번뇌가 사라졌음을 스스로 아는 것은 있다는 부처님의 말씀은 인정하니 웃긴다는 거죠.

스스로 아는 것을 인정한다면, 선불교의 주인공,참나 도 인정해야 논리적으로 맞죠.
무아여서 아무것도 나라고 할 것이 없다면서 주인공,참나는 힌두교 아트만, 유아론이라고 말했으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번뇌가 사라졌음을 스스로 아는 주체'에 대해서도 무아에 위배된다고 말해야 논리적으로 맞죠.

논리,과학적 사고를 강교수 스스로가 어기고 있는 셈.

다윈주의 우파/ 2014-10-02 15:41:51
여기는 “과학”이 아닌 “불교의 사유” 또는 “불교의 종교성”을 논하는 곳입니다.
~ <그렇기에 결례를 무릅쓰고 사유에 대한 사유적 이의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 <다음과 같은 구차한 사족을 달아가면서까지 말입니다.>
---------------------------------------------------
“그 사람의 언어가 바로 그 사람의 세계입니다.”
--- “강교수의 언어들, 바로 그것들이 강교수 본인의 비-불교 세계를 드러내고 있답니다!”

강교수님의 그 비-불 세계가 결코 나쁜 세계라는 말은 아닙니다. (사실 훌륭하시답니다!)
-----------------------------------------------------------

다윈주의 우파-님의 “도”에 대한 개인적 정의와 그 “윤리관”은 아주 훌륭하십니다.
허나 그러한 윤리관의 타당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철학과 사유”의 의무입니다.
또 진정한 가르침 또는 “종교”란 그러한 이성적 과정을 포함하면서, 그것을 넘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아마 여기 오시는 분들은 그러한 가르침의 宗-敎를 佛-敎라고 결정하신 분들 아니신가요? 철학과 종교의 사유는 과학의 사유와는 영역이 다릅니다. 강교수님은 그러한 구분을 하실 줄 모르면서도, 그 무-구분의 사유를 불교의 영역으로 가져오기 때문에 자꾸 탓을 하게 되는 것이고요.

우파-님 = “과학'이란 단순한 학문이나 도구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관'이며 '관점'입니다.”

--- 우파-님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러한 것에 대한 수용을 개인의 “입장”이라는 용어로써 표현합니다. 강교수님이나 우파-님의 입장을 철학 용어로는 “자연과학적 태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대응을 “현상학적 태도”라고 합니다. (판단-중지/현상학적-환원) 그것 또한 마찬가지로 하나의 “입장”입니다. 그와 같은 반-유물론/반-과학주의의 입장은 과학의 영역이 아닌 불교적 사유로의 확장을 도와줍니다. (~ 유물론과 반-유물론의 이러한 대조를 드러내는 사유는 물론 아주 다양하답니다.)
--- 세간에서도 프로와 아마츄어는 분명 다르며, 아마츄어는 프로를 넘어서기가 힘들죠. 그러나 매니아-층의 아마츄어들은 충분히 허접한 프로들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있는 곳 또한 바로 그 세간이고요. 시끄러움을 감당하면서 자기-성찰을 계속 하는 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겉 모습이 이쁘고, 밉고가 아니라 말입니다. 우파-님의 “도”에 관한 견해와 “윤리관”은 이공계 출신인 과거의 저도 평생 지녀 오던 것입니다. 칼세이건 등 과학자들의 이신론적 견해들을 추종하기도 했고요.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우깁니다. “이제는 저도 달라졌어요!”~^^~라고요. 과학 세계의 사유도 재미는 있지만, 인문 세계의 사유는 그것을 훨씬 능가하지 않을까요!

2014-10-02 15:12:38
소승근본주의자들은 겉으로는 깔라마경 와서보라 등등 합리적인척 하지만 속으로는 믿나 안믿나를 보고 이단정죄를 하죠. 껍데기는 불교인척 하지만 사고구조가 개독적이란 거죠. 속은 개독 겉은 소승 행동은 홍위병. 소승근본교는 호가호위하는 믿음의 종교이니 겉만보고 속지맙시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11길 16 대형빌딩 4층
  • 대표전화 : (02) 734-7336
  • 팩스 : (02) 6280-255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만
  • 대표 : 이석만
  • 사업자번호 : 101-11-47022
  • 법인명 : 불교닷컴
  • 제호 : 불교닷컴
  • 등록번호 : 서울, 아05082
  • 등록일 : 2007-09-17
  • 발행일 : 2006-01-21
  • 발행인 : 이석만
  • 편집인 : 이석만
  • 불교닷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불교닷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san2580@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