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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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병균 교수(포항공대)
  • 승인 2014.08.29 19:30
  • 댓글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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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13

흔히, 유심론자(唯心論者)들과 유신론자(有神論者)들은 ‘마음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와 ‘종교에 대한 과학적인 비판’을 유물론이라고 공격하고 비난한다.

그런 식으로 비난한다면 부처님도 유물론자이다. 인간을 오온(五蘊 몸과 네 가지 마음, 육체와 네 가지 정신작용)의 무더기라고 선언하고, 아(我 아트만 영혼)는 오온 안에도, 밖에도, 그 중간에도 없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외도들은 그때까지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소중한 아(我 아트만 영혼)를 잃어버린 듯, 강탈당한 듯, 공포와 분노를 느꼈다. 목련존자, 부루나존자, 용수보살 등의 부처님 제자들이 외도들에게 살해당한 이유이다. 현대의 기독교인 등의 유신론자(有神論者)들이 불교의 무신론과 무아론을 듣고는, ‘우리가 하나님의 고귀한 창조물이나 자식이 아니라면, 그리고 심지어 하나님조차 없다면 우리는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냐’고 분개하는 것과 동일한 현상이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무아(無我)’를 설하면 저들은 가지고 있던 ‘아(我)’를 잃어버릴(린) 듯이 공포를 느낄 것이다”라고.

필자의, 기독교인인, 제자 한 사람은 필자를 통해 접하게 된 ‘진화론과 불교’ 양자에 기초한 ‘무아론’에 충격을 받고 고백했다. 어제까지 하나님의 품안에서 누리던 안락함과 안전함이 이제 사라져 버렸노라고. 그래서 뭔가 아주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느낌이라고.

바로 부처님 당시의 외도들이 받은 충격이 그러했을 것이다. 흑백의 사람들이 풀처럼 빼곡히 돋아난 거뭇한 삼각형의 대지위로 하얗고 까마득하게 솟아오른 거대한 히말라야 산들과, 힘찬 갠지스 강과, 광대한 데칸고원과, 광활한 인도양을 천둥·번개·바람·빛으로 다스리는 위대한 신들을 잃어버린 느낌. 그들의 면전에서, 지고의 성스러움과 표현할 길 없는 신비감에, 영혼이 통째로 흔들리는 경험을 잃어버린 느낌. 우주크기의 거대한 힘을 지닌 신들에 대한 찬가가 갑자기 그 모든 신성함, 웅장함, 예술성을 잃고 땅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아무것도 아닌 헛소리나 픽션으로 변해버렸다.

이 일은 그 빡빡머리 사문(沙門 sramana)이 저지른 일이다. 갑자기 불인(不仁)한 천지 사이에 내던져진 황량함, 불안, 쓸쓸함이 해일처럼 거세게 몰려온다. 부처님은 참 못할 일을 하셨다. 깊은 동굴 속 질긴 어둠에 묻혀있는, 아직 잠이 한참 덜 깬 사람들에게 날카롭고 눈부신 탐조등을 비추어대다니. 그것도 아리안 족의 최신형 탱크 탐조등을!

아마, ‘마음은 따로 없다’는 뇌과학의 선언은 ‘마음은 물질과 연기(緣起)하지 않는다’는 마음독존주의자(心獨存主義者)들에게 똑같은 충격을 던질 것이다. 하지만, ‘중력은 물질(질량 힉스입자 higgs particle)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은 말인데, 뭐 그리 놀랄 일이란 말인가? 물질(질량 힉스입자 higgs particle)은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 중력만 존재할 수 있는가? 뇌가 없는 공간에 정신작용만 존재할 수 있는가? 눈이 없는 공간에 보는 기능만 남아있을 수 있는가? 봄(seeing)은 대상, 눈, 시신경 삼자의 연기작용이 아닌가?

(정확히 얘기하자면 봄은 대상, 눈, 시신경, 뇌 사자(四者)의 연기작용이다. 현대뇌과학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뇌는 '눈이 보지 않은 것을 만들어내서' 없는 것을 보게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거꾸로, 뇌는 ‘눈이 보고 있는 것’을 안 보이게 하기도 한다. 믿을 수 없으신가? 자세한 설명은 후에 다른 지면을 통해 나갈 예정이다.)

