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修道) 경제학: 경제 보살화
수도(修道) 경제학: 경제 보살화
  • 강병균 교수
  • 승인 2014.07.07 11:31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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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6.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세상에, 고통을 극복하러 이 세상에 태어난다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말이 안 되기는, ‘죽으려고 태어난다’는 말이나 비슷하다. 이게 본분사(本分事)란 말인가?

우리가 태어나 사는 과정에는 낙(樂)도 있고 고(苦)도 있는데, 이 고가 가끔 자주 난동을 벌이고 발악을 하며 우릴 못살게 굴며 괴롭히므로 손을 좀 쓰거나 봐주려고 하는 것뿐이다.

전쟁, 천재지변, 재난, 실패, 실연, 소중한 이의 죽음, 부모·자식의 죽음이나 불치의 질병이 닥칠 때는 지옥 같은 고통이 몰려오겠지만, 인생이 (어느 누구에게나)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고 주장한다면, 말미잘 해삼 멍게 따개비가 “삶은 왜 이리 고통스럽냐?”고 외치는 일이 벌어져야 할 것이다. 왜 갑자기 말미잘 해삼 따개비를 들먹이느냐고 묻는다면, 인간 중에는 말미잘 해삼 멍게 따개비 같은 사람들이 반드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말미잘, 해삼, 멍게, 따개비는 인간과 같은 고통이 없는 것이 분명하며, 뇌(腦)를 태우는 번뇌(煩惱)는 더욱 없을 것이다. 이들은 뇌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은 인간이 누리는 즐거움도 없다. 의식의 환희와 우주를 이해하는 쾌락이 없다. 없는 신(神)을 만들어내는 놀라운 신통력도 없다. 그러니 비물질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의 기쁨도 없다. 모든 일이 ‘고 위험, 고 이익(high risk, high return)’인 법이다. 즉 (큰) 고통이 없으면 (큰) 낙도 없다. 따라서 고로부터의 해탈의 낙도 없다. 이 점에서, 즉 고락의 측면에서 모든 생명체는 평등하다.

우리가 고통(번뇌)을 극복하기 위해서 세상에 나온 것이라면, 그리고 마침내 천신만고 끝에 고통을 극복하고 마음의 평안을 이루는 순간 (혹은 그 후 얼마 안 되어) 우리가 사라진다면(무여열반에 들어 윤회를 멈춤), 마치 ‘삶의 목적이 사라짐’이라는 소리처럼 들린다. 즉, ‘존재의 목적이 소멸’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뭔가 모순스러운 냄새가 짙게 풍긴다.

바로 이점에서, 절대로 사라지지 말고 이 세상에 계속해서 나오자(돌아오자)는 대승불교철학은 다시 돌아오지 말자는 ‘불환불래(不還不來)철학인 옛 철학’에 비해 진일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최소한 지구촌에 행복한 이들(대승보살)의 숫자가 계속 증가할 것이므로, 지구의 행복농도는 짙어갈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 이들이 영원히 사라져버린다면 지구의 행복농도는 매양 그 모양 그 꼴일 것이다. 돈을 엄청나게 많이 번 부자가 그 돈을 모두 지폐로 바꿔 다 태워버린다면, 지극히 어리석은 행동이다. (이건희 회장이 삼성전자를 몽땅 팔아 마련한 수백 조 현금을 죄다 소각시켜버린다고 상상해보라.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한국은행은 그만큼의 돈을 다시 찍어내 이 회장에게 주는 것이 최선이다. 그렇지 않으면 국부의 손실로 끝난다. 물론 화폐발행비용과 아울러 벌금도 물려야 한다.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게 경고하는 뜻으로.) 그 돈을 태우기 보다는 사람들의 행복(요즘 말로는 복지, 힐링, 기부)을 위해서 써야하듯이, 보살이 번 (엄청난 양의 질 좋은) 행복도 무여열반(심신의 완벽한 소멸)으로 무용지물(無用之物)화 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고통을 여읜 이들이 세상의 이익을 위해서, 즉 그 방법을 전해주기 위해서 여러 모습으로 이 세상에 계속해서 나온다는 (대승불교) 철학은 긍정적이고 현명한 해석이다. ‘여러 모습’ 철학이 특히 그러하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 진정한 보시이고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기 때문에, 도움을 받는 이들이 새 도우미보살을 옛 도우미보살과 같은 사람이라고 알아보지 못하게 올 때마다 매번 ‘다른 모습’으로 옴은 필연이다. 자신의 생체 유전자를 남기지 않으므로, 세상에 다시 옴이 반복됨에 따라, 세상은 생체 유전적으로 자신과 점점 더 멀어진다. 그러나, 전혀 연고가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보시인 ‘선한 사마리아인 보시’ 또는 ‘무연보시(無緣普施)’가 최고의 보시임을 유의하시라. 이 무연보시는 생체 유전자와 달리 육체가 아닌 사바세계 속에 그의 문화유전자(meme)를 점점 늘릴 것이다.

