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에르고 코기토
숨 에르고 코기토
  • 강병균 교수(포항공대)
  • 승인 2014.09.22 16:41
  • 댓글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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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16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엉터리 명제이다.

기계가 생각을 하면 기계가 존재하는가? 당신은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기계는 절대로 생각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하거나, ‘설사 기계가 생각을 하더라도 기계가 존재한다고는 할 수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 주장은, 물질적인 기계는 존재하지만 물질을 넘어선 기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왜 내가, 단지 생각한다는 이유로, 존재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데카르트의 논리에 따르면 생각을 하지 않는, 사실은 생각을 할 수 없는 기절한 사람이나 코마에 빠진 사람은 그 순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존재한다고 선언한 것은 육체적인 몸이 아니므로 다른 사람이 대신해서, 기절이나 코마에 빠져 의식이 없는 사람의 그 순간의 (비물질적인) 존재여부를 결정해 줄 수는 없는 일이다.

생각한다는 사실을 자기 존재의 증거로 치는 사람들은 사실은 영혼이나 신비로운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실제로는, 생각한다는 사실을 존재의 증거로 치지 않는다. 그들에게 존재의 증거는 대상의 영혼, 진아, 참나, 주인공의 존재여부이다.

‘기계 앞에 장막을 쳐서 가리고 기계와 대화를 할 때, 혹은 모니터를 통해서 기계와 문자로 대화를 할 때, 사람이 그 기계가 인간인지 기계인지 판단할 수 없으면 그 기계는 의식을 가진 것으로 봐야한다’는 튜링테스트가 있다. 지금도 일부 기계는 부분적으로 튜링테스트를 통과하며, 일부 미래학자들은 수십 년 내로 인간의 의식과 동일한 의식을 지닌 기계가 발명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인간이 생각을 한다고 해서 인간이 존재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당신이 생각하는 인간은 혹시 영혼이나 참나나 진아(眞我)는 아닌가? 뇌가 아니라 영혼, 참나, 진아, 주인공이 생각을 하는 것이라고 미리 가정한 것이 아닌가? 따라서 당신이 해석한 데카르트의 명제는 다음과 같이 바꿀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영혼이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본뜻은 분명 이러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뇌의 송과선에 살고 있는 조그만 사람’인 호문쿨리스(homunculus)를 믿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발언은 또 이렇게 바꿀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호문쿨리스가 존재한다.' 이렇게 보면 데카르트의 주장은 하나도 지적인 주장이 아니다.

데카르트의 주장은, 본질적으로, '호문쿨루스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호문쿨루스는 존재한다'와 다를 바가 없다. 이 문장은 'A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A는 존재한다'의 구조를 갖는다. 그러면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존재해야 한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데카르트나 당신은 설사 생각을 하는 기계를 목격할지라도, 절대로 그 기계가 존재한다고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 기계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으로 정보를 뱉어낼 뿐’이라고 간주할 것이다.

데카르트는 동물은 고통을 못 느낀다고 생각했다. 단지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데카르트는 ‘동물은 생각할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다른 서양인들처럼 기독교영향으로 동물은 영혼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를 키워본 사람은 누구나 개가 생각을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그의 ‘코기토 에르고 숨’은 엉터리 주장이다. 그 총명한 데카르트가 이런 엉터리 주장을 한 것은, 아마 당시에 아직 뇌신경망(connectome)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뇌신경망은 물질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의 예는 인간의 사유가 물질적인 과학발전에 상당부분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과학, 종교, 철학의 역사는 환망공상(幻想·妄想·空想·想像)의 역사이다. 이 세 분야의 차이는 과학은 옛 환망공상을 가차 없이 냉혹하게 부수어가는 과정이고, 종교는 첫 환망공상에 죽기살기로 집착하며, 철학은 버티고 버티다 더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면 뒤늦게 옛 환망공상을 포기한다. 

동물에 대한 데카르트의 견해로 볼 때, 데카르트의 의견은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이렇다: ‘영혼이나 호문쿨리스가 없는 존재는 생각을 할 수 없다. 그런데 나는 생각을 할 수 있으므로 영혼이나 호문쿨리스가 있다.‘ 이런 말은 그냥 영혼론일 뿐이지, 그 외에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

만약 영혼론이 아니라면 데카르트의 말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현상이 존재한다’란 토톨로지(tautology 동어반복 同語反覆)에 지나지 않는다.