뇌나 시신경이 사라지고 나면, 어디 따로 ‘봄’이 있다는 말인가? 만약 따로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아(我)가 오온(五蘊) 밖에 존재한다’는 주장이나 다를 바가 없다.

어떤 사람은 ‘대상이 없어도 볼 수 있다’는 증거로 꿈을 든다. 하지만, 시각중추에 이상이 생겨서 갑자기 색깔을 못 보게 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꿈도 흑백으로만 꾼다. 그러므로 꿈이란 대상이 없이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찍은 비디오는 실물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원래 대상이 없이도 모니터에 상영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체비디오에 즉 우리 마음에 보관된 영상을 보는 것이 꿈이다. 또 꿈은 저장된 기존의 영상을 이용해서 새로운 영상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생체 컴퓨터그래픽(bio-CG)이다. 꿈은 한 마음이 다른 마음이 저장한 것을 기초로 만들어낸 영상을 제삼의 마음이 보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눈이 없어도 볼 수 있다면서, 그 증거로서 독창적인 이론을 내놓는다: 눈이 없어도 깜깜한 것을 본다는 주장이다. 눈을 감으면 눈앞이 깜깜하다는 경험으로부터 유추한 주장이다. 시신경이 파괴된 맹인에게는 ‘깜깜하다’ 또는 ‘검다’는 느낌조차 없다. 깜깜하다는 것은 시력이 정상인 사람이 눈을 감거나 또는 암실 같은 어두운 곳에 들어갈 때 생기지, 시신경이 완전히 파괴된 맹인에게는 생기지 않는다. 정상인의 동공으로 들어오는 빛이 (전혀 또는 거의) 없을 때, 디폴트로 설치된 것이 검은 색이다. 검은 색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감각의 부재현상일 뿐이다. 

마음독존주의(心獨存主義)자들 또는 마음탈연기주의(心 脫緣起 主義)자들이 뇌과학에 반대하는 이유는, 그들은 ‘마음이 눈, 귀, 코, 혀, 피부, 뇌가 없이도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촉감(觸感 touch)하고 생각(지켜보는 등의 일체의 정신작용)할 수 있다’고 믿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인간적인) 고민이 잘 나타나 있는 곳이 초기경전이다. 부처님은 ‘자신의 가르침이 너무 어려워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해 결국 자신만 쓸데없이 고생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과학적 종교인들과 따뜻한 유물론자들의 주장은 마음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은 물질의 ‘창발적인‘ 성질이라는 것이다. 컴퓨터는 기계 즉 물질이지만, 우리 눈을 속이는 컴퓨터그래픽을 만들어 우리를 거친 ’명량‘의 바다로 인도하여 울돌목과 같이 울게 한다. 배달민족의 한(恨)에, 그리고 못난 임금과 못된 지배계층 아래서 지옥고를 겪는 백성의 고통에, 잠 못 이루는 성웅(聖雄) 이순신과 같은 마음이 되어서. 아무리 기계가 만든 CG이지만 우리의 감정까지 거짓일 리 있으랴.

▲ 무기인 망치를 든 토르. 망치는 인드라(제석천)의 금강저에 해당한다. 이 망치에 얻어맞아 죽지 않으려면 토르를 믿고 따라야 한다. 즉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모든 종교의 벌은 이 망치질에 해당한다.
영화 ’명량‘은 우리로 하여금, 컴퓨터라는 기계가 만들어낸 컴퓨터그래픽이 아니었다면 느끼기(하기) 힘든, 민족을 위해 위대한 희생을 한 고인에 대한 추모와 우리 후손들을 위한 우리자신의 희생을 결의(決意)하게 만든다.

유교(儒敎)는 유물론이라 할 수 있지만, 무수한 아름다운 시와 그림 등의 예술품을 남겼다. 맹자는 백성을 괴롭히는 무도한 왕은 (천명天命을 받은 존재인 천자天子가 아니라) 필부(匹夫)에 지나지 않으므로 (죽이고) 내쫓을 수 있다는 위대한 인본주의 사상을 만들었다. 공맹(孔孟)을 추종하는 유자(儒者)들은 사후에 존재하는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다. 사후에 혼(魂)은 하늘로, 그리고 백(魄)은 땅으로 흩어지면 그걸로 끝이다. 3년 걸려서 육신에서 분리된 혼백이 완전히 사라지면 그걸로 모든 것이 끝이다. 
 
