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이어(五餠二魚)
오병이어(五餠二魚)
  • 강병균 교수
  • 승인 2014.07.22 10:26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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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8

기독교 신약에 오병이어(五餠二魚)라는 기적이 등장한다. 예수가 갈릴리에서 야단법석(野壇法席)을 벌이고 있었는데 식사때가 되었다. 나누어 먹으려고 음식을 모아보니, 겨우 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뿐이었지만, 오천 명 대중이 먹고도 남았다는 일화이다.

이 일화는 많은 문제점을 시사한다. 그리고 경전을 기록한 자들과 후대에 해석하는 자들의 의식수준을 의심하게 만든다. 이 일화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예수의 사상과도 어긋나기 때문이다.

예수는 부는 지상에 쌓을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쌓으라고 했다. 그리고, 철저한 구약의 율법고수를 주장하는 바리세인들에게, 예수는 “율법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율법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사자후(獅子吼)를 토했다. 천번 만번 맞는 말씀이시다.

(구약 레위기를 펼치고 한번 읽어보시기 바란다. 그들의 율법이 얼마나 엽기적으로 기괴한지 단박 깨달을 것이다. 그래서 현재 기독교인들은 목사 신부 신도 할 것 없이 절대로 레위기를 언급하지 않는다.) 당시 유태인들이, 그 당시로부터 이미 500년 전에 부처님이 유언으로 남기신 ‘소소한 계율은 폐지해도 좋다’고 하신 말씀을 들어 알고 있었다면, 자신들의 계율인 율법을 반성적으로 검토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예수는 “외적인(몸적) 율법준수가 아니라 내적인 율법준수가 되어야 한다, 즉 마음으로 죄를 짓지 말아야한다”고 했다. 이렇게 몸의 행위 이전의 마음의 행위를 강조한 예수가, 그리고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라고 설교한 예수가, 야외에 모인 오천대중의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핀트가 빗나가도 한참 빗나갔다.

종교경전은 맹독성 복어이다. 잘못 요리(해석)하면 그 독으로 죽는다. 그리고 종교는 가시(온갖 헛소리 망상 환상) 많은 생선이기도 하다. 가시를 조심해서 잘 발라내지 않으면, 가시가 목에 걸려 죽거나 죽도록 고생한다. 크고 작은 가시를 판별해내는 천하의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시금석(試金石 층샛돌)이 있다: 종교가 사람을 위해 존재하지, 사람이 종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물질적인 양식은, 한 그릇 밥이라면 한 명 또는 몇 사람밖에 배를 채우지 못한다. 반면에 비물질적인 양식은, 한 그릇으로도 수없는 사람들의 배를 채운다. 뛰어난 사상, 철학, 가르침은 한 사람의 입에서 나와 수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 인식의 전환은 빵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정신적인 굶주림과 고통을 해결해준다.

예수는 야외에 모인 군중에게 단 몇 마디 말로(당시는 확성기가 없었으므로 대용량의 정보를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즉 ‘설교’라는 ‘비물질적인 5병2어’로 대중(의 마음과 영혼)을 배부르게 하였다. 대중은 설법에 감동한 나머지 마음이 배불러서 밥을 안 먹고도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5병2어밖에 못 먹었어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또는 밥 먹을 생각이 안 날 지경이었다. 이렇게 해석을 해야 예수의 면목을 살리는 길이다.

더욱이, 빵과 밥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아직도 ‘물질적인 오병이어’라니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인가? 수시로 끼니를 거르는 지독히 가난한 동네와 끔찍하게 못사는 후진국에서나 통할 법인 얘기이다. 빵과 물고기로 대표되는 먹을거리는, 정치와 경제의 영역이지 종교의 영역이 아니다. 거꾸로 종교가 득세하면 민중은 오히려 배를 곯았다. 일부 종교인들이 지옥을 동원한 ‘비물질적인 공갈협박’으로 수탈해갔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생산활동은 전혀 하지 않는 종교인들이 인구의 수십 프로를 차지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옛날 조선시대에 마을에 판소리꾼이나 남사당패거리가 오면 그 마을의 사람들이나 즐길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텔레비전 컴퓨터 스마트폰으로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수십만에서 수억 명이 즐긴다. 당신이 사람들 마음을 울리는 노래 한 곡만 유튜브에 올리면 한꺼번에 전(全)세계사람들을 울릴 수 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 유튜브 조회수가 자그마치 20억 회를 넘어섰다. 오병이어가 아니라 ‘1병0어’ 또는 ‘0병1어’로도 충분하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는 판소리꾼과 남사당패거리가 마을을 떠나면 그 좋던 소리와 멋진 공연모습도 같이 떠나버리지만, 지금은 컴퓨터, CD, DVD에 저장해놓고 유튜브에 올려놓고 영원히 즐길 수 있다, 언제든지 원할 때마다. 스위치만 켜면 갑자기 그 남사당 패거리가 부활해서 눈앞에서 오두방정을 떨며 공연을 하고, 소리꾼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댄다. 진실로, 시공(時空)을 초월한, 오병이어 기적의 시대이다.