차라리 거꾸로 말하는 것이 옳다.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생각한다.’ 숨 에르고 코기토! 다시 말하자면 이렇다. ‘(나에게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하는 소프트웨어나 알고리듬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 이 말은 ‘스마트폰에 계산 소프트웨어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계산한다’와 동일한 구조이다. 혹은 ‘자판기에는 판매 소프트웨어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판매한다’와도 같은 구조이다. (중요한 점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하는 소프트웨어나 알고리듬이 자기이지 따로 자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이 소프트웨어가 진화한다는 점이다. 단세포동물인 아메바나 원시적인 생물인 지렁이는 의식이 없고 생각을 하지 못한다. 거의 자판기 같은 자동기계(automaton)에 지나지 않는다(우리 몸의 백혈구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단세포생물로부터 어류, 파충류, 포유류, 영장류를 거쳐 지금의 몸과 마음으로 진화를 했다. (그리고 이렇게 진화를 할 수 있는 이유는 생물이 무아(無我)이기 때문이다. 무아이므로 몸과 마음의 모습과 기능이 바뀔 수 있다. 즉 무상(無常)이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신경계와 의식의 발달과 더불어 물질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이 발달하고 증가한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진화의 역사는 고(苦)의 증가의 역사이다. 물질계와 정신계를 느끼고 인식하게 하는 신경계와 의식의 발달은 (새로운 종류의)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낳는다; 신경계가 발달하지 못한 곤충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인식이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그 괴리로 인한 고급 고통이 발생한다. 소위 ‘나(자아 自我)’에 관련된 존재론적인 고통이다. 가장 진화한 인간만이 갖는 가장 진화한 고통이다. 고통도 진화를 한다는 말이다. 이렇듯이 지구생물체 35억년 진화의 역사는 바로 삼법인(三法印)의 구현具顯이다! 그리고 자신의 생체유전자와 습성과 지식이 후손과 문화를 통해서,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면서, 35억년 동안 끝없이 이어진 것은 윤회이다.)

그 과정에서 생각하는 마음(소프트웨어)과 뇌신경망(하드웨어: connectome)이 생기고 발전한 것이다. 생각하는 능력은 정확히 진화의 순서와 일치한다(고통을 느끼는 능력인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의 가짓수와 강도强度’ 역시 진화의 순서와 일치한다): 단세포생물<어류<파충류<포유류<영장류<인류 순서이다. 그러므로 더욱더 ‘숨 에르고 코기토‘가 옳다. 즉, 처음부터 생각하는 존재(영혼, 아트만, 참나, 진아, 신)가 있어서 그 존재의 의지와 설계에 따라 인간의 몸과 마음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물질적인 과학발전의 뒷받침이 없는 형이상학이나 신학은 거짓말쟁이 절름발이 신세로 전락한다. 단지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인류역사가 증명하듯이, 조만간에 진실이 밝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결정적인 증거이다. 데카르트는 위대한 철학자이자 과학자였지만 몇 가지 심각한 오류를 범하였다. 신이건 인간이건, 도도한 과학문명발달 앞에서 후대까지 변함없이 명성을 유지하며 조금도 체면을 구기지 않고 버텨낼 자는 거의 없다.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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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뇌의 작용” 2014-10-01 15:35:14
--- 불교-경전 = 조건에서 마음이 생겨난다. 조건 없이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
--- 뇌-과학자 = 뇌의 작용에 의해 마음이 생겨난다. 뇌가 멈추면 마음은 단멸한다. ---
………(스티븐 호킹 = 고장 난 컴퓨터를 위한 천국이나 사후세계는 없다.) ………

아래 서광님도 위 두 문장의 차이를 감별하실 능력이 없으신가 보네요.
과학의 지향과 불교의 지향을 구별해 주지 않으면 어린 아이들이 보고서 헷갈려 합니다.

애들 앞에서는 찬물을 마실 때도 조심해야 합니다.
서광님이 어떤 물을 드시든지 그것은 서광님 마음대로이긴 합니다만.

서광 2014-09-28 16:35:36
불교를,
공부할 때에 유의할 점이 있다.
원효로 보면.개와 합.지눌로 보면 전수와 전간이 그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중관과 유식이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부정하여 참을 찾는 것이 중관이라면,
모든 것을 하나 하나 긍정하여 본질을 찾는 것이 유식이다.
부정이 특색인 중관이다 보니 이것은 논리적 사유를 중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긍정이 특색인 유식은 논리적 사유를 매우 중시한다.
이러한 중관은 티벳이나,중국처럼 그 언어가 고립어인 민족에게 효과가 있다.
그와는 달리 인도처럼 그 언어가 글절어인 민족에게 효과가 있다.
그러므로 이 중관과 유식은 그나름대로 일장 일단이 있다.
우리민족처럼 고립어와 굴절어의 양면을 갖춘 교착어의 민족에게는 이 둘에 두루 통할수가 있다.