모든 종교는 다른 종교에 대해서 유물론이다. 하지만 지극히 높고 아름다운 사랑(생명과 이성과 진리에 대한)과 예술품을 생산한다.

리차드 도킨스가 어떤 기독교인에게 물었다. 중동사람들이 이슬람교도로 남는 것과 무신론자가 되는 것, 이 둘 중 하나를 택해야한다면 어느 쪽을 선호하느냐고. 그 기독교인의 대답은 놀라왔다. ‘중동사람들이 무신론자가 되는 것’이었다. 이 일화는 ‘한 종교는 다른 종교에게 무신론보다도 못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안전하게 말할 수 있다, ‘한 종교는 모든 다른 종교에 무신론이자 유물론이다’라고.

그리스 신들을 믿은 사람들은 유물론자인가 유신론자인가? 고대 게르만족과 바이킹족의 신인 토르(Thor)를 믿는 사람들은 유물론자인가 유신론자인가? 토르는 천둥, 번개, 폭풍, 전쟁을 관장하는 북유럽의 신으로서 인도의 인드라(Indra 제석천 桓因 환인)에 대응되는 신이다. 토르는 영어에 목요일(Thursday=Thor's day)로 남아있다, 영원히. 북유럽신화의 주신(主神) 보탄(Wotan)을 믿는 사람들은 유물론자인가 유신론자인가? 보탄(Wotan)은 영어에 수요일(Wednesday=Wotan's day)로 남아있다, 영원히.

▲ 아즈텍의 인신공희. 태양신에게 펄떡펄떡 뛰는 사람의 심장을 바쳤다. 그림 좌상의 붉은 것이 심장이다.
태양신을 믿은 아즈텍(Aztec) 인들은 유심론자인가 유물론인가. 기독교 구약의 야훼와 가나안 지역(지금의 이스라엘, 레바논, 요르단, 시리아 지역)의 몰록(Moloch) 신에게 바친 인신공희(人身供犧)는 유물론인가 유심론인가? 희생자들에게 제관들은 악마에 지나지 않는다.

800만 카미를 믿는 일본인들은 유심론자인가 유물론자인가? 전범(戰犯)들을 전신(戰神)으로 모시는 일본인들은 유심론자인가 아니면 유물론자인가?

십자군은 이들의 희생자들에게 악마보다 더한 존재이다. 왜냐하면 특정종교 경전상의 악마는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으나(사실은 엄청나게 크다. 거의 1에 가깝다), 십자군이 저지른 짓은, 악마의 존재에 관계없이, 사악하기 이를 데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 회교, 유대교, 마니교, 조로아스터교, 부두교, 힌두교, 불교의 악마가 동일인일 리가 없으므로 특정종교의 악마가 존재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뿐만 아니라 힌두교와 불교의 악마는 귀엽고 인간적인 측면까지 있다.

싯다르타가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으려는 순간, 이 우주에서 가장 자극적인 즐거움을 제공하는 욕계 제6천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왕 마왕파순(魔王波旬 Devaputra Mara)이는 큰일 났다 싶어서 급히 자기 딸 세 명을 보내 부처를 유혹했다. 그게 통하지 않자 우레 폭우 마귀들을 보내 위협도 해보았지만 별무신통이라, 마지막으로 통 크게 이 세상을 통째로 주겠노라고 회유했지만 그것마저도 실패했다.

마왕파순은 “그대가 깨달음을 포기하면 나는 세상을 포기하겠노라”고 빅딜(big deal)을 제안했지만 먹히지 않은 것이다. (믿을 게 따로 있지, 악마 말을 믿을 일은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참 잘 넘어간다. 왜냐하면 마왕파순이는 우리에게 친숙하기 이를 데 없는 오온(五蘊)의 모습으로, 즉 우리 몸과 마음의 모습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낙담한 마왕파순이는 중얼거린다. “죄다 넘어가는데, 이 어찌된 일인가?” 큰솥을 걸어놓고 끓여죽이겠다거나 거열형이나 능지처사형을 가하겠다고 위협을 하는 대신에, 먼저 아름다운 자기 딸들을, 그것도 셋씩이나, 보내 유혹부터 하다니 참으로 인간적인 악마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위협이란 게 고작 천둥·폭우라니 정말 귀여운 악마다. 그러니 더욱, (한 종교의 악마는 다른 종교의 악마와) 같은 존재일 리가 없다.