종교가 세력을 잃어가는 큰 이유 중 하나는 종교의 기적이 너무 시시해졌기 때문이다. 현대농업은 종자개량과 유전자공학과 농업기계화와 화학비료개발 등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생산력을 자랑한다. 그러니 오병이어의 기적이 초라해졌다. 설사 그 기적이 사실일지라도, 그것이 천계(天界)에 보좌(寶座)를 설치하고 펴는 신(神)삼두정치(三頭政治 triumvirate)의 일위(一位)인 예수가 궁벽진 갈릴리 타브하에서 자신에게 호의를 가진 자들에게 베푼 일회적인 기적인 데 비해서, 현대과학이 베푸는 은혜는 선인과 악인, 신자와 불신자를 가리지 않고 ‘평등한 시혜’를 되풀이해서 베푼다. 장소를 구별하지 않고 베푼다. 그것도 지금부터 영원히 베푼다. 즉 시공을 초월한 베풂이다.

조선시대에 겨울 딸기는 옥황상제가, 병든 어미의 입맛을 걱정하는 천하의 효자에게 내리는 상(賞)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불효자를 포함한 누구나 겨울에 딸기를 맛볼 수 있다. 비닐(하우스)이라는 간단하다면 간단한 발명품을 통해서 가능해진 것이다.

종교의 베풂은 우뇌에서 나와 우뇌에 작용하고, 과학의 베풂은 좌뇌에서 나와 좌뇌에 작용한다. 한쪽은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비합리적인 마음(감정)에 작용하고, 다른 쪽은 합리적인 방법으로 합리적인 마음(이성)에 작용한다. 종교가 참이라는 주장은 맹목적인 믿음에 의지할 뿐이어서 근거도 없고 비합리적이기 일쑤이지만, 과학이 참이라는 주장은 반박할 수 없는 합리적인 증거를 내민다. 그래서 종교인들은 심신으로 정신분열증에 시달린다. 마음은 종교로 향하지만 몸은 과학으로 향한다. 마음으로는 여호수아(가 태양을 멈춘 이야기)를 믿으면서, 몸으로는 비행기를 탄다. 심신분리현상(心身分離現象)이다.

종교의 경전은 수천 년 전에 쓰여졌고 개정이 불가능하지만, 과학의 경전은 끝없이 개정된다. 종교의 경전은 그 내용의 진위(眞僞)에 대한 의심을 천하의 악행으로 간주하여 금하지만, 과학의 경전은 의심을 장려하고 의심을 통해서 발전한다.

신약에 병자를 고치는 얘기가 나오지만, 지금은 부분적으로나 가능한 피부나 뼈 등의 인공배양이 심장 간 폐 위장 콩팥 등의 주요장기의 인공배양으로 발달하게 되면, 종교경전의 치유의 기적은 모두 시시한 이야기로 전락할 것이다. 치유의 은사를 약속하고 자랑하는 기독교 신약에도, 콜레라 장티푸스 흑사병 등 집단적인 질병을 떼로 치료한 경우는 등장하지 않는다. (전지全知한 하나님과 그 아드님조차도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의 존재를 몰랐던 것이 분명하다.)

지금 현대의학은 과거에 치료하지 못했던 질병들을 다 치료한다. 그것도 특정 개인을 안 믿어도(거꾸로, 믿으려면 독하게 믿어야 한다), 그리고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을지 모르는 하늘나라 독재자(celestial dictator)를 안 믿어도, 다 치료해준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치료해준다. 의사는 자기를 (모든 병을 치료하여 완쾌시키는 전능한 존재로, 혹은 바가지를 씌우지 않는 착한 사람으로) 믿어야만 치료해준다고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돈만 내면 된다. 그러니 비(非)형이상학적인, 단순한, 계산이 빠른, 그리고 즉물적인 사람들이 돈을 숭배하지 않을 수 없다. 정말로 평등한 시혜이다.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은총이다.

이제 세상은 ‘돈 앞에 만인이 평등’한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종교인들도 돈을 숭배한다. 믿음은 돈을 버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믿으면 돈을 벌 수 있다고 선전을 한다. 신학적인 근거는 소위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이다. 십자가 앞에서 기도를 하거나, 성상(聖像) 앞에서 기도를 하거나, 오래된 뼈를 모신 곳에서 기도를 하면, 크게 은혜롭고 대길(大吉)하다고 부추긴다. 영적인 구원은 골고다언덕 밑으로 굴려 떨어뜨리고, 저 멀리 산 아래로 던져버렸다.