이러한 둘중에서,
현대의 주류적 사조인 과학에 가장 적합한 것을 들라고 하면..그것은 단연 유식이다.
현대의 주류인 과학은 인도유럽어를 쓰는 유럽에서 주로 발달하였으며 논리적 사유를 매우 중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학이 발달시킨 뇌과학과 인지과학등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은 뇌의 작용이다.
그 실례는 무수한 과학적 실례와 데이타에 의하여 증명된다.
그체적으로는 사유는 주로 뇌의 전두엽,기억은 해마,감정은 편도체등이다.
이러한 뇌를 좀더 깊게 탐구하면 분자와 원자,소립자의 세계에 도달하며 홀로그램이니,초끈이론이니하는 것이 거론된다.

이와는 달리,
불교는 그 시작인 부파불교의 유부와 경량부,중관,유식의 과정을 보고,
최종적으로 유식에서 거론하는 심식이나 심소들을 보면 과학의 그것과 동일하다.
마음의 사유를 주관하는 심소인 思는 전두엽이고,기억의 念은 해마이다.
그외 하나하나 찾아 보면 도처에서 일치함을 알게된다.

이에서 보듯이,
과학과 불교의 유식은 그 지향하는 점이 같다.
즉..뇌가 마음이고,마음이 뇌인 것이다.
동일한 것을 주관적으로 사유한 불교는 마음이라고 불렀고,객관적으로 관찰한 과학은 뇌라고 불렀을 뿐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 뇌이기도 하고 마음이기도 한 것이,
강교수가 말하는 것과 같이 유물론은 아니다.
불교유식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다르마끼르티에 의하면 오직 유심이다.
찰나멸하는 근원적 존재는 인과적 공능을 가&#51220;기 때문이다.
이 공능에 의하여 일체의 인식이 생긴다.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인식결과가 그에 의한다.
그런즉 뇌즉 마음은 유물이 아닌 유식이다.

불교-잡컴-^.^- 2014-09-24 15:3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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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과학과 생물-물리주의가 물질-분석의 궁극을 향하여 치닫는 한 마찬가지의 경로를 갈 것입니다. 뇌-과학과 생물-물리주의는 단지 테크놀로지이며, 새로운 버전의 레고-껨일 뿐이랍니다. ~ 신-천지-창조를 위한! (“A Brave New World!”) ~ 근대-과학주의의 사유와 방법론을 현대 기술적으로 응용할 뿐인 뇌-과학과 생물-물리주의 한계는 “볼 수 있는 곳”까지 입니다. 물리학-&-수학만큼은 멀리 못 갈 거니까요.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근대의 그 한계를 넘어서 나아갑니다. 1900년대를 전후하여서요. 그들은 같은 범주인 “생명의 사유”에 대하여 심리학/뇌과학/생물학/진화론 등등 근대 과학의 사어들을 사용하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시간의 껍데기가 현대인 지금에도 과학이 근대적 무장을 해제하지 않는 한 결코 고대 그리스인들의 사유 반경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죽하면 근대까지의 서양적 사유를 플라톤-철학의 각주라고까지 표현했겠습니까. ~ “제천대성 왔다 가다!”)

더불어 다음의 부처님 말씀을 사유하지 못하고, 그 말씀을 행할 줄 모르는 한, 지금의 이 시간이 바로 그림자가 가장 짧다는 정오인 것을 우리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채 황혼의 저녁을 맞을 수도 있고요. 그리고 계속 뺑뺑이^^. ~ 이것이 문제입니다! 저와 당신의.

…“조건에서 <의식>이 생겨난다”
…“조건 없이는 <의식>은 일어나지 않는다” <갈애의 부숨에 대한 경, M-038>

…“조건에서 <심.의.식-마음/정신>이 생겨난다”
…“조건 없이는 <심.의.식-마음/정신>은 일어나지 않는다”

…“조건에서 <마음>이 생겨난다” + “조건 없이는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다”

뇌의 작용이 마음인가요? 정말-요!
~ 강교수님, 불-교의 <경전>을 뻘^^로 보지 맙시다. __()__

불교-잡컴-^.^- 2014-09-24 14: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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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것을 있다고 말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말하는 것이 진실을 말하는 것이요,
…있는 것을 없다고 말하고,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을 말하는 것이다. <속~담>

아마 공자도 이 같은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맞나요? 가치론-적 당위에 관한 것이죠.
아리스토텔레스의 표어이기도 할 겁니다. <!-고대-!>-그리스 사유의 <인식론-전통>이고요.