80노구(老軀)의 부처님이 음식을 잘못 드시고 중병에 걸렸을 때, 악마는 부처님에게 당장 돌아가시라고 권한다. 가르침은 잘 전해지고 제자들은 공부를 잘하고 있으니 걱정 말고 어서 죽으라는 것이었다. (우리 마음의 악마는 항상 엄청난 설득력을 대동하고 그럴듯하게 나타난다.)

죽음에 임한 스승으로서 어찌 제자들에 대한 걱정이 없었을까? 부처는 ‘서둘지 말라’고 악마를 꾸짖으며, 석 달 뒤에 열반하겠노라고 한다. 아무튼 부처를 이 세상에서 빨리 제거하려는 자신의 악심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내미는 악마가 귀엽지 않은가? 

유물론이란 인간의 아름다움과 선함(사랑 자비)과 진실함(진리를 추구하는 마음)과 이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을 믿지 않는 것이다. 유신론이라도 또 유심론이라도 이런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면 유물론이다. 이런 의미에서 중세기독교는 유물론이다. 그 외에도 모든 근본주의적인 종교는 유물론이다. 이들이 섬기는 신이나 마음은 바위처럼 단단하게 굳은 그리고 얼음처럼 얼어붙은 물질이지, 낭창낭창 유연해서 무한한 변화를 허용하며 우리 유한한 능력으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무한한 방향으로 진화하는 창발성이 아니다.

▲ 가나안 지방(지금의 이스라엘과 그 인근지역)의 식인종 신인 몰록(Moloch). 채식동물인 황소의 모습이지만 기이하게도 어린아이를 즐겨 먹었다. 제사장 손에 들린 제물인 어린아이를 보라.
원자를 인정한다고 분자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원자에는 부드러움 맛 냄새 촉감 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의 고유한 성질이 존재하지 않는다. 분자가 되면 갑자기 그런 성질들이 나타난다. 진공묘유(眞空妙有)다. 그렇다고 원자가 뭉쳐 분자가 되는 데 마음이 개입한 것이 아니며, 원자에는 없는 성질이 분자에 생기는 데 마음이 개입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예전처럼 누구나 하나같이 모를 때면 뭐든지 신의 뜻으로 둘러치면 되었으나, 신이, ‘과학문명과 인식‘의 발달에 따라 세상일(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이 차츰 설명됨에 따라, 변경으로 무한히 밀려나듯이 마음도 변경으로 밀려난다. 무한한 소실점으로. 원근법의 소실점으로. 원근법은 실로 위대한 발견이었다. 이 발견으로 2차원 평면의 그림이 갑자기 삼차원 물체의 입체감을 갖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 원근법이 바로 과학과 진화론이다. 과학의 발전은 신을 물질세계에서 쫓아냈으며, 진화론의 발견은 신을 생명세계에서 쫓아냈다. 그리고 진실한 의미에서의 다차원의 입체적인 신비를 드러냈다.

초월적이고 종교적인 신비주의에 경도된 사람들은, 과학자들의 ‘물질의 마음에 대한 영향력’에 대한 연구를 유물론이라고 공격한다. 뇌 이외에 생각하는 기능이 따로 있다는 주장이다. (고대 이집트인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을 하는 기관은 심장이라고 믿었다.)

그 따로 기능하는 놈은 왜 뇌가 망가지면 기능을 하지 못하는가? 뇌가 즉 뇌 시각중추가 망가지면 볼 수 없다는 점에서, 백보 양보해도 그놈은 안근(眼根 시각기관)·안경(眼境 시각대상)과의 연기관계에 있으므로 그놈은 그냥 안식(眼識)이라 해도 그만이다. 즉, 그놈은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부처님은 식을 초월적인 의미로 사용하신 적이 없다.)

나머지 5개의 식(識)인 이·비·설·신·의(耳鼻舌身意)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놈은, 육식을 뭉뚱그려서 지칭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바로 뇌신경세포들의 작용이다!