그렇게 번 돈을 가지고 속세로 달려가 마음껏 즐긴다. 혹자는 도박을 하고, 혹자는 주식투자를 하고, 혹자는 양주를 마시며, 혹자는 고급옷 고급음식점 고급호텔 해외여행 영화관람 등 즐길 것은 다 즐기며 산다. 그러면 그 돈은 다시 십자가와 불상으로 간다. 타락한 세상에서 더러워진 불인(不仁)한 돈이 회개와 참회를 하러 신성한 곳을 찾아간다. 속세를 거칠고 힘있게 흐르던 돈이 힘이 넘친 나머지 용솟음치더니 성스러운 하늘나라까지 물길을 내고 말았다. 성속(成俗)을 순환하며 천지를 흐르는 돈의 흐름이다. 희대의 전교(錢敎) 교주 장 여사 말 맞다나 돈은 흘러야한다. 중생계는 돈의 흐름이다!

그러므로 이 물질적인 풍요의 시대에 신약의 ‘물질적인 오병이어의 기적’은 수명이 다했다.

들으면 우리 눈을 번쩍 뜨이게 하고, 편협한 시각으로 한 치 앞밖에 못 보던 우리로 하여금 멀리 보게 하고, 낡고 좁은 통에 갇혀 있던 의식을 광활(廣闊)한 창공(蒼空)으로 끌어내고 밀어내는 가르침과 말씀이야말로 진실로 오병이어의 기적이다. 한 말씀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영적인 배고픔을 채워주니 어찌 기적이 아니랴. 성인(聖人)은 ‘한 번’ 입을 열어 미래세의 ‘무한한’ 중생의 마음을 배부르게 하였다. 진실로 ‘일구일설(一口一舌, 一口一說)의 기적’이다.

일찍이 2,500년 전에 소크라테스는 물었다. “아테네 시민이여, 오로지 돈을 벌고 명성과 위신을 높이는 일에 매달리면서, 진리와 지혜와 영혼의 향상에는 생각이나 주의를 조금도 기울이지 않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김한영 번역) 이 질문은 지금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디지털화된 지식이 인터넷을 통해 즉각적인 접근성을 제공하면서, 오히려 지식획득은 미래시점으로 밀려나고, 인터넷으로 제공되는 선정적인 황색기사와 비디오 게임이 지식습득으로부터 오는 (뇌신경세포가 필요로 하는 전기화학적인) 흥분과 자극을 대체하는 이 시대에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더욱 유효하다.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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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는 바보 2014-11-07 15:17:29
열반이란 삼계가 아닙니다.
만약 열반이 삼계라고 생각하면 윤회계에 속하게 된다.
열반이란 윤회를 벗어난 것이기에 삼계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열반이란 천국이나 지옥처럼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다.

허~허~ 2014-07-26 13:27:33
신이나 천국 혹은 열반의 특별한 세계가 있으면 좋겠지만, 21세기 인들까지 그런 환상에 집착한다는 것은 바보짓일 분이다...

이 따위 말을 하는 아래 분, 불교인 맞나요? 열반을 신이나 천국과 같은 계열로 대비를 시켜 놓고서, 같이 싸 잡아서 열반을 부정하는 작태를 보니 전혀 불자의 모습으로 보이지는 않는구려. 용수 보살의 중론송을 열심히 살펴 보기 바랍니다. 입으로 행하기 전에 먼저 머리로 행하라는 권유입니다. 신이나 천국의 이야기는 구원파 아이들이 즐기는 유론의 뻘짓들이지만, 열반은 유무를 논할 수 없는 부처님이 강추하는 중도의 궁극이랍니다. 부디 머리로라도 제대로 행하는 진정한 21세기 인이 되기 바랍니다. 교주 유병언을 조계종 종정과 대비시킬 수 있을지 없을지를 차라리 먼저 헤아리세요. 열반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기 전에 말입니다.

원불사단현 2014-07-24 11:35:35
예수가 물위를 걷는 기적보다 400년 앞서 잡아함경에 부처가 물위를 걷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고
오병이어 역시 기독경보다 먼저 기록되어 있다.
이런 전래설화는 그 시대 어느 문화권에서나 보편적인 이야기일 것이다.
니까야에도 수미산이니 31천이니 8만 4천 겁을 살 수 있느니 하지만
그 시대 사람들의 의식이 그랬을 뿐이고, 그런 문화 가운데 불교적 진리를 설파하는 방편으로 삼았을 뿐이다.
신이나 천국 혹은 열반의 특별한 세계가 있으면 좋겠지만, 21세기 인들까지 그런 환상에 집착한다는 것은 바보짓일 분이다...

주르륵 2014-07-23 04:28:14
글에서 깊이가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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