보살은 없애야할 (자신에게 기원하는) 고통이나 번뇌가 없기에, 그의 출세(出世 이 세상에 태어남)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것이다. 그렇긴 하나, 앞으로 누릴 무한한 깨달음의 즐거움과 평안은 오로지 그의 몫이자 복이다. 고통 속에 존재해온 시간은 분명히 유한한데(수학적으로 말하면 시간에 대한 고통의 적분값이 유한인데), 앞으로 안락을 누릴 시간은 한이 없다니 엄청나게(무한대로) 수지맞는 장사이다. 범인(凡人)에게는 고(苦)가 안팎에서 마구마구 일어나고 쳐들어온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러니 우리 모두 도(道)를 닦지 않을 수 없다. 개인적인, 국가적인, 동북아시아적인, 유라시아대륙적인, 그리고 전(全)지구적인, 혹은 전(全)우주적인 행복무역수지 개선을 위해서!

그런데 비밀은 모든 사람이 이미 보살이라는 것이다(一切衆生卽菩薩). 이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꿋꿋이 목숨을 유지해가면서, 다른 사람들의 필수품인 가지가지 물건과 의식주와 문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진정한 보살이다(위대한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는 우리가 빵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이익을 추구하는 빵집주인의 이기심 때문이라고 했지만, 이는 개인적인 차원의 마이크로 시각이다. 전체적인, 즉 매크로 시각에서 보면 빵집주인의 행위는 공익을 위한 헌신이다. 보이지 않는 손, 즉 천수보살의 화신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타인을 돕는 보살이다. 우리 개개인이 피땀 흘려 일하는 것이 결국은 인류전체의 행복과 삶의 질을 개선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진실로 일체중생은 보살이다. 단지, 자신들이 보살이라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불교라는 특정한 종교적 수행을 닦아야만 보살이 되는 것이 아니다. 불교가 생기기 전에도 보살은 존재했고, 불교가 사라진 후에도 보살은 존재할 것이다. 자기 일을 혼신을 다해 하고, 자기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 진정 보살이다. 이 점에서 기업인들(CEO 이하 전 사원들)은 농부들 못지않은 보살이다. 기업이 없으면 대중은 굶어죽는다. 무의식적으로 보살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사실은 보살행을 하고 있다는 자각(自覺)을 주는 것이 불교이다.

경제민주화가 아니라 ‘경제보살화’가 되어야 한다. 자신의 일에 자긍심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자신과 사회에 이로움을 줄까’ 하는 생각을 가지면 누구나 보살이 아니 될 수 없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보살행은 자선행이 아니라, 자신의 일에 충실한 것이다. 빵집주인은 빵을 성실히 맛있게 굽는 것이 최선의 보살행이다. 이건희 회장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보살행은 삼성전자가 꾸준히 이익을 내고 성장을 하게 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직장을 제공하는 것이다. 수재의연금을 내는 것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백만 배는 더 큰 보살행이다. 자선행은 이런 일 다음에 오는 일이다. 자선행이란, 최선을 다했지만 때와 장소가 맞지 않아서, 주위 환경이 안 좋아서, 운이 없어서, 또는 짓궂은 운명의 장난으로 곤경에 빠진 보살들을 그들이 보살행을 완성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영국과 불란서의 대혁명 와중(渦中)에, 대한민국의 동학혁명 독립운동 민주화운동 경제개발 와중에, 그리고 역사상 무수한 민중봉기 와중에 목숨을 앗기며 바치며 희생된 사람들은 넓게 보면 인류전체를 위한 희생이다. 이들이 인류역사 진행에 빛을 비추어주기 때문이다.

개인의 욕망(이상 理想)이라는 것은 신기루이고 환상일 수 있다. 개인의 욕망의 충족으로부터 오는 기쁨은 사실은 인류전체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역할을 하는 ‘유혹 호르몬’일 수 있다: 뇌 세포에서 분비되는 엔도르핀 도파민 세로토닌 옥시토신 등의 쾌락 호르몬과 같은 존재일 수 있다.