마음탈연기주의자(心脫緣起主義者 마음은 연기법을 벗어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부처님 당시의 베다교도들과 다를 바가 없다. 연기세계를 초월한 불생불멸의 실체적인 마음의 존재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런 마음을 ‘참나’라 하고, 혹자는 ‘진아’라 하고, 혹자는 ‘주인공’이라 하고, 혹자는 ‘주시하는 놈’이라 하는데, 오래전에는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그 자리)’이라고 했다. (중국인들이 불교를 받아들일 때 처음에는 불교를 잘못 이해해서 불교를 일종의 ‘신불멸론(神不滅論 영혼불멸론)’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이 잔영(殘影)이 소소영령한 놈으로 남은 것이다.

이런 경향은 신수 사후의 북쪽 불교가 아니라, 혜능 사후의 남쪽 불교에 심했다. 이는, 신수가 마음을 맑은 거울에 비유했지만 혜능은 그런 거울은 없다고 주장한 점을 볼 때, 참으로 아이러니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 말이 가장 전형적으로 묘사된 것이 일세를 풍미(風靡)한 경봉스님(鏡峰 1892-1982)의 발언이다.

“참으로 나(참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 몸을 운전하고 다니는 ‘소소영령한 그 자리’가 바로 곧 나의 몸을 운전하고 다니는 운전수요 나의 ‘주인공’인 것이다.“

이 문장에는 참나, 소소영령한 자리, 주인공이라는 ‘있다파(新有部)’의 주요한 세 단어가 모두 나타난다. ‘주인공은 몸(기계)을 운전하고 다니는 운전사(유령)다’는 경봉스님의 이 발언은 서구의 데카르트적인 ‘기계속의 유령(ghost in a machine)’의 불교적인 환생이다.

‘있다파’의 사상을 간결하고 충실하게 표현한 명문 중의 명문이다! 그리고 경봉스님을 비롯한 선인들의 이런 종류의 발언들은 현(現) 조계종정(宗正) 진제스님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입에 달고 사용하는 참나와 진아(眞我)의 기원이다.

이들은 참나, 진아, 소소영령한 자리 등의 ‘불생불멸의 실체론적인 존재’를 부정하는 무아론의 적자(嫡子)인 ‘없다파(舊無部 舊無我派 緣起派)’를 마구 맹렬하게 공격한다. 유물론자라는 주홍글씨를 씌워서.

도대체 얼마나 소중한 것을 지니고 있기에 잃어버릴까봐 저토록 조바심을 낸다는 말인가? 본시 잃어버릴 것이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인 무아론인데, 도대체 무엇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말인가? 육조혜능스님이 말씀하셨듯이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본래 한 물건도 없다)’ 아닌가?

인류역사를 관통해서 볼 때, 전단계의 미신을 부인하고 없애는 것은 유물론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런 유물론은 더 높은 단계의 신비의 출발이다.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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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법무식에게 2014-11-02 16:28:48
만법유식은 다음과 같이 썼다.

<<선사들은 경전에 나오는 말 그대로 쓰지 않음, 상황과 중생의 근기, 인연에 따라 즉흥적으로 참나에 해당하는 말을 써서 중생을 돕는 것임. 선사들은 무아를 배격하기 위해 이러는게 아니라 시시때때로 만나는 중생의 근기에 맞춰 중생 스스로 자신의 본성(진리)을 보게 하기 위해 자비심때문에 참나의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임. 이것도 모르고 근본불교를 부정하는 선불교라면서 분노에 휩싸이는 멍청이들이 있음.>>

하지만 멍청하기 이를 데 없는 '만법무식'은 다음의 강 교수의 비판을 읽지 않고 헛소리를 하는 것이 분명하다.

강병균 교수:
<<이 말이 가장 전형적으로 묘사된 것이 일세를 풍미(風靡)한 경봉스님(鏡峰 1892-1982)의 발언이다.

“참으로 나(참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 몸을 운전하고 다니는 ‘소소영령한 그 자리’가 바로 곧 나의 몸을 운전하고 다니는 운전수요 나의 ‘주인공’인 것이다.“

이 문장에는 참나, 소소영령한 자리, 주인공이라는 ‘있다파(新有部)’의 주요한 세 단어가 모두 나타난다. ‘주인공은 몸(기계)을 운전하고 다니는 운전사(유령)다’는 경봉스님의 이 발언은 서구의 데카르트적인 ‘기계속의 유령(ghost in a machine)’의 불교적인 환생이다.