아리스토텔레스가 미워한 선배 데모크리토스는 “보지도 않고서” 증명도 하지 않으면서 원자를 논하고 예언했답니다. 그리고 그걸로 레고-게임까지 즐깁니다. ~ 천지창조! ~ 에피쿠로스학파나 스토아학파에게, 그리고 현대의 물리주의-유물론자들에게까지도 “보이는 세계”에 대한 달콤한 해석과 함께 “보지 않고서도” 믿을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추론적 물질-기반을 제공한 것입니다.

“기하학을 모르는 자 이 곳에 들어오지 말라!” ~ 유클리드를 비롯한 플라톤의 후예들은 “볼 수 없는” 점-선-면의 세계를 공리로 하여 “볼 수 있는” 세계에 대한 연역적 해석을 감행합니다. 볼 수 없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을 말하려는 모험이 갖는 위험 부담은 진실에서 멀어지면서, 거짓을 말하게 될 가능성입니다. ~ 믿거나 말거나. ~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그것을 확인시키는 선언적 의미입니다.

현대물리학의 성배인 통일장-이론 후보 중 하나이면서, ‘Theory of Everything’이라고 불리는 초끈이론이 갖는 의미는 이렇습니다. 초끈이론의 정당성을 인간이 가진 물리적 방법으로는 검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 믿거나 말거나. ~ 물리학은 다시 수학이 되었거든요. 점-선-면의 궁극을 향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갈수록 오히려 추론과 형성이라는 레고-게임의 퍼텐셜은 높아만 갑니다. “수학은 자유”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빈 말이 아닌 것 같아요! “볼 수 없는 것”을 보겠다는 유혹이자 의지이기도 하고요.

추론-상상-형성의 세계로 더 멀리 나아 가든지 아니면 철학의 세계로 되돌아 오는 것이 미래의 여정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기 위해서는요. 또한 그것이 철학의 생명력을 유일신앙-릴리전보다 더 길어지게 하는 연유이기도 하고요.

논의의 포지션 2014-09-24 12:23:11
1 육체; 인간은 육체일뿐, 물질적인 차원에서만 인간을 설명. 파블로프,스키너, 도킨스 등 행동주의파들. 공산주의,무신론자들.. 인간의 고차원적인면, 존엄성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 그저 먹고 자고 남녀합방하고 애낳고를 반복하다가 덧없이 죽으면 끝.
2 심리신체; 프로이드 류, 인간을 성적시각으로만 바라 봄.
3 심리체; 아들러류, 권력 열등감 컴플렉스로 인간을 설명.
4 심리영체;융, 무의식
5 영체; 기독교,힌두교,이슬람교등 종교,영성 이상을 넘지 못함
6 영성초월체;요가등 경험의 축적들, 조직종교가 아님.
7초월체;탄트라, 도(교), 선(불교)

인간은 단지 물질적 육체가 아니라 이상의 7가지 신체의 결합이다. 관자재보살은 이 7가지 영역을 자유자재로 오갈수 있다. 1~3단계까지가 객관의 영역, 4~7단계까지가 주관의 영역이다. 반야바라밀다는 마지막 7단계에서 나오는 지혜를 말한다. 반야바라밀다를 '초월의 지혜'라고 말하는 까닭이다.

강교수가 불행한 것은 1단계의 인간만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1단계가 틀렸다는 얘기가 아니다.스키너,도킨스 모두 소중한 과학자이고 그들의 연구는 타당하다. 그러나 그게 인간의 전부라고 판단하는 것은 대단한 착각이라는 것. 강교수는 육체차원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그곳에서 마지막 차원(선불교,도교,탄트라)을 비판하고 있다. 단순 계산 차원에서 고차원 수학을 비판하는 격이다.

달라이 라마의 '마음의 본성' 법문 보면(유튜브,불교티브) 선불교와 똑같이 얘기한다. 인간은 거친마음에서 미세한 마음까지 불교가 어떻게 파악하는지를 볼수있다. 육체와 불가분의 관계인 감각과 느낌같은 거친 마음에서 미세한 마음까지, 미세한마음을 맑은 빛, 본래의 마음, 본래적 자각등으로 부르며(티벳불교) 육체가 죽을때 마지막까지 미세한 마음은 남는다(이것이 윤회한다). 이 미세한 마음이자 맑은 마음을 포착 증장시키는 수행을 하면 본래적 마음은 스스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의 법문 맥락상 그것은 참나,진여와 같다.

달라이 라마는 20여년간 과학자들과 서로 교류하면 인간의 본성에 대해 탐구해 왔다고 했다. 그는 스키너,도킨스,뇌과학자,진화론자들에게 도움을 받는다고 한다. 인간의 물질적인 면에 국한에서,, 물질적인 면에서는 불교이론보다 과학이 더 발달했으니까. 하지만 과학이 불교에게 배울게 훨씬 더 많다고 달라이라마는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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