알고 보면 세상은 보기보다 훨씬 나은 곳이다. 개별자의 관점에서 보면 세상은 험악한 곳일 수 있지만,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놀라운 생명의 힘을 유지하고 수없는 생명을 생장(生長)시키는 약동하는 삶의 현장이다. 이런 관점은 무의식적으로 종교경전에 표현되어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힌두교 바가바드기타이다. 동족(同族)이 둘로 나뉘어 전쟁을 벌인 마하바라타의 전장에서, 전차마부이자 비슈누 신의 아바타인 크리슈나(Krishna)는 동족살해라는 딜레마에 고뇌하는 제자 아르주나(Arjuna) 왕자에게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라고 가르친다. 이런 경전은 개별자의 관점에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다. 생물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의 치열한 노력으로 군집생물인 개미 벌과 사회적인 동물인 침팬지 보노보 등을 연구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종교)이해에 서광(曙光)이 비쳤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개별자의 관점과 전체의 관점 사이의 충돌을 최소화하며 조화시키는 것이다. (도로공사가 닦는 도 역시 개인과 사회를 연결하여 상호 의존도를 높임으로써 평화를 늘이는 길이다.)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이고 군집생물인 한, 홀로 존재하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고(苦)의 상당부분은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생겨난다. 타인과의 관계는 개인에게, 부처님이 두 번째 화살이라고 이름붙인, 정신적인 고를 만들기 때문이다.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이 기이한 관계는 저절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몸과 마음을 둘 다 연기적 조망으로 봐야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 에드워드 윌슨의 ‘사회생물학적인 관점’을 추가하면 금상첨화이다.)

따라서 도를 닦는다는 것은 사회적인 (그리고 문화적인) 행위이다. 왜냐하면 유아기부터 무인도에서 홀로 자라 거기 홀로 살고 있는 인간이 도를 닦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와 군집을 유지하고 사는 한, 우리는 도를 닦지 않을 수 없다. 나와 너의, 즉 사회의 행복을 위해서, 군집의 행복을 위해서,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그리고 자연과 뭇 중생의 행복을 위해서.

초기경전 숫타니파타에 등장하는 부처님은 ‘항상 행복한 분’이다. 우리가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가장 충실한 길이다.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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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석 2021-12-14 12:53:18
선명하고 명쾌한 논리로 붓다의 가르침을 설명해 주시는 노고 감사드립니다.

불교-마니아 2014-07-14 16:27:03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세상에, 고통을 극복하러 이 세상에 태어난다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말이 안 되기는, ‘죽으려고 태어난다’는 말이나 비슷하다. 이게 본분사(本分事)란 말인가?

우리가 고통(번뇌)을 극복하기 위해서 세상에 나온 것이라면, 그리고 마침내 천신만고 끝에 고통을 극복하고 마음의 평안을 이루는 순간 (혹은 그 후 얼마 안 되어) 우리가 사라진다면(무여열반에 들어 윤회를 멈춤), 마치 ‘삶의 목적이 사라짐’이라는 소리처럼 들린다. 즉, ‘존재의 목적이 소멸’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뭔가 모순스러운 냄새가 짙게 풍긴다.

바로 이점에서, 절대로 사라지지 말고 이 세상에 계속해서 나오자(돌아오자)는 대승불교철학은 다시 돌아오지 말자는 ‘불환불래(不還不來)철학인 옛 철학’에 비해 진일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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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모순스러운 냄새가 짙게 풍긴다”
--- 모순율/배중률/동일률이 유용한 곳은 개똥-철학을 가지고 노는 동네들입니다.

그러한 논리 법칙들을 들이 밀 곳에 여기 불-교의 동네는 결코 포함되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러한 논리적 정합성 여부를 떠나서 성립한 것이라는 것을 증명한 분이 바로 용수 보살입니다. (중론)
또 그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 잣대들을 꺾어 버리면서 뚫고 나오는 철학이 서양의 현대철학적 사유이랍니다.

수학기초론 논쟁의 동네에서도 19세기 말 ~ 20세기 초입부터 그러한 논리적 정합성을 추구하던 힐베르트의 공리주의가 브로우베르 등의 직관주의에 의해 강력한 반격을 받아오고 있었던 것을 이 수학교수님은 잠깐 잊고 계신 모양입니다. 더군다나 힐베르트의 제자인 괴델이 논리 법칙에 의해 추구할 수 있는 지식의 한계를 “불완전성정리”에 의해 증명했다는 것도 설마 하니 모르시진 않으실 텐데요.

즉 모순율 등의 논리 법칙을 들이댈 곳이 있고, 그렇지 못할 곳이 있다는 사리분별을 무시하고 글을 쓰시는 걸 보니
혹시 이제는 연세를 탓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저처럼이요. ~~ 저는 불교-마니아, 강교수님은 불교-흉내쟁이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환망공상”이라는 강교수님의 글 제목이 이제서야 좀 제대로 감이 오는군요.
--- 환상, 망상, 공상, 환상, 망상, ......

불교마니아 2014-07-14 15:27:51
강봉균 교수가 불자인 이유를 알 수가 없군요.
자신의 사설을 늘려서 이야기할 정도의 도인 정도로는 쳐줄 수 있겠으나,
불교 역사 속에서의 맥락과 경전적 사유라는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불교인으로는 보이지 않는군요. 씁쓸합니다. 불교의 오피니언리더가 저 정도라면 한국에서 불교를 찾는다는 것은 ~ 쩜쩜쩜.

타요버스 2014-07-07 14:21:53
가장 읽을만 한 칼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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