‘있다파’의 사상을 간결하고 충실하게 표현한 명문 중의 명문이다! 그리고 경봉스님을 비롯한 선인들의 이런 종류의 발언들은 현(現) 조계종정(宗正) 진제스님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입에 달고 사용하는 참나와 진아(眞我)의 기원이다.>>

강교수는 선사들 중에는 힌두교 아트만과 같은 의미로 참나(진아)를 쓴 사람들이 있다는 증거로 위 문장을 든 것이다.
글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입에 거품을 물고 비난하는 이유는 글을 쓴 사람 '만법무식'이 힌두교 아트만주의자라는 증거이다.

저도 가끔씩은 2014-09-04 19:31:43
만법유식-님, 각각-님, 두 분 말씀 감사히 잘 들었습니다. ~ 열반-비아, 해탈-대아 ~
저도 나름 환망공상을 가동시키면 어느 정도 두 분 말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라고 여깁니다만.
…(티벳-교과서는 논외로 하고, 물론 대승-교과서도 사실 잘 모릅니다. 허나 “교과서-지상주의자”의 길을 추구하기 때문에 눈에 밟히는 사유들에서는 자꾸 트집을 잡아 봅니다. 황당한 사례들이 현실에서는 너무 많잖아요, 그래도 교과서로 우길 수 있으니까 안 넘어가고 버티니 그렇지^^, 그쵸^^?)

두 분도 아시다시피 여기 한국은 하사도의 세계입니다.
…(사실 그것만 충실해도 다행입니다만, 그냥 수긍^^해 주세요, 만법유식-님.)
문득 이솝우화가 생각나네요.

한 소녀가 우유가 담긴 항아리를 들고 가고 있었다. 소녀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우유를 팔아서 달걀을 사고, 달걀을 부화시켜서 병아리를 키우고, 병아리가 커서 닭이 되면 닭을 팔아서 돼지를 사고, 나중에 돼지를 팔아서 송아지를 사고, 송아지가 자라서 소가 되면 소를 팔아서 예쁜 드레스를 사 입어야지. 그 드레스를 입고 파티에 가야지.” 단꿈에 빠져 흥겹게 길을 가던 소녀는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우유 항아리는 땅에 떨어져 산산이 부숴지고 만다.

교학에서는 점핑하고, 수행에서는 비약하거나 또는 생략해버리는 생각들이 눈에 너무 많이 띕니다. 그 모자라는 상태들 속에서 대승과 대승이, 대승과 초불이, 초불과 초불이 서로 맞서고 있는 모습도요. 어쩔 수 없는 필연의 과정이기도 하겠지만, 대승 속에서 대승을 구별해 내고, 초불 속에서 근본불교적 가르침을 추출해 내어 교학적 점핑에서 오는 모호함을 배제하고, 수행적 비약/생략의 애매함을 제거하는 것이 바램입니다. 서로 윈-윈하기를 기원하면서요. (또 저의 독설^^들도 잘 받아주시길 바라면서요.)

너무 어렵지만요. __()()()__

~ 그래서 현존하는 승가와 스님들과 학자들에 대한 원망이 크답니다.
~ 계행의 모본과 교학/수행의 가르침에 대한 갈망의 반작용으로 말입니다.

답답해서 써 보는 글이기도 합니다, 여하튼 두 분 말씀 다시 한 번 감사! __()__

만법유식 2014-09-04 18:38:38
석가모니 부처님이 말씀하신 제법무아에서의 제법이란=>오온무아 입니다.
제법에서 법=색,수,상,행,식 입니다.
그런데 근본불교주의자들이 딴지거는 참나,진여,불성,여래,법계,본래면목,주인공,본래무일물...이런 용어는 열반한 자리, 즉 오온을 여읜 자리입니다.진리를 가리키는 말이죠.
그런데 이 진리를 가리키는 단어를 향해 제법무아를 배격한다고 황당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죠. 근본불교주의자들은 제법무아의 뜻을 모든 것에는 아가 없다,라고 해석(사실은 오온무아인데)하고 있으며 그 오해로 인해 참나,본래면목,주인공 같은 진리(열반)를 표현한 단어를 향해 무아를 배격한다, 이교도다 엉뚱한 썰을 풀어놓고 있죠.

강병균씨는 교수죠, 이재열씨는 포교사 자격증 있는 법사고요 라디오 방송 진행자스님이나 각묵스님은 니까야 번역하신 분입니다. 소위 배웠다는 전문가라는 분들이 이런 엉뚱한 오해로 선종인 한국불교 선사들에게 진아론자들이란 딱지를 붙여 공격해 대니 이 잘 배운 바보들 말에 휘둘리는 무지한 불자들이 많아지는 문제 아닙니까.

열반비아?... 그런게 아니라 제법무아란 단어를 쓰더라도 제법비아,로 이해하면 선불교를 진아론을 가르치는 이교도라고 엉뚱한 주장이 다소 줄어든다는 것임."내가 없다"에 너무 꽂혀서 열반(참나,주인공,본래면목...)도 없다!라고 코미디를 연출한다는 얘기죠. 최초에 무아라고 한문으로 번역하지 말고 제법비아라고 했으면 이런 쓸모없는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도 됐다는 것.

선불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이해해 보려고 노력도 안해봤거나, 아니면 아직 불교전반에 대한 눈을 뜨지 못했거나 그저 자기분야의 불교만 알고 다른 불교는 전혀 모르거나...그러지 않고는 참나,본래면목,주인공...이런 걸 두고 진아론자,힌두교라고 매도할 수 없죠.

참나(오온-생각,감정,느낌등에 물들지 않은 상태,달리 말하면 탐.진.치가 사라진 상태,거짓됨이 없는 상태, 진리 그대로인 상태...그래서 참다운 나, 참나! 참마음! 이게 뭐가 잘못된 말임?)

주인공(유식과 관련된 용어.마음을 거둬들이면(선정에 들면) 텅빔/ 마음을 펼치면(한생각 일으키면) 만법이 펼쳐짐. 일체(오온)를 사용하기도 하고 거둬들이는 주체(진리)라서 주인공이라 부름)

이름들 마다 다 배경이야기가 있는데 근본불교주의자들은 배경이야기를 전혀 모르니 진아론으로 공격하는 것임.

만법유식 2014-09-04 18:09:19
순식간에 확! 써서 오타도 많고 생각한 모든 것이 순차적으로 나온 것도 아니고 섞여서 나오기도 하고...문제가 많아요. 대략 이해하시고 끝나면 좋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니까야 에서 제법무아를 말씀하실때 항상==> 오온을 먼저 말하면서 무아라는 말을 쓰십니다. 니까야 보시고 확인해 보세요. 부처님은 오온을 싫어해서 떠나야(초월해야) 열반에 이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역시 니까야 확인해 보세요.오온을 싫어해서 떠난 다음에야 나는 열반에 이르렀다,해탈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인간)은 해탈한 분, 열반에 이른 분이십니다. 누가 뭐래도.
그 부처님의 마음(=진리)을 일반 중생들 마음과 구분해서 참마음(참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눌스님의 "진심직설"을 찾아보세요. 참마음(=참나)에 대해 교종과 선종에 어떻게 표현하지는지 다 설명하십니다.

교종(모든 경전), 선종(선어록)에서 참나를 부르는 방식이 다양하다는 거죠.

교종=>능가경에서는 참나를 '심지'라고 표현
화엄경에선 '법계' 금강경에선 '여래' 반야경에선 '열반' 유마경에선 '법신'
대승기신론에선 '진여' 열반경에선 '불성' 원각경에선 '총지' 원각경에선 '원각'....모든 경에서 참나에 해당하는 언어가 다 있지만 이정도로....

선종(선어록)에서의 참나에 대한 다양한 이름들
언어를 세워 표현하면 안되지만(불립문자) 그래서 참나는 이름을 붙일 수 없지만 상황과 인연에 따라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자기,주인옹(공),무저발(밑이 없는 밥그릇),몰현금(줄없는 거문고),등불, 뿌리없는 나무,취모검,무위,마니주,무쇠관,진흙소,나무말불타지 않는 말), 심원,심인,심경(마음거울),심월,심주,고경(오래된 거울),,,,,본래 무일물, 본래면목,,,,,,,,너무 많아서 다 못 씀.

선사들은 경전에 나오는 말 그대로 쓰지 않음, 상황과 중생의 근기, 인연에 따라 즉흥적으로 참나에 해당하는 말을 써서 중생을 돕는 것임. 선사들은 무아를 배격하기 위해 이러는게 아니라 시시때때로 만나는 중생의 근기에 맞춰 중생 스스로 자신의 본성(진리)을 보게 하기 위해 자비심때문에 참나의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임. 이것도 모르고 근본불교를 부정하는 선불교라면서 분노에 휩싸이는 멍청이들이 있음.

진심직설을 보면 경전에 말하는, 선사들이 말하는 참나의 이름이 왜 그렇게 붙여졌는지 그 이유까지 나옴.

제법무아에서 제법=> 오온을 가리키는 말임.

각각 2014-09-04 17:53:39
下士(persons of small capacity)와 中士(persons of medium capacity)는 上士(persons of great capacity, 大乘菩薩)의 말을 이해할수 없다. 仰信은 아니더라도 不信만 없어도 대승불자의 자격이 있다고 본다. 어디 한번 上士(大乘菩薩)의 말을 보고 어떤지 자신을 살펴보자.





나의 덕의 2가지 뜻(我德二義 )이다.
이는 내가 있다는 견해에 치우침(我見邊)과 내가 없다는 견해에 치우침(無我見邊)을 떠난 것을 말한다. 나도 아니고 나도 아닌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곧 큰 나(大我)를 얻는 것이다.
마치 논설(보성론)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2가지 법에 의하면, 여래의 진리 몸에는 참된 나로 건너감(我波羅蜜)이 있다. 어떤 것이 2가지인가.
하나는 모든 바깥 도(외도)의 치우친 것들을 멀리 떠나는 것이다. 허망된 나라는 우스운 논리를 떠나기 때문이다.
둘은 모든 배워 깨치는 이들(성문)의 치우친 것들을 멀리 떠나는 것이다. 이는 내가 없다는 우스운 논리를 떠나기 때문이다”




진짜 나(인아)란 말은 자유자재(자재)하다는 뜻이다.
마치 덕왕품 처음의 노래 글 중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자유자재 함에는 8가지(8자재)가 있다.
첫째 많고 적음이 자유자재한 것이다(다소자재).
마치 경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한 몸(1신)을 나타내 보이나 여러 몸(다신)이 된다. 몸의 수가 많고 적음은 마치 작은 먼지(미진)와 같다. 온 우주 한량없는 세계에 가득하나 여래의 몸은 실제 작은 먼지가 아니다. 이는 자유자재하기 때문에 작은 먼지 같은 몸을 나타내는 것이다.”
둘째 크고 작음이 자유자재한 것이다(대소자재).
마치 경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하나의 먼지 몸(1진신)을 나타내어 3천세계에 가득하다. 부처 몸은 가이 없으나 실제 대천세계에 가득한 것이 아니다. 이는 자유자재하기 때문에 대천세계에 가득한 것이다.”


2가지 늘상함(二種常)은 법이 늘상하고(法常) 부처가 늘상한 것(佛常)이다.
법이 늘상하다(法常)는 뜻은,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는 것(不生不滅)이다. 이것은 늘상한 몸(常身 )을 뜻한다.
부처가 늘상하다(佛常)는 뜻은,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는 것(不老不死 )이다. 이것은 늘상한 목숨(常壽 )을 뜻한다.



진실된 나(眞實我 )가 열반의 나(涅槃我 )이고, 자유자재한 나(自在我 )가 깨침의 나(菩提我 )이다.
실제로 나아가 통틀어 말하면 곧 별다른 차이가 없다.
따라서 경중에서는 통틀어 맺음해 말한다.
“이와 같은 큰 나(大我 )를 큰 열반(大涅槃)이라 이름한다.”





이 글은 쓴 上士는 원효라는 大乘菩薩 인데 다음과 같이 小乘 을 확실히 배격하고 있다.
“ 이들(성문)의 치우친 것들을 멀리 떠나는 것이다. 이는 내가 없다는 우스운 논리를 떠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큰 나(大我 )를 큰 열반(大涅槃)이라 이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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